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지 못하는구나”(돈 조반니)
서양문화사 최초의 문학평론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비극을 “보통 이상의 사람을 모방”하는 것, 희극을 “보통 이하의 사람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따라 독일 고전주의에서는 비극을 머리 속에 그릴 때 언제나 고결한 인물의 파멸을 떠올렸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그리스 고전비극과 형식 면에서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예술인 오페라에서 고결하고 기품있는 인물이 파멸하는 비극이 창출되기를 소망한 이가 바로 독일 고전주의의 쉴러입니다. 이 바람을 접한 괴테는 쉴러에게 “당신이 오페라에 대해 바랐던 희망이 최근의 돈 조반니에서 상당 정도 충족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그 희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며 모차르트의 죽음으로 그 만한 것에 대한 모든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1797.12.30일의 편지)는 전갈을 보냅니다.
확실히, 돈 조반니는 쉴러가 소망한 비극이 아닙니다. 돈 조반니는 숭고하고 고귀한 인물이 아니라, <벌받은 탕아, 돈 조반니>라는 제목이 뚜렷이 표명하듯이, 여러 여자를 유혹하러 다니면서 한 번 휘어잡고 나서는 벗어나고 싶은 여자의 살결과 마음, 그 어두운 심연이자 분명한 구속 같은 존재를 향하여 끝없이 전진하였다 내빼는 점잖지 못한 인물입니다. 흔한 기준으로 평가할 때는 “보통 이하의 사람”인 돈 조반니는, 그러나 어느 삶의 공간에서나 수시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 인간 관계의 규칙, 한 마디로 “도덕”을 유린하면서 인간 안에 숨어 있던 심연을 드러내는 창조자로서, 그리스 고전비극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인간 심연을 파고드는 주인공입니다.
도덕? 돈 조반니는 그 인간 관계의 규칙을 하나의 놀이로 취급하며, 그 놀이 안에서 울고 웃는 인간들을 희롱합니다. 돈 조반니가 보기에는, 돈나 안나와 돈나 옥타비오, 체를리나와 마제토, 돈나 엘비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이 하나의 유희이며 희극입니다. 그 유희의 규칙을 파괴시키니, 이들 등장인물의 관계 설정이 수시로 변경되며, 부유합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부유하는 가운데 기품 있는 돈나 안나가 밤거리를 쏘다니고, 공동체에 안정되게 소속되어 있던 돈나 엘비라가 여행복을 차려 입고 거친 들녘을 밟으며, 환호성 속에서 연인과 함께 춤추던 체를리나가 속절없이 돈 조반니에게 손을 내밉니다. 귀족인 돈 옥타비오가 돈나 안나에게 성적인 접촉을 굳이 입에 올리는 것도 바로 그 유동하는 관계의 확정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돈나 안나와 돈 옥타비오가 농투성이인 체를리나, 마제토와 결속하여 함께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분노를 좇아 흐드러진 관계 속에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저음부를 강타하는 관현악과 타악,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어두운 심연을 보게 됩니다. 이게 인간의 삶인가? 우리 인간 안에 이토록 무서운 세계, 사랑과 분노와 절망의 세계, 격정의 세계가 있었던가? 격정에 휘말려 있는 이 순간에는, 인간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이 그대로 무너집니다. 듣는 이의 가슴을 숨막히듯 죄는 듯한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서 등장하곤 하는 돈 조반니는, 유희와 안정된 규칙의 세계에서 사는 그들,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 모두를 아주 우습게 여기면서 그 무서움의 세계를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흐허허—, 무서워라, 당신은 누구인가? 관계 속에 안착한 여자를 유혹하여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며, 그 인간 관계의 파괴와 함께 인간 존엄을 희롱하면서 동시에 인간 심연을 드러내는 자, 돈 조반니, 그토록 투명한 모차르트의 영혼을 통하여 탄생한 존재!
