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제16품, “사랑하는 것”

209 허튼짓에 자신을 몰입하고
유가瑜伽에 몰입하지 않는 자,
자신을 버리고 사랑하는 것에 사로잡힌 자 ―
그는 ‘자신에게 몰입하는 자’를 부러워한다.[1]“허튼짓(ayoga)”은 “유가瑜伽(yoga)”와 반대말이지만 용례가 많지 않아 뜻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장로게」 제320송의 “허튼짓에 자신을 몰입하여 일거리를 찾는 사람”, 「법구경」 제282송의 “유가瑜伽에서 광활함이 생기고, 허튼짓에서 광활함이 파괴된다”는 경문과 함께 비추어보면, “허튼짓(ayoga)”은 ‘스스로에게 몰입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는 것 등등의 바깥 일거리에 자기 자신이 팔려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반대로 ‘스스로에게 몰입함’이 바로 유가瑜伽, 즉 요가라고 할 수 있다.
 
「법구경」 제16품 전체 구조를 보면, “허튼짓”은 제209송에서 제216송까지 예시되는 바, “사랑하는 것”, “애정”, “즐김”, “욕락”, “갈애” 등이 그것이다. “허튼짓”의 귀결은 슬픔과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허튼짓들을 떠나 “戒와 見을 갖춤”에서부터 시작하여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자”(제217송), “이 세간에서 저 세간으로 간 자”(제220송)가 탄생한다. 그는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먼 곳에서 무사히 돌아온 장부”(제219송)이다.

210 사랑하는 것들과 만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것들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것들을 보지 못함도 괴로움이요,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봄도 괴로움이다.

211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것을 잃음은 혹독하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없는 자들 ―
그들에게는 속박 없어라.

212 사랑하는 것에서 슬픔이 탄생하며
사랑하는 것에서 두려움이 탄생한다.
사랑하는 것에서 완연히 해탈한 자 ―
그는 어디서든 슬픔도 두려움도 없어라.

213 애정에서 슬픔이 탄생하며
애정에서 두려움이 탄생한다.
애정에서 완연히 해탈한 자 ―
그는 어디서든 슬픔도 두려움도 없어라.

214 즐김에서 슬픔이 탄생하며
즐김에서 두려움이 탄생한다.
즐김에서 완연히 해탈한 자 ―
그는 어디서든 슬픔도 두려움도 없어라.

215 욕락에서 슬픔이 탄생하며
욕락에서 두려움이 탄생한다.
욕락에서 완연히 해탈한 자 ―
그는 어디서든 슬픔도 두려움도 없어라.

216 갈애(愛)에서 슬픔이 탄생하며
갈애에서 두려움이 탄생한다.
갈애에서 완연히 해탈한 자 ―
그는 어디서든 슬픔도 두려움도 없어라.

217 계戒와 봄(見)[2]“봄(見, dassana)”은 일반적으로 육촉처, 오취온, 사대, 제법 등등의 집멸集滅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법들의] 집멸을 여실하게 알아차림(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을 두고 “봄(見)의 청정”이라 한다. (「상응부」 제35.245경, “킹수카 경” 참고) 을 갖춘 자,
법과 도리를 참되게 말하는 자,
자신의 행업을 행하는 자 ―
그를 사람들은 사랑스러워 한다.

218 ‘밝혀내지 못한 바’[3]경전에서 세존에 대하여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길을 밝혀내신 분(anakkhātassa maggassa akkhātā)”으로 호칭되듯이, “밝혀내지 못한 바”라 함은 스스로가 눈이 어두워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것을 말한다.에 欲이 생긴 자,[4]“欲이 생긴 자”에서 “欲(chanda)”은 경전에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쓰인다. “欲”은 마음의 갈피와 갈래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비유컨대 “欲”은 ‘두 갈래 갈림길 중 어느 하나를 수용하여 그 길을 가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欲”으로부터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D ii.277)이 분기되어 실행되며, 때로는 (긍정적으로) ‘선법/불선법’이 분기되어 실행된다. 가령 “밝히지 못한 것에 欲이 생긴 자”(제218송)는 선법善法의 수용, 그리고 ‘애증・시비・유무에 欲이 생긴 자’는 불선법의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중부」 제70경의 “법을 듣는 자는 간직하며, 법을 간직하는 자는 법들의 도리를 살펴보며, 법들의 도리를 살펴보는 자는 법을 흔연히 수용하며, 법을 흔연히 수용함으로써 念과 欲이 생긴다”는 경문은, 어느 한 갈림길을 수용함으로써 欲이 생김을 말해 준다.
 
