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애진경大愛盡經 (MN 3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밧티, 제타바나 아나타핀디카 정사精舍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사티’라는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了知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流轉하고 윤회輪迴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견惡見[1]‘악견’에서의 ‘見’과 ‘청정한 見’에서의 ‘見’은 팔리어가 다르다. 전자의 ‘見(diṭṭhigataṃ)’은 ‘見에 빠져들어 있음’을 뜻하며, 후자의 ‘견(diṭṭhi)’은 정혜에 의하여 ‘보임’, 즉 수동태의 의미를 갖는다.이 일어났다. 비구대중은 이를 들었다, “정말로 사티라는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견이 일어났다”라고.

그러자 비구들은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당신에게, 벗 사티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견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벗들이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그런 악견에서 떠나도록 권유하고 설득하고 타일렀다. “이와 같이, 벗 사티여,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실로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수많은 법문法門으로, 벗 사티여, 세존께서는 緣起된 識을 말씀하셨으며, 어딘가의 緣을 위해 識의 생겨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 권유하고 설득하고 타이르는데도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바로 그 악견을 완강하게 붙들고 고집하면서 표명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벗들이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라고.

비구들은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을 그런 악견에서 떠나게 하지 못한 까닭에,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세존께 정례頂禮하고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아서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사티라는 비구는, 대덕大德이시여, 어부의 아들은,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저희들은, 대덕이시여,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나아가서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당신에게, 벗 사티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견이 일어났습니까?’ 이와 같이 말하자, 대덕이시여,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저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벗들이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라고. 그러자 저희들은, 대덕이시여,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이 그런 악견에서 떠나도록 권유하고 설득하고 타일렀습니다, ‘이와 같이, 벗 사티여,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실로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수많은 법문으로, 벗 사티여, 세존께서는 緣起된 識을 말씀하셨으며, 어딘가의 緣을 위해 識의 생겨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라고. 이와 같이, 대덕이시여, 저희들이 권유하고 설득하고 타이르는데도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바로 그 악견을 완강하게 붙들고 고집하면서 표명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벗들이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라고. 저희들은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을 그런 악견에서 떠나게 하지 못한 까닭에, 이제 이렇게 세존께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한 비구를 부르셨다. “오너라 그대, 비구여, 나의 말을 전하여 사티 비구를 부르라, ‘스승께서 당신을, 벗 사티여, 부르십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께 답하고서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당신을, 벗 사티여, 부르십니다.” “알겠습니다, 벗이여”라고,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그 비구에게 답하고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세존께 정례하고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에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그대는, 사티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내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견이 일어났는가?”

“바로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은, 제가 요지하는 바로는, 바로 이 識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사티여, 그 識인가?”

“그것은,[2]‘識(viññāṇa)’은 중성명사인데, 남성 관계대명사 ‘yo’로 받았다. 이는 관계문 안의 주어가 남성명사인 까닭에 지시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관계대명사가 중성에서 남성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팔리어에서는 관계대명사가 지시대명사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yvāyaṃ’은 ‘yo ayaṃ’이다. 대덕이시여, 이 말하는 자, 이 지각(受)할 자로서 이런저런 선악업善惡業들의 과보果報를 경험합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가리킨 법을 이와 같이 요지하고 있다는 말이냐? 실로 수많은 법문으로,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緣起된 識을 말하였으며, 어딘가의 緣을 위해 識의 생겨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더구나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아, 스스로 잘못 사로잡힘으로써 이렇게 우리까지 비방하고 스스로도 망치고 많은 허물을 짓는구나. 실로 이것이 그대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랫동안 머물러 무익한 괴로움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이러고도 이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이 이 법률에 관심이 있다 하겠는가?”

“실로 어찌 그렇겠습니까, 대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말하자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침묵과 당혹에 빠져 풀이 죽고 고개를 떨군 채 침울하고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 침묵과 당혹에 빠져 풀이 죽고 고개를 떨군 채 침울하고 망연하게 앉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아, 자신의 악견과 함께하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3]‘드러나다’로 옮긴 팔리어는 ‘paññāyissasi’이다. 원어의 뜻을 살리자면, (비구들의) 慧에 의하여 사티 비구가 악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나는 비구들에게 질문할 것이니라.”

▣ 識의 생겨남

그리고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그대들도, 비구들이여, 내가 가리킨 법을,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이 스스로 잘못 사로잡힘으로써 이렇게 우리까지 비방하고 스스로도 망치고 많은 허물을 짓듯이, 이와 같이 요지하고 있는가?”

“실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실로 여러 법문으로,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緣起된 識을 말씀하셨으며, 어딘가의 緣을 위해 識의 생겨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훌륭하도다, 비구들이여. 훌륭하게도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내가 가리킨 법을 이와 같이 요지하고 있다. 실로 여러 법문으로 그대들을 위해, 비구들이여, 나는 緣起된 識을 말하였으며, 다른 곳의 緣을 위해 識의 생겨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스스로 잘못 사로잡힘으로써 이렇게 우리까지 비방하고 스스로도 망치고 많은 허물을 짓는다. 실로 이것이 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머물러 무익한 괴로움을 일으킬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연緣을 연緣하여 識이 일어나면 바로 그 연을 가지고 무슨 識이라고 헤아린다. 눈과 色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眼識이라고 헤아리며, 귀와 소리를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耳識이라고 헤아리며, 코와 냄새를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鼻識이라고 헤아리며, 혀와 맛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舌識이라고 헤아리며, 몸과 촉감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身識이라고 헤아리며, 意와 法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意識이라고 헤아린다.