서양문화사에서 2천년을 넘게 획이 그어진 비극과 희극의 경계는 그리하여 무너집니다. 오페라 부파냐 아니면 세리아냐 하는 논쟁은 모차르트의 가공할 만한 창조력을 모르는 가운데 벌일 수 있는 논쟁입니다. 그 경계를 한껏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오페라 부파라는 명패를 형식적으로 걸치고서 모차르트는 내가 당신과 맺는 관계를, 연인의 관계를, 가족의 관계를, 공동체의 규칙을 희롱하고 붕괴시킵니다. 무서운 모차르트는 그 규칙을 파멸시키는 돈 조반니를 통하여 언제라도 우리에게 엄습할 수 있는 마성을 육화시킵니다.
마성이라…, 서양정신사에서 그리스도교 신관념이 팽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성(daemon)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힘, 인간을 능가하는 힘, 인간을 예기치 않게 돌연히 엄습하는 힘, 그래서 이름도 붙힐 수 없고 상으로 조각할 수도 없는 존재, 도무지 인간화시킬 수 없는 존재, 인격화될래야 될 수 없는 신입니다. 신에 대하여 투명하게 설정해 놓은 그리스도교 신관념이 등장함으로써 그 인격화되지 않는 힘을 악마라고 정의하였고, 그 정의가 일반화됨으로써 마성이라는 의미가 현대에서(특히, 국내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서양정신사에서 마성은 원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간을 초월하는 힘? 사랑, 격정, 공포, 분노를 일으키는 힘, 혹은 그것들 자체는 분명 인간을 초월합니다. 그 힘들이 바로 마성입니다. (참고로, 국내 번역서에서는 보통 그 단어를 정령, 정령숭배, 악마 등으로 옮겨놓고 있지만, 그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사랑과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마성의 존재, 그칠 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격정의 화신 돈 조반니는, …
돈 조반니는, …, 인간 삶에서 결코 몰아낼 수 없는 존재이며, 가공할 만한 파괴력과 창조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존재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을까요? “그분이 와요. 어찌하면 그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체를리나) 작품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평온한 음악이 울리면 기사장이 죽어가고(축복이어라, 마성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다니!), 피날레에서 돈 조반니가 나락에 떨어지면 관계된 이들을 위해서라도 단 한 줄기 평온한 혹은 우렁찬 승리의 선율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쉼없이 공포스럽고 무섭게 심장을 강타하는 음악이 흐르고(심장이 조여드는구나, 우리 모두 마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데도!), 돈 조반니의 파멸 이후 등장 인물 각자가 제 길을 가면서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모든 죄인은 벌을 받으리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조차 격정에 사로잡혀 노래하고, 피날레의 공포를 선취하는 서곡이 작열하는 마성의 역동성을 그 극까지 밀고 가더니 마지막 단 몇 초 동안 한 줄기 쉼이 오고, …,
오호라, “많은 슬픔과 약간의 기쁨”(모차르트), 무서운 격정과 한 순간의 위로가 우리의 삶이로구나! 살아가는 동안 그 위로는 마성의 제거로부터 오지 않으며, 마성의 벗어남으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불현듯 우리도 모르게, 흡사 마성처럼 오는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그 위로를 논리적으로 한 가닥 한 가닥 풀어 제시하지 않으며, 느닷없이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홍수의 물마루처럼 도도히 쇄도하는 그 마성을 어느 찰나 “가볍게” 전복시키고서 선명함과 투명함이 고요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맑고 투명함은 인간의 육성을 빌리지 않은 절대음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애증에 불타오른 몸짓으로 별안간 돈 조반니에게 다가가는 돈나 엘비라, 돈 조반니에게 영혼을 휘둘린 가녀린 체를리나, 고품격의 격정으로 돈 조반니를 쫓는 돈나 안나, 즉 극도로 방탕하지만 고혹적인 돈 조반니의 마성에 휘둘려 신비로운 체험을 한 이 세 여인의 갈증과 거뭇하게 타버린 심장 속에서 인간화되어 나타납니다. 절절함, 두렵고도 숭고한 감정, 아흐- 거부하고 싶지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 잔잔한 마음의 호흡을 뚝뚝 끊어버리는 절망 속의 사랑, 죽음을 응시하는 눈물의 위로로 모차르트의 투명함이 육화됩니다. 어두운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 신문지처럼 구겨진 아침햇살, 돈 조반니로부터 비롯한 절망과 위로와 갈증, “아 마음아, 어찌하여 너는 두려워하느냐! 그이로 인한 두근거림을 멈추어 다오”(돈나 엘비라), “때려 주오, 때려 주오, 마제토. 순한 양되어 나 체를리나 맞으리니”(체를리나), “눈물의 위로를 내게 베풀어 주오. 무덤에서야 나의 갈망, 나의 고통이 사그러지리니”(돈나 안나).
