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에 물들지 않는 얼굴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이창호 대 왕레이 관전기

농심신라면배는 한중일 간 국가바둑대항전으로 국가별로 각 5명의 기사가 출전하여 승자는 계속 두고 패자는 물러나는 체제로 진행됩니다. 결국, 최종 승자로 남은 국가가 승리하는 단체전입니다. 제6회 농심신라면배는 2004/2005 시즌에 벌어졌으며, 한국은 이미 2차전에서 이창호 9단만 홀로 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종 3차전을 각 2명이 생존한 일본·중국과 대회전을 치루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창호 9단은 2차전을 포함 5연승으로 최종 승자로 남아 한국이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관전기는 최종3차전 두번째 판인 이창호 9단 대 중국의 왕레이 8단의 대국에 대하여 쓴 것으로, 제가 apolis라는 필명으로 2005년 3월 4일에 이창호 홈페이지에 올린 것입니다.

이번 대국에서 난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 왕레이 8단

“한판 한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참으로 쉽게 납득되는 말이지만 사실은 아주 불투명한 말이다. 한 판의 바둑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달리 말해, 한수 한수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수 한수마다 최대한 “조화”롭게 쌍방 “균형”을 맞추며 수를 추구하는 것이 최선인가? 자신의 스타일을 무너뜨리지 않고 “나의 바둑을 두는 것”이 최선인가? 아니면 매 수마다 가장 효율적인 수를 두는 것이 최선인가? 요즘에 이창호 9단의 바둑을 평하면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수의 효율성”이라는 개념이 최선의 바둑과 밀접한 것이라면, 그 “효율”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어느 국면에서 가장 적절한 수가 효율적인 수? 그럼 그 “적절한 수”란 또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최선의 수”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창호 9단의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지만, 이처럼 어떤 표현 하나를 헤집고 들어가면 그 표현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 망망대해를 헤매기 마련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의 영혼, 사람의 심리, 사람의 감정이 한 판의 바둑을 움직이는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창호 9단은 바둑에 임할 때 자신만이 감지하는 그 뭔가가 있기에 그 잡히는 느낌을 그에 최대한 가까운 언어인 “최선”이라는 언어에 가탁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전달 받는 우리는 이창호 9단이 감지한 그 뭔가를 유추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사람의 내면은 심오한 영역이고, 따라서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한 사람의 언어를 감지하는 것도 그만큼 어렵다. 하물며 대가의 언어는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래서 이창호 9단이 추구하는 “최선의 수”, 혹은 “한판 한판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사실 고도의 민감성으로 이해해야 하는 고난이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수의 바둑은 사람이 두는 바둑이다. 사람은 영혼이 있고, 영혼은 흐름과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바둑을 두는 기사의 영혼은 상대 기사의 영혼을 상대하며 운동한다. 상대의 영혼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둑을 포함한 모든 승부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이라는 논리적인 듯하면서도 지극히 비논리적인 주체가 또 다른 영혼을 상대하여 벌이는 게임은 바둑 말고도 다른 여러가지가 있으나 바둑만큼 정신적이지는 않다. 그리하여 한 판의 바둑은 상대가 없는 기하학적 절대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수 한수마다 흐름과 반응이 꿈틀대는, 논리와 수리를 초월하는 지속적인 시공간에서 벌어진다. “연륜이 쌓여야 바둑의 내용이 깊어진다”는 격언은, 바둑에는 수리적인 체계 너머의 움직임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야 이 격언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격언이 된 듯하지만, “연륜”을 육체적인 연륜이 아니라 정신적 연륜으로 해석하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육체적인 나이가 많아진다고 하여 인생의 깊이가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깊이? 바둑의 깊이? 그것은 또 무엇인가? 대국자가 놓은 어느 한 수가 관전자들에게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그 생각이 인간 내면의 심층을 응시하도록 이끌 때, 나는 그 수를 깊이의 한 수라고 부르고 싶다. 물론 꼭 한 수가 아니라, 일련의 수순, 혹은 한 판의 바둑 내용이 인간 심층을 돌아보도록 대국자나 관전자의 마음을 비춰줄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적 진실을 두고 우리는 보통 “한 판의 바둑은 인생과도 같다”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또, 사람들은 성격이나 인품이 가지가지인지라 어떤 사람은 구도적인 품성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기발랄한 성격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사람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 판의 바둑은 인생과 같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인생은 천차만별이다.