“이는 마치, 비구들이여, 어떤 연緣을 연하여 불이 붙으면 바로 그 연緣을 가지고 헤아리는 것과도 같다. 장작을 연하여 불이 붙으면 장작불이라고 헤아리며, 잔가지를 연하여 불이 붙으면 잔가지불이라고 헤아리며, 검불을 연하여 불이 붙으면 검불불이라고 헤아리며, 쇠똥을 연하여 불이 붙으면 쇠똥불이라고 헤아리며, 쓰레기를 연하여 불이 붙으면 쓰레기불이라고 헤아린다.

“바로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어떤 연緣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바로 그 연緣을 가지고 무슨 識이라고 헤아린다. 눈과 色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眼識이라고 헤아리며, 귀와 소리를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耳識이라고 헤아리며, 코와 냄새를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鼻識이라고 헤아리며, 혀와 맛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舌識이라고 헤아리며, 몸과 촉감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身識이라고 헤아리며, 意와 法을 연하여 識이 일어나면 意識이라고 헤아린다.

▣ “이것”과 청청한 見

“이것[4]‘이것’이라 함은, 바로 앞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읽자면, 六識이 일어난 이후의 연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세존의 설법 내지 언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은 ‘有인 것’[5]‘有인 것(bhūtaṃ)’은 12지연기의 ‘有(bhava)’로부터 비롯하여 성립하는 것들, 즉 ‘有ㆍ生ㆍ老死ㆍ憂悲苦惱’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라고, 비구들이여, 보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생겨남이라고, 비구들이여, 보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사라짐(食滅)으로써 有인 것은 사라지는 法(滅法)이라고, 비구들이여, 보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것은 ‘有인 것’이 아닐 것이라고, 비구들이여, 미혹함으로써 의혹이 생기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생겨남이 아닐 것이라고, 비구들이여, 미혹함으로써 의혹이 생기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有인 것이 사라지는 법은 아닐 것이라고, 비구들이여, 미혹함으로써 의혹이 생기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것은 有인 것임’을, 비구들이여, 여실하게 정혜正慧로 봄으로써, 의혹이라는 것이 버려지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생겨남임’을, 비구들이여, 여실하게 정혜로 봄으로써, 의혹이라는 것이 버려지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有인 것은 사라지는 법임’을, 비구들이여, 여실하게 정혜로 봄으로써, 의혹이라는 것이 버려지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이것은 有인 것임’이라는,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에도, 여기에서 그대들은 의혹이 없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생겨남임’이라는,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에도, 여기에서 그대들은 의혹이 없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有인 것은 사라지는 법임’이라는,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에도, 여기에서 그대들은 의혹이 없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 ‘이것은 有인 것이다’가, 비구들이여, 여실하게 정혜로 잘 보이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생겨남이다’가, 비구들이여, 여실하게 정혜로 잘 보이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有인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가, 비구들이여, 여실하게 정혜로 잘 보이는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만약 그대들이,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완전히 청정하고 이와 같이 완전히 깨끗한 이 보임(見)[6]서두의 ‘악견’과 관련한 주석을 참고할 것을 애착하고 좋아하고 쥐고 품는다면,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내가 가리킨 법 역시 뗏목과 같은 것으로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요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만약 그대들이,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완전히 청정하고 이와 같이 완전히 깨끗한 이 보임(見)을 애착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쥐지 않고 품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내가 가리킨 법 역시 뗏목과 같은 것으로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요지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 苦蘊의 集과 “지금 여기”

“비구들이여, 이 네 食이 있으니, ‘有인 것’인 것들을 존립시키거나 ‘有인 것’이 될 것들을 붙든다.[7]이 ‘붙든다(anuggaha)’와 바로 앞의 뗏목 비유에서의 ‘붙들기(gahaṇa)’는 ‘gaṇhāti, grah’에서 파생한 동근어이다. 설법의 흐름상, “내가 가리킨 법”을 붙드는 것이나 “有인 것이 될 것들”을 붙드는 것이나 양자 모두 “食”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연결을 더 확대하자면, 食에 의하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을 붙들면, 그것은 곧 “有인 것”이 된다. 어떤 것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이의 食이요, 觸이 둘이요, 意思가 셋이요, 識이 넷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네 食은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이 네 食은 愛를 밑바탕으로 愛로부터 일어나고 愛로부터 생겨나고 愛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愛는,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愛는 受를 밑바탕으로 受로부터 일어나고 受로부터 생겨나고 受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受는,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受는 觸을 밑바탕으로 觸으로부터 일어나고 觸으로부터 생겨나고 觸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觸은,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觸은 六處를 밑바탕으로 六處로부터 생겨나고 六處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六處는,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六處는 名色을 밑바탕으로 名色으로부터 일어나고 名色으로부터 생겨나고 名色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名色은,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名色은 識을 밑바탕으로 識으로부터 일어나고 識으로부터 생겨나고 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識은,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識은 行을 밑바탕으로 行으로부터 일어나고 行으로부터 생겨나고 行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行은, 비구들이여, 무엇을 밑바탕으로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行은 無名을 밑바탕으로 無名으로부터 일어나고 無名으로부터 생겨나고 無名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렇듯, 비구들이여, 無名의 緣으로부터 行이, 行의 緣으로부터 識이, 識의 緣으로부터 名色이, 名色의 緣으로부터 六處가, 六處의 緣으로부터 觸이, 觸의 緣으로부터 受가, 受의 緣으로부터 愛가, 愛의 緣으로부터 取가, 取의 緣으로부터 有가, 有의 緣으로부터 生이, 生의 緣으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생겨나느니라.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生의 緣으로부터 老死가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生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老死가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生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老死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生의 緣으로부터 老死가 있습니다.”

“有의 緣으로부터 生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有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生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有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生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有의 緣으로부터 生이 있습니다.”

“取의 緣으로부터 有가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取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有가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取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有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取의 緣으로부터 有가 있습니다.”

“愛의 緣으로부터 取가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愛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取가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愛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取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정말로 愛의 緣으로부터 取가 있습니다.”

