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지난 11월 9일 박근혜 대통령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회동시 자승 스님은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 구절을 조언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일국의 대통령과 불교 대표종단의 사판 수장이 국가적인 위기에 만나 회자된 경구인 까닭에 파급력이 대단했다.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불교 경문을 이보다 더 가까이 접할 기회가 과연 있을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이니까. 나는 이 구절을 처음 접한 순간, 「화엄경」에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한 구절이 있단 말인가? 뭔가 잘못 인용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한문 구절을 언뜻 보아도 고문古文이나 한문경전의 문장이 전혀 아니었다.

매우 기이하다고 여겨 검색을 해보니, 화엄경을 수십 번 지송하셨다는 어느 독자 분께서 「불교닷컴」에 이 구절의 오류를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제보했다고 한다.

“총무원장이 말했다는 구절은 「화엄경」에 없는 말이에요. 왜 아무도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나요, 제가 「화엄경」을 수십 번 읽어왔는데, 그런 구절은 보지 못했어요. 혹시나 해서 아는 분들께 문의했더니 모두 화엄경에는 나오지 않는다면서 놀라더군요. 어떻게 종단의 대표가 「화엄경」에도 나오지 않는 구절을 말했을지 궁금합니다. 이건 바로잡아야 합니다.”

불교닷컴(2016년 11월 15일자 기사)

「불교닷컴」에서 11월 15일 이를 기사화한 뒤, 「불교저널」에서도 11월 17일 다음과 같이 사설을 썼다.

대한불교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은 지난 9일 사적인 인연을 앞세워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간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자승원장은 ‘樹木等到花(수목등도화) 謝才能結果(사재능결과) 江水流到舍(강수류도사) 江才能入海(강재능입해)’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지혜로 삼아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구절의 출처가 《화엄경》이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말은 화엄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른 경전이나 율장, 논서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충격적인 일이다. 과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가 경전을 읽어 보기는 하느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됐다.

불교저널(2016년 11월 17일자)

불교공부에 어느 정도 진입한 공부인이라면,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구절을 듣는 순간, 불교 경전에 들어있을 만한 구절이 아님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이것을 간파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의심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불교를 머리로만 공부하였거나 경전을 정갈하게 지송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내용이 매우 작위적·유위적인데다 불교적 청정을 맑게 드러내는 상쾌한 비유도 아니며, 선어록의 벼락 같은 일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 경전의 경문에 값하지 않으며, 인문적·문학적 사고에 젖은, 세간적인 아름다운 비유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보도자료로 배포된 “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라는 한문구절을 볼 것 같으면, 고전한문이 아니고 현대 중국어 문장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표점(띄어쓰기)을 달리해서 읽어야 한다. 바로 이렇게.

樹木等到花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江,才能入海。

나무는 꽃이 지기를 기다려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강물은 강을 떠나기까지 흘러
비로소 바다에 들 수 있다.

나 같은 비전공자가 보기에도 이런 중국어 문장은 불교경전이나 논서, 어록에 있을 리 만무하며, 한시漢詩일 리도 없다는 판단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의문투성이의 구절이 조계종 총무원장의 입에서 발화되어 대통령에게 전달됨으로써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기사화되었고, 미디어를 접한 이들에게 영락없이 「화엄경」 경문으로 알려지고 말았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대단히 인문적이고 문학적인 수사가 종교적 성언聖言으로 둔갑한 것이다.

살피건대, 이 구절의 먼 출처는 고은의 소설 「화엄경」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 보면, 선재동자가 이련 아씨와 뱃속의 아이를 버려두고 보안산상에 올라 묘향옹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산에 가서 말하다”라는 장이 그것이다. 보안산 위의 묘향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모든 것은 잃어야 할 것들이다. 잃었구나. 잃을 것을 잃었구나. 많은 것을 길에서 잃고 그러나 그 잃음으로 많은 것을 찾았구나. … 또한 네가 기르지 못할 것을 어찌 잃지 않겠느냐. 너는 오늘 산 밑에 둔 네 여자와 네 씨앗을 잃었구나.”

(중략)

“보아라. 허공은 비를 잃는구나. 본디 허공이 비를 가진 것이 아니니라. 비의 자리를 이루어 비의 터에 이루어진 비가 땅으로 내려오는지라 허공인들 내리는 비를 어이하여 붙잡을 수 있겠느냐. 세계는 잃어가면서 세계가 되는구나. 너도 또한 그러하다. 이제 너는 이 산을 내려가서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 한다. 네가 이 산을 잃음과 같이 나도 너를 잃을 무렵이 되었구나.”

— 고은, 「화엄경」(민음사 1991) 160-161면.

나는 고은의 불교관이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전유專有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며, 불교공부를 위해서는 그의 글은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비의 자리를 이루어 비의 터에 이루어진 비가 땅으로 내려오는지라 허공인들 내리는 비를 어이하여 붙잡을 수 있겠느냐”는 문장 역시 얼핏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불교적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언어유희일 뿐이며, 불교를 애매하게 만드는 공허한 수사라고 본다.