여기에서 비극이 탄생한다. 이창호 9단같은 구도자적 승부사가 길을 걸으면서 맛보는 인생은 여느 인생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똑같은 직업을 가진 프로바둑기사들이라고 해도 우리와 입장이 다르지 않다. 동일한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바둑에 대한 견해가 같을 수도 없거니와 바둑을 대하는 자세 역시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서로 인생이 다르다. 여기에서 한 판의 바둑에 대한 해석은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수읽기, 모양에 대한 감각, 선호 스타일 등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견해차가 프로기사들 사이에서도 분분한데, 하물며 아마추어가 보는 견해는 또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지금 “최선의 수”라는 말이 그 뭔가를 명확하게 지시하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지는 있는 사태를 말하고 있다. 바둑은 사람이 둔다는 사실, 바둑은 상대의 영혼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람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 – 이 사실들에 바탕해서 운명적으로 한 판의 바둑에 대한 해석, 한 수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설령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하더라도 그 의미나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최선의 수”라는 말 앞에서 당혹스러워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리고 이 “최선의 수”라는 말이 얼마나 고난이도의 언어인가를 부각시킨 것은 누구보다도 이창호 9단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그는 모든 관념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새로운 해석 지평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깊이의 한 수, 깊이의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바둑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다가가지 않으면 안된다.
 

조훈현 9단의 이창호 9단에 대한 글을 잠시 음미해 보자:

아직도 나는, 昌鎬는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天才의 유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은 있다. 부동심과 평정심이 뛰어난 것도 천재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昌鎬는 겉으로 드러나는 천재가 아니라 안으로 감추어진 천재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內的(내적) 천재」다. 內的 천재가 外的 천재보다 더 무서운 천재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알다시피, 조훈현 9단은 천재적인 통찰로 이창호 9단을 두고 “안으로 감추어진 천재”, 혹은 “내적 천재”라고 불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훈현 9단같은 번뜩이는 기재를 두고 이구동성으로 “천재”라고 칭한다. 그런데 이창호 9단은 좀 다르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인정하는 부류의 “천재”는 확실히 아니다. 그런데 그가 그 “천재”를 이긴다. 그렇다면, 이 “천재”라는 개념은 도대체 무엇인가? 혹시 사람들이 인정하는 “천재”는 천재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는 “천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조훈현 9단은 이런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재”의 개념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그는 머뭇거리며 “부동심과 평정심이 뛰어난 것도 천재라고 한다면, 거기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그런 천재, 아직까지도 의구심이 드는 천재, 그것을 굳이 천재라고 불러야 한다면 어떤 수사를 붙혀야 할까? 그는 과감하게 “내적 천재”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과감한 진일보에 의하여 이제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천재 개념이 수정된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천재는 다름아닌 “외적 천재”, “천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조훈현 9단은 오로지 이창호라는 존재로 인하여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재” 개념을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외적 천재는 누가 보아도 그 재능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외적 천재에 대한 관념들은, “별다른 노력없이 보통사람들의 수준을 훨씬 초월하는 부류”로 통합된다. 그래서 그 이미지들은 보통 “빠르다”, “날카롭다”, “예민하다”, “섬세하다” 등의 서술어가 따라붙는다. 바둑에서는 이 낱말들이 “수읽기가 빠르다”, “행마가 경묘하다”, “수가 날카롭다”, “감각이 뛰어나다” 등으로 표현된다. 조훈현 9단 역시 외적 천재에 대하여 “번뜩이다”, “빠르다”, “드러나다”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들은 그동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천재에 대한 개념 체계, 천재를 둘러싼 해석 지평이 만들어놓은 어휘들이다. 그런데, 이창호 9단 앞에서 그런 어휘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조훈현 9단의 예에서 대표적으로 입증되듯, 이창호 9단은 우리의 통상적인 관념을 흔들고 있다. 아니, 그는 우리가 그동안 절대 불변할 것으로 생각했던 그 무엇인가가 하나의 관념, 언제라도 수정될 수 있는 가상이나 허울에 불과함을 가르쳐 준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통상적인 해석 체계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해석체계는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라 흥망성쇠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끌어가고 주도한다는 점에서 주류적인 해석 체계라고 부를 만하다. 한 판의 바둑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주류의 해석이 관철되고 전달되고 통용된다. 그리고 그 해석의 언어는 일반 대중에까지 보편화되어 해석의 경직성, 해석 언어의 경직성을 초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익숙하고 편하다. 경직된 해석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언어의 세계를 벗어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그것은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역사와 전통이기도 하고, 인간이 고치기 힘든 만연된 습성과도 같다.