아울러 제218송에서 “欲이 생긴 자”와 “意로 가득한 자”가 밀접하게 언급된 것으로 보아 “欲”은 意의 기능과 가까운 관계로 짐작되며, 이 두 구句의 의미를 싸잡아 이르는 용어가 바로 “의욕意欲”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意로 가득한 자[5]“意로 가득한 자”는 용례가 워낙 드물어 본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意가 “身계발, 心계발, 慧계발”이라는 세 단계 수행 중에서 身계발과 관련된 것임을 미루어 볼 때, 身계발에 전념하는 자를 두고 “意로 가득한 자”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意로 가득하다”는 것은 색・성・향・미・촉이라는 다양한 것들을 넘어서는 단계, 즉 色界를 넘어서는 단계인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心이 다시는 욕락들에 매이지 않는 자”라는 불환자(=색구경천色究竟天에 오른 자)의 전제 조건으로 “意로 가득한 자”가 언급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되라.
心이 다시는 욕락들에 매이지 않는 자를 일러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자[6]“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자(uddhaṃsoto)”는 불환과를 지칭하는 낱말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라는 정형구로 쓰인다.라 한다.[7]제218송은 「장로니게」 제12송의 형식과 동일하지만, 다만 “밝혀내지 못한 것” 대신 (드문 낱말인) “종국終局(avasāya)”이 등장하고 단수명사들이 모두 복수명사로 되어 있다.

219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먼 곳에서 무사히 돌아온 장부는
친척들과 친구들, 동료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220 그와 마찬가지로 공덕[8]앞서 주석에서 언급했다시피, 경의 용례를 보면 “공덕(puñña)”은 ‘보시, 베풂’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쓰인다. “베푸는 자에게는 공덕이 증장하며, 조심하는 자에게는 미움이 쌓이지 않는다”(D ii.136)는 게송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아가 사념처라는 행처에서 노니는 것을 두고도 “공덕”(D iii.58)이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선법들을 수지해야 한다. 요컨대, “공덕”은 구체적으로는 승가나 비구・비구니 등에 대한 보시나 베풂을 뜻하며, 수습차제상으로는 선법들을 수지하고 사념처라는 행처에서 노니는 것을 뜻한다.을 지은 자,
이 세간에서 저 세간으로 간 자도
공덕들이 사랑스럽게 맞아들인다,
친척들이 돌아온 자를 그리하듯이.

209 ayoge yuñjaṃ attānaṃ yogasmiñ ca ayojayaṃ
atthaṃ hitvā piyaggāhī pihet’ attānuyoginaṃ.

210 mā piyehi samāgañchi appiyehi kudācanaṃ,
piyānaṃ adassanaṃ dukkhaṃ appiyānañ ca dassanaṃ.

211 tasmā piyaṃ na kayirātha piyāpāyo hi pāpako,
ganthā tesaṃ na vijjanti yesaṃ n’ atthi piyāppiyam.

212 piyato jāyatī soko piyato jāyatī bhayaṃ,
piyato vippamuttassa n’ atthi soko kuto bhayaṃ.

213 pemato jāyatī soko pemato jāyatī bhayaṃ,
pemato vippamuttassa n’ atthi soko kuto bhayaṃ.

214 ratiyā jāyatī soko ratiyā jāyatī bhayaṃ,
ratiyā vippamuttassa n’ atthi soko kuto bhayaṃ.

215 kāmato jāyatī soko kāmato jāyatī bhayaṃ,
kāmato vippamuttassa n’ atthi soko kuto bhayaṃ.

216 taṇhāya jāyatī soko taṇhāya jāyatī bhayaṃ,
taṇhāya vippamuttassa n’ atthi soko kuto bhayaṃ.

217 sīladassanasampannaṃ dhammaṭṭhaṃ saccavādinaṃ
attano kamma kubbānaṃ taṃ jano kurute piyaṃ.

218 chandajāto anakkhāte manasā ca phuṭo siyā
kāmesu ca appaṭibaddhacitto uddhaṃsoto ti vuccati.

219 cirappavāsiṃ purisaṃ dūrato sotthim āgataṃ
ñātimittā suhajjā ca abhinandanti āgataṃ.

220 tath’ eva katapuññam pi asmā lokā paraṃ gataṃ
puññāni paṭigaṇhanti piyaṃ ñātīva āgataṃ.