“受의 緣으로부터 愛가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受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愛가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受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愛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受의 緣으로부터 愛가 있습니다.”

“觸의 緣으로부터 受가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觸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受가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觸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受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觸의 緣으로부터 受가 있습니다.”

“六處의 緣으로부터 觸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六處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觸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六處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觸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정말로 六處의 緣으로부터 觸이 있습니다.”

“名色의 緣으로부터 六處가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名色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六處가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名色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六處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名色의 緣으로부터 六處가 있습니다.”

“識의 緣으로부터 名色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識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名色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識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名色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識의 緣으로부터 名色이 있습니다.”

“行의 緣으로부터 名色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行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名色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行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名色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行의 緣으로부터 名色이 있습니다.”

“無名의 緣으로부터 行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無名의 緣으로부터, 비구들이여, 行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無名의 緣으로부터, 대덕이시여, 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無名의 緣으로부터 行이 있습니다.”

“훌륭하도다, 비구들이여. 이렇듯, 비구들이여, 그대들 역시 이와 같이 말하고, 나 역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으며, 이것의 일어남으로부터 저것이 일어나나니, 無名의 緣으로부터 行이, 行의 緣으로부터 識이, 識의 緣으로부터 名色이, 名色의 緣으로부터 六處가, 六處의 緣으로부터 觸이, 觸의 緣으로부터 受가, 受의 緣으로부터 愛가, 愛의 緣으로부터 取가, 取의 緣으로부터 有가, 有의 緣으로부터 生이, 生의 緣으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생겨나느니라.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 苦蘊의 滅과 “지금 여기”

“그렇지만 이 無名의 남김없는 離貪ㆍ滅로부터 行의 滅이 있으며, 行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 있으며, 識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이 있으며, 名色의 滅로부터 六處의 滅이 있으며, 六處의 滅로부터 觸의 滅이 있으며, 觸의 滅로부터 受의 滅이 있으며, 受의 滅로부터 愛의 滅이 있으며, 愛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하느니라.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生의 滅로부터 老死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生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老死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生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老死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生의 滅로부터 老死의 滅이 있습니다.”[8]이 대목에서 ‘no ettha’(지금 여기에서)를 ‘우리 여기에서’로 옮긴 기존 번역문들은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우팔리 경”(MN56), “칼라마 경”(AN 3.66)에서 동일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우팔리 존자가 세존을 방문해서 먼저 방문했던 니간다 디가타팟시의 이야기를 가지고 답하자, 세존께서 “만약 당신이, 장자여, 진실로 저편에 이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겠다면, 지금 여기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합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지금 여기에서”라 함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고, 지금 세존과 문답하는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알려지고 스스로에게 보이고 스스로에게 밝혀지는 바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삼엄한 문답인 셈이다.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有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生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有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生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습니다.”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取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生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取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有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습니다.”

“愛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愛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取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愛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取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愛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습니다.”

“受의 滅로부터 愛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受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愛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受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愛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受의 滅로부터 愛의 滅이 있습니다.”

“觸의 滅로부터 受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觸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受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觸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受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觸의 滅로부터 受의 滅이 있습니다.”

“六處의 滅로부터 觸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六處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觸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六處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觸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六處의 滅로부터 觸의 滅이 있습니다.”

“名色의 滅로부터 六處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名色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六處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名色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六處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名色의 滅로부터 六處의 滅이 있습니다.”

“識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識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名色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識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名色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識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이 있습니다.”

“行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行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識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行의 滅로부터, 대덕이시여, 識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行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 있습니다.”

“無名의 滅로부터 行의 滅이 있다고, 이렇게 또한 나는 말하였다. 지금 정말로 無名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識의 滅이 있는가, 아니면 여기에서 어떠한가?”

“無名의 滅로부터, 비구들이여, 行의 滅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렇습니다, 無名의 滅로부터 行의 滅이 있습니다.”

“훌륭하도다, 비구들이여. 이렇듯, 비구들이여, 그대들 역시 이와 같이 말하고, 나 역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지 않음에 저것이 있지 않으며, 이것의 滅로부터 저것이 滅하나니, 無名의 滅로부터 行의 滅이 있으며, 行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 있으며, 識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이 있으며, 名色의 滅로부터 六處의 滅이 있으며, 六處의 滅로부터 觸의 滅이 있으며, 觸의 滅로부터 受의 滅이 있으며, 受의 滅로부터 愛의 滅이 있으며, 愛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하느니라.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如是知見)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우리는 과거세에 정말 존재했을까, 과거세에 정말 존재하지 않았을까, 과거세에 정말 무엇이었을까, 과거세에 정말 어떠했을까? 우리는 과거세에 정말 무엇이었다가 또 무엇이 되었을까?’라고, 과거의 끝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우리는 미래세에 정말 존재할까, 미래세에 정말 존재하지 않을까, 미래세에 정말 무엇이 될까, 미래세에 정말 어떻게 될까? 우리는 미래세에 정말 무엇이 되었다가 또 무엇이 될까?’라고, 미래의 끝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나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가, 정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무엇인가, 정말 어떠한가? 나는 정말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존재일까?’라고, 현재세를 향해 안으로 의문을 좇는 자[9]‘의문을 좇는 자’로 옮긴 팔리어 ‘kathaṃ-kathin’은, 직역하자면, ‘what/how로 시작되는 물음 내지 그 물음에 답을 말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경에 언급된 바를 들어 얘기하자면, “나는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될까?/ 무엇인가?” “나는 어떠했을까?/ 어떠할까?/ 어떠한가?”하는 물음들을 던지고 답하고 논하고 궁구하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말이다.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우리는 스승을 공경한다. 스승을 공경하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말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사문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분명코 사문[의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이와 같이 말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누군가를 스승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진정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여러 사문ㆍ바라문의 금계禁戒ㆍ의식儀式ㆍ길상吉祥으로 정녕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실로, 비구들이여, 그대들 스스로에게 알려지고 스스로에게 보이고 스스로에게 밝혀진 것, 바로 그것을 그대들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대들은, 비구들이여, 훌륭하게 인도되었도다, 나에 의하여, 비구들이여, 드러나 보이는 이 법에 의하여,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와서 보라는 것, 인도하는 것, 분별자分別者[10]‘분별자(viññu)’와 ‘識(viññāṇa)’은 ‘vi-√jña’에서 파생한 동근어이지만, 사뭇 다른 의미층위에서 사용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viññu’를 ‘智者’로 옮겨서 識과 의미층위가 다름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viññu’가 가진 ‘의혹의 길과 여시지견如是知見의 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의미를 놓치는 아쉬움이 있다. 더구나 후대 유식학에 의해 ‘분별지(vijñāna)’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더욱 고심이 되는 번역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좇는 어언語言ㆍ생각에 미혹된 의혹의 길”과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알려지고 스스로에게 보이고 스스로에게 밝혀진 것을 드러내는 여시지견의 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분별자’라는 번역어도 고려해볼 만하다.들에 의하여 낱낱이 밝혀지는 것에 의하여! ‘이 법은, 비구들이여, 드러나 보이는 것,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와서 보라는 것, 인도하는 것, 분별자들에 의하여 낱낱이 밝혀지는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연하여 말한 것이니라.

