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제3품, “심心”

33 펄떡이고 번뜩이는 心,
지키기 어렵고 방호하기 어려운 心[1]“phandana(펄떡임)”와 “capala(번뜩임)”라는 술어가 心에 적용된 용례는 여기 말고는 없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법구경 「심품」이 얼핏 心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는 듯하기 때문이다. 증지부에서 “잘못 놓인 心, 탁한 心”과 “바르게 놓인 心, 맑은 心”을 대비하면서 “비구들이여, 이 心은 환히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心은 도래한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A i.10)고 언급한 경문이 그나마 이 「심품」과 같은 맥락으로 보이며 이 이상의 부정적인 언급은 4부 니카야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부의 「장로게」에서 이 품을 능가할 정도로 心이 부정적으로 언급된 예들이 보이는데, 주지다하시피, 「장로게」에는 붓다의 입멸 이후 게송도 다수 결집되어 있어 교학의 엄밀성이 다소 느슨해지는 면이 있다. 이를 근거로 법구경의 일부 경문이 붓다의 입멸 이후 게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며, 이 품은 心의 부정적인 면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심계발의 어려움을 설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이 품의 요지는, 心은 심계발 이후에도 걸핏하면 “잘못 놓이고”, “貪에 의해 매몰되고”, “오염원에 의해 오염되고”, “탁해지고”, “원하는 곳 어디든 내려앉는” 것, 그러므로 “빠르고”, “펄떡이고 번뜩이고”, “대단히 보기 어렵고”, “지키기 어렵고”, “미묘한” 것이어서 극히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이 옳다면 “phandana(펄떡임)”와 “capala(번뜩임)”라는 낱말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서, 부정적인 면을 최소화하고 심계발의 어려움, “心의 길들임”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역어로 번역해야 한다.
현명한 자는 이 心을 곧게 한다,
화살 만드는 자가 화살대를 곧게 하듯이.

34 물고기가 서식지에서 잡혀나와
마른 땅에 던져지면 파닥거리듯
이 心은 펄떡거린다,
마라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35 제어하기 어렵고 빠르며
원하는 곳 어디든 내려앉는 心 ―
훌륭하도다, 이 心을 길들임이여!
길들인 心은 안락을 가져오나니.

36 대단히 보기 어렵고 미묘하며
원하는 곳 어디든 내려앉는 心 ―
현명한 자는 이 心을 지킬 것이다,
수호된 心은 안락을 가져오나니.

37 멀리 가며 홀로 거닐며
몸체가 없으며 동굴에 거하는[2]경에서 “동굴”은 거의 대부분 산중 수행처로 언급되고 딱히 뭔가 심오한 비유로 쓰인 예는 없다. “동굴에 거하다(guhāsaya)”라는 표현은 이 게송 말고 다른 곳에서는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동굴에 거하는 죽음의 올가미”(A iv.98)가 그것이다. 두 구절을 평행적으로 놓고 보면, “心”의 거처와 “죽음의 올가미”의 거처가 동일하다. 그렇다면 동굴은 “識이 있는 이 몸”이 아닐까? 心 ―
이 心을 조심操心히 다루는 자들은
마라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38 心이 안정되지 않은 자,
진법眞法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
맑음이 흔들리는 자 ―
그에게서 지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39 心이 새지(漏) 않는 자,
마음[3]초기불교 교학을 엄밀히 다루자면, “心(citta)”과 “마음(ceto)”을 구별하여 번역해야 한다. “心”은 본래 “환히 빛나는 것”이지만 “오염원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이므로, 오염원과 장애를 걷어내면 드러나는 것이 곧 “환히 빛나는 心”, “맑은 心”이다. 바로 이 청정심이 곧 법경法鏡이 된다. 거울은 비출 뿐 사물을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마음(ceto)”은 이 거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心”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心”과 “마음”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길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이 혼란하지 않는 자,
지혜로 惡을 버린 자,
깨어있는 자에게 두려움 없어라.

40 이 몸을 물항아리 같이 알고서
이 心을 성채와 같이 세우고서
지혜의 무기로 마라와 싸우라!
승리를 지키고 정주定住하지 말라!

41 정녕 머지 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누우리라,
識을 잃고 버려져서!
쓸모없는 나무토막처럼!

42 적이 적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이나
원수가 원수에게 행할 수 있는 일보다
잘못 놓인 心[4]앞의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잘못 놓인 心(micchāpaṇihitaṃ cittaṃ)”과 “바르게 놓인 心(sammāpaṇihitaṃ cittaṃ)”은 증지부(A i.10)에서 동일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이 행하는 일이
실로 더 악할 것이다.

43 어머니, 아버지가 행할 수 일이나
그 외 친족이 행할 수 있는 일보다
바르게 놓인 心이 행하는 일이
실로 더 나을 것이다.

