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숲에서

숲에서 봄이 오는 첫 신호는 무엇일까? 북한산 자락에 살아보니 비로소 알겠다. 가장 이른 산동백 꽃이 피기 전, 나뭇가지에 새움이 트기 전, 먼저 봄을 알리는 것은 물소리이다.

언땅이 녹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작은 개울물이 마치 노래를 하듯 낭랑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새들은 윤기 있는 소리로 울며 하늘을 난다. 그 몇 주 뒤에 비로소 개울가의 나무가 움트기 시작한다. 이어서 산동백, 개나리, 진달래 순으로 꽃이 피고, 나뭇가지의 색이 달라지고, 나뭇잎이 새옷을 입는다. 허름하고 추운 숲에 은거하던 이들이 순차적으로 봄날을 맞이하며 깨어나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다.

2361
북한산 숲 초입의 계곡에 핀 개나리.
2388
가장 이르게 봄을 맞이하는 한 그루 나무.

특히 어제처럼 가랑비라도 내리면 숲은 완연히 달라지고 인적은 드물다. 북한산 자락에 살면서 조금의 운치라도 있는 이들이라면, 비오는 날의 숲을 차마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봄날을 맞으며 풍경을 재편하는 시절에 비마저 흩뿌리면 홀로 자적하기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진달래가 아름다운 것은 이 은연자적하는 맛을 더욱 깊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주위의 모든 것이 허름한 빛깔인데 찬란하게 피어나는 순간, 그리하여 잡다하고 무질서한 듯한 풍경을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상승시키는 마력.

2438
진달래,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

아마도, 외국에 오래 산 한국인이라면 산속의 개울물과 진달래에서 가장 그리운 풍경,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발견할 것이다. 또르르 흐르는 작은 개울물과 허름한 산속에 핀 진달래, 이들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 알 수 없었던 그리움 덩어리의 근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장엄하지는 않지만, 그 작고 은연한 아름다움으로 내 안의 모든 것을 커다란 아름다움으로, 커다란 슬픔으로 상승시키는 존재들이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동일한 리듬을 갖고 있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모두 상습적인 인식체계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것은 아름다움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식의 균열과 함께 무엇이 드러나는 것일까? 인식 자체가 관습적인 허구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은 반드시 습관적인 사고와 습관적인 감정을 해체시키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런 파괴력이 없는 예술은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

2493
어둑해진 숲에서 비를 맞는 나무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본 지가 꽤 되었다. 비오는 봄날의 숲이 아름다워 휴대전화로 오랫만에 사진을 찍어보았다. 어두워지는 숲에서 비를 맞는 나무들을 보며, 말을 잊는다.

체리 자판 G80-3000

워낙 사람을 적게 만나는 탓에 타인의 취향을 두루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드물긴 해도 필기구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가진 분들을 만나면 새롭게 보인다. 가령 만년필로 필기를 한다거나 아니면 정성스럽게 깎은 연필로 필기를 하는 분들을 보면, 손글씨에 대한 애정 여부를 떠나 손맛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엿보여서 달리 보이는 것이다. 특히 만년필의 경우 나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적응하려고 몇 번이나 애썼으나 실패하고 만 기억이 있어서 만년필로 필기하는 분들을 보면 외경심마저 든다. 내가 왜 만년필에 적응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손맛에 맞는 만년필을 만나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필기를 하는 일조차 드물어 만년필이나 연필 필기에 대한 나만의 취향을 갖추는 일은 영영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저 책읽기를 하면서 연필로 밑줄을 긋거나 표기를 해놓는 정도일 뿐 공책에 따로 기록을 해놓는 일이 전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대신 컴퓨터 자판이 필기의 기능을 거의 대체하고 말았다.

