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니체, 숨어 있는 독자 —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 사상의 전기

모든 심오한 정신은 가면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모든 심오한 정신을 가리면서 가면은 계속해서 커진다. 그 정신이 제시하는 모든 말, 모든 발걸음, 모든 삶의 기호를 두고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그릇된 해석, 즉 천박한 해석 덕분이다. («선악 너머» I, 40)

safranski.jpg니체에 대한 해석이 니체만큼이나 심오한 정신이 아닌 자의 해석이라면, 그것은 니체의 정신을 한사코 가리려는 가면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는 니체를 해석할 때에 1881년 니체의 수를레이 암벽에서의 경험이 심오한 정신을 탄생시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의 니체 해석은 “천박한 해석”으로 간주하고 싶은 경향이 있다. 니체는 1881년의 경험 직전에 «서광»을 출판하고서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명”, “이제까지 인간의 두뇌와 심장이 탄생시킨 가장 대담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신중한 책들 중의 하나”라고 호평을 했지만 그 경험 직후에는 동일한 책을 두고 “초라한 파편 철학”이라고 평할 정도로, 1881년 경험을 전후하여 달라져던 것이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그토록 달라진 계기가 된 1881년 초여름의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자프란스키는 그 경험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보적인 해석과 함께 그 경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과 관련한 니체 자신의 편지, 유고, 저서, 니체가 읽은 책 등을 총망라하여 그 경험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물론 관련 자료를 총망라하긴 하지만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대목에서 꼭 필요한 어휘만을 고른다. 그래서 자프란스키의 서술은 압축적이면서도 풍요롭다.

한 대목을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이러한 자프란스키의 방식은 이 책의 전체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는 니체 사상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면서 자프란스키의 해석에 휘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미로에 숨어 있는 니체를 좀더 밝게 비추는 빛에 노출된다:

니체는 자신의 이론의 정원들에서 중심 주제를 굳이 밝혀내려는 자는 누구든 부득이 조악한 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그 정원들을 배치하였다. 니체는 자신의 미로에 숨어 있다, 그는 발견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구비구비 이어지는 기나긴 길을 거쳐서. 그러니 사람들이 그를 찾을 때에 어찌 헤매지 않겠는가. 아마도 [각 사람들] 자신에게서 일어난 일이 최상의 것이리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먼저 너희 자신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너희는 나를 너무 일찍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의 책들을 배치하되, 사람들이 그 중심 사상을 찾을 때에 운이 좋으면 [사람들] 자신의 사상과 충돌하도록 배치하였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그를, 즉 니체를 발견하느냐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사유를 발견하느냐 여부가 중요하다. 자기 나름의 사유는, 사람들이 되찾아야 할 아리아드네다. (Safranski 241)

그러니까 자프란스키는 니체 해석의 역사에서 어느 한 입장을 취하거나 이제까지 없었던 니체 해석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 사상의 탄생, 자기모순, 전환을 정확한 연대기를 따라 추적한다. 이 추적의 과정 속에서 그는 니체의 흔들림, 충돌, 움직임, 변화를 여실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흔들림과 움직임 속에서 생성된 것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다. 니체의 사상은 그리하여 생생한 것이고 그래서 숨어 있다. 그래서 수많은 해석도 등장한다. 그러나 심오한 사상은 가면이 필요할 뿐, 어떤 비유나 이미지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개념은 하나의 비유나 이미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심오한 정신에게 있어서 모든 비유나 이미지는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가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특히 1881년 경험 이후의 니체는, 미로에 숨어 있다. 따라서 비유나 이미지나 개념을 중심으로 니체를 찾아내려는 자는 니체를 찾아낼 수 없다. 결국 미로 속의 니체는 독자의 굳어진 개념이나 해석을 자꾸만 흔든다. 자프란스키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전기를 읽노라면 독자의 생각, 독자의 해석이 자꾸만 흔들리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프란스키의 전기는 디오뉘소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초인, 권력의지 등등의 중심 개념을 가지고 니체에 접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중심 개념들에 대한 명료한 해석을 내놓지도 않는다. 그는 그것들이 탄생했던 장소, 분위기, 상황, 날씨를 추적하여 이야기할 뿐이다. 이제까지의 니체 해석의 역사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해석들도 그 장소, 그 분위기, 그 날씨를 추적하는 실마리에 불과하다. 혹시 그 수많은 해석들은 니체가 무너뜨린 사상들의 잔재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자프란스키가 일반적인 전기 형식에 걸맞지 않게 마지막 15장을 할애하여 니체 이후의 해석사를 서술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러모로 이 책은 많은 영감을 준다.

정신적 붕괴 이후에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는 니체는 1900년 8월 운명한다. 그의 사망 100주기가 되는 2000년, 독일에서 니체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이 출판되었으나 이 책만큼 각광받은 것은 없다. 호프만, 쇼펜하우어, 하이데거의 전기에서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입증했던 자프란스키가 명쾌한 문체로 니체 사상의 토양들을 종횡하면서 일궈낸 성과는 깊고 풍요롭다. 자프란스키의 전기는 니체를 공부하는 이들이 일급의 전기로 삼을 만하다. 이 책을 알아보고 번역, 출판한 문예출판사의 기획에는 찬사를 보낸다. 오윤희 옮김, «니체 –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2003).

