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떠난 자, 그 무언가를 취하지 않고 말하는 법” — <마간디야 경>(Snp 4.9)

[세존]
835“‘탄하(갈증愛)’와 ‘아라티(싫증厭)’와 ‘라가(물듦貪)’를 보고서도
나는 음욕이 없었으니
그 똥과 오줌으로 가득한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실로 발 닿기조차 원치 않았습니다.”

[마간디야]
836“만약 당신이 그런 종류의 보배,
수많은 왕들이 구했던 여인을 원치 않으신다면,
어떤 부류의 견해와 계금戒禁생활,
그리고 유有의 수립을 말씀하십니까?”

[세존]
837“그것에 대해 ‘나는 이것을 말한다’라는 것 없으니
법들에 사로잡히는 바를 분간해야 합니다.
그리고 견해들 속에서 보이는 바를 취하지 않고서
간파하면서 안의 평온을 나는 보았습니다.”

[마간디야]
838“사유된 것들을 낱낱 분간하시고서
실로 그것들을, 모니牟尼시여, 취하지 않으시고서
‘안의 평온’이라고 말씀하셨사온데 그 뜻하는 바,
그것은 참으로 어떻게 선자禪者들에게 알려지는 것입니까?”

[세존]
839“견해에 의한, 들음에 의한, 앎에 의한,
계금戒禁에 의한 청정을 [모니牟尼는] 말하지 않습니다.
견해 아님에 의한, 들음 아님에 의한, 앎 아님에 의한,
계戒 아님에 의한, 금禁 아님에 의한 청정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버리고서 취하지 않고서
평온한 자로서 의지하지 않고서 유有를 바라지 않습니다.”

[마간디야]
840“참으로 견해에 의한, 들음에 의한, 앎에 의한,
계금에 의한 청정을 말하지 않는다면,
견해 아님에 의한, 들음 아님에 의한, 앎 아님에 의한,
계戒 아님에 의한, 금禁 아님에 의한 청정도 말하지 않는다면,
다만 무지몽매한 법에 불과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견해에 의해 청정으로 돌아갑니다.”

[세존]
841“당신은 견해를 의지하고서 묻고 있으니
사로잡힌 것들에 빠져 몽매함에 이른 것이요,
이로써 약간의 상想조차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와 같이 무지몽매함에 소진되고 있습니다.

842“혹은 ‘같은 자’, 혹은 ‘나은 자’, 혹은 ‘못한 자’라고
생각하는 자, 그는 그들과 더불어 논쟁합니다.
세 부류 가운데에서 동요함이 없는 자라면,
그는 ‘같은 자’, ‘나은 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843“그런 바라문이 무엇을 ‘진리이다’라고 말하겠으며,
누구와 더불어 ‘거짓이다’라고 논쟁하겠습니까?
같음도 같지 않음도 없는 자라면,
그가 누구와 더불어 말을 다투겠습니까?

844“집을 버리고 거처를 좇지 않는 자,
마을에서 친교를 맺지 않는 모니牟尼,
욕락欲樂들이 텅 비어 바라는 바가 없는 자,
그가 어찌 사람들과 더불어 쟁론하겠습니까?

845“무언가로부터 떨어져 세간을 유행하는 용龍이라면,
바로 그 무언가를 취하지 않고서 말할 것입니다.
마치 수련과 가시연과 어리연이
물과 진흙으로 더럽혀지지 않듯이,
모니牟尼는 말이 평온한 자, 움켜쥠이 없는 자,
욕락들과 세간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846“명지자明智者는 견해나 지각에 의해
만慢에 이르지 않나니, 참으로 그는 만慢에 이른 자가 아닙니다.
업業에 의해서도 들음에 의해서도 이끌리지 않을 것이니,
그는 주처住處에 끌려들지 않는 자입니다.

847“상想에서 이탐離貪한 자에게는 속박들이 없으며,
혜해탈慧解脫한 자에게는 어리석음(癡)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想과 견해를 취한 자들은
옥신각신 싸우면서 세간을 유행합니다.”

