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어리석은 자 품」

60 잠 못 드는 자에게 밤은 길고
지친 자에게 한 유순[1]1유순由旬(yojana)은 대략 11킬로미터의 거리이다.은 멀어라.
진법眞法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윤회는 길어라.

61 유행하면서 자신보다 낫거나
자신과 비슷한 자를 만나지 못하거든
의연하게 홀로 유행하라,
어리석은 자와 어울리지 말라.

62 ‘내 자식들이다, 내 재산이다’라며
어리석은 자들은 번민하지만,
자신도 자신의 것이 아닌데
하물며 자식들이며 재산임에랴!

63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면
그로 인하여 오히려 그는 현명한 자!
어리석은 자가 자신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그를 일러 진정 어리석은 자라 한다.

64 어리석은 자가 평생 동안
현명한 자를 공경한들
그는 법을 분별하지 못한다,
숟가락이 죽 맛을 분별하지 못하듯이.

65 분별 있는 자가 잠깐 동안이라도
현명한 자를 공경하면
금세 법을 분별한다,
혀가 죽 맛을 분별하듯이.

66 어리석은 자들은 우둔하게도
자신을 다만 적으로 대하면서 지낸다,
고통스러운 과보의
악업을 지으면서!

67 지어서 후회할 업은
짓지 않음이 훌륭하도다!
그러한 업은 무르익어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일 있으리니.

68 지어서 후회하지 않을 업은
지음이 훌륭하도다!
그러한 업은 무르익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 있으리니.

69 악이 익지 않는 한
어리석은 자는 악을 꿀맛으로 생각하지만,
악이 익으면
어리석은 자는 괴로움을 받는다.

70 어리석은 자는 다달이
쿠사 풀[2]학명은 Desmostachya cynosuroides, 또는 Poa cynosuroides. 쿠사 풀잎은 잘못 잡으면 손을 베일 정도로 날카롭다. 끝으로 음식을 먹기도 하겠으나,[3]“쿠사 풀 끝”이 무슨 비유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게송의 뜻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상응부 제13.2경(S ii.134)에서 “쿠사 풀 끝으로 찍어올린 물”을 언급하며 쿠사 풀 끝의 바늘 끝만한 면적을 강조한 용례가 보인다. 이와 동일한 용례로 보고 이 게송을 일반적으로 ‘쿠사 풀 끝으로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며 고행할지라도 법을 밝힌 자들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고 있지만, 이 해석은 이 송을 앞의 제69송 및 뒤의 제71송의 “악・악업의 익음”이라는 주제와 하등 관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는 법구경 결집의 긴밀성을 간과하는 해석이어서 아쉬운 면이 있다.
 
그래서 제안해 보건대, 쿠사 풀의 날카로움을 강조한 법구경 제311송이나 상응부 제35.247경(S iv.198)의 용례처럼 이 송에서도 풀 끝의 날카로움을 강조한 경우로 보고 싶다. 아울러 산스크리트어 복합어 “kuśāgrabuddhi(쿠사 풀 끝 같은 정신)”라는 용례는 “쿠사 풀 끝”이 정신적 날카로움의 비유로 통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아무튼 이 송에서 쿠사 풀 끝의 날카로움을 강조한 것이라면, 실제 풀 끝의 날카로움을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예리한 총기聰氣’를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가 예리한 총기로 음식을 먹는다”는 서술이 가능한가? 당연히 가능하다. 고래로 불교의 가르침에서 “예리한 총기”는 어리석은 자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제70송의 “쿠사 풀 끝”은 바로 이와 같은 “예리한 총기”를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리석은 자의 예리한 총기”는 “법을 밝힌 자의 지혜”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대비도 잘 살거니와, 제69~71송의 “악・악업의 익음”이라는 주제도 일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의 예리한 총기”란 무엇일까? 팔사도의 사명邪命이 아닐까? 출가자가 사주, 팔자, 점, 점성술, 점지, 제사, 사절使節 파견 등등을 통해 밥벌이를 하는 사명邪命 말이다. 한편 증지부 제10.119경(A v.234)에서는 “한 움큼 쿠사 풀” 등으로 하강의식을 치르는 바라문이 등장하는 바, 쿠사 풀이 구습의 제사에서 성물聖物로 쓰였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또 하나 해석의 가능성은, 3격의 “kusaggena”를 ‘도구’의 의미가 아니라 ‘동반’의 의미로 읽어, 어리석은 자가 악을 지음은 “쿠사 풀 끝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그 날카로움에 베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악업을 짓는 자는 당장은 음식을 먹는 꿀맛을 만끽하겠지만, 그것은 칼끝의 꿀맛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제69송에서 제71송까지의 게송이 “악・악업의 익음”이라는 주제로 일관되는 장점은 있으나, “어리석은 자”와 “법을 밝힌 자들”의 대비가 잘 살지 않는 흠이 있다.

