법구경, 「아라한 품」

90 여정을 마친 자, 슬픔을 여읜 자,
일체처에서 해탈한 자,
일체 속박을 없애버린 자 ―
그에게 더 이상 고뇌 없어라!

91 유념(念)하고 있는 자들,
그들은 집을 떠나고 거주居住를 즐거워하지 않아라!
그들은 백조[1]고대 인도문헌에서 언급되는 “haṃsa”는 백조, 혹은 기러기(학명은 Anser indicus)로 추정된다. “haṃsa”는 인도 신화에서 고귀한 존재의 상징이며, 아잔타 석굴 천정화에서처럼 고대 인도미술에서도 문양으로 수없이 등장한다.들이 습지를 떠나고
서식지를 떠나듯 하여라!

92 저장물이 없는 자들,
음식을 완전히 아는 자들,
공空하고 무상無相한 해탈처[2]“空하고 無相한 해탈처(vimokkha)”는 경에서 언급되는 “팔해탈(aṭṭha vimokkhā)”(증지부 제8.66경, A iv.306; 중부 제77경)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의 무색계와 상수멸 등이 팔해탈에 속한다. 이때의 “해탈처(vimokkha)”는 일반적인 의미의 “해탈(vimutti)”과 다르며, “성스러운 해탈처”, “위없는 해탈처” 등으로 수식된다. 그중에서도 “공하고 무상無相한 해탈처”는 상수멸이 아닐까 싶다. 아라한들이 노니는 행처는 곧 상수멸이라는 얘기이다. 일반적으로 “vimokkha”와 “vimutti”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해탈”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상相(nimitta)”은 색・성・향・미・촉・법의 육경六境이 제공하는 원자료(raw data)라고 할 수 있다. 경에서는 ‘눈으로 色을 보고서 色相을 좇는 識이 色相의 맛에 묶이고 속박되고 상호결박된 것’을 가리켜 “識이 밖으로 흩어져 분산된 것”(중부 제138경, M iii.225)이라고 정의한다. “色相~法相을 좇는 識”이라는 표현에서 ‘相과 識’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무상無相”은 “일체상一切相을 유의留意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相을 좇는 識”이 없는 것이다. 근・경・식의 삼사화합촉에서 무상無相한 자는 상수멸에서 출정한 자이며, 그것은 곧 마음삼매(cetosamādhi)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空해탈・無相해탈・無願해탈’이라는 소위 ‘삼해탈문’은 후대 논서에서 비로소 보이며, 경에서는 상수멸자가 출정한 뒤의 ‘觸’에 대해서, 그리고 ‘마음삼매’에 대해서 “空・無相・無願”이라는 술어로 형용한다.

곧 행처行處인 자들 ―
마치 허공을 나는 새들의 행로처럼
그들의 행로는 추적하기 어려워라!

93 누漏가 완전히 다한 자,
식食에 의존하지 않는 자,
공空하고 무상無相한 해탈처가
곧 행처인 자 ―
마치 허공을 나는 새들의 자취처럼
그의 자취는 추적하기 어려워라!

94 말들이 병거兵車를 모는 자에 의해 잘 길들여지듯
근根들[3]“根들”이라 함은 안・이・비・설・신・의를 말한다.이 적정寂靜(사마타)에 이른 자,
만慢을 버린 자, 누漏가 없는 자 ―
천신들마저 그와 같은 자를 부러워하여라!

95 대지 같으며 인드라의 기둥[4]“인드라의 기둥”은 도성 앞 기둥이나, 저택 입구에 깔린 박석을 말한다. 그 어떤 풍우나 악천후, 더러움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물에 빗대어 일체 고락에 적묵한 자의 기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지”의 비유는, “대지에 깨끗한 것을 버리고 더러운 것을 버리고 대변을 버리고 소변을 버리고 침을 버리고 고름을 버리고 피를 버려도, 대지는 그로 인하여 고뇌하거나 수치스러워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중부 제62경, M i.423)는 설법과 직접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인드라의 기둥”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같은
덕행자는 걸림 없어라!
진흙 없는 호수처럼
그에게는 윤회 없어라!

96 그의 의意도 고요하며
말과 행업도 고요하여라!
그는 올바른 앎에 의해 해탈된 자,
고요히 가라앉은 자!

