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자신품」

157 자신이 소중함을 안다면
자신을 잘 지켜야 하나니,
밤의 세 때 중
한 때는 다시 깨어야 한다,[1]“밤의 세 때 중 한 때”라 함은,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눈 뒤 다시 밤을 세 때로 나누었을 때, 밤의 마지막 때를 말한다. 「증지부」 제3.16경에서는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말하나니,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하며, 밤의 첫 때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하며, 밤의 중간 때에는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워 발에 발을 올리고, 유념하고 알아차리면서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유의하고, 밤의 마지막 때에는 다시 일어나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한다”고 설하고 있으며, 이 경문은 다른 경에 십여 차례 등장하는 정형구이기도 하다. 현자라면!

158 우선 자신부터
제대로 잡혀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남을 가르쳐야 하며
오염[2]“오염(kilesa)”은 일반적인 뜻으로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한편으론 “갈망, 원망, 혼침・수면, 도거・악작, 의혹”이라는 “다섯 장애(五障)” 혹은 “다섯 덮개(五蓋)”가 대표적인 “오염원(upakkilesa)”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제158송을 넓게 해석하자면, “자신을 제대로 잡음”과 “오염되지 않음”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장애가 되는 법들”이 걷힌 현자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 아울러 제157송의 “밤의 세 때 중 한 때에 다시 깨어”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하는 일과 제158송의 “오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두 송이 “깨어있음”, “마음의 청정”, “오염되지 않음”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깨어있음”과 “오염되지 않음”이 곧바로 연결되는 주제는 아니지만, 니카야 경전 전체를 배경으로 살펴보면 긴밀히 연계된 주제인 것이다.이 되지 않아야 한다, 현자라면!

159 남을 가르친 대로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길들기는 참으로 어렵나니
잘 길든 자가 [남을] 길들게 할 것이다.

160 자신이 정녕 자신의 보호자이니,
어찌 남이 보호자가 되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길듦으로써
[자신의] 보호자로 삼기는 어려워라!

161 자신에 의해 지어진 악惡은
자신에게서 생겨나 존재하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자 자신을 부순다,
마치 금강이 보석을 부수듯이!

162 말루바 넝쿨[3]학명은 Bauhinia vahlii로, 다년생 넝쿨식물이다.이 살라나무[4]학명은 Shorea robusta로, 사라수娑羅樹로 한역되었다.에 엉겨붙듯
계戒가 아주 나쁜 자 ―
그는 자신에게 행하기를
적이 원하는 바를 행한다.

163 자신에게 좋지 않고
해로운 일은 행하기 쉽되,
유익하고 좋은 일은
극히 행하기 어렵다.

164 아라한들, 성자들,
삶이 법다운 자들의 가르침을
비난하는 어리석은 자는
악한 견해에 의지하여 비난하는 것이니,
그는 대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자멸한다.

165 자신에 의해 지어진 악은
자신에 의해 오염된 것이니,
자신에 의해 지어진 악은
자신에 의해 청정해진다.
청정도 부정不淨도 각자에 의한 것이니
그 누구도 남을 청정케 하지 못한다.

166 ‘남의 이로움(利他)’과 더불어
‘자신의 이로움(自利)’도 소홀히 하지는 말라.[5]제166송은 불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성구와 관련된 경구로 보인다. “자리이타”라는 용어는 「잡아함경」, 「별역잡아함경」을 비롯하여 여러 한역 경전에 보인다. 그리고 “자리이타”의 뜻은 「상응부」 제12.22경(S ii.28)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경의 맥락에 따르면, “자리自利”는 출가비구의 이로움을 뜻하며, “이타利他”는 “가사・탁발・좌와처・병구완・약품조제”를 보시하는 자들의 이로움을 말한다. 출가비구가 정진함으로써 결실과 성과를 맺는 것이 곧 “自利”이며, 이 “自利”의 성취와 동시에 “利他”가 성취된다. 그러므로 “自利”가 곧 “利他”인 셈이다.
 