그와 같은 자는 법을 밝힌 자들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71 지은 악업은
우유처럼 금방 굳는 것이 아니니,
불길이 잿더미를 남기며 지나가듯
지은 악업은 어리석은 자를 불태우며 뒤따른다.

72 어리석은 자에게 아는 것[4]“아는 것(ñatta)”이라는 낱말의 용례는 5부 니카야 중 이 게송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 사본은 같은 어원의 “아는 것(ñata)”으로 대체해서 읽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경에서는 수행을 통해 도달한 앎을 “앎(aññā)”이라고 하는데, 이를 고려하면 이 송의 “아는 것(ñatta)”과 “앎(aññā)”은 의미가 다른 것으로 읽어야 한다. 제75송에서는 “(존경과 권위의) 얻음을 위한 앎”과 “열반을 향하는 앎”을 구별하고 있는 바, 아마도 전자의 앎을 “아는 것(ñatta)”이라 칭한 듯하다. 이 해석이 옳다면, 수행을 통해 도달했던 앎도 뭔가의 얻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는 것”, 즉 “지식”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제75송에서 “열반을 향하는 앎”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여읨을 계속 기르라”고 일갈했을 것이다.이 생기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은 자의 튀어나온 부위를 쳐서
이마가 깨질 것이다.[5]“이마가 깨지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제72송이 제73송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면, “이마가 깨지다”는 표현은 다름아닌 제73송의 내용, 즉 ‘어처구니 없는 생각’, ‘헛된 망상’ 등을 하는 선행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마가 깨지다”에 상응하는 우리말 표현은 “정신이 나가다”가 아닐까 싶다.

73 헛되게도, 그는 계발[6]“계발(bhāvana)”은 수습차제의 진보, 즉 수행을 통한 진보를 뜻한다. 어리석은 자는 “아는 것”, 즉 “얻음을 위한 앎”으로 공부의 진보를 바라고 재가자・출가자들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얻길 바라지만, 이는 참으로 어리석고 헛된 생각, “이마가 깨진 자의 바람”, 정신 나간 자의 생각이라는 게 제72~73송의 요지로 보인다. 나아가 “이마가 깨진 자”는 제74송과 같은 존경과 권력을 바라며 만慢이 커져간다. 이 얻음을 위한 앎을 버리고 “열반을 향하는 앎을 확연히 알고 여읨을 기르는 것”이 붓다의 제자, 비구의 길이라는 게 제75송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제72~75송은 “지식 대 앎”, “얻음 대 열반”, “권력 대 여읨”을 대비시킨 한 묶음의 결집이다.을 바랄 것이며,
비구들로부터는 존경을,
거처에서는 주인노릇[7]“주인노릇”이라고 번역한 “issariya(자재, 자유, 주인노릇)”는 “자재신自在神(īśvara)”에서 온 낱말이다. 「자설경」 제2.9경에는 “일체의 종속은 괴로움이요, 일체의 자재自在(issariya)는 안락이어라”는 부처님의 자설이 보인다. 기실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avalokiteśvara)”은 ‘그 어떤 종속에도 걸림 없는 대자재 속에서 일체가 관찰되는 공부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종속에서 벗어나 걸림 없는 대자재 속에서 오온이 공함을 봄”이 바로 반야심경 공부의 첫걸음이다. 이 첫걸음을 딛지 못한 자는 그 이후의 법수관을 할 수 없다.을,
다른 가문들로부터는 공양을 바랄 것이다.