* * *

오늘날 학인으로서 이천오백여년 전의 경전을 대할 때 갖추어야 할 첫번째 덕목은 무엇일까? 경전은 무한히 심원하고 무한히 광대한 세계라는 겸허한 인식이다. 경전을 쉽게 여기는 공부인들이 많이 있으나, 나는 그런 공부인들에게 불법佛法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초기불교의 원형질과도 같은 《숫타니파타》라면 더욱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숫타니파타》는 4부 니카야의 체계적 교학으로 여물지 않은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팔리어 문장도 쉽게 파악하기 힘든 고층古層의 어형과 구문을 간직하고 있다. 더러는 《숫타니파타》에 속하는 경이 이미 부처님 재세시 결집되어 4부 니카야에서 문답되기도 하므로, 그 고색창연함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마간디야 경>은 ‘마간디야’라는 미상의 인물과 부처님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는 열세 송의 짧은 경이지만, 《숫타니파타》에 속해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조심스럽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경전의 심원한 깊이에 투명하게 빠져들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돌아보면 홀로 길을 가고 있다는 자각에 적막함이 감돌기도 하지만, 원형질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인연에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한거의 잔잔한 기쁨이라고나 할까.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한역경전, 선어록 등등의 언어의 밀림을 헤쳐가면서 초기불교 경전을 한낱말 한낱말 짚어가며 읽다보니, 남들과는 다른 세계로 접어든 지 이미 오래. 뜻을 얻은들 다른 세계에 들어서 산 세월이 있는지라, 그 세계 밖의 언어로 소통하기란 쉽지 않다.

바야흐로 언어권력의 시대이다. 언어의 의미를 제하고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사라진 시대. 이미지? 이미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이미 언어화된다. 내면의 감정? 감정도 순식간에 언어화됨으로써 존재성이 획득된다. 모든 것이 그렇게 언어로 규격화되어 소통된다. 내가 ‘소통’을 가상이자 허위라고 보는 이유이다. 사실은 소통이란 없으며, 흐름의 교차와 부딪힘, 엇갈림, 뒤섞임, 혹은 소용돌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가상에 기대어 인생을 사는 법이니, ‘소통’이라는 허위의 미덕이 없지는 않다.

<미간디야 경>에서 부처님은 ‘갈증(愛)’과 ‘싫증(厭)’과 ‘물듦(貪)’이라는 인간 존재의 기본동력을 의인화하여 그것이 똥과 오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씀하신다. ‘갈증’과 ‘싫증’의 순환 속에서 켜켜이 물들어가면서 (즉, 똥과 오줌으로 가득 차면서) 음욕을 품고 죽음을 향하는 인간 존재의 운명은 참으로 일상적이고 비극적이다.

인간은 권력의 정점에 오를수록 ‘갈증’과 ‘싫증’의 순환을 대단위로 전개한다. 그렇게 두텁게 물들어가며 탐욕의 부피를 키우고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한다. 마간디야는 말한다. “숱한 왕들이 구했던 여인”, “보배”가 다름아닌 대단위의 ‘갈증’과 ‘싫증’과 ‘물듦’일진대, 어찌 당신은 그것을 원치 않으시는가?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원하시는가?

‘갈증’과 ‘싫증’의 순환이라는 이 마력적인 삶을 원치 않는다면, 권력자의 주술적인 스케일의 삶을 원치 않는다면, 어떤 부류의 견해를 갖고 있으며, 어떤 계금戒禁생활을 원하며, 어떤 존재상태를 원하는가? — 이것이 마간디야의 질문이다.

‘갈증’과 ‘싫증’의 순환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자는 반드시 그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마간디야의 질문 내용이 바로 그런 흔적이다. ‘어떤 견해’, ‘어떤 생활’, ‘어떤 존재’. 마간디야는 ‘갈증’과 ‘싫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견해나 생활, 존재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실은 ‘견해ㆍ생활ㆍ존재’라는 것은 ‘갈증’과 ‘싫증’이 순환하며 내놓는 내부의 가면에 불과하다. ‘어떤 견해’, ‘어떤 생활’, ‘어떤 존재’ 자체가 갈증과 싫증의 소산이다. 부처님은 ‘견해ㆍ생활ㆍ존재’라는 갈증과 싫증의 또다른 얼굴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신다:

837“그것에 대해 ‘나는 이것을 말한다’라는 것 없으니
법들에 사로잡히는 바를 분간해야 합니다.
그리고 견해들 속에서 보이는 바를 취하지 않고서
간파하면서 안의 평온을 나는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똥과 오줌으로 가득한 것”에 접근조차 하지 않으신다. ‘어떤 견해’, ‘어떤 생활’, ‘어떤 존재’를 구하는 자는, “탄하”와 “아라티”와 “라가”라는 여인을 구하는 한 명의 왕이다. 질문자 마간디야는 그런 종류의 보배를 구하는 권력자이다.

