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대 알파고 제1국 관전기—“사람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

이세돌과 알파고 간에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 도전기 5번기가 끝났다. 알파고의 충격적 연승(1국~3국), 절박한 시점에서 거둔 이세돌의 승리(4국), 쌍방 긴박한 승부호흡(5국)을 지켜보면서, 바둑 자체가 흥미로웠던 것은 물론이고 이 대국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흥분, 여러 전문가들의 해석은 더욱 흥미로웠다.

예로부터 동북아 3국은 바둑에 대한 문화적 존중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패배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그 어느 나라보다 도전기 내내 당혹과 절망, 환희를 강도 높게 맛보았을 것이다. 바둑애호가로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감정에 휩싸이면서 5번기를 관전했다. 경이로웠고,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다. 절정의 기량을 갖춘 승부사의 심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흔치 않은 행운이 주어졌으며, 인간의 인식과 심리 구조,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바둑의 고정관념 등을 다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도 문외한이고 바둑 실력도 아마추어에 불과한데도, 관련 자료와 해설, 기사 등을 참고하여 주요 대국을 복기하면서 지난 일주일 간 눈앞에서 펼쳐진 고원의 승부를 재음미하고 싶었다.

제1국에 임하는 이세돌의 기본자세는 경적輕敵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정보는 지난 해 유럽챔피언 판후이 2단과 알파고의 5번기 대국기보가 유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경험칙상 바둑기사들은, 입단하는 것보다 입단 이후 정상급 기사로 발돋움하는 것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훨씬 어려움을 알고 있다. 비록 알파고가 판후이와의 대국 이후 수개월 동안 엄청난 학습이 가능하다한들, 최고수의 반열에 오르려면 그와 같은 양적 학습으로 메울 수 없는 비밀한 간극이 있다고 본 것이 거의 모든 바둑기사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예측한 것이 이세돌의 5-0 완승, 혹은 이세돌의 실수로 인한 4-1승 정도였다. 한 마디로, 이세돌의 지도대국이 될 것으로 보았다. 돌 가리기에서 돌 수를 맞춘 이세돌은 흑을 선택했다.

leesedol.vs.alphago
실전1보(7~23). 이세돌, 알파고를 테스트하다.

흑을 쥔 이세돌은 알파고를 테스트하는 성격의 포석(흑7)을 펼친다. 프로의 바둑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포진이다. 이에 알파고는 백8로 우상귀를 걸치고, 이세돌은 흑9로 협공한다. 알파고는 평범한 정석을 펼쳐 백16까지 나아간 다음 백18로 흑을 갈라친다. 흑이 흑19로 한 칸을 뛰자 백은 백20으로 우변을 한 번 밀고 백22로 흑 두점(9, 19)을 모자 씌웠다. 아직까지는 언뜻 피차 선악을 말하기 힘든 진행으로 보이지만, 우상귀에서 흘러나온 흑15ㆍ흑17ㆍ흑21 석점과 초반 포석의 흑7 한점이 중복되어 있다는 평이 내려진다. 이세돌의 포석 실패. “변칙 포진을 사용했는데 알파고가 우상귀에 한 칸으로 걸치자 좋은 진행이 나오기 어려웠다. 아니, 이미 걸침 당한 순간 좀 어려워졌다.”(최철한)

이때 이세돌은 상용수법의 하나로 백22에 흑23을 강하게 갖다붙였다. 이른바 기대기 전법. 여기까지 보면 이세돌이 흑7이라는 낯선 포석을 펼친 뒤 백을 유인하여 흑23으로 급전을 펼친다는 느낌이다. 그러자 알파고는 이세돌의 흑23에 대하여 모든 바둑기사들을 경악에 빠트린 일련의 수순을 진행한다.

sedol_02
실전2보(24~28). 알파고, 부분전투에서 최강

백24로 들여다보고 백26으로 세점머리를 치받고 백28로 끊는 수, 이 세 수는 하급 아마추어라면 무작정 싸우려고 할 때 금방 눈에 띄는 수순이다. 하지만 프로들에겐 단 한수라도 삐끗하면 초반에 승부가 판가름날 수순, 이후 진행될 난해한 수읽기가 완벽하게 되어 있지 않으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수순이다. 더구나 당대 최고수를 상대로 이렇게 힘겨루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 수순을 보고 이세돌의 표정은 연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후 일련의 수순에서 초반을 풀어나가는 알파고의 솜씨에 대해 국후에 “너무 놀랐다”고 했다. 대국에 임하기 전에 알파고를 경적했던 이세돌은 이 수순 이후로 시종일관 끌려가게 된다. 알파고가 부분전투에서 최강임을 입증했다.

