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오솔길

샘물을 뜨러 가는 도중에 거치게 되는 북한산 오솔길은 내게는 소중하고 정든 길이다. 나는 이 작은 길을 사랑한다. 인적이 없는 조붓한 길, 바람이 스치고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시냇물 소리, 새 소리가 들리는 이 길을 내가 밟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고맙다. 여름에는 무성한 초목에 덮여 있어 오솔길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더니, 잎이 떨구어지면서 서서히 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에 처음 발견한 길이어서 이렇듯 완연히 드러난 모습은 이번 늦가을과 겨울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

지난 늦가을 풍경이다. 오솔길이 시작하는 길목에는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메마른 잎을 달고 입문 역할을 하고 있다. 작고 아름다운 나무들 아래로 돌계단이 천연히 놓여 있다. 아마 이 돌계단은 아주 먼 시절에 지금은 사라진 암자의 주인이 놓았을 것이다. 비오는 날이다. 떨어진 잎들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빛깔은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낙엽을 밟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 들리고, 작은 실개울은 흐르고, 비는 고요히 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은 감추어진 길이어서 오솔길이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같은 장소의 이번 겨울 풍경이다. 단풍잎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달려 있다. 단색조의 겨울산에서 만나는 메마른 단풍잎은 가을날의 물이 차오른 붉은 잎의 아름다움을 능가한다. 산책 길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는데 마침 지난 11월에 새로 구입한 휴대폰으로 간간히 풍경을 찍어보았다.

간혹 가다 떨구어지지 않은 갈색 나뭇잎들도 만나게 되는데, 주변의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으면 그 빛깔의 조화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말없이 바라본다. 이런 풍경은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온 뒤에 비로소 처음으로 발견했다. 하긴 처음 발견한 게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비가 내리든 눈이 흩날리든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숲을 산책하다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상 풍경이건만 이런 일상이 하나의 호사가 되고 말았으니, 도시인의 생활은 참 박복하다.

설경 속의 상록수 빛깔은 청신하다. 눈이 내린 날은 낮자란 조릿대가 더욱 맑고 푸르다. 어엿한 나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어린 소나무 한두 그루만 있어도 주변 풍경은 전적으로 새롭다. 이 청신한 기운, 이런 느낌을 뭐라 해야 할까.

목적지이다. 석간수를 뜰 수 있는 샘물이 있다. 터가 상당히 좋아 보여서 암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어느 날 이곳에서 만난 어느 분이 원래 이 자리에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오솔길을 올라오는 돌계단이며 샘물 주위의 축대들이며 예사롭지 않은 것도 바로 암자 때문이었던 것이다.

암자터에서 바라본 앞산 풍경이다. 칼바위 능선 한 자락이 보인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여 전혀 보이지 않더니 늦가을부터 조금씩 조금씩 앞산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겨울철에는 아쉽지 않을 정도로 큰 품의 능선이 보인다. 저녁예불 시간 즈음에 나무들이 욱여싸고 있는 이 공간에 머물며 포행을 하다보면, 어디선가 아득하게 범종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없는 곳, 깊은 산중에서 저녁 어스름에 듣는 저녁 종소리는 선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