 

그러나, 다시 한번 우리말 번역의 문제. 니체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은 항상 빛나는 섬광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오윤희가 우리말로 옮긴 «니체 –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에서는 그 섬광같은 것, 그 번뜩이는 뭔가를 이상하게도 느끼기 힘들다. 자프란스키가 그토록 수많은 니체의 글과 편지와 메모를 인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하게도 번역본에서는 그 맛을 느끼기 힘들다. 번역의 문제 때문이다. (“그의 사상의 전기”라는 딱 알맞는 부제를 두고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라고 바꿔붙힌 것부터가 왜곡의 전조다.)

이 번역본은 많은 정성이 들어갔지만 아주 위험한 번역이다. 독자들은 이 번역본을 읽을 때 막힘없이 잘 읽힐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상당히 잘 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역자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만들기 위해 니체의 원문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 주의하시라, 원문을 위해 번역문을 손질한 것이 아니라 번역문이 잘 읽히도록 원문을 손질했다! 이러한 손질에 의하여 니체의 강하고 큰 문제가 사소한 문제가 되었으며, 황금의 비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미로의 공간이 시장바닥이 되었다. 그래서 잘 읽힌다. 한 예를 들어보자:

Es ist durchaus nicht nöthig, nicht einmal erwünscht, Partei für mich zu nehmen: im Gegetheil, eine Dosis Neugierde, wie vor einem fremden Gewächs, mit einem ironischen Widerstande, schiene mir eine unvergleichlich intelligentere Stellung zu mir.

내 편을 드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낯선 식물을 대할 때 갖게 되는 어느 정도의 호기심과 비판적 저항,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다. (오윤희 역)

니체가 1888년 카를 푹스에게 보낸 이 편지 내용은 자프란스키의 저서에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자프란스키가 니체 독해와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제일 먼저 당부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책 겉표지에 인쇄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대목에서 “ironisch”를 “비판적”으로 옮긴 것도 놀랍거니와 문장 자체를 오독한 것도 당황스럽다. 이 문장은,

내 편을 드는 것은 전혀 필요없으며 결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낯선 식물을 대할 때와도 같이 약간의 호기심을, 반어적 반박과 함께, 내게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나에 대한 가장 지적인 입장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로 옮겨야 한다. 즉, ‘니체에게 반어적 반박(다름아닌 경쾌한 반박)을 하면서 약간의 호기심을 내비추는 것’ 자체가 바로 ‘니체에 대한 가장 지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윤희의 번역문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이러한 예는 가벼운 예고편에 불과하다.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번역본을 일일이 들추면서 오역을 점검하느라 내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독자들은 이 번역본을 읽으면서 상당히 평범한 차원으로 전락한 니체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를 바랄 뿐이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편집자의 변, 니체 100주기 맞춘 삶과 사상 더듬기에 의하면, 편집실에서 철저히 원문과 대조하고 ‘니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해박한 고병권’이 꼼꼼히 점검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대조하고 무엇을 점검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과연 그들은 독일어 원문을 읽기는 읽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구입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니체라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자프란스키의 안목이, 필연적으로 번역본이라는 가면이 필요한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크고 두꺼운 가면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숨어 있는 독자는 숨어 있는 니체, 숨어 있는 자프란스키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경쾌하게 반박을 하면서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고 니체의 사상을 엿보도록 하자.

숨어 있는 니체, 숨어 있는 독자 —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 사상의 전기”에 대한 6개의 댓글

  • 책과 관련한 글은 인터넷 알라딘서점의 리뷰에도 함께 올리고 있는데, 얼마 전에 이 서평과 관련하여 역자와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알라딘서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싱가
  • 간만에 들렀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깊게 읽은 책인데, 역시 ‘오역의 암초’를 피하지는 못한 모양이군요. 저는 독일어를 할 줄 몰라, 그저 고싱가님께서 지적하신 부분들에 고개를 끄덕일 따름입니다.
    니체를 아직도 깊이 읽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만 하면서 ‘니체주의자’임을 空言하고 다녔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이 곳에 들러 좋은 배움을 얻고 갑니다.

    박민호
  • 훌륭한 저작인데 훌륭한 번역이 되지 못하여 매우 아까운 책입니다. 니체 독해는 꼼꼼하고 엄밀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가독성에 치우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니체 독해에서 가독성이란 곧 오독을 의미할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고싱가
  • 중고로 판매되는 가격이 2배네요 ㅠㅠ

    아 슬픈 현실…

    강재원
  • 한국어 번역본에 대해서 엄청나게 점잖은 평가를 하셨네요. 저도 한글번역본을 보다가 첫페이지부터 이해가 안되어서 대충 훑어보고 던져버렸던 책인데, 영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원본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첫문장부터 주어와 술어부터가 흐리멍텅하게 누가 무엇을 했다는건지 알 수 없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읽으니 니체 본인의 경험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21세기의 번역도 이 정도라는 게 우리나라 인문학의 수준이겠지요.

    그러고보니 오랫만에 들렀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이선일
  • 이선일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번역평을 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역자에 대한 비판도 되기 때문이지요. 이 뛰어난 전기가 많은 부분에서 번역 오류가 있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수용이 안되는 면이 많았지만, 역자 나름의 고충도 이해해 주고 역자 나름의 의도도 존중해 주고 싶었기에 점잖게 대응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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