sedol_03
실전3보(56~58). 백58의 강력한 건너붙임

실전2보 이후로 알파고는 단 한수의 실수도 없이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 실전3보에서는 백58이 놀라운 수라고 할 수 있다. 백56으로 한번 민 다음 백58로 건너붙힌 수.

sedol_03-1
참고1도. 흑 인내의 길을 가자면

흑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려면 참고1도에서처럼 백▲의 건너붙힌 수를 흑1로 끊고 흑3으로 단수 친 다음 흑5로 잡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백은 백4로 자연스럽게 이어짐으로써 백말이 두터워지고 우변ㆍ우하귀에 대한 영향력이 커진다. 이는 흑으로서는 굴욕적인 연결이다. 프로들은 이처럼 상대(백)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수순을 극도로 회피한다.

sedol_04
실전4보(57~66). 흑의 분단

그래서 흑은 실전4보에서 흑59로 끊고 흑61로 호구 친 다음 흑63으로 나아간다. 흑이 이렇게 진행하는 이유는, 향후 흑 “가”로 들여다봄으로써 백말을 공략함과 동시에 우변ㆍ우하귀 흑집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른바 모양을 정리하지 않고 맛을 남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백은 백58ㆍ백62로 흑을 양단할 수 있었다. 백64로 부딪힌 수에 의문을 표할 수도 있지만, 백64로 거의 확실한 선수를 아낌없이 행사하고 백66으로 흑 두점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흑 두점이 먼저 준동할 가능성을 방지한 것이다.

sedol_05
실전5보(78~80). 흑의 양걸침과 백80의 완착(?), 그리고 우변침투

우중앙에서 흘러나온 백이 우하귀 백78로 침입하자 흑은 하변에서 좌중앙에 이르는 진영을 경영하기 위해 좌하귀 백 한점에 흑79로 걸쳤다. 그러자 알파고의 백80, 이 한수가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백이 진다면 패착으로 지목될 만한 완착. 백80이라는 한가한 수로 인하여 백은 흑79ㆍ흑81로 양걸침을 당함으로써 하변에서 좌중앙에 이르는 거대한 흑집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눈에 백이 망하는 그림이 보인다. 그리고 20여수가 진행된 뒤, 나중에 “가”(백102)로 우변을 침투하게 되는데….

sedol_06
실전6보(93~102). 백102, 알파고라는 존재의 무서움

백은 전보의 흑79ㆍ흑81의 양걸침을 당함으로써 실전6보처럼 좌중앙에 거대한 흑집을 허용하고 말았다. 좌중앙과 좌하귀의 수순들이 정리된 시점에서 대부분의 바둑기사들은 흑이 유리하다고 보았으며, 초중반에 놀라움을 선사했던 알파고가 드디어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며 안도했다. 흐름상 모두가 흑이 좋다고 보았다. 어떤 이들은 백이 망한 결과라며 혹평하기까지 했다.

그때 알파고는 백94(우하귀에 대한 흑의 활용수단을 줄인 수), 백96(좌상귀와 상변 흑의 연결을 차단함으로써 흑97~흑101로 상변 흑의 삶을 강요한 수)이라는 사전작업을 하고, 이제는 모든 바둑기사들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될 백102로 흑 진영에 침투했다. 역시 아마추어라면 흔히 침투할 수 있는 수 중에 하나이며, 때에 따라서는 상용수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에겐 이 수는 이 시점에서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 그래서 너무나 충격적인 수이다. 이런 수를 둔다는 것은 여기에서 불문곡직 승부를 결정짓자는 얘기이다.

국후 소감에 따르면, 이세돌은 “서로가 어려운 바둑이 아닌가 느끼고 있었는데 거기서 뭐랄까 승부수? 사람으로 치자면 수읽기랄까, 도무지 둘 수 없는 수가 나왔다”고 했다. 이 말을 부언하자면, 이 수는 우상귀ㆍ우변ㆍ우하귀 전체에 걸친 모든 변화에 대해 완벽한 수읽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감히 결행할 수 없는 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수읽기가 불가능하므로 (인간의 관점에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강심장의 수이기 때문이다. 당시 관전기사들은 한결같이 좌하귀ㆍ좌중앙의 실수로 불리해진 백이 던진 “승부수”라고 보았지만, 이세돌은 팽팽한 국면에서 도무지 수읽기가 불가능하여 감히 결행할 수 없는 수(그는 “승부수?”라는 의문의 어조로 말했다), 승부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불가능한 수였다.

sedol_06-1
참고2도. 간명한 정리수순은 흑 필패의 길

백▲의 침입에 대해 가장 쉽게 정리하자면, 참고2도처럼 흑1ㆍ흑3으로 위로 막아 백4 이하를 넘겨주고 그 대신 백 두점을 잡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되면 백은 백4~백10으로 방벽을 침으로써, 맛이 남아 있던 우하귀 흑▲ 한점을 완전히 제압하게 된다. 그런데다가 백이 선수이다. 이것은 흑 필패의 길이므로, 이세돌은 백▲ 침입수를 차단함과 동시에 우하귀 흑▲ 한점의 맛도 남겨두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어떤 미래가 닥쳐올 지 모르는 오리무중의 접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sedol_07
실전7보(103~116). 백116, 승부가 결정되다.