권력자 마간디야가 ‘견해ㆍ생활ㆍ존재’라는 것을 상주불변의 대상으로 붙잡고서 언어화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부처님은 그것들이 수많은 인연들이 중첩적으로 잠시 화합한 “법들”에 불과함을 안다. 권력자는 ‘어떤 견해’, ‘어떤 생활’, ‘어떤 존재’에 사로잡힘으로써 법法을 실체화ㆍ언어화하고, 모니牟尼는 권력자에 의해 실체화ㆍ언어화 되어가는 법法을 속속들이 분간하고 간파한다. 권력자의 언어와 질문 자체가 성립함과 동시에 모니牟尼에 의해 무너진다. 존재는 속속들이 법으로 간파되고, 언어는 속속들이 “갈증/싫증”의 한 줄기 흐름으로 간파된다. 이것이 “안의 평온”을 보는 것이다. “안의 평온”은 보이는 것이지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갖 심리적 장애에서 말끔히 해탈한 청정한 자에게만 보인다. 일말의 애욕이나 일말의 미움이라도 마음에 그늘로 남아있다면, “안의 평온”을 볼 수 없다.

거센 흐름의 “갈증/싫증”에서 헤어나지 못한 마간디야는 “안의 평온”을 본 적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납득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범부 수준은 넘어서 있는지라 부처님의 답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약간은 알고 있다. 부처님의 답은 “사유된 것들을 낱낱 분간하고서, 그것들을 취하지 않고서”(838) 이루어진 것이다.

마간디야의 되물음에서 “사유된 것들(pakappitāni)”이 언급된다. 그리고 현대인은 마간디야가 말한 “사유”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유”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쉽게 넘어간다. 그렇게 옛 경전의 세계를 매몰시키면서 현대인의 얄팍한 사고체계로 경전을 파훼한다. 참으로 이보다 유치한 농담이 없을 지경이지만, 어쩌랴, 이것이 인간의 유구한 일상이자 역사인 것을!

하지만 불교를 배우는 학인이라면, 우리의 상식적 사고를 철저히 의문시해야 한다. 인간이 대면하는 모든 대상은 인간의 감각기관과 짝을 이루어 출현한 대상물이지만, 우리는 흔히 그 대상물을 우선 앞에 두고 이후에 그 대상물에 대응하는 정신적 과정을 “사유”라고 본다. 그리고 그 “사유”는 감각기관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서양철학의 기본 인식론, 아니 무문범부의 상식적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감각기관(根)ㆍ감각대상(境)”의 짝을 말하며, 그 짝에 개입하는 “식識”을 말한다. 그 셋이 화합하여 이 몸을 가진 자에게 접촉(觸)되면, 그 데이터가 유불리ㆍ호오의 필터(受)를 거쳐 상想이 탄생하며, 마침내 “상想—사유思惟—심尋(vitakka)—희론戱論—명명命名”이라는 인식과 언어의 흐름이 굽이친다. 한마디로, 불교에서 말하는 “사유”는 언어를 만드는 것이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유”는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언어 없는 사유를 “볼” 수 있는가? 언어 없는 사유를 보지 못하는 우리는, 혹시 똥과 오줌으로 가득한 언어로 유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라는 것이 <마간디야 경>의 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유”라 함은, 경전에서 말하는 사유가 전혀 아니라, 똥과 오줌으로 가득한 언어유희인 것이다.

마간디야는 현대인과 달리 언어유희 이전, 언어 이전의 “사유”를 알고는 있지만, 사유에서 언어로 굽이쳐 흐르는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공부인이다. 마간디야는 “사유된 것들”을 취함으로써, 즉 사유와 어행語行을 거쳐 법을 실체화함으로써, 마침내 견해ㆍ생활ㆍ존재를 묻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유된 것들”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취하지 않음으로써, 견해ㆍ생활ㆍ존재라는 똥과 오줌으로 가득한 것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신다. 언어와 견해의 구조 속에서 되풀이되는 바를 단번에 간파하고 취하지 않음으로써, “안의 평온”을 보신다. 칼을 뽑지도 않고 베어버리는 셈이다.

