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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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의 마샤. 전쟁터에서 그녀와 어울리는 것은 오직 자작나무 숲 뿐이었다.

자작나무 숲이 내게 각인된 것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이반의 어린시절»에서였다. 전쟁과는 하나도 닮은 점이 없는, 순수하고 섬세한 움직임의 간호원 마샤가 어느날 야전에 배치된다. 그녀의 연약한 숨결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삶이 던져진 것이다. 사실 그녀의 눈빛과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주위의 모든 것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전투의 긴장감이 팽팽한 야전에서 유일하게 그녀와 어울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다.

잎이 다 떨구어진 자작나무 숲은 끝이 없이 펼쳐져 있고, 크고 성긴 나무들 사이사이마다 영혼을 불러들이는 듯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녀는 마음의 공간을 보호하느라 그 은빛의 숲을 하염없이 자적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작나무들의 수피가 그녀에게 선사한 은빛의 공간에는 그녀만 있어야 할 것같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정결한 은빛의 공간에서 마음의 공간에 침범을 당한다. 그리고 자작나무 숲은 카메라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고, 달리고, 회전한다. 그때 자작나무 숲은 내게서 흐릿한, 그러나 지울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하여 무작정 질주하는 슬픔이 되었다.

«이반의 어린시절»에서의 자작나무 숲이 온통 자작나무 뿐이었다면, 가을이 끝나가는 무렵에 백양사 동구에서 본 은사시나무는 다른 천연 빛깔의 나무들과 공존하는 뼛빛의 나무였다. 그리고 그 은사시나무의 군락지는 백양사의 애기단풍과 대비되어 유난히 환한 흰빛의 공간이었다. 아직 천연색으로 가득한 산에서 유독 이른 시기에 잎을 떨어뜨리고 저 멀리 흰 기둥과 흰 가지만으로 빛나는 은사시나무는 영혼의 뼈를 발라내듯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착실하게 만들고, 붉은 빛깔로 들뜨는 마음들을 가라앉힌다. 차창 밖의 은사시나무는 은빛으로 흔들리며 달린다. 또 다시 슬픔은 질주하는가. 은사시나무가 군락하는 경계선은 다행히도 여린 선을 이루고 있을 뿐 온 산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슬픔의 여린 선 주위로는 타들어가는 가을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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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동구의 단풍나무. 너무 아름다워 눈앞에 보고 있는 순간마저 어쩐지 머나먼 추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추억은 나의 현실과 너무 멀리 있다.

확실히 단풍나무의 붉은 빛깔은 아름답다. 그러나, 자작나무 숲도 슬프고 은사시나무도 슬프고 이 아름다움 역시 웬지 슬프다. 체홉은 단편소설 <미인>에서 미인을 보았을 때에 밀려드는 슬픔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미인의 이름 역시 마샤였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마샤가 나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욕망도, 열광도, 쾌감도 아니었으며 뭔가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이었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마치 꿈처럼 모호한 슬픔이었다.”

사실 그 미인은 그 미인이 처한 환경에 너무나 반하는 소녀였다. 너무나 현실과 다른 존재로부터 뭔가가 다가온 것일까. 체홉은 그 존재로 인한 슬픔에 관하여 명쾌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

소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아니면 이 소녀가 지금 내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영영 내 것이 될 수 없는 타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녀의 흔치 않은 아름다움이 지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필수적이지 않으며 우연하고 무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막연히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의 슬픔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 특별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백양사 동구의 단풍나무는 너무 아름다워 눈앞에 보고 있는 순간마저 어쩐지 머나먼 추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추억은 나의 현실과 너무 멀리 있다. 체홉의 미인처럼, 단풍나무는 현실과 너무나 반하는 아름다움이다. 현실과 전혀 다른 것을 단지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엄연히 한 그루의 나무로 섰으니, 그 아픔을 무어라 이를 것인가. 특히나 절정을 지나 마지막 하강선을 타고 있는 붉은 잎들은 절반은 바닥에 누워 있으니, 그것은 막연하고 커다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미인이었다. 그 미인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 미인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 미인은 자기 삶의 궤적을 따라 살고 있을 뿐 나의 삶과 겹치는 구석이 없다. 그런데 그 미인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반역의 현실로 들뜨게 하지 말라고, 들뜨게 하여 슬프게 하지 말라고 애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반의 어린시절»의 간호원 마샤는 자작나무 숲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런 말 없이 눈빛으로 자작나무 숲을 향한 슬픔을 영원히 흘리고 있다. 그 눈빛처럼, 현실에 정반하는 붉은 단풍잎을 향하여 우리는 근원을 모르는 막연한 슬픔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자작나무와 단풍나무 앞에서 슬픔은 질주하여도 언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슬픔은 명쾌한 원인이 없는 것이므로, 위성처럼 우리 주위를 맴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알 수가 없다. 새가 난 허공에는 흔적이 남지 않듯, 그 막연한 슬픔이 지나간 마음결에도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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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풍경화 <자작나무 숲>은 비현실적으로 붉은 낙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클림트의 풍경화 <자작나무 숲>은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붉은 낙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흰 기둥과 붉은 낙엽이라는, 인간 삶의 양 극점으로서 양립할 수 없는 두 언어가 하나의 그림에 공존하고 있는 셈인다. 아마도 클림트는 이 양극의 언어에서 동일한 그 무엇인가를 보았겠고, 그러기에 <자작나무 숲>같은 비현실적이고도 아픈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리라. 그 숲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으나 어딘가 커다랗게 아프다. 클림트는 한 폭의 그림으로 타르코프스키가 영상으로 보여준 자작나무 숲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근원적인 언어를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 마음의 운명적 풍경일까. 한 그루의 나무로 서기 위하여 과연 우리는 어떤 그림, 어떤 언어가 필요한 것일까.

“근원적인 언어를 찾아가는 길, 한 그루의 나무로 서기 위하여 필수적인 언어를 찾아가는 길, 그 길은 왜 항상 흔적 없는 슬픔과 결부되어 있는 것일까?” —가을이 끝나가는 영혼의 숲에서 클림트의 <자작나무 숲>을 자적하며 자문해 본다. [2003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