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낸다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이창호 대 장쉬 관전기

농심신라면배는 한중일 간 국가바둑대항전으로 국가별로 각 5명의 기사가 출전하여 승자는 계속 두고 패자는 물러나는 체제로 진행됩니다. 결국, 최종 승자로 남은 국가가 승리하는 단체전입니다. 제6회 농심신라면배는 2004/2005 시즌에 벌어졌으며, 한국은 이미 2차전에서 이창호 9단만 홀로 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종 3차전을 각 2명이 생존한 일본·중국과 대회전을 치루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창호 9단은 2차전을 포함 5연승으로 최종 승자로 남아 한국이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관전기는 최종3차전 첫 판인 이창호 9단 대 일본의 장쉬 9단의 대국에 대하여 쓴 것으로, 제가 apolis라는 필명으로 2005년 2월 28일에 이창호 홈페이지에 올린 것입니다. 불교를 모르던 시절에 쓴 것이었는데 불교용어가 눈에 띄는 것이 이채롭네요.

포석에서는 다소 앞서 나갔다. 중반 들어서 느긋한 수순이 이어져 형세가 어려워졌는데 마지막에 운이 따라줬다.
— 이창호 9단의 인터뷰에서

한 판의 바둑을 이기기 위해서는 바둑에 대한 집중력이 관건이다. 이 집중력을 중시한 바둑격언 중의 하나가 바로 “반전무인”이며, “승부 외적인 요소에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 역시 그렇다. 그런데 이때 집중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집중을 의미할까? 나는 앞으로 놓아야 할 한 수에 대한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한 판의 좋은 바둑을 위해 바둑 외적인 요소에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면, 이와 유추적으로 말해, 최선의 한 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한 수 이외의 요소에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집중을 위해서는, 지금 막 놓인 한 수 이전의 바둑 내용에 집착하거나 신경쓰지 않아야 한다. 가령, 방금 상대가 놓은 한 수가 자신이 놓은 이전의 수를 무력화시키는 수였다고 치자. 그럴 경우에, 자신이 놓은 이전의 수가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할 수는 있으나, 그 수가 잘못되었다는 평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자책할 필요는 더더구나 없다. 자신의 수가 선하건 악하건 이미 그 수가 놓인 이상 더 이상 그 선악의 사태를 변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이미 벌어진 사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둑을 두다 보면 누구나 그 사실에 대하여 반항하려고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좀더 생각하고 두었어야 하는데…’ 등등, 변경 불가능한 사태에 대하여 회한과 분노의 감정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이와 정반대로 자신이 놓은 훌륭한 수에 대하여 긍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이제 앞으로 놓아야 할 한 수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고, 바둑 내용을 그르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한 판의 바둑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호오의 감정들로부터 매 수마다 자유로와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창호 9단은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누구보다 자유롭다. 가령, 이창호 9단은 대국후에 “초반에는 좋았으나 중반의 실수로 형세가 좋지 않았다” 하는 식으로 자신의 바둑을 평가한다. 그의 평가처럼 그 역시 실수를 한다. 그러나 그는 바둑을 두는 동안 “중반의 실수”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실수 이후의 형세”에 집중한다. 바로 방금 놓인 상대의 수로 인하여 재편된 형세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수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지금 놓인 수를 시발로 하여 새롭게 마음을 내는 편을 택한다. 되도록이면 이전의 수들에는 감정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그는 자신이 놓은 수에 대한 체면이나 기세를 상대적으로 덜 중시할 것이다. “돌의 체면”이니 “기세의 한 수”니 하는 것은 한 수가 놓인 뒤에 따라오는 평가에 불과하다. 수에 대한 평가를 먼저 고려하여 수를 놓는다는 것은 진정한 고수의 몫이 아니다. 수에 대한 모든 평가는 언제나 수가 놓인 이후에 덧붙는 그림자일 뿐, 최선의 수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으로 유구하여 확고부동한 것일지라도 진정한 고수는 거기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양을 중시하는 수”, “정석” 등은 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고려하여 수를 놓는 것으로서, 차선의 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수 한수마다 새롭게 마음을 내는 기사라면, 자신이 이미 둔 수를 자랑스러워 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둔 수를 평가하더라도 그 평가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기사라면 자신이 둔 수와 상대가 둔 수를, 마치 바둑 고서에 등장하는 종이 위의 중반기보처럼 무감정으로 대하려고 할 것이다. 종이 위의 기보는 바꿀 수가 없다.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주어진 시간 내에, 방금 놓인 한 수를 시발점으로 하여, 최선의 수를 생각하여야 한다. – 이것이 한 판의 바둑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할 수있다.