74 ‘재가자들과 출가자들은 모두
바로 내가 한 일을 생각하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이든
내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
이런 것이 어리석은 자의 생각(思惟)이니,
그의 바람과 만慢은 커져간다.

75 얻음을 위한 앎이 있는가 하면
열반을 향하는 앎도 있다.[8]대개의 번역서들이 “얻음을 위함(lābhūpanisā)”과 “열반을 향함(nibbānagāminī)”의 문법적 분석을 불명료하게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게송을 전반적으로 이상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낱말은 ‘유재석有財釋(bahuvrīhi) 복합어’로 분석해야 하며, 따라서 여성명사 “앎(aññā)”을 한정하는 형용사로 읽어야 한다. (이 송에서 “앎(aññā)”을 “어느 하나(aññā)”라고 읽는 것은 문법적으로 허용되기 어렵다.) 이제까지 초기불교 경전 번역서들을 읽어본 경험에 따르면, 가장 많이 놓치는 문법적 요소가 바로 이 ‘유재석 복합어’이다. 인도 고대어 학인들은 반드시 이 복합어의 용법을 명확하게 숙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이를 확연히 알고서
붓다의 제자, 비구는
명성[9]“얻음・명성・칭송”(lābhasakkārasiloka)은 경에서 많이 보이는 복합어로서, 한결같이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인다. 이 복합어 요소들 중에서 “얻음(lābha)”과 “명성(sakkāra)”이 제75송에서 언급되고 있다. “얻음”은 대개 비구가 재가자 등으로부터 공양물이나 시중을 받는 것, 나아가 존경과 명성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품 역시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며, 출가자 역시 어리석은 자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을 기뻐하지 말고
여읨(遠離)을 계속 길러야 하리!

60 dīghā jāgarato rattī dīghaṃ santassa yojanaṃ
dīgho bālānaṃ saṃsāro saddhammaṃ avijānataṃ.

61 carañ ce nādhigaccheyya seyyaṃ sadisam attano
ekacariyaṃ daḷhaṃ kayirā n’ atthi bāle sahāyatā.

62 “puttā m’ atthi dhanaṃ m’ atthi” iti bālo vihaññati
attā hi attano n’ atthi kuto puttā kuto dhanaṃ.

63 yo bālo maññatī balyaṃ paṇḍito vāpi tena so,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 ti vuccati.

64 yāvajīvam pi ce bālo paṇḍitaṃ payirupāsati
na so dhammaṃ vijānāti dabbī sūparasaṃ yathā.

65 muhuttam api ce viññū paṇḍitaṃ payirupāsati
khippaṃ dhammaṃ vijānāti jivhā sūparasaṃ yathā.

66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karontā pāpakaṃ kammaṃ yaṃ hoti kaṭukapphalaṃ.

67 na taṃ kammaṃ kataṃ sādhu yaṃ katvā anutappati
yassa assumukho rodaṃ vipākaṃ paṭisevati.

68 tañ ca kammaṃ kataṃ sādhu yaṃ katvā nānutappati
yassa patīto sumano vipākaṃ paṭisevati.

69 madhuvā maññatī bālo yāva pāpaṃ na paccati
yadā ca paccatī pāpaṃ atha bālo dukkhaṃ nigacchati.

70 māse māse kusaggena bālo bhuñjetha bhojanaṃ
na so saṃkhātadhammānaṃ kalaṃ nāgghati soḷasiṃ.

71 na hi pāpaṃ kataṃ kammaṃ sajju khīraṃ va mucchati
ḍahantam bālam anveti bhasmācchanno va pāvako.

72 yāvad eva anatthāya ñattaṃ bālassa jāyati
hanti bālassa sukkaṃsaṃ muddham assa vipātayaṃ.

