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마흔의 경(MN 11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정사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대덕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답하였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 비구들이여,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正定을 가리키겠노라. 이를 들으라, 잘 작의作意하라, 내가 설할 것이니.”

“대덕이시여,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답하였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거룩한 정정正定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正定인가?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이라는, 비구들이여, 이 일곱 지분과 함께 심일경心一境이 갖춰진 것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이라고 한다.

▣ 사견邪見, 정견正見, 거룩한 정견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1]“거기”라 함은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을 말한다. 정견이 선행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사견邪見을 사견이라고 알아차리며, 정견正見을 정견이라고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여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사견邪見인가? 보시물이라는 것도 없고 제물祭物이라는 것도 없고 공물供物이라는 것도 없으며, 선악업의 결실이나 익음도 없으며, 이 세간도 없고 저 세간도 없으며,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으며, 화생하는 중생도 없으며, 이 세간과 저 세간을 스스로 증지證智로 증험하고서 알려주는, 바르게 가고 바르게 걸은 사문ㆍ바라문도 없다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사견이라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정견正見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정견 또한 두 겹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有漏)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견이 있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無漏) 출세간적이고 길[2]여기에서의 “길”은 “팔지성도八支聖道”, 즉 여덟 지분의 거룩한 길을 말한다.의 지분인 거룩한 정견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견인가? 보시물이라는 것도 있고 제물이라는 것도 있고 공물이라는 것도 있으며, 선악업의 결실과 익음도 있으며, 이 세간도 있고 저 세간도 있으며,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으며, 화생하는 중생도 있으며, 이 세간과 저 세간을 스스로 증지로 증험하고서 알려주는, 바르게 가고 바르게 걸은 사문ㆍ바라문도 있다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견이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이 되는 거룩한 정견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거룩한 자ㆍ마음에 새어나감이 없는 자ㆍ거룩한 길을 갖춘 자ㆍ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의 지혜, 혜근慧根, 혜력慧力, 택법각지擇法覺支, 길의 지분인 정견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견이라고 한다.[3]“사견/정견”의 두 겹, 그리고 다시 “정견/거룩한 정견”이라는 두 겹의 중첩구조는, “팔사도/팔정도” 및 “팔정도/거룩한 팔정도(=八支聖道)”라는 첩첩의 구조가 성립함을 말해준다.

그는 사견을 떠나고 정견을 밟기 위하여 정진한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는 정정진이 있다. 그는 유념하여 사견을 알아차리며, 유념하여 정견을 밟고서 머무른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는 정념正念이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에게는 삼법三法이 정견을 따라 감도나니, 삼법이란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다.[4]이 경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 함께 삼법을 이루어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을 순차로 감싸며 나아간다. 그리고 삼법의 힘으로 오정도를 밟아나가 심일경이 함께 갖춰지면 그것이 바로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이다. 이로써 여덟 지분, 즉 팔정도/팔지성도의 답파가 이루어진다.

▣ 사사유邪思惟, 정사유正思惟, 거룩한 정사유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 정견이 선행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사사유邪思惟를 사사유라고 알아차리며, 정사유正思惟를 정사유라고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여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사사유邪思惟인가? 욕락의 사유ㆍ악의의 사유ㆍ상해의 사유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사사유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정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정사유 또한 두 겹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사유가 있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사유가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사유인가? 비구들이여, 이욕離欲의 사유ㆍ비악의非惡意의 사유ㆍ불상해不傷害의 사유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사유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사유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거룩한 자ㆍ마음에 새어나감이 없는 자ㆍ거룩한 길을 갖춘 자ㆍ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의 모색摸索ㆍ사색思索ㆍ사유思惟ㆍ몰입과 집중ㆍ전심專心ㆍ어행語行[5]팔리어를 병기하자면, 모색(takko), 사색(vitakko), 사유(saṃkappo), 몰입과 집중(appanāvyappanā), 전심(cetaso abhiniropanā), 어행(vācāsaṃkhāro)”이다. 각각의 용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긴 글이 필요하므로 여기에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출현시키기 위한 밑흐름임을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거룩한 자, 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에게만 펼쳐지는 어행語行, 거룩한 정사유임을 명심하자.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사유라고 한다.

그는 사사유를 떠나고 정사유를 밟기 위하여 정진한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는 정정진이 있다. 그는 유념하여 사사유를 알아차리며, 유념하여 정사유를 밟고서 머무른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는 정념이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에게는 삼법이 정사유를 따라 감도나니, 삼법이란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다.