나아가 다른 경(「상응부」 제46.55경, 「증지부」 제3.54경 참고)에서는 “나의 이로움”과 “남의 이로움”, “자타의 이로움”은 다섯 장애와 탐진치가 없어 마음이 청정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로움”이라고 번역한 “attha”는 마음이 청정한 자의 앎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제165송(“청정”)과 제166송(“이로움”)은 한 주제로 묶일 수 있다. (“attha”는 일반적으로 “이로움, 이익, 유익, 목적, 이상, 뜻” 등의 다양한 의미로 번역된다.) 다음은 “자리이타”와 직접 관련된 「상응부」 제12.22경의 결말 부분이다:
 
“비구들이여, 방만한 자는 나쁜 불선법들에 뒤덮여 괴롭게 지내며 큰 ‘참된 이로움’을 저버린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정진이 시작된 자는 나쁜 불선법들에서 벗어나 안락하게 지내며 큰 ‘참된 이로움’을 이룬다. 비구들이여, 저열한 것으로는 으뜸가는 것을 얻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으뜸가는 것으로 으뜸가는 것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 범행梵行이 최상의 음료이며, 스승이 면전에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라,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하여 우리의 이 출가생활은 불모가 아니요 결실이 있고 결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가사・탁발・좌와처・병구완・약품조제를 받고 있으니, 그들의 합심은 우리에게서 큰 결실이 될 것이며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혹은 ‘자신의 이로움(自利)’을 보고 불방일함으로써 [자신의 이로움을] 성취해야 하며, 비구들이여, 혹은 ‘남의 이로움(利他)’을 보고 불방일함으로써 [남의 이로움을] 성취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혹은 ‘자타의 이로움(自他俱利)’을 보고 불방일함으로써 [자타의 이로움을] 성취해야 한다.”

자신의 이로움을 확연히 알고서
‘참된 이로움’ 을 좇는 자 되라.

157 attānañ ce piyaṃ jaññā rakkheyya naṃ surakkhitaṃ,
tiṇṇaṃ aññataraṃ yāmaṃ paṭijaggeyya paṇḍito.

158 attānam eva paṭhamaṃ patirūpe nivesaye,
ath’ aññam anusāseyya, na kilisseyya paṇḍito.

159 attānañ ce tathā kayirā yath’ aññam anusāsati
sudanto vata dametha, attā hi kira duddamo.

160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 hi sudantena nāthaṃ labhati dullabhaṃ.

161 attanā va kataṃ pāpaṃ attajaṃ attasambhavaṃ
abhimatthati dummedhaṃ vajiraṃ v’ amhamayaṃ maṇiṃ.

162 yassa accantadussīlyaṃ māluvā sālam iv’ otataṃ
karoti so tath’ attānaṃ yathā naṃ icchatī diso.

163 sukarāni asādhūni attano ahitāni ca,
yaṃ ve hitañ ca sādhuñ ca taṃ ve paramadukkaraṃ.

164 yo sāsanaṃ arahataṃ ariyānaṃ dhammajīvinaṃ
paṭikkosati dummedho diṭṭhiṃ nissāya pāpikaṃ
phalāni kaṭṭhakasseva attaghaññāya phallati.

165 attanā va kataṃ pāpaṃ attanā saṃkilissati,
attanā akataṃ pāpaṃ attanā va visujjhati,
suddhī asuddhī paccattaṃ nāñño aññaṃ visodhaye.

166 attadatthaṃ paratthena bahunā pi na hāpaye,
attadattham abhiññāya sadatthapasuto siyā.