73 asataṃ bhāvanam iccheyya purekkhārañ ca bhikkhusu
āvāsesu ca issariyaṃ pūjā parakulesu ca.

74 “mam’ eva kata maññantu gihī pabbajitā ubho,
mam’ evātivasā assu kiccākiccesu kismici”,
iti bālassa saṃkappo, icchā māno ca vaḍḍhati.

75 aññā hi lābhūpanisā aññā nibbānagāminī,
evam etaṃ abhiññāya bhikkhu Buddhassa sāvako
sakkāraṃ nābhinandeyya vivekam anubrūhaye.

* 각주   [ + ]

1. 1유순由旬(yojana)은 대략 11킬로미터의 거리이다.
2. 학명은 Desmostachya cynosuroides, 또는 Poa cynosuroides. 쿠사 풀잎은 잘못 잡으면 손을 베일 정도로 날카롭다.
3. “쿠사 풀 끝”이 무슨 비유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게송의 뜻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상응부 제13.2경(S ii.134)에서 “쿠사 풀 끝으로 찍어올린 물”을 언급하며 쿠사 풀 끝의 바늘 끝만한 면적을 강조한 용례가 보인다. 이와 동일한 용례로 보고 이 게송을 일반적으로 ‘쿠사 풀 끝으로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며 고행할지라도 법을 밝힌 자들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고 있지만, 이 해석은 이 송을 앞의 제69송 및 뒤의 제71송의 “악・악업의 익음”이라는 주제와 하등 관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는 법구경 결집의 긴밀성을 간과하는 해석이어서 아쉬운 면이 있다.
 