마간디야는 언어화ㆍ존재화ㆍ실체화의 한 시작점인 “사유”는 알고 있으나, 그 “사유” 이전은 알지 못한다. “사유” 이전으로 거슬러갈 수 없는 그는 그래서, 견해ㆍ생활ㆍ존재에 대한 답을 얻지 않고는 “안의 평온”을 얻을 수 없다고 본다. “안의 평온”조차도 그에게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안의 평온”이라는 ‘갈증과 싫증’, “안의 평온”이라는 견해, “안의 평온”이라는 음욕.

839“견해에 의한, 들음에 의한, 앎에 의한,
계금戒禁에 의한 청정을 [모니牟尼는] 말하지 않습니다.
견해 아님에 의한, 들음 아님에 의한, 앎 아님에 의한,
계戒 아님에 의한, 금禁 아님에 의한 청정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버리고서 취하지 않고서
평온한 자로서 의지하지 않고서 유有를 바라지 않습니다.”

840“참으로 견해에 의한, 들음에 의한, 앎에 의한,
계금에 의한 청정을 말하지 않는다면,
견해 아님에 의한, 들음 아님에 의한, 앎 아님에 의한,
계戒 아님에 의한, 금禁 아님에 의한 청정도 말하지 않는다면,
다만 무지몽매한 법에 불과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견해에 의해 청정으로 돌아갑니다.”

부처님은 권력자의 터치에 의해 전도된 “안의 평온”의 존재성을 흩어버리기 위해 “청정”이라는 대체어를 등장시켜, “견해ㆍ들음ㆍ앎ㆍ계금에 의한 청정”도 부정하고 “견해 아님ㆍ들음 아님ㆍ앎 아님ㆍ계금 아님에 의한 청정”도 부정하신다. 그러나 마간디야는 부처님의 답에도 불구하고 “안의 평온”과 “청정”에 이를 수는 없었고, “어떤 이들은 견해에 의해 청정으로 돌아간다”(840)는 사유의 아름다움, 어행語行의 아름다움, 여인의 아름다움, 도무지 떠나보낼 수 없는 “탄하와 아라티와 라가”의 아름다움을 염원한다. 갈증ㆍ싫증의 반전극, 이 세상 아름다움에 물든 그는, 부처님의 “무지몽매한 법”을 버리고 “견해에 의한 청정”의 질곡 같은 중독의 길을 간다. 그의 권력의지는 인간 비극의 처절한 미화이다.

841“당신은 견해를 의지하고서 묻고 있으니
사로잡힌 것들에 빠져 몽매함에 이른 것이요,
이로써 약간의 상想조차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와 같이 무지몽매함에 소진되고 있습니다.

마간디야는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끝내 “견해”에 의지하고, 끝내 “사로잡힌 것들”에 중첩적으로 사로잡힌다. 그는 “사유” 이전의 “약간의 상想”조차도 보지 못한다. 그러니 “나”라는 좌표를 기준으로 “같은 자”, “나은 자”, “못한 자”라는 가늠이 탄생하는 순간도 보지 못한다. 그 좌표를 기준으로 “진리”와 “거짓”과 사물들이 탄생하는 창조의 순간도 보지 못한다. 내가 데미우르고스가 되어 이 세간을 창조한 것이지만, 이 세간의 기원이 망각되고 나는 (나의) 이 세간을 의지하여 “진리”와 “거짓”의 예술가가 된다. 언어와 논쟁과 다툼은 이 세간의 황홀한 채색이다. 이 채색과 이 예술작품이 훼손된다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의 멸실이며, 나의 세간의 종말이다. — 마간디야의 존재는 이렇게 타오른다, 이 몸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나,

844“집을 버리고 거처를 좇지 않는 자,
마을에서 친교를 맺지 않는 모니牟尼,
욕락欲樂들이 텅 비어 바라는 바가 없는 자,
그가 어찌 사람들과 더불어 쟁론하겠습니까?

845“무언가로부터 떨어져 세간을 유행하는 용龍이라면,
바로 그 무언가를 취하지 않고서 말할 것입니다.
마치 수련과 가시연과 어리연이
물과 진흙에 묻지 않듯이,
모니牟尼는 말이 평온한 자, 움켜쥠이 없는 자,
욕락들과 세간에 묻지 않습니다.