▣ 생명의 탄생과 성장

“더 나아가, 비구들이여, 셋이 결합함으로써 입태入胎가 있다. 여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합이 있어도 어머니가 월경이 없고 간답바가 임하지 않으면, 그로 인하여 입태가 없다. 여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합이 있고 어머니가 월경이 있어도 간답바가 임하지 않으면, 그로 인하여 입태가 없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합이 있고 어머니가 월경이 있고 간답바가 임할 때, 이와 같이 셋이 결합함으로써 입태가 있다.

“이어서, 비구들이여, 어머니는 아홉 달 내지 열 달 동안 큰 염려와 소중한 보살핌으로 뱃속에 잉태한다. 이어서, 비구들이여, 어머니는 아홉 달 내지 열 달이 지나 큰 염려와 소중한 보살핌으로 출산을 한다. 이어서 갓 태어난 생명을 자신의 피로 기른다. 실로 그 피는, 비구들이여, 성자의 율律에서는 곧 어머니의 젖인 것이다.

▣ 오욕락五欲樂

“그 생명은, 비구들이여, 아이로 성장하고 根들이 발달함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를 하며 논다. 가령, 땅따먹기, 자치기, 말타기, 팔랑개비, 야자수잎 재기, 수레놀이, 활놀이 등이다.[11]고대 인도에서의 어린아이들의 놀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증이 어렵다. 번역어는 순전히 팔리어 사전과 주관적인 추정에 근거한 것으로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 생명은, 비구들이여, 아이로 성장하고 根들이 발달함에 따라 오욕락에 내맡기고 [오욕락의] 일부가 되어 [오욕락을] 섬기나니, 오욕락이란, 눈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色들, 귀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소리들, 코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냄새들, 혀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맛들, 몸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촉감들이다.

▣ 苦蘊의 集

“그는 눈으로 色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色은 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色은 꺼리며, 身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 마음이 한정된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지만,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好惡에 들어서서, 낙수樂受든 고수苦受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한다. 그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하는 그에게 즐거움이 일어난다.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取이며, 그것의 取를 연하여 有가, 有를 연하여 生이, 生을 연하여 老死ㆍ憂悲苦惱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그는 귀로 소리를 듣고서 사랑스러운 소리는 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소리는 꺼리며, 身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 마음이 한정된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멸하지만,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에 들어서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한다. 그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하는 그에게 즐거움이 일어난다.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取이며, 그것의 取를 연하여 有가, 有를 연하여 生이, 生을 연하여 노사ㆍ우비고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그는 코로 냄새를 맡고서 사랑스러운 냄새는 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냄새는 꺼리며, 身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 마음이 한정된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멸하지만,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에 들어서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한다. 그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하는 그에게 즐거움이 일어난다.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取이며, 그것의 取를 연하여 有가, 有를 연하여 生이, 生을 연하여 노사ㆍ우비고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그는 혀로 맛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맛은 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맛은 꺼리며, 身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 마음이 한정된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멸하지만,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에 들어서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한다. 그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하는 그에게 즐거움이 일어난다.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取이며, 그것의 取를 연하여 有가, 有를 연하여 生이, 生을 연하여 노사ㆍ우비고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그는 몸으로 촉감을 접하고서 사랑스러운 촉감은 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촉감은 꺼리며, 身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 마음이 한정된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멸하지만,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에 들어서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한다. 그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하는 그에게 즐거움이 일어난다.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取이며, 그것의 取를 연하여 有가, 有를 연하여 生이, 生을 연하여 노사ㆍ우비고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그는 意로 法을 식별하고서 사랑스러운 法은 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法은 꺼리며, 身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 마음이 한정된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멸하지만,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에 들어서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한다. 그 受를 즐기고 환대하고 탐착하는 그에게 즐거움이 일어난다.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取이며, 그것의 取를 연하여 有가, 有를 연하여 生이, 生을 연하여 노사ㆍ우비고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集이 있느니라.

