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모르게 양쪽 어깨가 뻐근하고 기침이 쿨룩쿨룩 나왔다. 평소 심히 앓아본 적도 없고, 아무 물이나 마셔도 배탈 한번 나지 않은 제법 강한 체질이어서 내심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슬슬 고장이 나는가 싶어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진단이나 처방도 가지각색이었다. 잠자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사람, 불규칙한 끼니에 두 주전자도 더 마셔대는 커피가 문제라는 사람, 구름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 사람, 거기다가 하루 종일 문 밖에 나가는 일도 없이 밤낮으로 그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무슨 플라스틱이라고 배겨날 길이 있겠나는 사람 . . .
— 재연스님, 「방랑시작」(문학동네 2006) 153면
재연스님의 「방랑시작」을 읽던 아내가 부랴부랴 달려와서 이 대목을 들이댔다. 재연스님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평소에 “까닭 모르게 양쪽 어깨가 뻐근하고 기침이 쿨룩쿨룩”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히 원인으로 짚을 만한 것도 없고 어찌할 도리도 없어, 그저 고질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젊은 시절 어지간히 몸관리를 안한 탓이리라, 그렇게 연민하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깨가 뻐근한 것이야 간혹 풀어주면 된다쳐도, 잔기침이 자주 나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재연스님의 글을 읽어보니 원인은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자판의 높이 문제였다. 그분의 판단에 따르면, 자판의 높이는 팔꿈치보다 한 치쯤 낮을 때 가장 편하며, 그보다 높을 때는 자판에 올린 손의 높이에 따라 팔과 어깨, 가슴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재상에서 널빤지를 구해다가 책상 아래에 선반을 지르고 거기에 자판을 내려놓은 뒤로는, 뻐근하던 어깨가 훨씬 부드러워지고 기침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좌식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몸에 배긴 책상생활을 물리고 좌식생활을 하기에는 두려움이 컸다. 과연 내가 평상시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까? 좌식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책상생활로 돌아온다면 이 또한 무슨 공염불인가? 불현듯 좌식생활에 대한 선망이 떠오를 때마다 그런 두려움이 커서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나중에 서울살이를 마감하고 시골로 내려간다면 한옥 같은 생활을 할 때나 좌식생활을 해볼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품고 있었다.
그러나 재연스님의 글이 당장에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책상 아래에 자판을 놓을 선반을 지르기보다는 아예 책상을 물리고 좌식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그날 바로 책상을 해체하고 서재에 툇마루를 들였다. 그리고 보료를 깔고 앉아서 툇마루 위에 놓인 자판에 손을 올려보니 팔꿈치보다 한 치쯤 낮게 위치했다. 그리고 이렇게 좌식생활을 한 지도 어언 반 년이 넘었다.
과연 재연스님의 경험 그대로였다. 어깨가 뻐근하던 게 완연히 사라졌다. 고질인 줄 알았던 잔기침도 사라졌다. 그리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좌식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깨끗이 사라졌다. 평소에 반가부좌 자세를 선호하던 때문이었을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작업을 하거나 글을 읽는 것은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서 작업하는 것보다 오히려 간결하고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뭔가에 답답하게 갇혀 있는 기분이라면, 좌식은 주변의 공간과 공기를 자유롭게 호흡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의자가 없어도 되는, 한 단계 더 홀가분한 삶으로 도약한 기분!
건강할 때는 몸의 존재를 잊고 산다. 몸의 존재감은 아플 때 드러난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까지, 몸이 질병을 부여잡고 존재감을 드러낼 때까지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학대이지만, 정신 본위의 현대인은 그것을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을 정신이나 영혼 정도로 국한하고, 몸은 그 정신이나 영혼을 보조하는 시종이나 도구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은 “나”가 아니라 “내 몸”, “나의 몸”, “나의 것”, “나의 소유”이다. 이것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표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도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어째서 몸을 “나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일까? 그 밑바탕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있다. 육체는 시간과 더불어 노쇠하고 끝내는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나”라고 규정하는 한, 나라는 존재는 죽음과 무상을 벗어날 길이 없다. 영혼과 육체를 모두 “나”라고 규정한다면 죽음과 더불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를 “나의 소유물”, 즉 “타자”로 규정해야 한다. 그래야 정신, 마음, 혹은 영혼은 육체의 소멸과 무관하게 영속한다는 믿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육체를 “나”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는 존재에 대한 욕망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육체를 타자화하는 것이야말로 무수한 괴로움을 야기하는 자기 정체성의 왜곡과 축소이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자기 정체성을 축소시키고 괴로움의 쳇바퀴를 수용한다.
자기 정체성의 축소는 이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자기 몸 뿐만 아니라 자기 안의 부정적인 면까지 타자화시키고 타인의 책임이라고 규정한다. 가령, 사람들은 “너 때문에 화났다”라고 말하지, “나는 너에게 화를 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안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타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간법이다. 세간법 안에서의 해결책은 증상만 치료하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화를 낸 것을 두고 화해한들, 자기 안의 부정적인 에너지는 늘 타자화될 준비를 하고 무의식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간법의 구조를 흔드는 첫걸음은 자기 안의 부정적인 면들을 “나”라고 수용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기 몸도 “나”라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곧 몸을 귀하고 소중하게 대한다는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세간에서의 수많은 괴로움은 상당 부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은 그 자체로 평화롭다. 그것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것이다. 너의 몸을 소중하게 여겨라, 그것은 이번 한 생에만 너의 것이니. 사람의 몸은 대단히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잃기는 쉽다. 모든 세간의 것들은 하늘의 번개처럼 찰나의 것이니, 너는 이번 생을 한 방울의 작은 빗방울로, 나자마자 곧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으로 알아야 한다.
— 총카파
좌식생활을 반년 이상 하고 보니, 몸이 그동안 얼마나 불편한 공간에서 고생을 했는지 알겠다. 모든 사람에게 좌식생활이 편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새로운 해방를 맞는 기분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다가 쉴 만한 때다 싶으면 잠시 보료 위에 누워본다. 이완을 하면서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어느 곳이 편하고 어느 곳이 굳어 있는가, 어느 곳이 흐르고 어느 곳이 막혀 있는가.
이번 한 생에만 나에게 허락된 것, 이 아름다운 것, 너는 어찌 그리 오랜 세월 아무 불평없이 속박되어 살아왔느냐? 이제 편히 쉬어라, 배고프면 간소한 음식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시거라. 그리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눕고 싶으면 눕고, 졸리면 자고, 걷고 싶으면 북한산 숲으로 들거라. 거기 수많은 수많은 생애동안 너와 더불어 살아온, 너와 다름없는 벗들이 있느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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