컴퓨터 자판에 대한 고집스런 취향이 생긴 것은 아마도 필기구 손맛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손가락에 부담을 덜 주고 조용한 자판을 선호해서 펜타그라프 자판을 사용해왔으나, 마음에 들던 자판이 단종되고 더는 구할 수 없어 마침내 삼사 년 전께 컴퓨터 자판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기계식 자판의 존재였다. 그리고 기계식 자판에 대한 종류를 익힌 뒤 처음으로 구한 것이 독일의 체리 자판 G80-3494(적축)이었다. 기계식 자판은 일반적으로 펜타그래프 자판이나 멤브레인 자판보다 소리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기계식 자판 중에서 가장 소리가 작고 키압이 낮은 적축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처음 체리 적축 자판을 사용했을 때는 무척 실망했다. 소리가 작고 키압이 낮아 손가락이 아주 편하기는 했지만 보강판 때문인지 키감이 영 아니었다. 그런데 1~2주 사용해보니 갈수록 익숙해지고 키감 자체가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편하고 좋았다. 다만 한영 전환키가 일반 자판의 위치보다 오른쪽에 위치해 있어서 거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집 아이가 자판에 오미자차를 쏟아서 기계식 자판을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400
Cherry G80-3000 흰색자판(갈축). 기계식 자판의 기본으로 통하며 키감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자판이 104키여서 일반적인 106키 자판 사용자에게는 한영 전환키 사용이 불편하다.

이번에는 체리 적축이 아니라 체리 갈축을 선택했다. 새로운 키감도 맛보고 싶고 검정색 자판보다는 흰색 계열의 자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적축보다 소리가 크고 키압이 약간 높기는 했지만 그 정도 차이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으며, 키감은 가장 뛰어나다는 평대로 타건감이 시원시원하여 단연 좋았다. 다만 디자인에 대한 호오가 크게 엇갈리는 편인데, 나같은 경우에는 진정으로 원하고 원했던 디자인이다.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투박한 디자인,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다. 확실히 나는 독일이나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특히 Lock을 표시하는 연노랑 불빛이 연하고 부드러워 시선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사용해본, 체리 적축 자판을 포함한 모든 자판은 이 불빛이 내게는 너무 강했던지라 늘 테이프로 가려 사용할 정도였으니, 체리 G80-3000의 이 표시등이 얼마나 반갑던지!

389
Lock 표시등이 시선을 자극하지 않아 좋다.

늘 곁에 두고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냐. 이 자판과 평생 함께할 듯한 예감이 든다. 구입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밖에 있을 때에도 문득 이 체리 자판이 생각날 정도이다. 이 또각또각 소리와 손맛, 경쾌하고 깊은 타건, 그리고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 타자하다가 가끔 자판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들 정도이니, 손맛에 대한 내 취향이 이 정도였던가 싶다.

일반 자판보다 열배 가량 비싼 물건인지라 호사스러운 취향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자판에 대해서만큼은 괜찮다고 한다,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서. 하하하, 원했던 손맛의 만년필을 만나지 못한 스산한 과거가 마침내 보상받았다. 아들아, 고맙다!

384
이 체리 자판과 평생을 함께할 것같다. 키감과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문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고층(古層)에 속하는 「숫타니파타」의 “무소뿔 경”에 나온다. 「숫타니파타」는 교법의 체계가 확립되기 전 가르침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질박한 언어로 교법을 파해하는 힘을 분출하고 있다. 각 수행전통에서 비롯한 교법이 고착되고 경직된 이 시대에, 우주의 성좌처럼 빛나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마시는 시간은 귀하고 신선하다.

“무소뿔 경”은 한 명의 장부가 “흑단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듯” 재가생활의 증표를 버리고 출가자로서 나설 때 홀로 가야 할 명징하고 정결한 여정을 일러준다. 이 경을 읽어보면 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경책하지만, 다만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지혜로운 벗”을 만날 경우에는 그와 함께 길을 가라고 가르친다. 이 벗은 곧 스승이기도 하다. “지혜롭다(nipaka)”의 어원은 “스승(nipa)”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들의 벗”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하자면, 벗은 스승이며 스승은 벗이다.