▣ 사어邪語, 정어正語, 거룩한 정어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 정견이 선행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사어邪語를 사어라고 알아차리며, 정어正語를 정어라고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여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사어邪語인가? 거짓말(忘語), 흉보는 말(兩舌), 거친 말(惡口), 실없는 빈말(綺語)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사어邪語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정어正語인가? 나는 정어 또한 두 겹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어가 있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어가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어인가? 거짓말을 삼감, 흉보는 말을 삼감, 거친 말을 삼감, 실없는 빈말을 삼감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어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어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거룩한 자ㆍ마음에 새어나감이 없는 자ㆍ거룩한 길을 갖춘 자ㆍ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가 네 가지 말의 악행[6]“네 가지 말의 악행”이란 앞서 언급된 “거짓말, 흉보는 말, 거친 말, 실없는 빈말”을 가리킨다.을 떠나고 벗어나고 멀리하고 삼감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어라고 한다.

그는 사어邪語를 떠나고 정어正語를 밟기 위하여 정진한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는 정정진이 있다. 그는 유념하여 사어를 알아차리며, 유념하여 정어를 밟고서 머무른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는 정념이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에게는 삼법이 정어를 따라 감도나니, 삼법이란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다.

▣ 사업邪業, 정업正業, 거룩한 정업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사업邪業을 사업이라고 알아차리며, 정업正業을 정업이라고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여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사업邪業인가? 살생(斷生命), 주지 않은 것을 취함(不與取),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欲邪行)[7]흔히들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을 “삿된 음행”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보다 훨씬 폭넓은 개념으로 읽고 싶다. 이를테면 안이비설신에 의해 분별된 색성향미촉을 탐하고 좋아하는 것은 전부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으로 보고 싶다.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사업邪業이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정업正業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정업 또한 두 겹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업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업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삼감, 주지 않은 것을 취함을 삼감,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을 삼감이 있다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업이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업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거룩한 자ㆍ마음에 새어나감이 없는 자ㆍ거룩한 길을 갖춘 자ㆍ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가 세 가지 몸의 악행[8]“세 가지 몸의 악행”이란 앞서 언급된 “살생, 주지 않은 것을 취함,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을 가리킨다.을 떠나고 벗어나고 멀리하고 삼감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업이라고 한다.

그는 사업邪業을 떠나고 정업正業을 밟기 위하여 정진한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 정정진이 있다. 그는 유념하여 사업을 알아차리며, 유념하여 정업을 밟고서 머무른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 정념이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에게는 삼법이 정업을 따라 감도나니, 삼법이란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다.

▣ 사명邪命, 정명正命, 거룩한 정명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사명邪命을 사명이라고 알아차리며, 정명正命을 정명이라고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여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사명邪命인가? 술수術數, 참언讖言, 점술,[9]“술수(kuhanā), 참언(lapanā), 점술(nemittakatā)”은 정확한 사전적 정의가 없다. 그것들은 일반 직업이 없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방도들로서 모두 사술邪術에 속한다고 보고 번역어를 택했다. 다음의 “정명正命”에서 다른 각 지분의 상응구절과는 달리 “거룩한 제자”, 즉 입류자 이상의 출가비구가 대비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보고 싶다. 따라서 “사명邪命”은 오늘날 무속이나 사주, 점 등에 의한 생계유지 같은 차원을 말하는 것이지 재가자의 흔한 직업군을 두고서 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이득으로 이득을 추구함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사명邪命이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정명正命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정명 또한 두 겹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명이 있다.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명이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명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거룩한 제자가 있어 사명을 떠나고 정명으로 생명을 유지한다[10]앞의 “사명邪命”과 짝을 이루는 “정명正命” 역시 일반 직업군이 아니라 탁발ㆍ공양ㆍ보시에 의한 생명 유지, 즉 출가비구의 청백한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경전 여러 곳에서 공식구로 등장하는 다음 경문이야말로 “정명正命”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라고 보고 싶다: “그는 몸을 보호할 염의染衣와 배를 유지할 걸식乞食으로 만족한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그것만을 지니고서 간다. 마치 날개 달린 새가 어디를 날더라도 정녕코 날개만을 지니고 날듯이,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보호할 염의와 배를 유지할 걸식으로 만족하며,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그것만을 지니고서 간다.”(<대애진경> 참고)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있고 공덕을 짓고 의존을 낳는 정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명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이 거룩한 자ㆍ마음에 새어나감이 없는 자ㆍ거룩한 길을 갖춘 자ㆍ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가 사명을 떠나고 벗어나고 멀리하고 삼감 —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새어나감이 없고 출세간적이고 길의 지분인 거룩한 정명이라고 한다.

그는 사명邪命을 떠나고 정명正命을 밟기 위하여 정진한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 정정진이 있다. 그는 유념하여 사명을 알아차리며, 유념하여 정명을 밟고서 머무른다. 그렇게 하여 그에게 정념이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에게는 삼법이 정명을 따라 감도나니, 삼법이란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다.

