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아픔도 여의지 못하고 — 오대산 적멸보궁을 오르다

 
숲이여 그대 홀로 찬란하더라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의 삶이 지나가고 다가오는 것뿐이지만,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는 유독 한 살이라는 관념의 나이가 더해진다. 관념의 플러스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무게를 주는 것인가는 알 길이 없으나, 차가운 겨울 한복판에서 소실되는 하루와 생동하는 하루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밥과 인간의 영원한 희망인 세월은 그러나 연초라 하여 달라지는 법이 없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정상인들이 모두 일터로 가서 일을 하는 날에,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이 그저 가난한 마음 하나뿐인 나그네는 한겨울 새벽에 길을 나선다. 서울 허공을 자욱히 덮고 있던 겨울 안개, 나그네의 발길이 그리웠는지 오대산 산골로 향하는 버스 차창 옆에 바짝 붙어 뺨을 부비려 한다. 그러다가 산등성이가 다가오면 그 어두운 품속으로 휘영청 날아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주마(走馬)한다. 이리 오라고 이리 오라고, 그렇게 새벽 안개는 너울너울 비취빛의 손짓을 한다. 날이 맑겠구나. 어스름 속에서 유혹하던 비취빛은 강원도 진부에 도착하였을 때 태양의 뜨거운 등장과 함께 숲으로 은신한다.

오대산 전나무숲
젊은날 꿈결에 보았던 풍경. 이 가난한 시간에 그 찬란하였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런가

아침 10시 월정사 일주문. 전나무 숲은 어둑시근하고 계곡은 빙설로 덮혀 하얗다. 인적이 없다. 서너 시간이면 일상의 전체를 버리는 일도 가능하고, 일상을 저 멀리 놓고 관조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러한 것이거늘 무에그리 사랑하고 무에그리 아파하는가! 님과의 인연으로 아파하며 살아가는 법도 배우고, 또 님과의 인연을 끊고 허무해지는 법도 배워야 하리.

계곡의 빙설로 발길을 옮겨 미끄러져 간다. 길게 길게 방향 없이 선회하는 나그네의 발길은 어린아이의 유희처럼 즐겁다. 이 새하얗게 빛나는 유희의 공간에서 시름없이 유희하는 것은 그러나 자연의 소리들이다. 간혹 휭 하니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 존재는 종적이 없다. 도란도란 물소리, 그 유려한 굴곡으로, 그 경이로운 결을 이루며 흐른다. 흐른다, 지극히 맑고 투명한 존재가 되어 흐른다. 심장을 후비는 저 흐름, 저 투명한 존재를 향한 이 간절한 사랑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으리.

메마르게 헤매던 젊은날 꿈결에 보았던 천연색의 풍경. 봉긋한 산봉우리 사이에 눈 덮힌 계곡이 있고, 그 계곡으로 투명한 물이 졸졸졸 흐르던 꿈. 차가운 날씨였으나 선선함과 시원함의 감각으로 다가오던 기운. 나그네는 오늘 그 꿈을 정녕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이 가난한 시간에 그 찬란하였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산 위로 갓 떠오른 태양으로 허공은 백색으로 찬란하고, 계곡은 사상 유례없이 빛을 뿜어내며 전나무 숲마저 희부옇게 만들지만, 나그네의 마음은 끝내 꽃을 틔우지 못한다. 이내 가난한 마음은 단촐한 삶으로 만족함을 배워왔으니 숲의 찬란함마저 차마 감당하지 못하거니, 숲이여 지금 그대 홀로 찬란하더라도 용서하시라.

 
부디 정결한 염원을 안고 타종하소서
 

오대산 겨울숲
겨울 숲의 오대산. 눈물을 뿌릴지언정 이 허무하고 이 아름다운 순간을 버리지는 않으리라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을 바라보며 한 줄기 온기를 간직하고 상원사로 향하다. 한암 스님의 부도. 옛날의 부도와 현대의 부도는 왜 이렇게 격이 차이나는 것일까. 신심의 결여 때문이리. 돌 하나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의 차이, 자신의 몸을 희생할 수 있는 신심의 있고 없음의 차이. 밥을 굶는다하더라도 길을 갈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서 분출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인간의 위대함을 알았으리오. 신심은 연약한 이들의 몫이라고들 하지만 한 줄기 막힘 없는 거센 물줄기와도 같더라. 하여 그 물줄기를 타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에게 누가 그 길을 가르쳐 주었던가. 숲을 향하여 눈길을 던진다.

상원사 전면의 오대산 숲이 빛난다. 새벽에 보았던 안개의 비취빛이 모두 이 숲으로 숨어든 모양이다. 산등성이 나무들은 백색 광채로 하여 형체가 모호하고 그 밑층의 나무들은 희멀건 그림자처럼 서 있다. 오직 계곡 가까이에 자리잡은 나무들만이 그림자를 짙게 드리고 있다. 거의 티를 내지 않고 곧게곧게 나리는 겨울 허공의 햇살, 숲을 향하여 색채의 경계를 쪼는 칼날같은 광채. 촉촉한 겨울숲은 햇살로 하여 존재의 무게를 잃고 무산하는 듯하다.

상원사 동종 비천상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 위대한 순간에 위대하게 정지해버렸다

이 순간의 광채가 오대산 숲을 향했던 나그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다. 이곳에 머물리라, 이 순간에 하염없이 머물리라. 눈물을 뿌릴지언정 이 허무하고 이 아름다운 순간을 버리지는 않으리라. 그리하여 비천상.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은 지금 막 비상하려는 참이다. 옥빛 옷자락을 훌훌 휘날리며 이곳에 내려왔다가 둥실 반전하는 순간, 공후와 생황의 연주 소리가 들리는 듯 아니 들리는 듯. 그 음악은 지금 절묘한 반전부를 타고 있다.