97 구습舊習을 버린 자,[5]“구습을 버린 자”로 번역한 “assaddha”는 경의 용례를 보면 “신심이 없는 자”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그래서 제97송의 맥락에 맞게 이 용어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흔히 “(경박한) 믿음이 없는 자” 정도의 의미로 읽고 있지만, 이렇게 쓰인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해석 가능성은, “as-saddha”의 “saddha”를 “믿음, 신심”이 아니라, 동음이의어인 “제사”로 읽는 것이다. 이때의 제사는 구체적으로는 망자를 위한 바라문 계급의 제사 등을 말한다. 경에서 “saddhaṃ pamuñcati(제사를 그만두다)”라는 표현은 바라문 계급의 일체 의식을 그만두는 것을 뜻하므로, “assaddha”를 “구습을 버린 자”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직후, “그들에게 불사의 문이 열렸노라, 귀 있는 자들은 구습을 버려라!”(M i.169)는 사자후에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이 “saddhaṃ pamuñcati”이기도 하다. 이때의 “구습”은 단순히 ‘바라문 계급의 제사’만을 뜻하지 않고 뜻이 확장되어 ‘욕락에 물든 일체 습성’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위無爲를 아는 자,[6]“무위를 아는 자(akataññū)”는 行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구경」 제383송의 “바라문이여, 그대는 行들의 멸진을 알고서 무위를 아는 자 되리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무위(akata)”로 번역한 낱말은 ‘짓는 바가 없음(無作)’을 뜻한다. 앞서 제24송의 “지음(作)이 가라앉은 자(nisammakārin)” 역시 行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빈틈을 부순 자,[7]“빈틈”이라 번역한 “sandhi”는 ‘틈새, 빈틈, 이음매, 연결, 교차점, 길목’ 등을 뜻한다. 경에서는 여러 의미의 용례들이 보이므로 이 게송에서의 의미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게송이 아라한을 묘사한 구절인데다, “sandhi”가 “구습”, “여지”라는 부정적 낱말과 나란히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누漏(āsava)”를 형용한 용어로 쓰인 듯하다. (“누漏”는 “새다”를 뜻한다.) 그래서 “빈틈을 부순 자”로 번역했다. 제97송은 전반적인 내용상 “누漏가 완전히 다한 자”(제93송), 즉 “누진멸자漏盡滅者”를 묘사한 게송으로 보고 싶다. 여지餘地를 없앤 자,
먹이를 토해버린 자[8]앞의 제92송에서 “음식(bhojana)의 저장”과 “空하고 無相한 해탈처”를 대비시킨 것을 보면, “相”을 “음식”에 빗대었음을 알 수 있다. 제93송의 “식食”과 제97송의 “먹이(āsa)를 토해버린 자”의 “먹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먹이를 토해버리다”는 대단히 구상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흔히 “모든 바람을 버린 자”로 추상화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경에서 언급되는 “음식”, “먹이”, “양분(食)” 등의 숱한 용례를 고려하면, 굳이 추상적인 의미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는 실로 위없는 사람이어라!

98 마을이든 숲이든
평원이든 고원이든
아라한들이 머무는 곳 ―
그 땅은 즐거워할 만한 곳이어라!

99 숲은 즐거운 곳이어라,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곳 아니어도
이탐離貪한 자들에게는 즐거운 곳이어라!
그들은 더 이상 욕락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이니.

90 gataddhino visokassa vippamuttassa sabbadhi
sabbaganthappahīnassa pariḷāho na vijjati.

91 uyyuñjanti satīmanto na nikete ramanti te
haṃsā va pallalam hitvā okamokaṃ jahanti te.

92 yesaṃ sannicayo n’ atthi ye pariññātabhojanā
suññato animitto ca vimokho yesaṃ gocaro
ākāse va sakuntānaṃ gati tesaṃ durannayā.

93 yassāsavā parikkhīṇā āhāre ca anissito
suññato animitto ca vimokho yassa gocaro
ākāse va sakuntānaṃ padaṃ tassa durannayaṃ.

94 yass’ indriyāni samathaṃ gatāni assā yathā sārathinā sudantā
pahīnamānassa anāsavassa devāpi tassa pihayanti tādino.

95 paṭhavīsamo no virujjhati indakhīlūpamo tādi subbato
rahado va apetakaddamo saṃsārā na bhavanti tādino.

96 santaṃ tassa manaṃ hoti santā vācā ca kamma ca
sammadaññāvimuttassa upasantassa tādino.

97 assaddho akataññū ca sandhicchedo ca yo naro
hatāvakāso vantāso sa ve uttamaporiso.

98 gāme vā yadi vāraññe ninne vā yadi vā thale
yatth’ arahanto viharanti taṃ bhūmiṃ rāmaṇeyyakaṃ.

99 ramaṇīyāni araññāni, yattha na ramatī jano
vītarāgā ramissanti, na te kāmagavesino.