이창호 9단은 이런 집중에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유독 어느 한 수에 대한 가치평가를 망설이는 편이다. 바둑이 끝나고 나서도 어느 한 수에 대하여 가치평가를 거의 하지 않는데, 하물며 바둑이 진행되는 동안에랴! 아마도 그는 앞으로 놓일 한 수에 대한 최대의 집중을 위하여 이전의 수들에 감정이 끄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놓인 자신의 수와 상대의 수를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는 하겠지만, 그 평가에 마음이 함몰되거나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로서는 이미 놓인 수들이 흡사 종이 위로 옮아간 확정된 기보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수 한수가 놓일 때마다 이전의 모든 수순들은 종이 위에 인쇄되어가는 기보와도 같다. 눈앞의 한 수만이 생기를 띨 뿐 다른 모든 것은 이미 죽어버린 수순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수 한수가 새롭다. 이와 같이, 이전의 수들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고 이제 놓일 한 수를 향하여 마음을 내는 것, 이것이 나는 이창호의 비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창호 9단이 늘상 말하는 “한판 한판 최선을 다할 뿐이다”는 인터뷰 내용을 “한수 한수 최선을 다할 뿐이다”는 의미로 읽는다.

대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어야 할 단수에는 지체없이 잇는 편에 속하지만, 그 뻔한 단수에도 불구하고 이창호 9단은 당장 잇지 않고 뜸을 들여 생각하기로 악명이 높다. 내가 보기에, 이 습관 아닌 습관은 적절한 시간 분배 차원이라기보다는 이창호 9단이 한수 한수에 대하여 얼마만큼 새롭게 집중하는가를 입증해 주는 좋은 예다. 뻔한 단수에 대하여 뜸을 들여 생각하는 것은 그가 바둑을 대하는 근본 마음자세와도 같다. 새롭게 한 수가 놓인 이상, 그 수가 너무나 뻔한 단수일지라도, 그 수로 인하여 바둑은 새롭다. 이창호 9단의 뜸들임은 바로 그 새로움을 음미하는 경건한 수순인 것이다.
 

팬들이나 이창호 9단 본인이나 농심신라면배 3차전에서 가장 심적인 부담을 가졌던 대국은 장쉬 9단과의 대국이었다. 그리고 장쉬 9단은 이창호 9단이 앞으로 상대할 네 명의 기사 중 가장 강하였으며, 이창호 9단과의 대결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열망한 기사였다. 그는 대국 전날 호텔에 당도하여, “나는 대국 전날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암시의 말을 남기고 공식 인터뷰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창호 9단은 객실 배정도 되지 않았는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장쉬 9단의 강렬한 열망과 이창호 9단의 심적인 부담이 맞물리면서 이미 전날부터 시작된 이 바둑은 그러나 이창호 9단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이 바둑을 지켜보면서 이창호 9단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장면1도를 보자. 장면1도가 시작되기 바로 전, 그리고 장면1도가 그려지는 동안, 한국편 관전자들은 조용하였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한국이 후반 30분까지 2-0으로 앞서다가 불과 5분 만에 연속 두 골을 먹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2 동점이 된 것이지만 게임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이것을 두고 바둑기사들은 “역전 분위기이다”고 말한다. 초중반 내내 끌려가던 장쉬 9단이 어느새 호각지세로 일어섰으니 한국 검토진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편의 관전자들은 환호작약했다. 관전자들과 검토기사들 사이에 팽배한 그 역전 분위기(말 그대로 분위기이다)에서, 하지만 이창호 9단은 아무도 모르게 중앙에 대한 노림수(물론 이창호 9단은 ‘노림’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를 작렬하기 위한 첫번째 수순을 둔다. 바로 좌하귀를 젖혀 잇는 것, 장면1도 흑5~7의 수순이었다. 이 수들은, 미세한 형세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한수 한수마다 바둑을 새롭게 바라본 결과물이었다. 중반 들어 자신이 느긋하게 두었던 수들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미세하게 된 형세에서, 일체의 감정을 배제시키고, 주어진 매 일분 내에, 새롭게 새롭게 바둑에 임한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초인적인 집중수행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장면1도(191~200)
이창호 9단이 흑5로 젖히는 순간 한국측 검토실은 “썰렁했다”