▣ 여래의 출세出世

“여기, 비구들이여,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나니, 그는 아라한, 정등각,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佛, 세존이다. 그는 스스로 證智를 실현하고서, 신ㆍ마라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을 망라한 이 세간과 천ㆍ인天人을 망라한 인류를 밝힌다. 그는 법을 가리킨다. 그 법은 처음도 미묘하고 중간도 미묘하고 끝도 미묘하며, 義가 있고 文이 있다.[12]‘文’으로 번역한 팔리어 ‘vyañjana’의 어원을 살피자면, 칠이나 바름을 통해 구분ㆍ구별을 짓는 것을 말한다. 문법에서는 ‘소리'(=모음)를 분절한다는 의미에서 ‘자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다른 것과 구분되는 ‘특성ㆍ구별’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의미의 ‘표현’이라는 뜻은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에서도 ‘文’은 지금은 보통 ‘문자’라는 의미로 통용되지만, 원래 ‘文身’이라는 낱말에서 보이듯 몸에 칠하거나 새김으로써 그 사람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義'(attha)는 기본적으로 ‘욕계'(kāma)에서 ‘법계'(dharmadhātu)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므로, ‘의미’라는 번역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은 의미와 표현이 있다”는 문장으로는,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은 法界로 인도하는 것이며, (욕계로 돌아가고 마는 여타 가르침과는 다른) 변별성이 있다”는 의미를 드러내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는 오롯이 원만하고 청정한 梵行을 비춘다.

▣ 출가

“그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 혹은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그는 그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신심을 갖는다. 그는 신심을 구족俱足한 자가 되어 이렇게 깨어난다, ‘번다한 재가생활이 티끌이 앉은 곳이라면, 출가는 트인 허공이다. 집에 거주하면서 위없이 원만하고 위없이 청정하고 소라처럼 말끔한 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袈裟를 걸치고 집을 떠나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리라’라고. 훗날 그는 미미한 재산이든 엄청난 재산이든 버리고, 미미한 일가친척이든 엄청난 일가친척이든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걸치고 집을 떠나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 성스러운 戒蘊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비구들의 수습생활에 들어서서 살생을 그만두고서 살생을 멀리한 자 된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알고 연민을 알고 일체생명의 피해를 가엾이 여기며 지낸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함(偸盜)을 그만두고서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함을 멀리한 자 된다. 주어진 것만을 취하고 바라며, 떳떳하고 청백하게 얻은 것으로 지낸다.

“범행梵行 아닌 것을 그만두고서 범행자가 된다. 멀리 떠난 자(遠離行者) 되어 행음과 풍속을 멀리한다.

“거짓말(忘語)을 그만두고서 거짓말을 멀리한 자 된다.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진실하며 정직하며 사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세간을 속이지 않는다.

“흉보는 말(兩舌)을 그만두고서 흉보는 말을 멀리한 자 된다. 이곳에서 듣고서 어딘가에 일러 이곳을 이간하지 않으며, 혹은 어딘가에서 듣고서 이곳에 일러 어딘가를 이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갈라선 자들을 융화시키고 융화된 자들을 더하고,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즐거워하고 화합이 되는 말을 하는 자 된다.

“거친 말(惡口)을 그만두고서 거친 말을 멀리한 자 된다. 부드럽고 듣기 순하고 사랑스럽고 흐뭇하고 고결하고 많은 사람에게 흡족한 말들, 그런 말을 하는 자 된다.

“실없는 빈말(綺語)을 그만두고서 실없는 빈말을 멀리한 자 된다. 알맞게 말하며(應時語) 적실하게 말하며(實語) 의에 맞게 말하며(義語) 법에 맞게 말하며(法語) 율에 맞게 말하며(律語), 연원이 있고 귀착점이 있고 義가 갖춰진, 값진 말을 적시에 말하는 자 된다.

“그는 씨앗ㆍ초목 군락의 훼손을 멀리한 자 된다. 하루 한 끼 걸식하고 밤에는 먹지 않으며 때에 어긋난 식사를 멀리한다.

“춤ㆍ노래ㆍ연주ㆍ공연의 관람을 멀리하며, 화환ㆍ향료ㆍ화장ㆍ지물持物ㆍ장식ㆍ장신구의 패용을 멀리하며, 높은 침상ㆍ큰 침상을 멀리하며, 금ㆍ은 받는 일을 멀리하며, 조리되지 않은 곡물 받는 일을 멀리하며, 조리되지 않은 고기 받는 일을 멀리하며, 여인ㆍ소녀 받는 일을 멀리하며, 여종ㆍ남종 받는 일을 멀리하며, 염소ㆍ양 받는 일을 멀리하며, 닭ㆍ돼지 받는 일을 멀리하며, 전답ㆍ토지 받는 일을 멀리하며, 사절使節로 오가는 시중을 멀리하며, 사고파는 일을 멀리하며, 저울질ㆍ됫박질ㆍ잣대질을 멀리하며, 허위ㆍ기만ㆍ사기ㆍ부정을 멀리하며, 절단ㆍ살해ㆍ포박ㆍ약탈ㆍ탈취ㆍ폭행을 멀리한다.

“그는 몸을 보호할 염의染衣와 배를 유지할 걸식乞食으로 만족한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그것만을 지니고서 간다. 마치 날개 달린 새가 어디를 날더라도 정녕코 날개만을 지니고 날듯이,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보호할 염의와 배를 유지할 걸식으로 만족하며,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그것만을 지니고서 간다.

“그는 이 성스러운 계온戒蘊을 구족俱足하여 안으로 ‘흠 없는 안락’을 경험한다.

▣ 성스러운 근수호根守護

“그는 눈으로 色을 보고서 相을 잡지 않으며 種好[13]‘種好’라고 번역한 팔리어 ‘anuvyañjana’는 어원상 ‘뒤따르는 특성ㆍ구분’을 뜻하므로, 이 맥락에서는 ‘相에 뒤따르는 가지가지 특성ㆍ구분ㆍ구별ㆍ분절ㆍ변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三十二相 八十種好’라는 용례에서도 그 뜻을 확인할 수 있다. 한역의 ‘種好’라는 번역어는, “相을 뒤따라서 호오에 의하여 가지가지 구별ㆍ분절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자 한 듯하다.를 잡지 않는다. 眼根이 수호되지 않은 채 지내면 ‘붙잡음에 의한 고뇌’ 로 말미암아 그에게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 것이므로, [眼根] 수호를 위한 걸음을 걸어 안근을 지키고 안근 수호에 다다른다.