* 각주   [ + ]

1. 고대 인도문헌에서 언급되는 “haṃsa”는 백조, 혹은 기러기(학명은 Anser indicus)로 추정된다. “haṃsa”는 인도 신화에서 고귀한 존재의 상징이며, 아잔타 석굴 천정화에서처럼 고대 인도미술에서도 문양으로 수없이 등장한다.
2. “空하고 無相한 해탈처(vimokkha)”는 경에서 언급되는 “팔해탈(aṭṭha vimokkhā)”(증지부 제8.66경, A iv.306; 중부 제77경)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의 무색계와 상수멸 등이 팔해탈에 속한다. 이때의 “해탈처(vimokkha)”는 일반적인 의미의 “해탈(vimutti)”과 다르며, “성스러운 해탈처”, “위없는 해탈처” 등으로 수식된다. 그중에서도 “공하고 무상無相한 해탈처”는 상수멸이 아닐까 싶다. 아라한들이 노니는 행처는 곧 상수멸이라는 얘기이다. 일반적으로 “vimokkha”와 “vimutti”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해탈”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상相(nimitta)”은 색・성・향・미・촉・법의 육경六境이 제공하는 원자료(raw data)라고 할 수 있다. 경에서는 ‘눈으로 色을 보고서 色相을 좇는 識이 色相의 맛에 묶이고 속박되고 상호결박된 것’을 가리켜 “識이 밖으로 흩어져 분산된 것”(중부 제138경, M iii.225)이라고 정의한다. “色相~法相을 좇는 識”이라는 표현에서 ‘相과 識’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무상無相”은 “일체상一切相을 유의留意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相을 좇는 識”이 없는 것이다. 근・경・식의 삼사화합촉에서 무상無相한 자는 상수멸에서 출정한 자이며, 그것은 곧 마음삼매(cetosamādhi)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空해탈・無相해탈・無願해탈’이라는 소위 ‘삼해탈문’은 후대 논서에서 비로소 보이며, 경에서는 상수멸자가 출정한 뒤의 ‘觸’에 대해서, 그리고 ‘마음삼매’에 대해서 “空・無相・無願”이라는 술어로 형용한다.
3. “根들”이라 함은 안・이・비・설・신・의를 말한다.
4. “인드라의 기둥”은 도성 앞 기둥이나, 저택 입구에 깔린 박석을 말한다. 그 어떤 풍우나 악천후, 더러움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물에 빗대어 일체 고락에 적묵한 자의 기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지”의 비유는, “대지에 깨끗한 것을 버리고 더러운 것을 버리고 대변을 버리고 소변을 버리고 침을 버리고 고름을 버리고 피를 버려도, 대지는 그로 인하여 고뇌하거나 수치스러워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중부 제62경, M i.423)는 설법과 직접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인드라의 기둥”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5. “구습을 버린 자”로 번역한 “assaddha”는 경의 용례를 보면 “신심이 없는 자”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그래서 제97송의 맥락에 맞게 이 용어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흔히 “(경박한) 믿음이 없는 자” 정도의 의미로 읽고 있지만, 이렇게 쓰인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해석 가능성은, “as-saddha”의 “saddha”를 “믿음, 신심”이 아니라, 동음이의어인 “제사”로 읽는 것이다. 이때의 제사는 구체적으로는 망자를 위한 바라문 계급의 제사 등을 말한다. 경에서 “saddhaṃ pamuñcati(제사를 그만두다)”라는 표현은 바라문 계급의 일체 의식을 그만두는 것을 뜻하므로, “assaddha”를 “구습을 버린 자”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직후, “그들에게 불사의 문이 열렸노라, 귀 있는 자들은 구습을 버려라!”(M i.169)는 사자후에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이 “saddhaṃ pamuñcati”이기도 하다. 이때의 “구습”은 단순히 ‘바라문 계급의 제사’만을 뜻하지 않고 뜻이 확장되어 ‘욕락에 물든 일체 습성’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무위를 아는 자(akataññū)”는 行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구경」 제383송의 “바라문이여, 그대는 行들의 멸진을 알고서 무위를 아는 자 되리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무위(akata)”로 번역한 낱말은 ‘짓는 바가 없음(無作)’을 뜻한다. 앞서 제24송의 “지음(作)이 가라앉은 자(nisammakārin)” 역시 行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빈틈”이라 번역한 “sandhi”는 ‘틈새, 빈틈, 이음매, 연결, 교차점, 길목’ 등을 뜻한다. 경에서는 여러 의미의 용례들이 보이므로 이 게송에서의 의미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게송이 아라한을 묘사한 구절인데다, “sandhi”가 “구습”, “여지”라는 부정적 낱말과 나란히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누漏(āsava)”를 형용한 용어로 쓰인 듯하다. (“누漏”는 “새다”를 뜻한다.) 그래서 “빈틈을 부순 자”로 번역했다. 제97송은 전반적인 내용상 “누漏가 완전히 다한 자”(제93송), 즉 “누진멸자漏盡滅者”를 묘사한 게송으로 보고 싶다.
8. 앞의 제92송에서 “음식(bhojana)의 저장”과 “空하고 無相한 해탈처”를 대비시킨 것을 보면, “相”을 “음식”에 빗대었음을 알 수 있다. 제93송의 “식食”과 제97송의 “먹이(āsa)를 토해버린 자”의 “먹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먹이를 토해버리다”는 대단히 구상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흔히 “모든 바람을 버린 자”로 추상화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경에서 언급되는 “음식”, “먹이”, “양분(食)” 등의 숱한 용례를 고려하면, 굳이 추상적인 의미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