이창호 9단이 좌하귀를 젖히는 순간, 그러나 대국 현장의 해설자는 “(한국)검토실의 분위기가 썰렁하다”고 긴급 타전하였다. 불계승을 위한 본격적인 첫 수순이 놓이는 시점에서, 이창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침울하였다. 순간 올해 초 일련의 패배 대국들이 머리속에 스치며 “몰락”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들어왔을 것이다. 드디어 영웅의 몰락인가? 이렇게 몰락하는 것인가? 왜 하필 내가 보는 앞에서 몰락하는가? 어쩐지 가슴이 아프다. 관전자들의 눈에는 더 이상 국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수순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좌하귀를 젖힌 수는 중앙 백 두점을 잇는 수(백8)와의 맞보기일 뿐이었다. 젖혀 잇는 수가 평범한 끝내기 수순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끝내기 수순이거나 맞보기가 아니었다. 이창호 9단은 새롭게 마음을 내어 최선의 수를 찾고 있건만 최선의 수를 찾을 의무가 없는 관전자들은 이전의 수들에 대한 선악을 평가하기에만 급급하기에, 이러한 오해가 탄생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맞보기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중앙 백 두점을 백이 잇기(백8)를 기다린 다음, 이창호 9단은 중앙으로 한 칸 뛰어둔다(흑9), 그리고 백10. 이것이 장면1도이다. 이 장면1도에서 이창호 9단은 이미 중앙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정확한 수순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좌상귀를 선수하며 시간을 번다(장면2도 흑1). 장면2도의 흑1은 이창호 9단으로서는 시간을 벌기 위한 수순이기도 하고, 순조로운 끝내기 수순이기도 하다. 이럴 경우에 상대 대국자와 관전자들은 예외없이 이창호 9단의 끝내기 수순에 집중할 뿐, 정작 이창호 9단 본인이 무엇을 집중하고 있는가를 예측하지 못한다. 이것은 카드 게임에서 읽히지 않는 카드와도 같다.

장면2도(201~214)
이창호 9단은 시간을 연장시키며 중앙에 집중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의 집중처를 모르다

분명 중앙에 뭔가가 있다. 뭔가가 잡힌다. 좀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두 번째 시간을 벌기 위하여 역시 좌상귀에 거의 선수성 착수(흑3)를 하였을 때, 장쉬 9단은 우상귀 흑 한 점을 때린다(백4). 이것은 장래에 여의치 않을 경우에 흑이 강렬하게 패로 버틸 수도 있는 (백의 입장에서의) 불확정성을 제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이미 읽어두기라도 한 듯, 좌상귀를 다시 한번 침착하게 선수하고(흑5), 우상 중앙 쪽으로 패를 걸어 백을 굴복시키고 선수를 잡는다. 이제 다시 문제의 중앙이다. 이 중앙으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가.