33 phandanaṃ capalaṃ cittaṃ dūrakkhaṃ dunnivārayaṃ
ujuṃ karoti medhāvī usukāro va tejanaṃ.

34 vārijo va thale khitto okamokata ubbhato
pariphandat’ idaṃ cittaṃ Māradheyyaṃ pahātave.

35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ṃ dantaṃ sukhāvahaṃ.

36 sududdasaṃ sunipuṇaṃ yatthakāmanipātinaṃ
cittaṃ rakkhetha medhāvī, cittaṃ guttaṃ sukhāvahaṃ.

37 dūraṅgamaṃ ekacaraṃ asarīraṃ guhāsayaṃ
ye cittaṃ saññamessanti mokkhanti Mārabandhanā.

38 anavaṭṭhitacittassa saddhammaṃ avijānato
pariplavapasādassa paññā na paripūrati.

39 anavassutacittassa ananvāhatacetaso
puññapāpapahīnassa n’ atthi jāgarato bhayaṃ.

40 kumbhūpamaṃ kāyam imaṃ viditvā nagarūpamaṃ cittam idaṃ ṭhapetvā
yodhetha Māraṃ paññāvudhena jitañ ca rakkhe anivesano siyā.

41 aciraṃ vat’ ayaṃ kāyo paṭhaviṃ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ṇo niratthaṃ va kaliṅgaraṃ.

42 diso disaṃ yan taṃ kayirā verī vā pana verinaṃ,
micchāpaṇihitaṃ cittaṃ pāpiyo naṃ tato kare.

43 na taṃ mātā pitā kayirā aññe vāpi ca ñātakā,
sammāpaṇihitaṃ cittaṃ seyyaso naṃ tato kare.

* 각주   [ + ]

1. “phandana(펄떡임)”와 “capala(번뜩임)”라는 술어가 心에 적용된 용례는 여기 말고는 없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법구경 「심품」이 얼핏 心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는 듯하기 때문이다. 증지부에서 “잘못 놓인 心, 탁한 心”과 “바르게 놓인 心, 맑은 心”을 대비하면서 “비구들이여, 이 心은 환히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心은 도래한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A i.10)고 언급한 경문이 그나마 이 「심품」과 같은 맥락으로 보이며 이 이상의 부정적인 언급은 4부 니카야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부의 「장로게」에서 이 품을 능가할 정도로 心이 부정적으로 언급된 예들이 보이는데, 주지다하시피, 「장로게」에는 붓다의 입멸 이후 게송도 다수 결집되어 있어 교학의 엄밀성이 다소 느슨해지는 면이 있다. 이를 근거로 법구경의 일부 경문이 붓다의 입멸 이후 게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며, 이 품은 心의 부정적인 면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심계발의 어려움을 설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이 품의 요지는, 心은 심계발 이후에도 걸핏하면 “잘못 놓이고”, “貪에 의해 매몰되고”, “오염원에 의해 오염되고”, “탁해지고”, “원하는 곳 어디든 내려앉는” 것, 그러므로 “빠르고”, “펄떡이고 번뜩이고”, “대단히 보기 어렵고”, “지키기 어렵고”, “미묘한” 것이어서 극히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이 옳다면 “phandana(펄떡임)”와 “capala(번뜩임)”라는 낱말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서, 부정적인 면을 최소화하고 심계발의 어려움, “心의 길들임”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역어로 번역해야 한다.
2. 경에서 “동굴”은 거의 대부분 산중 수행처로 언급되고 딱히 뭔가 심오한 비유로 쓰인 예는 없다. “동굴에 거하다(guhāsaya)”라는 표현은 이 게송 말고 다른 곳에서는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동굴에 거하는 죽음의 올가미”(A iv.98)가 그것이다. 두 구절을 평행적으로 놓고 보면, “心”의 거처와 “죽음의 올가미”의 거처가 동일하다. 그렇다면 동굴은 “識이 있는 이 몸”이 아닐까?
3. 초기불교 교학을 엄밀히 다루자면, “心(citta)”과 “마음(ceto)”을 구별하여 번역해야 한다. “心”은 본래 “환히 빛나는 것”이지만 “오염원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이므로, 오염원과 장애를 걷어내면 드러나는 것이 곧 “환히 빛나는 心”, “맑은 心”이다. 바로 이 청정심이 곧 법경法鏡이 된다. 거울은 비출 뿐 사물을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마음(ceto)”은 이 거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心”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心”과 “마음”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길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4. 앞의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잘못 놓인 心(micchāpaṇihitaṃ cittaṃ)”과 “바르게 놓인 心(sammāpaṇihitaṃ cittaṃ)”은 증지부(A i.10)에서 동일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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