“그는 귀로 소리를 듣고서 相을 잡지 않으며 種好를 잡지 않는다. 耳根이 수호되지 않은 채 지내면 붙잡음에 의한 고뇌로 말미암아 그에게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 것이므로, [耳根] 수호를 위한 걸음을 걸어 耳根을 지키고 耳根 수호에 다다른다.

“그는 코로 냄새를 맡고서 相을 잡지 않으며 種好를 잡지 않는다. 鼻根이 수호되지 않은 채 지내면 붙잡음에 의한 고뇌로 말미암아 그에게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 것이므로, [鼻根] 수호를 위한 걸음을 걸어 鼻根을 지키고 鼻根 수호에 다다른다.

“그는 혀로 맛을 보고서 相을 잡지 않으며 種好를 잡지 않는다. 舌根이 수호되지 않은 채 지내면 붙잡음에 의한 고뇌로 말미암아 그에게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 것이므로, [舌根] 수호를 위한 걸음을 걸어 舌根을 지키고 舌根 수호에 다다른다.

“그는 몸으로 촉감을 접하고서 相을 잡지 않으며 種好를 잡지 않는다. 身根이 수호되지 않은 채 지내면 붙잡음에 의한 고뇌로 말미암아 그에게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 것이므로, [身根] 수호를 위한 걸음을 걸어 身根을 지키고 身根 수호에 다다른다.

“그는 意로 法을 식별하고서 相을 잡지 않으며 種好를 잡지 않는다. 意根이 수호되지 않은 채 지내면 붙잡음에 의한 고뇌로 말미암아 그에게 악한 불선법들이 흘러들 것이므로, [意根] 수호를 위한 걸음을 걸어 意根을 지키고 意根 수호에 다다른다.

“그는 이 성스러운 근수호根守護를 구족하여 안으로 ‘흩어지지 않는 안락’을 경험한다.

▣ 성스러운 염ㆍ정지念正知

“그는 나갈 때 돌아올 때 알아차리면서(正知) 하는 자 되며, 시선을 둘 때 거둘 때 알아차리면서 하는 자 되며, [몸을] 당길 때 풀 때 알아차리면서 하는 자 되며, 법의ㆍ발우ㆍ윗옷을 지닐 때 알아차리면서 하는 자 되며, 먹을 때 마실 때 삼킬 때 섭취할 때 알아차리면서 하는 자 되며, 대변 볼 때 소변 볼 때 알아차리면서 하는 자 되며, 갈 때 설 때 앉을 때 누울 때 걸을 때 말할 때 침묵할 때 알아차리면서 하는 자 된다.

▣ 오개청정五蓋淸淨

“그는 이 성스러운 戒蘊을 구족하고 이 성스러운 根守護를 구족하고 이 성스러운 念ㆍ正知를 구족하여, 숲속ㆍ나무 아래ㆍ산등성이ㆍ산비탈ㆍ산굴ㆍ무덤ㆍ삼림ㆍ노지ㆍ짚단 등 외딴 곳을 눕고 앉을 곳(坐臥處)으로 삼는다.

“그는 식후 걸식에서 돌아와 앉는다,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우고 전면全面에 念을 확립하고서. 그는 ‘세간을 붙잡음’을 그만두고서 붙잡음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지내며, 붙잡음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세간에 대한] 꺼림ㆍ진에瞋恚’를 그만두고서 꺼리지 않는 마음으로 지내며, 일체생명의 이익을 위해 연민하는 자 되어 ‘꺼림ㆍ진에’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혼침ㆍ수면惛沈睡眠을 그만두고서 혼침ㆍ수면을 벗어나 지내며, 광명상光明想이 있는 자 되어 念하고 알아차리면서 혼침ㆍ수면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도거ㆍ악작掉舉惡作을 그만두고서 산란하지(掉舉) 않고 지내며, 안으로 가라앉은(寂靜) 마음이 되어 도거ㆍ악작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혹을 그만두고서 의혹을 건너 지내며, 선법들에서 의문을 좇지 않는 자 되어 의혹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14]‘오개五蓋’는 마음을 ‘덮는(蓋)’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중에서 ‘혼침ㆍ수면’과 ‘도거ㆍ악작’, ‘의혹’과 관련하여 현재 통용되고 있는 설명은 심각하게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니카야 경문은 접근하기 쉬운 것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관찰하기 쉬운 것에서 관찰하기 어려운 것으로 이끌고간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붙잡음(탐) / 꺼림(진)’보다 더 깊게 들어가야 관찰되는 것이 바로 ‘혼침ㆍ수면 / 도거ㆍ악작’이며, 그보다 더 깊게 들어가야 관찰되는 것이 ‘의혹’이라고 보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의혹 / 여시지견如是知見’의 갈림길이 관찰하기 가장 어려운, 결코 덮개로 보이지 않는 덮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을 붙드는 순간(즉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숙고하고 살피고 조사하고 그려보는 순간) 의혹의 길에 들어선 것이니, 과연 여시지견으로 이 모든 덮개가 여실하게 보이는 자는 누구일까?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조차도 붙들지 않는 자, 애착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쥐지 않고 품지 않는 자가 아닐까? —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열반경 사십권 중에서 어느 정도나 부처님의 말씀이고 어느 정도나 마라의 말인가?” 앙산이 말했다, “전부 마라의 말입니다.”