장면3도(215~235)
흑은 중앙 백의 경계선 언저리를 천천히 선회비행 하더니…

장면3도는 이창호 9단이 중앙으로 들어가는 수순을 보여준다. 그는 수가 나는 곳인 결정적 고지 부근에서 좀 떨어진 변방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중앙 경계선 언저리를 배회하며 1분마다 한수 한수 찔러간다. 흑1, 흑3, 흑7, 흑9. 그는 수가 나는 결정적 지점에 근접해 있는 “A” 쪽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그는 흡사 먹이를 향하여 급강하하기 직전 공중을 선회하는 수리나 매와도 같다. 공중에 곡선을 그리며 비행하는 새의 정연한 움직임을 관찰하고서 비로소 다른 이들은 문득 예감을 하기 시작하였다. “뭔가가 있다!” 그러나 그 뭔가가 정확히 어떤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관전자들도 직감하는 마당에 대국자인 장쉬 9단이 예감하지 못할 리 없다. 불안과 흥분과 환호가 우우 일어선다. 평온했던 바다 위로 높은 파도가 삽시간에 일어선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관전자들의 흥분과는 상관없이 천천히 선회비행을 한다. 그리고 단수 한 방씩 딱 딱 친다(흑11, 흑15). 대국자와 관전자들의 흥분을 증폭시키기라도 하듯, 이창호 9단은 좌상귀와 좌하귀를 번갈아 선수하며(흑5, 흑13, 흑17, 흑19) 1분 1분의 시간을 유예시킨다. 이창호 9단이 좌상귀와 좌하귀를 한수 한수 마무리하면서 시간은 늘어지고, 그 늘어진 시간에 장쉬 9단은 자신의 심장을 향하여 최고속으로 급강하하고 있는 맹금을 느린 화면으로 목격한다. 아뿔싸, 피할 수가 없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마침내 중앙에 놓인 한 수 흑21. 이창호 9단의 정연한 수순이 모든 관전자들의 심층을 한 바탕 휘젓고 지나간다. 장쉬 9단은 차라리 이 수로 인하여 마음이 편하다. 사태가 평정되고 죽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후는 죽음을 정리하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이와같은 극적인 수순을 이창호 9단은 어떻게 보았을까? 물론 수읽기의 깊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전의 수에 머무르지 않고 매 수마다 새롭게 마음을 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두고 보통 “냉정한 판단”이라는 수사를 동원하지만, 그 정도의 수사로는 한 인간이 일생에서 몇 번 만나기 힘든 중차대한 국면을 서술하기는 역부족이다. 한수 한수마다 끊임없이 마음을 비워내고 새롭게 마음을 내는 근본적인 마음자세의 결과, 그러한 냉정한 판단도 가능했던 것이고, 그러한 깊은 수읽기도 가능했던 것이고, 그러한 승리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한 이창호의 구도적인 자세 앞에서 우리는 열광하고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 구도적인 자세 때문에 존경하는 적장인 것이다. 그네들은 이창호 9단의 승리만큼은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면서 착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수였든 나쁜 수였든 자신이 이전에 놓았던 수의 가치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고뇌 끝에 최선의 수를 찾는 자를 누가 미워할 것인가! 오히려 그네들은 이창호 9단의 승리를 염원하기까지 않는가! 나는 이창호 9단이 이 구도적인 자세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진정한 스타일은 다름아닌 이 구도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대가 가볍게 두면 가볍게 두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구도적인 자세까지 잃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창호 9단의 구도적인 자세를 가장 방해했던 기사는 누구보다도 이세돌 구단을 들 수 있다. 이를 두고 이창호 9단은 이세돌 구단에 대하여 “자극적이다”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상대를 자극하는 것도 실력이다”고 하였다. 무엇을 자극한다는 것일까? 이세돌 구단은 한 판의 바둑이 진행되는 동안 이창호 9단으로 하여금 이창호 9단 자신의 수에 대한 긍지와 명예와 가치를 수시로 자극시키고 일깨웠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세돌 구단이 이창호 9단의 수순을 무시하는 듯한 수를 던질 때, 이창호 9단은 자신이 이전에 놓은 수의 긍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이전에 놓은 자신의 수들을 종이 위의 기보로 간주해가며 한수 한수마다 늘 새롭게 마음을 내었던 그의 구도적인 자세를 방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전에 놓은 수의 긍지와 가치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종이 위의 기보가 살아서 돌아오고 그것이 바둑의 내용을 규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고력이 줄어들기 마련이고, 최선의 새로운 수가 아니라 뻣뻣한 수가 나오기 시작한다.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실력인가? 당연하다. 바둑은 수리적인 체계 너머의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실력 중의 실력이다. 그것은 영혼의 승부인 것이다. “상대를 자극하는 것도 실력이다”는 이창호 9단의 말은 겸허한 말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나는 이창호 9단의 발언들이 인격이 훌륭하다거나 대단히 겸손하다거나 하는 등의 인간성의 높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바둑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적인 자세에서 비롯하여 인격이 완성되고 인간성이 완성된다고나 할까. 한 분야에서 일가 정도가 아닌 대가에 이른 사람은 그 분야에 임하는 남다른 자세가 있다. 대가는 자신의 분야에 임하는 그 자세로부터 삶의 자세와 자신의 언어를 도출한다. 이창호 9단은 승패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는 바둑의 질에 연연하며, 바둑의 질에 연연하기보다는 바둑에 임하는 자세를 중시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창호 9단이 보통사람과는 다른 승부관, “보통사람을 초월한 승부관”(화이강 8단)을 가지고 있다고 평한다. 물론 그 역시 사람인지라 더러는 승패에 연연하기도 하겠으나 그는 그것을 끝내는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는 그의 상용어를 평범하게 읽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둑에 임하는 그의 구도적인 자세를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일갈이지 결코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

한 판의 바둑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놓인 수에 집착하느라 앞으로의 수를 어둡게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늘 새롭게, 늘 최선으로, 그것도 한수 한수마다, 자유롭게, 집중하고 사색한다. 이렇게 바둑 한 판에 임하는 수행의 자세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으로 흘러들고, 한 인간이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의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이창호 9단은 “이세돌 구단과 두는 바둑은 재미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세돌 구단의 자극성을 내면적으로 극복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며, 이세돌 구단과의 대국에서도 구도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초발심의 발로이며, 앞으로 이세돌 구단이 이창호 9단에게 고전할 것임을 암시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장쉬 9단을 넘어섬으로써 한국으로서는 최대의 고비를 넘겼다. 상대가 강할수록, 판이 클수록 이창호 9단의 구도적인 자세는 더욱더 강해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후의 상대는 장쉬 9단보다 강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창호 9단 대 장쉬 9단의 바둑을 보고 이창호 9단의 본령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종반 특유의 조임을 통하여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창호 9단의 구도적인 자세가 유감없이 배어든 판이기 때문에 그의 본령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바둑이 끝난 뒤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다름아닌 얼굴을 씻는 행위였다.