* 각주   [ + ]

1. “밤의 세 때 중 한 때”라 함은,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눈 뒤 다시 밤을 세 때로 나누었을 때, 밤의 마지막 때를 말한다. 「증지부」 제3.16경에서는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말하나니,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하며, 밤의 첫 때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하며, 밤의 중간 때에는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워 발에 발을 올리고, 유념하고 알아차리면서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유의하고, 밤의 마지막 때에는 다시 일어나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한다”고 설하고 있으며, 이 경문은 다른 경에 십여 차례 등장하는 정형구이기도 하다.
2. “오염(kilesa)”은 일반적인 뜻으로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한편으론 “갈망, 원망, 혼침・수면, 도거・악작, 의혹”이라는 “다섯 장애(五障)” 혹은 “다섯 덮개(五蓋)”가 대표적인 “오염원(upakkilesa)”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제158송을 넓게 해석하자면, “자신을 제대로 잡음”과 “오염되지 않음”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장애가 되는 법들”이 걷힌 현자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 아울러 제157송의 “밤의 세 때 중 한 때에 다시 깨어”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케 하는 일과 제158송의 “오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두 송이 “깨어있음”, “마음의 청정”, “오염되지 않음”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깨어있음”과 “오염되지 않음”이 곧바로 연결되는 주제는 아니지만, 니카야 경전 전체를 배경으로 살펴보면 긴밀히 연계된 주제인 것이다.
3. 학명은 Bauhinia vahlii로, 다년생 넝쿨식물이다.
4. 학명은 Shorea robusta로, 사라수娑羅樹로 한역되었다.
5. 제166송은 불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성구와 관련된 경구로 보인다. “자리이타”라는 용어는 「잡아함경」, 「별역잡아함경」을 비롯하여 여러 한역 경전에 보인다. 그리고 “자리이타”의 뜻은 「상응부」 제12.22경(S ii.28)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경의 맥락에 따르면, “자리自利”는 출가비구의 이로움을 뜻하며, “이타利他”는 “가사・탁발・좌와처・병구완・약품조제”를 보시하는 자들의 이로움을 말한다. 출가비구가 정진함으로써 결실과 성과를 맺는 것이 곧 “自利”이며, 이 “自利”의 성취와 동시에 “利他”가 성취된다. 그러므로 “自利”가 곧 “利他”인 셈이다.
 
나아가 다른 경(「상응부」 제46.55경, 「증지부」 제3.54경 참고)에서는 “나의 이로움”과 “남의 이로움”, “자타의 이로움”은 다섯 장애와 탐진치가 없어 마음이 청정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로움”이라고 번역한 “attha”는 마음이 청정한 자의 앎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제165송(“청정”)과 제166송(“이로움”)은 한 주제로 묶일 수 있다. (“attha”는 일반적으로 “이로움, 이익, 유익, 목적, 이상, 뜻” 등의 다양한 의미로 번역된다.) 다음은 “자리이타”와 직접 관련된 「상응부」 제12.22경의 결말 부분이다:
 
“비구들이여, 방만한 자는 나쁜 불선법들에 뒤덮여 괴롭게 지내며 큰 ‘참된 이로움’을 저버린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정진이 시작된 자는 나쁜 불선법들에서 벗어나 안락하게 지내며 큰 ‘참된 이로움’을 이룬다. 비구들이여, 저열한 것으로는 으뜸가는 것을 얻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으뜸가는 것으로 으뜸가는 것을 얻는다. 비구들이여, 이 범행梵行이 최상의 음료이며, 스승이 면전에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라,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하여 우리의 이 출가생활은 불모가 아니요 결실이 있고 결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가사・탁발・좌와처・병구완・약품조제를 받고 있으니, 그들의 합심은 우리에게서 큰 결실이 될 것이며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혹은 ‘자신의 이로움(自利)’을 보고 불방일함으로써 [자신의 이로움을] 성취해야 하며, 비구들이여, 혹은 ‘남의 이로움(利他)’을 보고 불방일함으로써 [남의 이로움을] 성취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혹은 ‘자타의 이로움(自他俱利)’을 보고 불방일함으로써 [자타의 이로움을] 성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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