▣ 사선四禪의 구족

“그는 이 오개五蓋, 즉 慧를 약화시키는 마음의 번뇌를 그만두고서 欲樂들을 떠나고(遠離) 불선법들을 떠나, ‘尋이 있고 伺가 있는, 떠남에서 비롯한 희ㆍ락喜樂’, 初禪을 구족하고 지낸다. 더 나아가,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尋과 伺가 가라앉음으로써 안으로 고요함, 心一境, ‘尋이 없고 伺가 없는, 삼매에서 비롯한 희ㆍ락’, 第二禪을 구족하고 지낸다. 더 나아가,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희열(喜)로부터 離貪함으로써 觀하고 念하고 알아차리고 안락(樂)을 몸으로 경험하며, 성자들이 ‘觀하는 자, 念하는 자, 안락에 머무는 자(樂住者)’라고 부른 第三禪을 구족하고 지낸다. 더 나아가,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안락(樂)도 버리고 괴로움(苦)도 버림으로써, 이렇듯 먼저 쾌ㆍ불쾌가 꺼짐으로써, ‘苦樂이 없는, 觀ㆍ念에 의한 청정(捨念淸淨)’, 第四禪을 구족하고 지낸다.

▣ 苦蘊의 滅

“그는 눈으로 色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色을 탐하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은 色을 꺼리지 않으며, 身念이 이루어진 자, 마음이 한정되지 않은 자(無量心)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나니,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린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를 끊어버리고서, 낙수樂受든 고수苦受든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다. 그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滅한다.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그는 귀로 소리를 듣고서 사랑스러운 소리를 탐하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은 소리를 꺼리지 않으며, 身念이 이루어진 자, 마음이 한정되지 않은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나니,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린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를 끊어버리고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다. 그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滅한다.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그는 코로 냄새를 맡고서 사랑스러운 냄새를 탐하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은 냄새를 꺼리지 않으며, 身念이 이루어진 자, 마음이 한정되지 않은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나니,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린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를 끊어버리고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다. 그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滅한다.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그는 혀로 맛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맛을 탐하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은 맛을 꺼리지 않으며, 身念이 이루어진 자, 마음이 한정되지 않은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나니,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린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를 끊어버리고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다. 그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滅한다.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그는 몸으로 촉감을 접하고서 사랑스러운 촉감을 탐하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은 촉감을 꺼리지 않으며, 身念이 이루어진 자, 마음이 한정되지 않은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나니,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린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를 끊어버리고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다. 그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滅한다.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그는 意로 法을 식별하고서 사랑스러운 法을 탐하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은 法을 꺼리지 않으며, 身念이 이루어진 자, 마음이 한정되지 않은 자로서 지낸다. 이와 관련한 그 악한 불선법들은 심해탈ㆍ혜해탈에서 남김없이 滅하나니, 그는 이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린다. 그는 이와 같이 호ㆍ오를 끊어버리고서, 낙수든 고수든 불고불락수든 지각되는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다. 그 受를 즐기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이 滅한다. 그에게 受들에 대한 즐거움의 滅로부터 取의 滅이 있으며 取의 滅로부터 有의 滅이 있으며, 有의 滅로부터 生의 滅이 있으며, 生의 滅로부터 老死ㆍ憂悲苦惱가 滅한다. 이와 같이 온통으로 이 苦蘊의 滅이 있느니라.

▣ 애진해탈愛盡解脫[15]이 경명은 대림스님은 “갈애 멸진의 긴 경”, 전재성은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으로 옮겼으며, 고대한역은 사티 비구의 이름을 음역하여 “嗏帝經”(MA 102)이라 하였다.

“그대들, 비구들이여, 내가 간결하게 [설한] 이 애진해탈愛盡解脫을 수지受持하라. 사티 비구, 어부의 아들은 커다란 愛의 그물, 愛의 속박에 묶인 것이니라.”

이것을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에 고양된 비구들은 세존께서 설하신 말씀을 환희하였다.

* 각주   [ + ]