마성의 화신을 접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인간의 심연, 마치 놀이의 규칙처럼 정해져 있던 인간 관계의 파괴, 도덕과 예절과 절도를 가볍게 전복시키는 사랑과 분노와 절망—한 마디로 말해서, 돈 조반니는 마지막 음 하나까지 격정에 젖어 있는 오페라입니다. 격정은, 즉 파토스(pathos)는, 고통이나 열정이나 비애가 아니라 “그 뭔가가 인간을 엄습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 내면”입니다. 격정은 인간 스스로 지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마성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입니다. 격정의 양날(사랑과 증오)에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힌 돈나 엘비라는 그래서 처음부터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때로는 별안간 사랑으로 때로는 별안간 증오로 돈 조반니를 대합니다. 돈나 엘비라의 절망적인 몸짓은 오페라 <돈 조반니>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주요 모티브”(슈테판 쿤체)와도 같습니다. 돈나 엘비라는 상처가 벌어지기를 열망하면서, 벌어진 상처로부터 고통을 받으려고, 돈 조반니에게 포기하지 않고 다가갑니다. 돈 조반니로 인하여 영혼을 다친 그녀는 “여행복 차림으로”(대본의 지문), 모든 인간 사회의 구속에서 내쫓기듯 벗어나, 자신의 실존의 뿌리를 건드린 돈 조반니를 찾아, 인생 미답의 들녘을 배회합니다: “알료샤, 나는 지난 다섯 해 동안 나의 눈물을 사랑하였습니다 … 어쩌면 나는 내가 받은 모욕을 사랑하였을 뿐,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부르르 몸이 떨리는, 정말이지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심연밖에 없는, 마음결이 한껏 유린된 상태, “치명상을 입은 심장의 감정”(돈나 안나), 이게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영혼의 위대한 슬픔, 돈 조반니의 격정이 선사한 선물, 모차르트의 선명함, <돈 조반니> 직후에 작곡된 마지막 교향곡 39, 40, 41번에서 드러나는 현혹적인 격정과 깊은 슬픔과 낙화하는 눈부신 꽃잎의 선율입니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의 격정은 의식적인 정열이 아니라 차라리 두렵고 무서운, 그러나 유혹적인 내면 상태이며, 모차르트의 슬픔은 결코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인간 심연의 비극을 향하여 무한히 흐르는 슬픔이며, 모차르트의 선명함은 그 위대한 슬픔의 정수에서 정녕 환상처럼 혹은 바람처럼 다가온 한 줄기 선율입니다.
이 격정과 슬픔과 선명함은 모차르트 음악을, 아니 모차르트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양식으로서 천상의 음식이요, “천상의 음식을 먹는 자가 지상의 음식을 먹지 않고도”(석상) 구현하는 가벼움과 날렵함입니다. 고혹적인 격정으로부터 눈부신 꽃잎으로 화하는 혁명을 모차르트는 알고 있었고, 그 전복의 혁명, “그 빛나는 전환, 모차르트의 자유”(칼 바르트)를 음악으로 드러낼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차르트의 자유는 거대한 암반을 향하여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한 점 연분홍 꽃잎처럼 마성을 향하여 선뜻 부드럽게 다가섭니다. 가냘픈 체를리나가 돈 조반니에게 손을 내밀 듯이, “자 내게 손을 내밀어 다오”(돈 조반니). 이렇게 격정적인 마성과 눈부신 선율을 가볍게 가볍게 춤추듯 오가면서, 심장을 한껏 박동시키는 오케스트라와 참혹하게 아름다운 아리아를 섞바꾸면서, 모차르트는 인간 영혼의 정수와 신비를 만천하에 공포합니다: 사랑하라, 누구든 그 신비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