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새벽에 출가하기 직전 잠시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아이를 안아보고 떠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떠날 것이냐? 아이를 안아보다간 아쇼다라가 깨어날 것이고, 그러면 출가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아이를 먼 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몸을 돌려 왕궁을 떠난다. 나는 그 뒷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릿하다. 그분도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을 때 펼쳐지는 세계를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고, 그런데도 아이를 떠났던 것이다.
삼년 간 오로지 부모 손에서만 자라다가 이제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 그간 아이에게 해 준 일이라고는 제집 마당 드나들 듯 함께 북한산 숲을 드나들었던 것 뿐이다. 그리고 먹고 싶을 때 먹게 하고, 먹기 싫어할 때 먹지 않게 놔두고, 자고 싶을 때 자게 하고, 일어날 때 일어나게 하고, 놀고 싶을 때 실컷 놀게 하고, 울 때 울게 놔두고, 고집을 부릴 때 고집을 부리게 놔두었다. 동화책을 읽어준 바도 없고 글자를 가르쳐 준 바도 없고, 인사며 예절이며 규칙이며 그런 것을 아예 일러주지 않았다. 뭘 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른바 태평육아였다고나 할까. 덕분에 말이 늦게 되었으며 인사법이나 예절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환하고 씩씩하고 활발하다.

배낭을 메고 북한산에 들다. 아이를 길러준 북한산이 고맙다.
주위에서 너무 교육을 안 시키는 것 아니냐 우려를 표할 때에는, “아, 어차피 평생 말을 하고 살 터인데 그리 일찍부터 말을 배울 필요가 있나요? 말을 배우면서 얻는 세계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상실되는 세계도 있어요!”, “아니 평생 글 읽고 살아갈 텐데 일찍부터 글자 배워 뭐해요? 너무 일찍부터 배우면 일찍 싫증낼 거예요!” 등등의 우스개 소리로 넘겼지만, 사실은 언중유골이었다.
말과 언어라는 게 개체성의 확립과 생존에 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생명의 에너지가 명확하게 규격화되고 탈색되는 단점이 있다. 어차피 말과 언어를 배울 것이라면 가능한 늦게 배워, 말과 언어 이전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오래도록 유지시켜 주고, 자연과 어머니의 몸에 매몰되었다가 서서히 눈을 뜨면서 바라보는 세계를 최대한 확보해 주고 싶었다. 나는 생명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으며, 생명 스스로가 주위 환경에 맞추어가며 발현하는 과정을 개입하지 않고 깊이 존중해 주고 싶었다.
아이는 주위환경과의 전적인 동일성에서 벗어나 서서히 자타를 구별하면서 개체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개체성이 확연해지는 만큼 그 개체성을 축소시키고 위협하는 외부의 개입에 대해서는 크게 저항하는 특성이 있다. 그게 고집, 떼, 울음 등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때 그 저항을 부모가 강압적으로 제압할 경우 개체성이 크게 위축되고 생명의 역동성이 왜곡되어 어둡게 발현되는 경향을 낳는다. 나는 아이가 그런 저항의 언어를 표출할 때마다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생명의 신비를 더욱 경이롭게 바라보고,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하고 고요히 기다렸다. 그러면 아이가 그 저항의 언어를 스스로 관찰하고 그쪽으로 발현되던 에너지가 저절로 잦아든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아이의 떼와 울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때 두 팔을 벌리면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안긴다. 바로 이때 아이를 안을 때 펼쳐지는 세계를 아는가? 아이를 낳아본 부모라면 그 뭔가에 크게 감응된 세계를 알 것이다. 부처님도 그것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았던가!
생명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개체성이 발현되는 과정에 대한 깊은 관찰, 일어나고 사라지는 세계의 신비로움, 그리고 아이와 부모의 존재의 동시확장…. 아이는 개체성을 훼손 당하지 않고 존엄을 회복하며, 부모는 대립적인 주견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확장을 체험한다. 부모는 마음을 생명 전체로, 이 우주 전체로 확장시켜야 주견을 세우지 않을 수 있다. 부모는 자신의 주견, 자신의 견해를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먼지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이들은 폭력을 겁내나니
모든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나니
스스로를 비추어 보면
다른 이들을 해치거나 해치게 하지 못하리.— 법구경 10.129
부숴진 동종(銅鐘)처럼
스스로를 고요히 하면
그대는 열반을 성취한 자,
다툼이 보이지 않네.— 법구경 10.134
결국 문제는 부모의 내면이다. 살 만큼 살아본 어른이 아직도 자신의 개체성, 자신의 의식에만 빠져 아이와 대결하면, 아이는 위험하다. 아이는 아직 충분히 개체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늘 위협받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앞으로도 스스로의 개체성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난한 성장과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갓 태어난 그 연약한 개체성을 억압하고 강압하면, 그것은 아이에게는 생명의 위협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폭력과 죽음의 언어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아이와 절대로 맞대결하면 안된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 생명의 진화에 걸맞게 크게 성숙해야 한다.
아이는 부모에게 생명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알려주고 가르치는 존재이며, 부모에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웃음을 선사하는 존재이다. 인생사 희로애락에서 ‘희’와 ‘락’을 가장 순도 높게 체험하게 해 주는 존재이다. 어찌 보면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이 생명 하나를 낳기 위한 생명 스스로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꽃은 피었다가 지듯이, 사랑도 피었다가 진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 아이를 낳는다. 이것은 사랑의 확장이며 존재의 확장이다. 사랑은 피었다가 짐으로써 확장된 것이다. 어떤 영화대사였던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아이를 낳고 보니 변하는 사랑이 아름답다. 사랑도 시절에 맞는 사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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