그래서 제안해 보건대, 쿠사 풀의 날카로움을 강조한 법구경 제311송이나 상응부 제35.247경(S iv.198)의 용례처럼 이 송에서도 풀 끝의 날카로움을 강조한 경우로 보고 싶다. 아울러 산스크리트어 복합어 “kuśāgrabuddhi(쿠사 풀 끝 같은 정신)”라는 용례는 “쿠사 풀 끝”이 정신적 날카로움의 비유로 통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아무튼 이 송에서 쿠사 풀 끝의 날카로움을 강조한 것이라면, 실제 풀 끝의 날카로움을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예리한 총기聰氣’를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가 예리한 총기로 음식을 먹는다”는 서술이 가능한가? 당연히 가능하다. 고래로 불교의 가르침에서 “예리한 총기”는 어리석은 자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제70송의 “쿠사 풀 끝”은 바로 이와 같은 “예리한 총기”를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리석은 자의 예리한 총기”는 “법을 밝힌 자의 지혜”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대비도 잘 살거니와, 제69~71송의 “악・악업의 익음”이라는 주제도 일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의 예리한 총기”란 무엇일까? 팔사도의 사명邪命이 아닐까? 출가자가 사주, 팔자, 점, 점성술, 점지, 제사, 사절使節 파견 등등을 통해 밥벌이를 하는 사명邪命 말이다. 한편 증지부 제10.119경(A v.234)에서는 “한 움큼 쿠사 풀” 등으로 하강의식을 치르는 바라문이 등장하는 바, 쿠사 풀이 구습의 제사에서 성물聖物로 쓰였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또 하나 해석의 가능성은, 3격의 “kusaggena”를 ‘도구’의 의미가 아니라 ‘동반’의 의미로 읽어, 어리석은 자가 악을 지음은 “쿠사 풀 끝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그 날카로움에 베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악업을 짓는 자는 당장은 음식을 먹는 꿀맛을 만끽하겠지만, 그것은 칼끝의 꿀맛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제69송에서 제71송까지의 게송이 “악・악업의 익음”이라는 주제로 일관되는 장점은 있으나, “어리석은 자”와 “법을 밝힌 자들”의 대비가 잘 살지 않는 흠이 있다.
4. “아는 것(ñatta)”이라는 낱말의 용례는 5부 니카야 중 이 게송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 사본은 같은 어원의 “아는 것(ñata)”으로 대체해서 읽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경에서는 수행을 통해 도달한 앎을 “앎(aññā)”이라고 하는데, 이를 고려하면 이 송의 “아는 것(ñatta)”과 “앎(aññā)”은 의미가 다른 것으로 읽어야 한다. 제75송에서는 “(존경과 권위의) 얻음을 위한 앎”과 “열반을 향하는 앎”을 구별하고 있는 바, 아마도 전자의 앎을 “아는 것(ñatta)”이라 칭한 듯하다. 이 해석이 옳다면, 수행을 통해 도달했던 앎도 뭔가의 얻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는 것”, 즉 “지식”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제75송에서 “열반을 향하는 앎”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여읨을 계속 기르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5. “이마가 깨지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제72송이 제73송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면, “이마가 깨지다”는 표현은 다름아닌 제73송의 내용, 즉 ‘어처구니 없는 생각’, ‘헛된 망상’ 등을 하는 선행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마가 깨지다”에 상응하는 우리말 표현은 “정신이 나가다”가 아닐까 싶다.
6. “계발(bhāvana)”은 수습차제의 진보, 즉 수행을 통한 진보를 뜻한다. 어리석은 자는 “아는 것”, 즉 “얻음을 위한 앎”으로 공부의 진보를 바라고 재가자・출가자들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얻길 바라지만, 이는 참으로 어리석고 헛된 생각, “이마가 깨진 자의 바람”, 정신 나간 자의 생각이라는 게 제72~73송의 요지로 보인다. 나아가 “이마가 깨진 자”는 제74송과 같은 존경과 권력을 바라며 만慢이 커져간다. 이 얻음을 위한 앎을 버리고 “열반을 향하는 앎을 확연히 알고 여읨을 기르는 것”이 붓다의 제자, 비구의 길이라는 게 제75송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제72~75송은 “지식 대 앎”, “얻음 대 열반”, “권력 대 여읨”을 대비시킨 한 묶음의 결집이다.
7. “주인노릇”이라고 번역한 “issariya(자재, 자유, 주인노릇)”는 “자재신自在神(īśvara)”에서 온 낱말이다. 「자설경」 제2.9경에는 “일체의 종속은 괴로움이요, 일체의 자재自在(issariya)는 안락이어라”는 부처님의 자설이 보인다. 기실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avalokiteśvara)”은 ‘그 어떤 종속에도 걸림 없는 대자재 속에서 일체가 관찰되는 공부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종속에서 벗어나 걸림 없는 대자재 속에서 오온이 공함을 봄”이 바로 반야심경 공부의 첫걸음이다. 이 첫걸음을 딛지 못한 자는 그 이후의 법수관을 할 수 없다.
8. 대개의 번역서들이 “얻음을 위함(lābhūpanisā)”과 “열반을 향함(nibbānagāminī)”의 문법적 분석을 불명료하게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게송을 전반적으로 이상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낱말은 ‘유재석有財釋(bahuvrīhi) 복합어’로 분석해야 하며, 따라서 여성명사 “앎(aññā)”을 한정하는 형용사로 읽어야 한다. (이 송에서 “앎(aññā)”을 “어느 하나(aññā)”라고 읽는 것은 문법적으로 허용되기 어렵다.) 이제까지 초기불교 경전 번역서들을 읽어본 경험에 따르면, 가장 많이 놓치는 문법적 요소가 바로 이 ‘유재석 복합어’이다. 인도 고대어 학인들은 반드시 이 복합어의 용법을 명확하게 숙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9. “얻음・명성・칭송”(lābhasakkārasiloka)은 경에서 많이 보이는 복합어로서, 한결같이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인다. 이 복합어 요소들 중에서 “얻음(lābha)”과 “명성(sakkāra)”이 제75송에서 언급되고 있다. “얻음”은 대개 비구가 재가자 등으로부터 공양물이나 시중을 받는 것, 나아가 존경과 명성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품 역시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며, 출가자 역시 어리석은 자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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