같은 장의 “가장 존귀한 새는 그것이 머무르다 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162면)는 구절의 경우에도 인문적 수사로는 감동적으로 다가올지는 몰라도, 그리고 얼핏 불교적 가르침으로 비칠지는 몰라도, 엄밀히 보면 기존의 불교적 가르침에 그 특유의 허세가 가미된 문학적 차용이라고 본다. (이런 미세한 차이를 간파해내는 데에서 공부인의 역량이 드러난다.) 고은의 소설 「선」도 앞부분을 읽다가 도저히 그 허세를 견딜 수 없어 차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은, 선어록의 날카로운 선기禪機에 뭔가를 덕지덕지 덧칠함으로써 온통 허탄한 문장들로 넘쳐나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취향과는 다른 분들은 얼마든지 달리 판단할 근거와 권리가 있겠으므로, 나의 판단만을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영화감독 장선우는 고은의 소설 「화엄경」을 원작으로 손수 각본까지 써서 영화 「화엄경」을 제작하여 1993년에 개봉하였던 바, 이 영화 막바지에 선재동자가 한 가닥 대금산조를 불고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세상은 자신을 잃어가면서 세상이 되네요. 하늘은 비를 잃어 허공이 되고요. 강은 강을 잃어 바다가 되지요. 꽃은 꽃을 잃어 열매가 되고요. 나는 또한 마음을 잃어 허공이 되었어요. 마음을 잃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탐내고 원망하고 다투는 어리석은 고통의 바다를 헤어나지 못해요.

— 영화 「화엄경」(1993)에서

이것은 명백히 소설 「화엄경」의 “산에 가서 말하다”라는 장의 반향이다. 장선우는 고은의 소설에서 새기고 싶은 구절을 자기 식으로 소화하여 위와 같은 선재동자의 발언으로 구체화한 듯하다. 고은이나 장선우나 불교에 관심이 깊은 이들이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작품은 그들이 불교에 문학적·예술적 감성으로만 접근할 뿐,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했음을, 소위 “입문”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입문入門”이라 함은 초기불교의 “입류入流”와 같은 뜻으로, 가령 「육조단경」에서는 오조홍인이 교수사였던 신수의 게송을 보고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에 들지 못했다(只到門外 未入門內)”고 일갈할 정도이다.

아무튼 불교입문 여부와는 무관하게 고은의 문장이나 장선우의 선재동자 대사나 문학적 수사로는 찬탄을 받는 모양이다. 이 문학적 수사로서의 역할을 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것이 그 나름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세간적인 여정을 밟는 것을 존중해 주고 싶다. 그 나름의 호소력이 있기에 아마도 이 대사에 감명받은 영화 관람객들이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식의 문장으로 새기고서 「화엄경」의 구절로 소개했을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이 가짜 경문이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차츰차츰 파급되어 2000년대에는 유명인사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여러 서적에서도 「화엄경」 경문으로 인용되며, 2012년에는 부산대 정병언 교수에 의해 이 문장이 “흔히 말하는 투”로 언급된다.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은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재동자의 구법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 영화의 마지막에 선재가 읊조리는 구절은 숱한 유혹에 맞닥뜨리는 우리가 마음속 깊이 새겨둬야 할 노래이기도 하다. “세상은 자신을 잃어가면서 세상이 되네요. 하늘은 비를 잃고 허공이 되구요. 강은 강을 잃어 바다가 되지요. 꽃은 꽃을 잃어 열매가 되구요.” 후반을 흔히 말하는 투로 바꿔보면,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정병언, 「부대신문釜大新聞」 칼럼(2012년 3월 5일)

이쯤 되어서는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문장이 많은 인구에 회자되었던 듯하다. 정병언 교수는 학자적 습관 때문에 이 문장의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보고 “흔히 말하는 투”라고 언급했겠지만, 출처를 엄밀히 따지지 않는 이들은 「화엄경」의 경문으로 알고 유포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문장에 해당하는 한문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구글로 검색해 본 바로는, 한문 문장은 어느 출가 수행자의 2012년 3월 16일자 트위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수행도 그러할 것이다. 나를 놓지 않으면 팔만사천장애물이 펼쳐지지만 나를 놓으면 천년의 어둠이 촛불 한 점에 사라지듯 사라질것이다.

慈無님 트위터(2012년 3월 16일)

慈無님의 인용문은 표점이 잘못된 것으로 보아 직접 작문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분도 어딘가에서 인용한 듯하다. 그런데 이 트윗 이전에 한문 문장이 인용된 출처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일본이나 중국 사이트에서는 전혀 검색되지 않는다. 따라서 「화엄경」 경문으로 통하던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문장을 좋아한 누군가가 「화엄경」 원문을 확인할 수 없어 흥미 삼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중국어 문장과 함께 한글 번역이 함께 묶여 「화엄경」 경문으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가짜 화엄경 경문이 2010년 주경스님의 한국일보 칼럼에 인용되고 2015년에는 마가스님의 한겨레 웹사이트 글에 인용되었으며, 급기야는 종정스님과 총무원장 스님이 함께 자리한 2016년 3월 30일, “팔공총림 동화사 주지 진산식”에서 효광스님의 주지 취임사로 언급되었다는 점이다. 이 취임사는 현재 동화사 홈페이지에 “주지스님 인사말”로 그대로 소개되어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의 말씀은 농부의 마음과 다름없는 소박한 가르침을 정신이 번쩍 드는 간결한 언어로 전하고 있다.

