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의 «춘설»

황병기의 춘설 이 음반에 실린 음악들을 듣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온 것일까. 나는 20년 가까이 서양음악의 애호가로서 지내왔으나, 황병기의 음악을 들으면서 비로소 그 20년이 이질적인 것들에 적응하려고 애쓴 세월임을 알았다. 물론 모차르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 모차르트조차도 내가 영원히 안길 수 있는, 혹은 내가 숨결처럼 들이쉴 수 있는 음악이 아님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내 생각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인 재료들이 수년 간 서서히 동양적인 것들로 채워지면서 내 감각들 역시 변하기 시작하였다. 첫 신호는 서양의 책들에 대한 기피였고, 다음으로는 동양의 고전과 미술에 대한 관심이었다. 종교적인 관심도 가톨릭에서 불교로 바뀌었다. 그래도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음악적인 요소였다. 가장 나중까지 모차르트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 음반을 구입하기까지 내가 가진 국악 음반으로는 죽파의 가야금 산조밖에 없었다. 그것도 10여년 전에 구입하고 나서는 거의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느릿하고 권태롭고 무미하게만 느껴졌던 탓이다. 그러나 황병기의 곡과 연주들을 들어보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쾌를 느꼈고, 순식간에 국악에 빠져들었다. 이제 죽파의 가야금 산조를 들어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죽파의 연주를 두고 “권태로움을 아는 위대한 예인의 연주”라고 평했던 듯한데, 서양의 세계관에 머물면서 평하자면 확실히 그런 평이 옳게도 여겨질 수 있겠지만, 지금 내 귀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김현이 “권태로움”이라고 평한 그 부분을 나는 “잔잔함”이나 “졸박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추함의 미학”까지 내려간 서양미학의 세계에서 국악의 극적이지 못한 요소들은 확실히 권태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는가 보다. 내가 쌓은 세계, 혹은 내가 속한 세계가 달라지면 음악도 이렇게 달리 들릴 수 있는가!

 

«춘설»은 ‘나’라는 것이 이렇게 달라졌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음반이다. 이 음반을 들은 것을 기점으로 나는 거문고 밑도드리, 가야금 정악, 산조, 가곡, 판소리 등등을 듣게 되었다. 이제 국악을 듣기 시작한 초보인 셈인다. 그런데도 굳이 나서서 이 음반을 소개하는 까닭은, 서양음악이 조금씩 덜 들리기 시작하는 분들이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늠자로 이 음반만한 것이 없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춘설»은 모두 황병기가 작곡한 곡들로 채워져 있으나 연주악기의 종류는 가야금, 대금, 거문고 등으로 상이하며, 음반 내지의 설명도 뛰어난 글들로 채워져 있어서 국악에 접근하고자 하는 분들이 제1감으로 택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가령 여음餘音에 대한 황병기의 생각은 한국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성찰 한 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소리 하나에 관심을 모으고, 여음이라는 자연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여러 가지 줄튕김 행위에 의해 생겨나 조금씩 변화하는 음색, 그리고 현을 지긋이 눌러줌으로써 생기는 미분음적 뉘앙스와 잔잔한 농현을 느끼고 감상하는 태도와 어울린다. 한국의 음악미학에서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나란히 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음이 있는 줄튕김악기의 소리는, 있기는 있으되 한계를 아는 인간의 역할과 근본적이되 멈출 곳을 아는 자연의 역할 사이의 균형이라는 지고의 미적 이상을 충족해 준다.

– 황병기 글/ 김세중 번역, 음반내지 21면에서

가야금과 거문고의 연주기법은 하나의 음이 울리고 난 뒤의 사라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러한 자세와 철학이 “여음”餘音이라는 낱말을 낳았는데, 가령 가야금의 경우 오른손으로 소리를 튕기자마자 왼손으로 농현을 하여 그 사라지기 시작하는 소리를 흔들거나 꺾거나 높히거나 내린다. 서양음악의 경우에는 소리의 냄과 소리의 끊음이 중요하지 냄과 끊음 사이의 소리를 흔들거나 어루만져 미분음적인 상태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차이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병기는 “서양철학은 합리적이다. 사고에서는 논리, 예술에서는 통제가 중시된다. 논리나 통제가 없으면 결과의 타당성이 의심받는 예는, 전위적 우연성 해프닝으로 만들어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볼 수 있느냐 문제 삼는 일부 비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주자가 음의 지속과 세기를 장악하는 줄비빔악기는 서양의 음악예술 개념을 만족시키며 따라서 높이 평가받는다”(음반내지 21면)고 일갈한다.