“바둑은 균형과 조화다”, “바둑은 승부다” 등등의 관점은 바둑계에서 대표적으로 통용되는 주도적인 해석 언어들에 속한다고 할 수있다. 물론 그 주도적인 해석 언어가 잘못되었다거나 볼품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해석 언어이다. 문제는 그런 해석의 언어로 포섭되지 못하는 존재가 출현했을 경우에 발생한다. 가령 후지사와 구단은 “바둑은 자유의 세계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인생만큼이나 주류적인 해석과는 다르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해석할까? 그의 별명 그대로 그는 “괴물”로 해석된다. 사실 지극히 낯선 존재는 익숙한 해석의 언어로 해석될 수가 없다. 주류적인 해석은 이처럼 낯선 존재를 일단은 부정한다. 이창호 9단이 등장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력형 천재”라는 식의 평이 바로 그것이다. 이 평에는 “노력”과 “천재”라는 상반된 개념이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 평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 끝에 흠결 있는 천재라는 암시를 준다.

물론 요즘에는 이러한 해석으로는 이창호 9단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제 주류적인 해석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언어에 “~이 아니다”, “~와는 다르다”, “~을 초월한다” 등등의 부정사를 써서 해석하게 된다. 가령 “승부를 초월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같다” 등등. 자신들의 언어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기에 “~이 아니다” 유의 부정서술이 남발하게 된다. 드디어 해석 언어의 빈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금 바둑계에서는 “천재”라는 개념도 흔들리고 있고 “바둑”에 대한 관념도 흔들리고 있다. 하기야 바둑이라는 관념이 언제 고정되기라도 했겠는가마는, 이창호 9단의 등장으로 인하여 바둑의 본질에 대하여 예전보다 훨씬 깊게 고심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바둑은 균형과 조화다”와 “바둑은 승부다”라는 바둑에 관한 상반된 정의를 두고 논쟁되어 왔지만, 이제는 그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다름아닌 불세출의 고수 이창호 9단이 “바둑은 균형과 조화다”나 “바둑은 승부다”가 표방하는 주류적인 해석 지평과는 동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왕루난 원장인가 누군가가 했던 말로 기억난다. “이창호는 바둑의 경계를 높혔다”고. 나는 이 말이 주류적인 해석 언어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이창호 9단에 대한 최종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상의 영토가 확장될 때 ‘경계가 넓어졌다’는 표현을 쓰지 ‘경계가 높아졌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창호 9단을 두고 ‘경계를 높혔다’는 표현을 썼다. 이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주류적인 해석 체계가 이창호 9단을 도저히 포착할 수 없어 당황스러워 하고 흔들리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창호 9단에 접근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고 그 언어에 바탕해서 몸과 마음을 조율한다. 예컨대, 중국기사들은 이창호 9단과 대국하기 전에 승부의 관념에 집중하여 “자신감이 있다”고 호언하거나 협소한 천재성의 개념에 치중하여 “우리의 재능이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개념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농심신라면배 우승을 마치고 귀국하여 열린 기자회견에서의 인터뷰 내용을 한 번 음미해 보자:

— 예전에는 ‘마음만 먹으면 이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이겼다. 이것에 대한 이9단의 생각은.