1. ‘악견’에서의 ‘見’과 ‘청정한 見’에서의 ‘見’은 팔리어가 다르다. 전자의 ‘見(diṭṭhigataṃ)’은 ‘見에 빠져들어 있음’을 뜻하며, 후자의 ‘견(diṭṭhi)’은 정혜에 의하여 ‘보임’, 즉 수동태의 의미를 갖는다.
2. ‘識(viññāṇa)’은 중성명사인데, 남성 관계대명사 ‘yo’로 받았다. 이는 관계문 안의 주어가 남성명사인 까닭에 지시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관계대명사가 중성에서 남성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팔리어에서는 관계대명사가 지시대명사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yvāyaṃ’은 ‘yo ayaṃ’이다.
3. ‘드러나다’로 옮긴 팔리어는 ‘paññāyissasi’이다. 원어의 뜻을 살리자면, (비구들의) 慧에 의하여 사티 비구가 악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4. ‘이것’이라 함은, 바로 앞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읽자면, 六識이 일어난 이후의 연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세존의 설법 내지 언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5. ‘有인 것(bhūtaṃ)’은 12지연기의 ‘有(bhava)’로부터 비롯하여 성립하는 것들, 즉 ‘有ㆍ生ㆍ老死ㆍ憂悲苦惱’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 서두의 ‘악견’과 관련한 주석을 참고할 것
7. 이 ‘붙든다(anuggaha)’와 바로 앞의 뗏목 비유에서의 ‘붙들기(gahaṇa)’는 ‘gaṇhāti, grah’에서 파생한 동근어이다. 설법의 흐름상, “내가 가리킨 법”을 붙드는 것이나 “有인 것이 될 것들”을 붙드는 것이나 양자 모두 “食”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연결을 더 확대하자면, 食에 의하여 “세존께서 가리키신 법”을 붙들면, 그것은 곧 “有인 것”이 된다.
8. 이 대목에서 ‘no ettha’(지금 여기에서)를 ‘우리 여기에서’로 옮긴 기존 번역문들은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우팔리 경”(MN56), “칼라마 경”(AN 3.66)에서 동일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우팔리 존자가 세존을 방문해서 먼저 방문했던 니간다 디가타팟시의 이야기를 가지고 답하자, 세존께서 “만약 당신이, 장자여, 진실로 저편에 이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겠다면, 지금 여기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합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지금 여기에서”라 함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고, 지금 세존과 문답하는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알려지고 스스로에게 보이고 스스로에게 밝혀지는 바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삼엄한 문답인 셈이다.
9. ‘의문을 좇는 자’로 옮긴 팔리어 ‘kathaṃ-kathin’은, 직역하자면, ‘what/how로 시작되는 물음 내지 그 물음에 답을 말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경에 언급된 바를 들어 얘기하자면, “나는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될까?/ 무엇인가?” “나는 어떠했을까?/ 어떠할까?/ 어떠한가?”하는 물음들을 던지고 답하고 논하고 궁구하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말이다.
10. ‘분별자(viññu)’와 ‘識(viññāṇa)’은 ‘vi-√jña’에서 파생한 동근어이지만, 사뭇 다른 의미층위에서 사용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viññu’를 ‘智者’로 옮겨서 識과 의미층위가 다름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viññu’가 가진 ‘의혹의 길과 여시지견如是知見의 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의미를 놓치는 아쉬움이 있다. 더구나 후대 유식학에 의해 ‘분별지(vijñāna)’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더욱 고심이 되는 번역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을 좇는 어언語言ㆍ생각에 미혹된 의혹의 길”과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알려지고 스스로에게 보이고 스스로에게 밝혀진 것을 드러내는 여시지견의 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분별자’라는 번역어도 고려해볼 만하다.
11. 고대 인도에서의 어린아이들의 놀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증이 어렵다. 번역어는 순전히 팔리어 사전과 주관적인 추정에 근거한 것으로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
12. ‘文’으로 번역한 팔리어 ‘vyañjana’의 어원을 살피자면, 칠이나 바름을 통해 구분ㆍ구별을 짓는 것을 말한다. 문법에서는 ‘소리'(=모음)를 분절한다는 의미에서 ‘자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다른 것과 구분되는 ‘특성ㆍ구별’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의미의 ‘표현’이라는 뜻은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에서도 ‘文’은 지금은 보통 ‘문자’라는 의미로 통용되지만, 원래 ‘文身’이라는 낱말에서 보이듯 몸에 칠하거나 새김으로써 그 사람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義'(attha)는 기본적으로 ‘욕계'(kāma)에서 ‘법계'(dharmadhātu)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므로, ‘의미’라는 번역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은 의미와 표현이 있다”는 문장으로는,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은 法界로 인도하는 것이며, (욕계로 돌아가고 마는 여타 가르침과는 다른) 변별성이 있다”는 의미를 드러내기는 어렵다고 본다.
13. ‘種好’라고 번역한 팔리어 ‘anuvyañjana’는 어원상 ‘뒤따르는 특성ㆍ구분’을 뜻하므로, 이 맥락에서는 ‘相에 뒤따르는 가지가지 특성ㆍ구분ㆍ구별ㆍ분절ㆍ변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三十二相 八十種好’라는 용례에서도 그 뜻을 확인할 수 있다. 한역의 ‘種好’라는 번역어는, “相을 뒤따라서 호오에 의하여 가지가지 구별ㆍ분절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자 한 듯하다.
14. ‘오개五蓋’는 마음을 ‘덮는(蓋)’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중에서 ‘혼침ㆍ수면’과 ‘도거ㆍ악작’, ‘의혹’과 관련하여 현재 통용되고 있는 설명은 심각하게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니카야 경문은 접근하기 쉬운 것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관찰하기 쉬운 것에서 관찰하기 어려운 것으로 이끌고간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붙잡음(탐) / 꺼림(진)’보다 더 깊게 들어가야 관찰되는 것이 바로 ‘혼침ㆍ수면 / 도거ㆍ악작’이며, 그보다 더 깊게 들어가야 관찰되는 것이 ‘의혹’이라고 보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의혹 / 여시지견如是知見’의 갈림길이 관찰하기 가장 어려운, 결코 덮개로 보이지 않는 덮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을 붙드는 순간(즉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숙고하고 살피고 조사하고 그려보는 순간) 의혹의 길에 들어선 것이니, 과연 여시지견으로 이 모든 덮개가 여실하게 보이는 자는 누구일까? 세존께서 가리키신 法조차도 붙들지 않는 자, 애착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쥐지 않고 품지 않는 자가 아닐까? —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열반경 사십권 중에서 어느 정도나 부처님의 말씀이고 어느 정도나 마라의 말인가?” 앙산이 말했다, “전부 마라의 말입니다.”
15. 이 경명은 대림스님은 “갈애 멸진의 긴 경”, 전재성은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으로 옮겼으며, 고대한역은 사티 비구의 이름을 음역하여 “嗏帝經”(MA 102)이라 하였다.

대애진경大愛盡經 (MN 38)”에 대한 3개의 댓글

  • 항상 기쁜 마음으로 님의 글을 보고 또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食은 識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장아무
  • 아닙니다, 食(āhara)과 識(viññāṇa)은 다릅니다. 食은 자양분의 의미에 가깝고요, 識은 ‘식별하다’의 뜻을 갖습니다.

    경전의 내용이 어렵고 지금 당장은 이해하기 벅차더라도 한번쯤 인내하면서 음미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무려 2,500여년 전의 고대로부터 전승된 것이니까요.

    고싱가
  • 食(āhara)과 識(viññāṇa)이군요. 불법은, 교학은 참 어렵습니다.

    장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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