그래서인지 국악에서 하나의 음이 나와서 사라지는 과정은 마치 한 소절의 음악, 혹은 한 프레이징의 음악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음 안에 이토록 풍부한 세계가 깃들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 음악은 굳이 서양음악처럼 규칙적이고 긴박한 박자로 기동성을 끌어올리거나 반복적 선율을 통해 뭔가를 구축하거나 화음이나 대위법으로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두고 황병기는, “양악에서는 음들이 일정한 규격의 벽돌처럼 취급되어 여러 음으로 구축물을 쌓아 올리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대하여, 국악에서는 음들이 각기 특이한 형태의 자연석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석으로 정원을 꾸미는 식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1]이라고 말한다.

황병기는 서양음악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은 국악의 본질적인 요소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박자와 장단, 기동성과 농현, 화음과 유니슨, 소리와 소리의 간격, 머릿소리와 여음 등등, 서양음악과 국악의 머나먼 거리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들이 어떤 정신적인 내용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깊이 성찰하고 있다. 이 성찰이 바로 그의 작곡에 고스란히 흘러들어가 있으며, 그래서 그의 곡들은 실험과 혁신이 가득하면서도 전통적이다. 쉽게 말해, 국악의 정신적인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혹은 우리나라의 정신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추구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음과 음의 관계, 연주기법 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서양 현대음악의 출발점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고심해본 음악애호가들은 황병기의 이런 성찰과 그 결과물이 놀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황병기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 시기적으로 뒤의 것들이다. 작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국악에서 황병기의 작곡은 사실 작곡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간다. 정악적 요소와 민속악적 요소의 배합, 아방가르드로서의 작품, 고대세계의 상상적 복원, 산조적 작곡, 화음과 반음계의 도입, 판소리 요소의 도입 등등, 그의 곡들은 언제나 실험적이면서도 언제나 전통적이다. 실험성의 측면에서는 <미궁>을 앞설 만한 곡이 없겠으나, 전통적 음악이면서도 전통적 기법을 넘어선 강도는 음반 «춘설»에 실린 곡들이 다른 음반의 곡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서양의 현대음악처럼 낯선 실험성의 음악이 아니라 지극히 전통적이다. 전통적이라면 뭔가 퀴퀴함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격조가 있고 단아하다. 이를 두고 조슬린 클락Jocelyn Clark은 “황병기와 같은 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전통음악은 아픈 과거의 연상을 지워버린다”(음반내지 16면)고 평한다.

젊은 시절 정악과 민속악을 다 배워 아악과 속악의 경계를 넘나든 첫 연주자로서 황병기는 그의 글과 음악을 통하여, 전통음악이라면 흔히 연상되는 것들, “퀴퀴하고 졸박함, 망가진 산하, 촌티나는 해학, 전쟁의 상흔 따위 이미지”(조슬린 클락, 음반내지 6면)를 불식시켰다. 가령, 함동정월의 가야금 산조를 듣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픔이 느껴지지만,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그런 먹먹함이 아니라 그 먹먹함을 대신하는 쓸쓸함이나 적막함이 느껴진다. 그는 정악의 소박함, 덤덤함, 유장함 등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민속악의 한恨, 아픔, 신명, 조촐함과 화려함 등을 알고 있다.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이러한 양편의 언어들을 대부분 동시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한과 아픔의 언어만큼은 그대로 취하지 않고 대신 적막함으로 변화시켜 취한 듯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적막한 채로 머물 뿐 슬픔이나 아픔에 물들지 않으며, 느릿느릿하면서도 탄력이 넘치며, 덤덤히 흐르다가도 화려하게 달린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비유컨대, 옛날 웃방에 놓여 있었던 허름한 반닫이가 이제 격조 높은 미술품이 되어 전시장에 전시된 것을 보는 기분이 든다.