글쎄…. 예전에는 결과적으로도 많이 이겼다. 하지만 자신이 있다는 생각은 안 했다. 대국전 ‘괜찮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대국에서 졌을 때 많이 혼돈이 된다. 혼돈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그는 대국에 앞서 “자신이 있다는 생각은 안 했다”. 다만 “대국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질문과 대답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늘 그러했다. 이 인터뷰 내용에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하나 나온다. “괜찮겠다.” 괜찮겠다? 괜찮겠다고 생각한 대국? 이창호 9단은 이미 자기 세계의 언어를 우리 앞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러나 주류적 해석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낯선 언어조차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해석 체계의 틀로 끌어들여 이해한다. 그것은 겸손의 표현이라고, 그것은 이창호의 인품에서 나온 말이라고, 그것은 ‘해볼 만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그렇게들 해석한다. 이것은 위대한 언어가 평범한 언어로 전락하고 마는 전형적인 형식의 비극이다. 이 비극에 처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마치 히딩크가 축구를 새롭게 생각하도록 이끌었듯이, 이창호 9단은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바둑을 새롭게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기자들에게 누누히 “창조적인 기사”를 쓰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 당부를 실현할 만한 인재가 우리에게는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소위 바둑평론가들이 바둑의 해석 지평을 새롭게 탐색하고 새롭게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거기에다 이창호 9단은 우리가 그 뉘앙스를 가장 잘 잡아낼 수 있는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이 아니던가!

위 인터뷰에서 그는 또 이런 말을 하였다. “대국전 ‘괜찮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대국에서 졌을 때 많이 혼돈이 된다. 혼돈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현재로서는 나는 이 말을 해석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주류적인 해석 체계로 끌어들여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이창호 바둑을 보면서 언젠가 영감처럼 이 말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라고 예감한다. 우리는 관념과 논리를 통하여 이창호 바둑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그와 반대로 이창호 바둑으로부터 관념과 논리를 도출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주류적인 해석 체계를 넘어서기 위한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다.”사물의 핵심을 직관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그 눈빛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던 어린아이”(조훈현 9단), 그 이창호가 이제 서른이 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요 몇년 사이에 이창호 9단은 부쩍 이창호 9단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크나큰 행운이다.
 

왕레이 8단. 그는 불행히도 중국인이다. 그가 중국인이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중국 바둑계가 세워놓은 주류적인 해석 체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창호 9단과 대면하였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공식인터뷰 석상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기자들이 대국전 그의 말을 거의 기사화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말수가 적은 듯하다. 다만, 왕레이 8단 곁에 있었던 왕시 오단은 누누히 “자신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심지어는 왕레이 구단이 이창호 9단과 먼저 대결하게 되었으므로 자신은 이창호 9단과 대결할 일은 없을 것같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이창호 9단과 몇 번 부딪힌 적이 있는 왕레이 8단은 그 “자신 있다”는 말이 얼마나 허허로운 말인가를 안다. 더구나 왕레이 8단은, 이창호 9단의 ‘왕시 오단과 먼저 만나는 것도 괜찮겠다’는 견해를 접수한 중국기원 수뇌부의 전략적 카드로 먼저 출전하였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낯선 풍경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출전 기사들은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순서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측은 모양새가 확실히 다르다. 그들에게는 한 인간의 정신적 체계를 통제하는 상부구조가 있다. 전략을 짜는 상부인물이 있다. 특히 국가의 명예를 감안하자면 중국기사들의 중압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생각해 보자. 중국 치우미들이 왜 그토록 국수주의적인가. 한 인간의 정신은 좋든 나쁘든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 사고를 자유롭게 펼치고, 자유롭게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자오쯔양 장례와 관련한 심상찮은 흐름에서 엿볼 수 있듯,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어 있다. 분출되어야 할 자유가 막혀 있을 때 사람들은 다른 왜곡된 통로를 통해서 배출하게 된다. 이를테면, 증오를 분출시켜서라도 자기 안의 뭉친 것을 풀어내야 한다. 그 억압된 덩어리를 국수주의적 감정에 실어 배출한다면, 이는 국가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이와같은 중국적 풍경은 우리가 과거 독재정권 시절 한일전 축구에 극악하게 매달렸던 시절을 씁씁히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공식적인 언론 매체에서 다루기 힘들다. 자칫하면 외교분쟁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티즌은 자유롭다. 금기까지 건드려가며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 판의 바둑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국자의 정신 구조를 분석하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구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기사들이 처한 정신적 풍경을 스케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풍경이 억압적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주류적인 해석 언어에 갇혀 있어 힘든 마당에, 중국기사들처럼 국가라는 억압체계에 의해 조성된 긴장된 분위기에서 존경해 마지 않는 이창호 9단을 상대로 자유로운 바둑을 두기는 어렵다. 이것이 왕레이 8단의 불행이다.