▣ 여덟 지분과 열 지분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정견에서 정사유가 생겨나며, 정사유에서 정어가 생겨나며, 정어에서 정업이 생겨나며, 정업에서 정명이 생겨나며, 정명에서 정정진이 생겨나며, 정정진에서 정념이 생겨나며, 정념에서 정정이 생겨나며, 정정에서 정지正智가 생겨나며, 정지에서 정해탈正解脫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하여, 비구들이여, 여덟 지분(八支)을 답파한 유학과 걸음이 있으며, 열 지분(十支)을 답파한 아라한이 있다.

▣ “위대한 마흔”의 법문

비구들이여, 거기에서는 정견이 선행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하여 정견이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에서 사견邪見이 부서지며, 사견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견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견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사유正思惟에서 사사유邪思惟가 부서지며, 사사유를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사유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사유를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어正語에서 사어邪語가 부서지며, 사어를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어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어를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업正業에서 사업邪業이 부서지며, 사업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업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업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명正命에서 사명邪命이 부서지며, 사명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명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명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정진正精進에서 사정진邪精進이 부서지며, 사정진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정진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정진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념正念에서 사념邪念이 부서지며, 사념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념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념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정正定에서 사정邪定이 부서지며, 사정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정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정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지正智에서 사지邪智가 부서지며, 사지를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지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지를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정해탈正解脫에서 사해탈邪解脫이 부서지며, 사해탈을 연유하여 생긴 갖가지 나쁜 불선법들도 정해탈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정해탈을 연유하여 갖가지 선법들이 계발되고 성취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하여, 비구들이여, 스물의 선한 날개가 있으며 스물의 불선한 날개가 있다. ‘위대한 마흔’의 법문[11]“위대한 마흔”이라 함은, ‘十正支(바른 열 지분)’ 및 ‘十正支를 연유하여 생긴 선법들’이라는 “스물의 선한 날개”와, ‘十邪支(삿된 열 지분)’ 및 ‘十邪支를 연유하여 생긴 불선법들’이라는 “스물의 불선한 날개”를 말한다.이 구르기 시작하였나니,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신이든 마라든 범천이든 그 누구든, 세간에서 이를 멈추게 할 자 없다.

▣ 여법한 언설言說들의 되비춤

비구들이여, 어느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어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은 비난과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다만 법이 현현할 때 열 가지 여법한 언설言設들이 속속 그에게 되돌아가 [그 스스로를] 비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尊師가 정견을 비난한다면, 사견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사유를 비난한다면, 사사유를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어를 비난한다면, 사어를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업을 비난한다면, 사업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명을 비난한다면, 사명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정진을 비난한다면, 사정진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념을 비난한다면, 사념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정을 비난한다면, 사정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지를 비난한다면, 사지를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어느 존사가 정해탈을 비난한다면, 사해탈을 가진 사문ㆍ바라문이 공양과 칭송을 받아야 할 존사가 되고 말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느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어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을 비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다만 법이 현현할 때 이 열 가지 여법한 언설들이 속속 그에게 되돌아가 [그 스스로를] 비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12]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을 비난하는 순간, 그 비난자는 결국 그 스스로가 “十邪支”를 걷는 자가 되며, “十邪支”를 걷는 자들을 칭송하는 자가 된다. 이를 두고 부처님께서는 “이 열 가지 여법한 언설들이 속속 그에게 되돌아가 그 스스로를 비난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이 구르기 시작한 이상 그 누구도 이를 멈추게 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 十正支와 그 선법들에 의하여 十邪支와 그 불선법들이 하염없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또한 비구들이여, 옥칼라 사람 밧사와 반냐 무리들은 무인론자無因論者, 무작론자無作論者, 허무론자들인데도, 그들은 ‘위대한 마흔’의 법문을 비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힐난과 폄훼와 공박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13]인과도 없고(“무인론”) 업보도 없고(“무작론”)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허무론”)는 주장을 하는 무리들은,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이 그 어떤 “邪支”를 거론하든 어차피 그들 입장에서는 무인ㆍ무작ㆍ허무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등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법문을 비난하면 행여 그 비난으로 인하여 이 법문의 여법한 언설들이 고스란히 그들에 대한 힐난과 폄훼와 공박으로 되돌아올까봐, 즉 “十邪支”를 걷는 자들로 드러날까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 탓에 그들은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그만큼 그들의 사상은 겉과 속이 다르며, 나약하며, 실질이 없으며, 이율배반적이다.

이것을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세존의 설법을 우러러 환희하였다.