이세돌이 우변 백▲의 침입수에 대해 이중과제를 안고 싸운 결과 본보처럼 우변이 정리되었다. 결국 흑은 우상귀 흑 석점을 백에게 선수로 헌납하게 된다. 그리고 좌상귀 백116, 이것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이후에 우하귀 공방 및 좌하귀 끝내기를 둘러싼 이세돌의 실착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는 정수로 일관할 경우 어차피 진다는 판단을 내린 이세돌이 수순을 비틀면서 벌어진 전략적 실패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알파고의 초강력한 위용에 크게 흔들린 이세돌이 심리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바둑TV로 이세돌 9단의 표정을 봤는데, 상대가 의외로 강했고 압박까지 해 들어오니까 심리적으로 흔들린 것 같았다. 이렇게 셀 줄은 몰랐을 게 분명하고, 당황했을 것이다.”(최철한)

제1국에서 알파고의 실수는 두 곳이 거론된다. 하나는 좌하귀 양걸침을 당함으로써 좌중앙에 흑집을 크게 허용했다는 것, 또 하나는 우하귀 끝내기에서 명백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최철한의 검토에 따르면, 백102의 우변 침투를 결행하려고 선수를 뽑기 위해 알파고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정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후자의 끝내기 실수는, 알파고가 집차지보다 승률을 우선하는 알고리즘이어서 승리가 확정적일 경우(즉 승률이 높게 계산될 경우) 나올 수 있는 사소한 실수로 보인다.

sedol_07-1
참고3도. 알파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다.

참고3도는 백이 좌하귀에서 흑에게 양걸침(흑79, 흑81)을 당한 뒤 우변 공방이 마무리되기까지의 진행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보면, 흑은 좌중앙에 큰 집을 지은 대신, 백은 백80으로 좌상쪽의 흑▣ 두점을 제압하고, 백102의 우변침투로 우상귀 흑◉ 석점을 잘라먹고, 백116으로 좌상귀를 크게 접수했다. 과연 백이 좌하귀 양걸침을 당한 것이 실수일까? 부분적으로는 백 실패이지만 백116까지의 대세적 관점에서 보자면 백의 확실한 성공이다. 알파고는 바둑기사들의 대세관을 충격적으로 흔들고 있다.

– 중반 좌하 방면 접전에서 알파고가 망했다고 해설자들은 입을 모았다.

“망하지 않았다. 검토해 보니 알파고의 깊은 뜻이 있었다. 알파고는 부분적으로 당하더라도 선수를 잡아서 우변 승부수를 날리려 했던 것이다. 같이 연구하는 기사들도 그 뜻을 깨닫고 경악했다. 우리 사이에서 이제 알파고는 ‘바둑신’으로 추앙받고 있다.”(최철한)

바둑인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알파고가 제1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더군다나 초중반 전투를 통해 포석이 뛰어나고 부분접전ㆍ힘싸움에서 최강임을 입증했으며, 우변 공방을 통해 인간을 초월하는 정밀한 수읽기가 가능함을 보여주었으며(인간적 해석에 따르면, 불리할 경우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좌하귀 수습과 백102의 침투를 통해 차원이 다른 대세관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 * *