웅혼한 기상, 절도 있는 되풀이, 맺고 풂의 절묘한 배합, 그 리듬과 함께 비천이 이곳에 나리는가 싶더니 아연 빛을 반짝반짝 흩뿌리며 유연하면서도 중후한 안단테. 오호라, 이 순간에 비천이 멈춰버렸다. 그 음악은 수행의 타종소리와 함께라야만 이어질 뿐 더 이상의 진행은 없다.

모든 위대한 것에는 정지가 있고 또 재생이 있으니 부디 수행하는 이는 정결한 염원을 안고 타종하소서. 그 음악이 지극히 신묘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다 하여도 듣고 배우리이다.

 
오체투지하는 마음은 얻기 어렵고
 

적멸보궁 오르는 길, 신라시대의 자장율사가 인류사의 위대한 스승 붓다의 물질적 정표를 안고 올랐던 길. 마음속에서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릴지라도 마음 밖에서는 실상 아무 일도 없다. 마음만으로는 풀 한 포기 곱게 누일 수 없고, 마음만으로는 연인의 살결을 어루만질 수 없다. 나뭇가지에 엉켜버린 풀 한 포기 곱게 누이며 천하를 위로하고 또 나를 위로할 수도 있으니, 마음 밖에 진리의 법이 없다한들 마음 밖에 위로가 마냥 없지는 않다.

적멸보궁 오르는 길, 마음 밖의 위로를 찾아가는 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가(禪家)의 답이 제아무리 크고 높다한들, 붓다가 적멸한 흔적 앞에서 오체투지하고픈 인간의 간절한 소망은 어찌할 것인가. 오체투지와 함께 일각을 이룰 수도 있으리. 대중의 신심과 선지식의 신심은 차원이 다르다지만, 선지식도 한 생각 어리석으면 대중과 다를 바 없고 대중도 한 생각 지혜로우면 선지식과 다를 바 없으리.

스승 앞에서 오체투지하든 스승과 대결하든, 그러나 나그네만은 인간의 생이 신비롭기 끝이 없어 사랑도 아픔도 여읠 수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품지 못하니 한 생각도 지혜로울 수 없다.

오대산 비로봉에 조금 못 미쳐 자리잡은 적멸보궁에 이르기까지 산길은 내내 안온하다. 중대 사자암을 지나치면 거의 다 오른 셈이다. 한창 중창 중인 중대 사자암을 아쉬워하다. 근대의 고승 한암 스님이 나이 오십이 넘어서 봉은사의 조실 자리를 마다하고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며 이곳 오대산 골짜기로 숨어들어 지팡이를 꽂았던 곳이다.

적묵한 곳에서 말없는 학이 되어 끝내 사자후를 토하려고 사자암에 거하였는가. 이 암자의 명명자는 붓다의 진신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사자가 되려고 사자암이라 일렀을 것인가. 그 누구든 사자가 되어 사자후를 토하라는 선승들의 일갈은 이토록 질긴 세월을 타고 오늘 이곳을 처음 찾은 나그네의 심장에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오대산 적멸보궁
적멸보궁 오르는 길. 오체투지하려고 저 정수리로 오르는 이들에게는 한 올의 막연함도 없으리

물 한 모금으로 정신을 축이고 모퉁이를 돌면 드디어 가파른 나선형의 계단. 그 위로 희끗 보이는 적멸보궁.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올려보니 맑은 겨울 하늘. 길 위에는 군데군데 하얀 눈. 바람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와 이내 나그네의 전신을 휘감으며 살결을 차갑게 한다. 적멸보궁이 선 곳은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산봉우리의 정수리. 붓다의 진신이 지척에 있어도 그 가르침을 모르면 모든 게 허사이리. 나그네의 감각에는 붓다의 몸이 수천년의 세월을 건너 있는 듯. 붓다의 가르침도 그렇게 건너 있는 듯. 막연하다.

이 추운 겨울날에 오체투지하려고 인생의 정수리로 오르는 사람 몇몇. 저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모른다한들, 오체투지하는 한 순간에 인간사 생노병사의 비밀을 단박에 깨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저들에게는 한 올의 막연함도 없으리. 오체투지하는 한 순간에는 사자처럼 사자후를 토하며 물러섬이 없으리.

상원사 동종의 비천을 보듯 적멸보궁 문밖에서 촛불의 그림자로 오체투지하는 이들을 보다.

부디 정결한 염원을 안고 오체투지하소서. 그 순간만큼은 사랑도 아픔도 여의고 청정과 고요 속에서 오체투지하소서. 온전히 오체투지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얻기 어렵다지만, 나그네도 언젠가는 당신들처럼 깨쳐 이루리이니.
[2004년 글]

사랑도 아픔도 여의지 못하고 — 오대산 적멸보궁을 오르다”에 대한 3개의 댓글

  • 이 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때부터 문체가 비로소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허구헌날 서양인문학 책만 읽다가 그쪽의 문체에 익숙해 있었더랬는데, 이 글부터는 그런 문체를 벗어나기 시작했답니다.

    Gosinga
  • 멋진곳을 들렸네요…. 조용할때 들려서 끝까정 읽어나갈께요
    좋은글감사해요

    주목
  • 끝까지 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조용해지는 곳이 되고 싶어요.

    Gosinga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