* 각주   [ + ]

1. “허튼짓(ayoga)”은 “유가瑜伽(yoga)”와 반대말이지만 용례가 많지 않아 뜻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장로게」 제320송의 “허튼짓에 자신을 몰입하여 일거리를 찾는 사람”, 「법구경」 제282송의 “유가瑜伽에서 광활함이 생기고, 허튼짓에서 광활함이 파괴된다”는 경문과 함께 비추어보면, “허튼짓(ayoga)”은 ‘스스로에게 몰입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는 것 등등의 바깥 일거리에 자기 자신이 팔려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반대로 ‘스스로에게 몰입함’이 바로 유가瑜伽, 즉 요가라고 할 수 있다.
 
「법구경」 제16품 전체 구조를 보면, “허튼짓”은 제209송에서 제216송까지 예시되는 바, “사랑하는 것”, “애정”, “즐김”, “욕락”, “갈애” 등이 그것이다. “허튼짓”의 귀결은 슬픔과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허튼짓들을 떠나 “戒와 見을 갖춤”에서부터 시작하여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자”(제217송), “이 세간에서 저 세간으로 간 자”(제220송)가 탄생한다. 그는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먼 곳에서 무사히 돌아온 장부”(제219송)이다.
2. “봄(見, dassana)”은 일반적으로 육촉처, 오취온, 사대, 제법 등등의 집멸集滅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법들의] 집멸을 여실하게 알아차림(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을 두고 “봄(見)의 청정”이라 한다. (「상응부」 제35.245경, “킹수카 경” 참고) 
3. 경전에서 세존에 대하여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길을 밝혀내신 분(anakkhātassa maggassa akkhātā)”으로 호칭되듯이, “밝혀내지 못한 바”라 함은 스스로가 눈이 어두워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것을 말한다.
4. “欲이 생긴 자”에서 “欲(chanda)”은 경전에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쓰인다. “欲”은 마음의 갈피와 갈래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비유컨대 “欲”은 ‘두 갈래 갈림길 중 어느 하나를 수용하여 그 길을 가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欲”으로부터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D ii.277)이 분기되어 실행되며, 때로는 (긍정적으로) ‘선법/불선법’이 분기되어 실행된다. 가령 “밝히지 못한 것에 欲이 생긴 자”(제218송)는 선법善法의 수용, 그리고 ‘애증・시비・유무에 欲이 생긴 자’는 불선법의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중부」 제70경의 “법을 듣는 자는 간직하며, 법을 간직하는 자는 법들의 도리를 살펴보며, 법들의 도리를 살펴보는 자는 법을 흔연히 수용하며, 법을 흔연히 수용함으로써 念과 欲이 생긴다”는 경문은, 어느 한 갈림길을 수용함으로써 欲이 생김을 말해 준다.
 
아울러 제218송에서 “欲이 생긴 자”와 “意로 가득한 자”가 밀접하게 언급된 것으로 보아 “欲”은 意의 기능과 가까운 관계로 짐작되며, 이 두 구句의 의미를 싸잡아 이르는 용어가 바로 “의욕意欲”이라고 할 수 있다.
5. “意로 가득한 자”는 용례가 워낙 드물어 본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意가 “身계발, 心계발, 慧계발”이라는 세 단계 수행 중에서 身계발과 관련된 것임을 미루어 볼 때, 身계발에 전념하는 자를 두고 “意로 가득한 자”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意로 가득하다”는 것은 색・성・향・미・촉이라는 다양한 것들을 넘어서는 단계, 즉 色界를 넘어서는 단계인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心이 다시는 욕락들에 매이지 않는 자”라는 불환자(=색구경천色究竟天에 오른 자)의 전제 조건으로 “意로 가득한 자”가 언급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6.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자(uddhaṃsoto)”는 불환과를 지칭하는 낱말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라는 정형구로 쓰인다.
7. 제218송은 「장로니게」 제12송의 형식과 동일하지만, 다만 “밝혀내지 못한 것” 대신 (드문 낱말인) “종국終局(avasāya)”이 등장하고 단수명사들이 모두 복수명사로 되어 있다.
8. 앞서 주석에서 언급했다시피, 경의 용례를 보면 “공덕(puñña)”은 ‘보시, 베풂’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쓰인다. “베푸는 자에게는 공덕이 증장하며, 조심하는 자에게는 미움이 쌓이지 않는다”(D ii.136)는 게송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아가 사념처라는 행처에서 노니는 것을 두고도 “공덕”(D iii.58)이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선법들을 수지해야 한다. 요컨대, “공덕”은 구체적으로는 승가나 비구・비구니 등에 대한 보시나 베풂을 뜻하며, 수습차제상으로는 선법들을 수지하고 사념처라는 행처에서 노니는 것을 뜻한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