사실 이와 같은 설명은 인간적 언어를 동원한 해석에 불과하고, 알파고는 단지 연산의 결과값에 따라 착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알파고의 수가 놓일 때 그 수(연산의 결과값)를 추상화함으로써 언어적 설명, 즉 해석이 가능하다. 흔히 추상화는 복잡한 구체물들을 개념화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근원적으로는 “음양” 혹은 “+-”에서 비롯하여 의미분절(“하나”에서 “여럿”으로)과 가치평가(“선악ㆍ시비ㆍ호오ㆍ애증” 등등)가 덧입혀짐으로써 추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화는 곧 구체화이며, 인식론은 곧 존재론이다. 개념화 자체가 사실은 음양의 은폐를 통해 구성되는 구상물이다. 알파고의 의의는 수천년 전통의 바둑계에서 확립된 의미분절과 가치평가를 “0과 1”, “+와 –”, “음과 양”으로 환산했다는 점이며, 그 환산값을 가지고 바둑 최고수의 인식ㆍ존재론을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알파고의 승리에 두려움과 좌절에 빠졌던 이유는, 인간이 누천년 동안 쌓아올린 의미분절과 가치평가가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강제된 자각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어느 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나 학습한 관습적 허구ㆍ관습적 추상ㆍ관습적 구체(=의미분절과 가치평가)에 존재를 의지한 채 생애를 부지한다는 얘기이며, 그 의지처가 무너질 때 정신적 붕괴, 실존적 절망을 맛보게 된다. 어느 시대에 국한된 해석체계가 무너지는 것뿐인데, 인간의 위대성이 무너졌다는 리얼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관습적 허구, 관습적 해석(바둑 용어로는 “고정관념”)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숭고한 존재들은 “음과 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가 온갖 개념과 감정으로 쌓아올린 숭고한 가치들은 한갓 인공지능에 의하여 “+-”로 환산될 수 있는 존재가 절대 아니라고 믿는다. 이런 신념에 대해 알파고가 진실의 의문을 던진 것이다. 바둑에는 “승패”라는 환산값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외 “포석ㆍ정석ㆍ모양ㆍ맛ㆍ맥ㆍ삭감ㆍ침투ㆍ전략ㆍ싸움ㆍ형세ㆍ끝내기ㆍ정수ㆍ속수ㆍ악수ㆍ수법ㆍ무리수ㆍ노림수ㆍ승부수ㆍ기세ㆍ실리ㆍ세력ㆍ두터움ㆍ엷음ㆍ선수ㆍ후수ㆍ선악” 등등의 가치와 관념들은, “승패”라는 환산값을 은폐시키고 국면을 조각(의미분절)내어 선악의 가치를 부여(가치평가)한 추상ㆍ구체화의 결과물들, “하나”에서 “여럿”으로의 운동, 국소적으로만 의미 있는 존재, 한마디로 “관습적 해석”, “관습적 존재”, “관습적 위대함”, “관습적 숭고함”에 불과하다고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바둑계는 알파고의 의문 제기에 처음에는 두려움과 절망을 느꼈으며, 그 감정이 잦아든 뒤에는 절대적 가치라고 믿었던 관념들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앞으로 바둑계에서는 사뭇 다른 수법들이 등장하고, 고정관념의 파괴와 중앙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알파고는 바둑계에는 선물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실은 알파고가 놀라운 게 아니라, 알파고 알고리즘 개발진이 바둑돌의 배치를 완벽에 가깝게 연산으로 환산(딥러닝)한 능력이 놀라운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공지능 간의 대결을 통해 기계 스스로 연산의 결과값을 보정(머신러닝)해 나가도록 만듦으로써 알파고라는 바둑고수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알파고 알고리즘을 개략적으로라도 살펴보면, 알파고가 이세돌의 바둑기보 전체를 학습하더라도 사실은 미미한 정보(극미한 보정값)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당초 알파고 알고리즘에서는 이세돌 맞춤전략이란 게 성립할 수 없다. 그러고도 이세돌을 크게 압박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니 앞으로 알파고가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 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마도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부차적 전략까지 수립했더라면 이세돌은 좀더 다른 각도에서 알파고 대전에 임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기원과 바둑계 인사들은 알파고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채 안이하게 한 명의 승부사에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압박과 부담을 떠맡겼던 셈이다. 그 결과 이세돌은 당혹과 충격과 놀라움 속에 제1국을 패하게 되었으며, 유일한 소득은 알파고에게도 뭔가 모자른 면, 결함이 있다는 직감이었다. 그래서 이세돌은 제1국에서 얻은 경적필패의 교훈을 되새기고 다음 대국에 임한다면, 충분히 싸워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둑기사들도 이세돌이 알파고를 경시하지 않고 존중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보았다.

사실 알파고의 논리는 시종일관 승패라는 연산값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지만, 인간의 심리와 언어는 의미분절과 가치평가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집 차이”라는 국소적 연산값을 두고 알파고에게 “결함”, “실수”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바둑에서 승패의 연산에 비하자면 “집 차이”라는 연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 차이”는 하나의 가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가상적 결함(즉 승패의 연산을 은폐시키고 국소적으로 존재를 영위하는 연산값에 대한 무관심)에 의지해서 한 명의 승부사가 좌절을 딛고 심기일전하게 된다. 혹시 인간은 가상을 통해 희망을 얻고 가상을 통해 좌절을 겪는 존재가 아닐까? 인간은 무의미를 통해 좌절을 겪고 무의미를 통해 희망을 얻는 존재가 아닐까?

이세돌 대 알파고 제1국 관전기—“사람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에 대한 1개의 댓글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람계곡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