공자는 “시를 통하여 일어나고 예를 통하여 확립하고 음악을 통하여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논어» 泰伯篇)고 말했다. 황병기는 공자의 이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한 독보적인 현대인일 것이다. 황병기의 음악이 들리고 거문고 정악이 들리는 이즈음, 서양음악을 들을 때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공자의 이 말을 나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듯하다. 망가졌던 이 산하에서 성어악成於樂의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만 하다. 이 성어악의 소리를 이 음반뿐 아니라 «침향무», «비단길» 등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복된가.

어느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건너가는 것은, 어느 한 작품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황병기의 이 음반은 그 역할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나는 이 음반을 듣고서 내가 이미 국악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제 위치를 확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거문고 정악과 산조, 가야금 정악과 산조, 가야금과 거문고 병창, 가곡, 판소리 등등을 이제 듣고 있다. 만약 거문고의 밑도드리가 근원적인 친밀함으로 다가온다면 이미 그 사람은 국악의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사실 요즘 사람들이 가야금 산조를 듣고 국악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마련되기는 쉽지 않을 성싶다. 가야금 산조를 들을 때 느껴지는 그 뭔가의 아픔 때문이다. 그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되 거기에 물들거나 빠지지 않는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그래서 권할 만하다. 그러면서도 황병기의 곡은, 황병기의 곡이 잘 들리는 분에게는, 이전에 잘 듣지 못했던 가야금 산조, 판소리 등의 민속악으로 건너가는 다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정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황병기의 음악이 지니고 있는 크나큰 매력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트 안내

황병기 선생의 홈페이지
황병기 선생이 직접 운영하시면서 글을 올리고 계신다. 어느 실험적인 예술에도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지켜볼 수 있는 그분의 깊이와 끊임없는 학습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 음반 및 다른 음반에 실린 모든 곡의 시작 부분을 2분 가량 들어볼 수 있다.
풍류마을
각종 장르의 국악을 들어볼 수 있는 단정하고 요긴한 사이트다. 비용은 무료이며 회원가입을 해야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국악FM방송국
국악방송 FM 채널이다. 인터넷 상으로 생방송 및 다시듣기를 통하여 국악을 청취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이며 회원가입을 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정창관의 국악이 보인다
한국고음반연구회 창립회원인 정창관의 국악 안내서, 전자책이다. 국악을 쟝르별로 설명하고 대표적인 관련 음반을 소개하고 그 음반의 일부를 들려준다.
진회숙의 국악 오딧세이
대중적인 국악 소개서 «나비야 청산가자»를 쓴 진회숙의 홈페이지. 가야금, 거문고, 해금, 판소리, 민요, 궁중악 등 여러 부류의 국악을 들을 수 있다.
소리·On누리
각종 음악을 들려주는 개인 블로그인데, 황병기 선생의 곡 일부도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음원이 저작[인접]권자의 허락을 안 받은 듯하다, 허허.
  1. 황병기,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102면 []

황병기의 «춘설»”에 대한 9개의 댓글

  • 餘音….春雪…. 하나의 음이 울리고 나서 사라지는 과정… 겨울에 큰 눈이 한 번 내리고 나서 봄에 사라지는 잔설 같은…..사라지면서도 남기는 것들…. 의미가 깊군요. ‘춘설’을 들어보고 싶군요. 오래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황병기선생의 가야금을 듣고, 아주 멍~ 했어요. 빗방울인지.. 낙수 인지… 내 이마에 떨어지는 줄 알고…

    강물
  • 황병기 선생의 연주는 확실히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청량감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저도 황병기 선생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려고 이번 연말의 연주회를 예약해 놓았는데, 마음이 설렙니다.