장면1도(21~37)
다가왔으니 다가가겠다

장면1도는 네 귀의 점유가 끝났을 때부터 시작된다. 흑이 좌하귀에 전형적인 접근 수법을 써서 화점 밑에 붙히자(흑1) 백은 안으로 막는다(백2). 그리고 상호 탄력을 받으며 흑도 뻗고 백도 뻗는다. 순조로운 흐름이다. 왕레이 구단은 순조롭게 흑5로 젖힌다. 백이 흑7의 자리로 뻗으면 흑은 백6의 자리로 벌리면 된다. 다름아닌 순조로운 흐름은 이창호가 선호하는 것이 아니던가. 설마 이창호가 흑7의 자리를 손빼고 그 아픈 단수를 자진해서 맞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창호는 흑7의 단수를 감수하며 흑이 벌리려던 지점에 먼저 벌린다(백6). 백6은 벌린다는 의미보다 흑에게 접근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왕레이는 이 판의 바둑에서 처음으로 의표를 찔린다. 의표를 찔림과 동시에 백, 이창호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창호의 그림자다. 그는 흑7로 단수 한 방을 때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아간다(흑9). 그러자 백10의 방비.

이제 흑은 선수를 잡았다. 어디로 갈까? 좌변의 흑을 안정시킬 겸 좌변의 백 세력을 삭감할 겸 백12 자리 근처로 날아가고 싶지만, 이창호가 자신의 의표를 찌르고 가슴 아프게 다가온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왕레이는 우변의 백 두점을 향하여 접근한다(흑11). 다가왔으니 다가가겠다. 그러나 이창호는 또 다시 손을 빼고 왕레이가 갈까 말까 망설였던 지점에 착점한다(백12). 또 찔렸다. 가슴 아프게도, 이창호는 왕레이가 두고 싶었던 곳을 계속 두고 있다. 백12가 놓이고 보니 좌변 흑이 가냘퍼 보인다. 왕레이는 임시방편으로 좌변의 안정을 취해 두고 백이 손을 뺀 우변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흑13~백16의 수순, 그리고 흑17. 우변의 백 두 점을 공략하는 경로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는 위압적인 습격의 길을 택한다. 흑7의 단수 한 방과 흑17의 습격은 동일한 심리적 언어이다. 이창호는 또 한 방 맞고 있다. 한 악장의 소나타가 주제선율을 반복하고 있다.

장면2도(38~49)
왕레이, 강렬하게 분출하다

흑▲의 습격과 함께 시작된 공략은 흑의 튼튼한 외벽쌓기를 의도하고 있다. 흑2로 누르고 흑4로 막고 흑6으로 잇는다. 그리고 백7로 흑 한 점을 톡 끊었을 때 흑8로 뻗어둠으로써 일련의 정석적인 사태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순조롭다. 백은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흑은 상변으로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과 하변의 효율적인 배치가 마음에 든다. 흐뭇하다. 그런데 백이 흑의 효율적인 배치 공간 안으로 슬쩍 들어온다. 백9의 응수타진이다. 왕레이 구단은 이창호 9단에게 흑▲를 활용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넌지시 보내며 흑10으로 꽉 잇는다. 흑▲를 활용하게 되면 우중앙을 전반적인 흑의 세력권에 집어넣을 수 있으니 백은 손 빼지 말고 흑▲를 제압하라는 위협이다.

그러나 또, 이창호는 손을 빼고 상변으로 날개를 펼친다(백11). 벌써 세 번째다. 연이어 왕레이는 의표를 찔린다. 기분이 묘하다. 누가 이창호를 느리다고 했던가? 누가 이창호의 바둑이 순조롭다고 했던가? 왕레이 구단은 심리적인 배반과 좌절을 느낀다. 그 좌절을 극복하겠다는 듯 그는 이를 악물고 흑12로 힘차게 젖힌다. 흑12는 흡사 어두운 구멍에서 뭔가가 강렬하게 분출하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이창호 9단은 “A” 지점에 흑돌이 놓였을 경우의 위력적인 흑 세력이 두려워 우변을 돌보지 않고 백11을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레이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창호가 자꾸만 왕레이의 예측권을 벗어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돌과 돌이 서로에게 육박하는 중반전의 드잡이가 시작되었다.