그러나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지혜로운 벗”을 만나기란 쉽지 않는 법!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동등한 벗”, 스승으로서의 벗을 만나지 못한다면,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스승을 위시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수행할 경우 그 관계성으로 인하여 하나의 성이 건립된다. 이른바 ‘모임’, ‘조직’이라는 것이 탄생하고 그 ‘모임’, ‘조직’을 생존시키기 위한 섬세한 무형의 움직임들이 꿈틀거리며 도반들 간에 소통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 마치 한 나라와도 같다. 그러할진대,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과 그 모임을 떠나서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것”과도 같다.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불꽃이 타버린 재로 돌아가지 않듯이”, 이제까지 경험한 즐거움과 괴로움, 쾌와 불쾌를 벗어던지고, “평정과 고요와 청정”을 얻고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홀로 갈 수 있겠느냐? 세간의 거대한 흐름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공부하는 길을 택했고, 그 길 위에서 정녕 만나기 힘든 도반들과 스승을 만났는데, 그 벗들과 함께한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너의 세월, 너의 인생, 너의 나라를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겠느냐? “무소뿔 경”은 혼자서 가라고 한다,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그렇다면 혼자서 가는 길, 과연 그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 누가 진짜 스승이며 누가 가짜 스승이냐?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聖典)에 전한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좋은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안락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 「칼라마 경」에서

칼라마인들이 살고 있는 케사푸타에는 여러 존경받는 사문과 바라문이 방문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가르침만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다른 가르침을 멸시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가르침이 진실이고 누구의 가르침이 거짓이냐? 이 혼란스러운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위와 같이 답했다. 늘 들어온 가르침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성전에 전한다고 해서,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스스로 점검할 것을 당부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점검하느냐? 그 가르침을 실천했을 때 이로움과 안락을 주는 것이냐, 아니면 해로움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냐로 구분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헌장이라고 할릴 만하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을 알며, 괴로움이 사라지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안다. 이것을 아는 데 무슨 유서있는 전통이나 스승의 권위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 관찰하고 경험하면 알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벗이 필요하고 스승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만이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바로 자신이다. 구도의 길은 그 어떤 스승, 그 어떤 벗이 곁에 있다해도 결국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반문한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눈으로 사물을 보고서 마음속에 탐진치가 있으면 ‘내 마음속에 탐진치가 있구나.’ 라고 알고, 마음속에 탐진치가 없으면 ‘내 마음속에 탐친치가 없구나.’ 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이런 것들이 믿음을 통해, 좋아함을 통해,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진리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를 통해,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을 통해서, 경험되어야 할 것들이겠는가?

— 「상윳타 니카야」 육처편

이상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그분의 구도역정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분, 싯타르타는 히말라야 설봉이 새벽의 여명을 받으며 웅자하게 자태를 드러낼 즈음 출가의 길을 떠났고, 사문 고타마가 되었다. 이윽고 알라라 칼라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사문 고타마는 알라라 칼라마와 동일한 경지에 이르렀고 함께 교단을 이끌자는 제안을 받는다. 최소 수백 명의 공부조직을 이끄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문 고타마는 여전히 생사의 의문을 풀지 못했고 혼자서 길을 떠난다. 그리고 다른 스승 웃다카 라마풋타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라마풋타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다. 스승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라마풋타는 그에게 수백 명의 교단을 이끌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사문 고타마는 여전히 생사의 의문을 풀지 못했고, 또 다시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이 구도여정에서 우리는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의 안목과 자세를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한다. 그분들은 이십대 후반의 젊은이가 자신들과 동등한, 아니 자신들보다 위의 경지를 체득하자 순순히 교단을 이끄는 자리를 내놓을 줄 알았던 노년의 현인들이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직후, 최초로 법륜을 굴릴 인물로 두 스승을 지목한 것도 부처님이 그들을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이다. 새삼 그 두 스승이 그립고 존경스럽다.

아마도 그 두 스승은 당대에 세력을 떨쳤던 육사외도보다 수승한 경지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문 고타마가 그토록 훌륭한 스승들마저 떠난 것은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의문을 그대로 덮어두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 이 경책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의문을 스승의 가르침으로 덮어버리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의 구도여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벗과 함께 가는 길, 다른 하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벗,
지혜로운 벗을 만나거든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알아차림 속에서 그와 함께 유행하라.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벗,
지혜로운 벗을 만나지 못하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왕처럼
숲속의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

— 「법구경」 코끼리 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