바짝 불타오르는 마간디야의 존재 앞에, “욕락들이 텅 빈 자”가 등장한다. “집”과 “마을”과 “욕락들”은 동의어이다. 욕락들은 오욕락인 바, 이를테면 “눈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色들”이다. 욕락들은 눈ㆍ코ㆍ귀ㆍ혀ㆍ몸으로 대대對對하는 모든 것에 대한 호오라고 하겠으니, 인간의 인식ㆍ감정ㆍ존재의 얼개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모니牟尼”는 그것들을 버리고, 그것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것들이 텅 비어 바라는 바가 없다. 그는 “상想과 사유”를 본 자이므로, “상想과 사유와 견해”의 설계에 의해 건축된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것들”, 즉 욕락들을 떠난다.

그는 욕락들에서 떨어져 세간을 유행하는 자, 용이다. 욕락들에서 떨어져 세간을 유행하는 용이라면, 욕락들을 취하지 않고서 말할 것이다. “눈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색色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버리고 떠난 “용”이라면, 그는 그 색들을 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상想”과 “사유”를 간파함으로써 그것을 취하지 않아 그런 색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니牟尼에게는 “눈에 의해 식별된 색色들”만 있을 뿐, “눈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色들”은 없다. 범부도 색을 보고 모니도 색을 보지만, 그 색은 같은 것이 아니다. 범부의 색이 오욕락이라는 총천연색 세간이라면, 모니의 색은 색이 없는 색, 투명한 색, 물에 비친 영상이다. 그리하여 모니는 “수련과 가시연과 어리연이/ 물과 진흙에 묻지 않듯이”, 이 세간을 유행하되 “욕락들과 세간에 묻지 않는다”. 이것은 세간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간 속에서 세간을 투과하는 것, 세간 속에서 맑고 투명하게 이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탈속脫俗이며, 이속離俗이다. 모니는 세속을 등진 바 없지만, 세속은 모니가 등졌다 한다. 모니는 움직인 바 없지만, 세속은 모니더러 멈추라 한다. 이것이 모니와 권력자의 영원한 대치구조이다.

“상想”과 “사유”와 “견해”를 취하는 권력자는 그것들과 한몸으로 뒹굴며 나라는 존재를 부풀린다. 나의 언어는 나이며, 나의 생각은 나이며, 나의 견해는 나이며, 나의 호오는 나이며, 나의 감정은 나이며, 나의 시비ㆍ판단은 나이며, 나의 생활은 나이며, 나의 존재는 나이므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훼손되면 심각한 분노나 좌절에 휩싸인다. 그것이 그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는 “견해나 지각”의 두터움을 더욱 배가하며 “‘나’라는 기준”으로 끝없이 하강한다. 그는 “만慢에 이른 자”, 즉 “‘나’라는 기준”에 갇힌 존재, 하나의 세간이다. 그는 행위(“업”)와 언어(“들음”)에 끝없이 끌려가며 “‘나’라는 동굴”, “주처住處”에 웅거한다. 그리고 그 웅거의 힘으로 사사건건 옥신각신 싸우며 세간을 유행한다. 이것은 속박과 소진의 유행, 자기존재의 프로젝트를 위한 끝없는 갈증/싫증의 길이다. 수많은 왕들이 구했던 여인을 향한 역정인 것이다.

847“상想에서 이탐離貪한 자에게는 속박들이 없으며,
혜해탈慧解脫한 자에게는 어리석음(癡)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想과 견해를 취한 자들은
옥신각신 싸우면서 세간을 유행합니다.”

마지막 사구게는 “상想에서 이탐한 자(saññāviratta)”, “혜해탈한 자(paññāvimutta)”라는 두 낱말로, 무문범부와 마간디야와 같은 공부인의 존재방식, “여인을 구하는 왕들”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이 짧은 시구에 세간 전체를 일격에 무너뜨리는 금강저가 비장되어 있는 것이 경전이니, 누구든 쉬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또한 경전이다. 다만, 경전의 세계에 비하면 우리의 사고, 우리의 철학이라는 게 형편없이 경박하고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함을 아는 자라면, 약간의 접근을 허락할 것이다. <마간디야 경>은 “약간의 상想”이라도 보는 자, 다문제자多聞弟子, 궁극적으로는 “상想에서 이탐한 자”, “상想에 물들지 않은 자”를 위한 경이며, “상想과 견해를 취하는” 무문범부無聞凡夫나 오늘날의 다독범부多讀凡夫를 위한 접근로는 전혀 없다.

“무언가를 떠난 자, 그 무언가를 취하지 않고 말하는 법” — <마간디야 경>(Snp 4.9)”에 대한 2개의 댓글

  • 감사합니다.

    LYH
  • 감사합니다.

    PJH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