* 각주   [ + ]

1. “거기”라 함은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을 말한다.
2. 여기에서의 “길”은 “팔지성도八支聖道”, 즉 여덟 지분의 거룩한 길을 말한다.
3. “사견/정견”의 두 겹, 그리고 다시 “정견/거룩한 정견”이라는 두 겹의 중첩구조는, “팔사도/팔정도” 및 “팔정도/거룩한 팔정도(=八支聖道)”라는 첩첩의 구조가 성립함을 말해준다.
4. 이 경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정견ㆍ정정진ㆍ정념이 함께 삼법을 이루어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을 순차로 감싸며 나아간다. 그리고 삼법의 힘으로 오정도를 밟아나가 심일경이 함께 갖춰지면 그것이 바로 “밑바탕과 갖춤이 있는 거룩한 정정”이다. 이로써 여덟 지분, 즉 팔정도/팔지성도의 답파가 이루어진다.
5. 팔리어를 병기하자면, 모색(takko), 사색(vitakko), 사유(saṃkappo), 몰입과 집중(appanāvyappanā), 전심(cetaso abhiniropanā), 어행(vācāsaṃkhāro)”이다. 각각의 용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긴 글이 필요하므로 여기에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출현시키기 위한 밑흐름임을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거룩한 자, 거룩한 길을 계발한 자”에게만 펼쳐지는 어행語行, 거룩한 정사유임을 명심하자.
6. “네 가지 말의 악행”이란 앞서 언급된 “거짓말, 흉보는 말, 거친 말, 실없는 빈말”을 가리킨다.
7. 흔히들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을 “삿된 음행”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보다 훨씬 폭넓은 개념으로 읽고 싶다. 이를테면 안이비설신에 의해 분별된 색성향미촉을 탐하고 좋아하는 것은 전부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으로 보고 싶다.
8. “세 가지 몸의 악행”이란 앞서 언급된 “살생, 주지 않은 것을 취함, 욕락들에 빠진 그릇된 짓”을 가리킨다.
9. “술수(kuhanā), 참언(lapanā), 점술(nemittakatā)”은 정확한 사전적 정의가 없다. 그것들은 일반 직업이 없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방도들로서 모두 사술邪術에 속한다고 보고 번역어를 택했다. 다음의 “정명正命”에서 다른 각 지분의 상응구절과는 달리 “거룩한 제자”, 즉 입류자 이상의 출가비구가 대비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보고 싶다. 따라서 “사명邪命”은 오늘날 무속이나 사주, 점 등에 의한 생계유지 같은 차원을 말하는 것이지 재가자의 흔한 직업군을 두고서 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10. 앞의 “사명邪命”과 짝을 이루는 “정명正命” 역시 일반 직업군이 아니라 탁발ㆍ공양ㆍ보시에 의한 생명 유지, 즉 출가비구의 청백한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경전 여러 곳에서 공식구로 등장하는 다음 경문이야말로 “정명正命”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라고 보고 싶다: “그는 몸을 보호할 염의染衣와 배를 유지할 걸식乞食으로 만족한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그것만을 지니고서 간다. 마치 날개 달린 새가 어디를 날더라도 정녕코 날개만을 지니고 날듯이,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보호할 염의와 배를 유지할 걸식으로 만족하며,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그것만을 지니고서 간다.”(<대애진경> 참고)
11. “위대한 마흔”이라 함은, ‘十正支(바른 열 지분)’ 및 ‘十正支를 연유하여 생긴 선법들’이라는 “스물의 선한 날개”와, ‘十邪支(삿된 열 지분)’ 및 ‘十邪支를 연유하여 생긴 불선법들’이라는 “스물의 불선한 날개”를 말한다.
12.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을 비난하는 순간, 그 비난자는 결국 그 스스로가 “十邪支”를 걷는 자가 되며, “十邪支”를 걷는 자들을 칭송하는 자가 된다. 이를 두고 부처님께서는 “이 열 가지 여법한 언설들이 속속 그에게 되돌아가 그 스스로를 비난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이 구르기 시작한 이상 그 누구도 이를 멈추게 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 十正支와 그 선법들에 의하여 十邪支와 그 불선법들이 하염없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13. 인과도 없고(“무인론”) 업보도 없고(“무작론”)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허무론”)는 주장을 하는 무리들은,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이 그 어떤 “邪支”를 거론하든 어차피 그들 입장에서는 무인ㆍ무작ㆍ허무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등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법문을 비난하면 행여 그 비난으로 인하여 이 법문의 여법한 언설들이 고스란히 그들에 대한 힐난과 폄훼와 공박으로 되돌아올까봐, 즉 “十邪支”를 걷는 자들로 드러날까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 탓에 그들은 이 “위대한 마흔”의 법문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그만큼 그들의 사상은 겉과 속이 다르며, 나약하며, 실질이 없으며, 이율배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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