주경스님,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는다”(한국일보 2010.8.16)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 강수류도사 강재능입해·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라는 말씀이 화엄경에 전해지고 있답니다.

마가스님, “새 삶을 원할수록 크게 버려라”(한겨레 휴심정, 2015.4.30)

존경하는 팔공총림의 여러 대중 스님 !
화엄경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비로소 바다에 들어 간다’라고 하였습니다.

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 강수류도사 강재능입해)

팔공총림 동화사 주지스님(능담효광) 진산식 취임사(2016년 3월 30일)

가짜 경문이 마침내 출가사문과 본찰의 주지스님, 총림의 주지스님에 의해서까지 「화엄경」 경문으로 공식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 11월 9일 총무원장 스님이 이 가짜 경문을 「화엄경」의 지혜의 말씀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했고,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이 이를 기사화함으로써 문장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진짜 같은 가짜가 탄로나기 직전에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은 셈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진짜 같은 가짜는 가장 화려한 불꽃을 터트리고 나서야 비로소 가면을 벗는 법이다.

불교계가 아니라면 이 가짜 경문의 사태에 그다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불교계, 특히 조계종단은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경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파국적인 사실 앞에서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화엄경」 80권의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하더라도 적어도 이 가짜 경문이 경전에 값하지 않는 내용임을 대번에 간파하고 걸러낼 만한 안목이 없었다는 점도 부끄럽고, 한문 문장이 전혀 경전의 문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살필 여유나 실력이 없었다는 점도 부끄럽고, 엉터리 오언절구 형식에 맞춘답시고 표점마저 잘못된 중국어 문장이 경전한문으로 둔갑되어 모든 미디어에서 통용되었다는 점도 부끄럽다.

「화엄경」을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유구한 전통의 한국불교 사판 수장이 가짜 경문을 가지고 국가의 수장에게 「화엄경」의 지혜의 말씀이라며 건넬 정도라면, 이는 종단 전반적으로 경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사실의 폭로 외에 달리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적 차용에 불과했던 인문적 감수성의 문장이 경전의 성언聖言으로 둔갑되어 전 국민의 머리에 각인되기까지 이를 저지할 역량이 불교계에 없었다는 문제, 한국불교 전반의 문제이다. 그저 안타깝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화엄경」에는 없는 구절이다. 내 이름을 걸겠다”고 공언한 연구자나 「화엄경」을 수십 번 지송하신 분들이 있어 그분들의 법향을 훈습하며 위로를 삼는다.

또 착한 남자여, 이 향을 사를 적에 낱낱 향에서 한량없는 향기가 나와 시방 모든 법계와 모든 부처님 도량에 풍기니 향의 궁궐도 되고 향의 전각도 되며, 이렇게 향 난간ᆞ향 담ᆞ향 망루ᆞ향 창호ᆞ향 누각ᆞ향 반월ᆞ향 일산ᆞ향 당기ᆞ향 번기ᆞ향 휘장ᆞ향 그물ᆞ향 형상ᆞ향 잠엄 거리ᆞ향 광명ᆞ향 구름 비가 곳곳에 가득하여 장엄하였느니라.

— 화엄경, 입법계품, “보안장자” 편(동국대역경원 번역)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에 대한 5개의 댓글

  • 항상 정성들여 쓰신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컴퓨터를 할 때마다 꼭 들러서 불교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고 가곤 합니다…^^

    불교논리
  • 수고롭게 자주 들러 주시는데 제가 글을 자주 올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고싱가
  • 지금까지 올려주신 글이 많아서 그때그때 조금씩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문헌에 대한 지식 없이 힐링만 얘기하거나, 통속적인 불교 해석만이 넘치는 넷상에서

    고싱가 숲은 제게 오아시스같은 상쾌함을 줍니다… ^^

    불교논리
  • 장자 잡편 외물편 제자소이재토 득토이망제 전자소이제어 득어이망전 이말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영주
  • 장자의 忘言之人에 대한 비유는 금강경의 뗏목 비유와 동일하여 같은 수준에서 운위될 수 있겠습니다만,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문구는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인문적 사유의 결과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 각각의 수준에 대해서는 서로 함께 논하여 동일한 결론에 이를 필요는 없으며, 각자의 관점에 따라 흡족한 결과물을 받아안고 살아가도록 놔두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장자가 그 글 끝에 “내가 어떻게 하면 망언지인忘言之人을 만나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고 탄식한 것은 왜일까요? “망언忘言”을 아는 자가 그만큼 드물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세상에는 논의를 통하여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분야가 있는 반면, 논의는커녕 교육도 불가능하여 세월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분야도 있습니다.

    김영주님 덕분에 훌륭한 장자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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