    Gosinga
  • 항상 이곳에 들러 좋은 정보를 얻어가는 재미가 솔솔하네요.
    며칠전 책을 주문하면서 이 음반을 사서 듣고 있어요.
    가야금 소리가 너무 좋군요.
    가야금 소리 들으며 김훈의 현의 노래 읽으며 얼마전에 갔던 달빛속의 가야 고분군을 생각하며..크~
    음악에 대해선 전반적으로 무지하지만 국악이 마음속에 다가온 적이
    있었는데 한 2년전쯤 추석연휴때 텅빈 남해의 고속 도로를 달리며 무슨 민요인지를 들을때 그랬습니다.
    좋은 음반 있으면 계속 소개 부탁드려요..^^

    아스피린
  • 김훈의 «현의 노래»는 사실 음악에 관한 소설인데, 문학평론가들이 김훈만한 음악 지식을 갖추고 있는가는 의심입니다. 공자 이후 한참 뒤부터 아악/속악 식의 도식화가 이루어졌겠고, 유가철학이 가야에 과연 전파되었는지 의심스럽지만, 김훈은 과감하게 우륵의 가야금을 속악의 범주에 넣고 있지요. 가야의 고을 고을 들의 소리가 우륵의 가야금 곡으로 흘러들었다는 게지요.

    우륵이 하림성에서 적국인 신라 왕 앞에서 가야금을 뜯는 장면은 그야말로 소설로 듣는 가야금 연주인 듯합니다. 오른손으로 튕기고 왼손으로 소리를 어르는 과정이 눈에 선하게 들어옵니다. 가장 비극적인 장면에서 가장 음악적이고 아름다운 문체가 등장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이 장면 이외에도 독자 입장에서 음악적으로 고심할 만한 대목들이 꽤 됩니다.

    황병기 선생이 작곡한 <하림성>이라는 대금 곡, <침향무>를 작곡할 때 완상했다던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 등등은 황병기 선생과 김훈의 긴밀한 접촉을 짐작케도 하지요.

    아울러 이 소설은 반민족주의를 부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듯한데, 차마 아무도 이를 건드리지 못하는 듯합니다. 예술을 위하여 가얏고를 들고 적국으로 도강하는 예술가는 과연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Gosinga
  • 우륵이 가야금 가지고 적에게 투항하는 줄거리가 읽으면서 좀 거슬리긴 했지만
    반민족주의로 연관시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륵이 가진 예술적 업적이 워낙 크고
    작가가 우륵의 투항에 대해서 이런 저런 변명이나 고민에대한 묘사 없이
    그냥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는데다
    주인공이 허구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실제인물의 실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논란을 피해갈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읽으면서 그냥 그때는 국가,민족의 개념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것과 좀 틀리지
    않았을까 상상하면서 넘어갔습니다만..

    저는 김훈의 문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 도입부 죽어가는 왕의 늙은 몸을 묘사한거를 보면서 울적해서 혼났어요-.-;;

    aspirin
  • 모짜르트 뿐 아니라 국악에도 관심이 많으시군요. 학생때 클래식 기타를 하다가 문득 현에서 나는 음들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에 관련된 음반을 모으다가 황병기 선생님 앨범을 사게 되었습니다. 잠잘 때 불을 끄고 누워서 들으면 늘 번잡한 마음이 편안히 다스려 졌습니다. 눈이 오면 겨울나그네와 춘설을 꼭 듣곤 합니다. 십수년이 지나서야 가야금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제 짧은 산조 정도 연주하고 있습니다. 비로서 산조가 어떤 것인지 맛을 알게 되었는데, 말씀하신대로 황병기 선생님 작품들은 서양음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하나의 다리역할을 해 준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수제천과 영산회상은 평생 들어야할 명곡이 아닐까 첨언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보리수
  • 가야금 연주도 하시는군요. 멋지십니다. 수제천과 영산회상을 말씀하시다니 또한 놀랍습니다. 저는 그 즈음에 불교로 관심이 확 기울면서 불교음악(이런 장르가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쪽으로 넘어갔습니다만, 언젠가는 수제천과 영산회상을 깊이 들어보고 싶습니다. 첨언해 주셔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황병기 선생님 곡들은 전통적인 정신과는 사뭇 떨어져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한데, 아마도 그분이 기독교 전통에 서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고싱가
  • 가야금 연주요?
    그거 손가락 진짜 아플텐데…
    손가락 굳은살이 베인다는 말도 있어요.

    김수연
  • 대단하시다.
    황병기 선생님 짱!

    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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