낯을 씻는 혼자만의 시공간에서 그는 이 판의 바둑에 임한 자신의 자세에 대하여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 앞에 나와 말했다: “포석에서는 다소 앞서 나갔다. 중반 들어서 느긋한 수순이 이어져 형세가 어려워졌는데 마지막에 운이 따라줬다.” 그는 “느긋한 수순이 이어져 형세가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다시 한번 확인되는 바이거니와, 그의 발언은 그가 바둑에 임하는 근본적인 마음자세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형세가 어려워졌다”는 그의 발언은, 그가 한 수 자체의 가치평가보다는 한 수가 놓인 뒤의 형세에 집중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창호 9단은 평소에 어느 수가 잘못되었다고 명확하게 꼽질 않는 편이다. 형세에 집중하고 그 형세에서의 승리를 향한 최선의 수를 찾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이전의 수에 대한 가치평가는 사치스런 유희에 해당할 수 있다. 더구나, 한수 한수 놓일 때마다 무한한 가상의 수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 무한히 출몰하는 수들 중 어느 한 수가 반상에 등장하는 셈인데 그 수의 운명적인 불안함에 대하여 “패착성 수”, 혹은 “패착”이라는 식으로 가치평가를 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는 수의 가치평가와 관련하여서는 “느긋한 수순이 이어졌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 표현하고 마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한다. “마지막에 운이 따라줬다.” 이것을 단순한 예의상의 말로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창호 9단과의 인터뷰는 인터뷰 하는 맛이 없다고 푸념하는 인터뷰어는 사실 자질 미달이다. 나는 그런 인터뷰어의 푸념을 접할 때면 화가 나기까지 한다. 이창호 9단은 “노림수가 성공했다”는 둥, “중앙에 수가 난다는 것을 일찍부터 예감하고 있었다”는 둥의 말을 하지 않고 하필 “마지막에 운이 따라줬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다시 한번, 그가 얼마나 한수 한수를 따라가며 바둑에 집중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 바둑에서의 한수 한수가 결국은 승리로 가는 징검다리였고, 이창호 9단은 그 징검다리의 끝이 승리에 닿는 순간을 “운”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징검다리 사이사이에는 그 자신도 모르는 무수한 변화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 변수들을 무사히 건너 승리에 닿게 되었으니 그것을 “운”이라고 표현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대국을 평하는 그의 인터뷰 내용에 쓰인 동사들이다. “(포석에서는) 앞서나갔다”, “(수순이) 이어졌다”, “(형세가) 어려워졌다”, “(운이) 따라줬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인터뷰에서 이 대국을 평할 때 쓰인 동사 “(후반에) 풀렸다”. 이 동사들이 무엇을 의미할까? “앞서가다, 이어지다, 어려워지다, 따라주다, 풀리다”는 동사들의 의미는 하나같이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중국의 어느 기자의 멋진 표현을 빌자면, 이 낱말들은 “돌에서 빛이 새나오는 것”과도 같이 이창호 9단에 대하여 뭔가를 시사해 준다. 이를테면, 이창호 9단이 한수 한수에 정진했던 과정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이 대국을 회상할 때 그는 바로 이 대국에서의 정진 과정이 가장 먼저 마음속에 떠올랐을 테고, 다시 한번 가상적으로 펼쳐지는 그 고독한 구도의 시공간 속에서 그런 언어가 자연스럽게 조영되었을 것이다.

승부사라기보다는 구도자에 가까운 이창호 9단의 언어에 바탕해서, 우리는 또한 그의 바둑세계에는 “노림수”, “감각적인 수”, “패착” 등의 가치평가적 수가 희미하게만 존재한다는 것을 추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수가 무게감을 가질까? 어쩌면, 그의 바둑세계에는 오로지 종이 위의 기보로 옮아가기 직전의 “한 수”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좋은 기보를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평소 소망은, 그 “한 수”에 대한 그의 무한한 존경을 웅변해 준다. 그는 극소수의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한 극점에 있으며, 그 극점에서 고독하게 추구하고 탐색한 바를 바둑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고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존경을 표해야 마땅하다.
 

※ 참고사항

1.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其心). 이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며, 육조 혜능은 이 구절의 독경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 사이버오로와 타이젬의 인터뷰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나는 이영호 타이젬 특파원의 이창호 9단에 대한 존경심을 감안하여 그의 기사의 표현 하나하나를 신뢰한다. 그래서 타이젬 인터뷰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