장면3도(50~56)
칼자루를 쥐고 칼날 위에 서다

좌변 백 세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백△ 석 점은 다소곳하고 알뜰하다. 누구라도 둠 직한 수순들이다. 정말 평범하게 다가서고 평범하게 뛰고 평범하게 펼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이창호의 바둑은 참 평범하다. 격렬할 것도 치밀할 것도 없이 그저 순조롭기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견은 어디까지나 기보상으로 대했을 때의 감각적 인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백△ 석 점이 만들어놓은 평화로운 풍경이 사실은 왕레이의 심리를 세 번이나 뼈아프게 배반하고서 조성한 독살스러운 풍경인 것이다.

왕레이는 앞서 경고했던 대로 실행했다(흑▲). 그러자 이창호는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하여 백1로 한껏 벌린다. 마늘모로 벌려도 되는데 흑 석 점에 박치기하듯이 육박해오는 백1이 흑의 입장에서는 고맙다. 흑2가 놓임으로써 흑 진영에 응수타진했던 백□ 한 점을 고스란히 접수했기 때문이다. 왕레이가 득을 보았다고 생각할 즈음, 이창호는 백3으로 강하게 뻗어나갔다. 백3은 흑▲처럼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창호가 웬지 심상치 않은 스텝을 밟는 듯하지만 왕레이는 흑4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자 이창호는 우상변 쪽으로 붙여끌어(백5, 백7) 삶을 확보한다. 이창호의 수순들이 좀 까끌까끌했지만 이제 보니 별다를 게 없다. 불분명한 상황들이 정리되었다. 이제 흑은 우상변 “A”로 끊기는 약점을 보완하느냐, 아니면 중앙으로 머리를 치민 백 두 점을 제압하느냐(“B”) 하는 명확한 고민에 빠졌다. 상변으로 벌릴 수도 있으나 백이 먼저 펼친 지점이라 의미가 반감된다. 어떻게 할까? 선택은 자신에게 있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지만, 왕레이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흑B로 백 두 점을 제압하는 것이 기분도 좋거니와 명확히 판단되는 최대의 곳이다. 너무도 분명한 한 수이기에 고민에 빠진다. 왜 이창호가 이런 호수를 흑에게 내 주는 것일까? 이창호가 이 선택의 상황을 만들어놓은 듯한 기분이 자꾸만 든다. 포카게임으로 말하자면, 이창호가 베팅을 해놓은 상태이고 왕레이는 그 베팅에 어떻게 대응할 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왕레이는 공들여 생각한다. 약점을 보완할까, 아니면 백 두 점을 축으로 제압할까? 백 두 점을 제압하는 것이 좋은데, 그러면 백은 “C” 쯤으로 축머리를 활용할 수도 있다. 백이 축머리를 활용하게 되면 이후의 수순은 어떨까? 그는 다음 수에 대하여 오래도록 고민한다. 칼자루는 왕레이가 쥐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칼자루를 쥔 왕레이가 칼날 위에 서 있는 형국이다.

장면4도(57~59)
견딜 수 없는 침묵

고심 끝에 왕레이는 확신이 선 듯 백 두 점을 친다(흑1). 개운하다. 흑이 “A”로 끊긴다해도 백 두 점을 제압한 중앙의 위용이 사뭇 자랑스럽다. 이제까지 세번에 걸쳐 때리고 습격하고 쳤으니 마음이 좀 풀릴 만하다. 대국 해설자도 흑의 세력이 좋다고 평한다. 왕레이는 그동안 세 번이나 심리적 좌절을 겪었으나 백 두 점을 침으로써 심리적 보상이 좀 되었다는 느낌이 어렴풋하다. 어떻게 보면 잘 어울린 바둑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하변의 흑 한 점 밑으로 백이 착 달라붙었다. 백2, 어? 이건 뭐지? 뭐지?

중력의 법칙을 고려하면, 하변의 흑 한 점 위인 “C” 지점에 백이 놓이는 것이 흑으로서는 무겁다. 그러나, 자신의 예측을 지속적으로 벗어났던 그 이창호가 좀 평탄한 상황을 조성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점으로 달라붙었다. 이게 더 큰 중압감을 준다. 흑이 위에 올라탄 형국인데도 상당한 압박을 느낀다. 이창호가 이전 수순들 속에서 흘렸던 까끌까끌한 감각마저 언뜻 스친다. 뭐지? 왕레이는 차분하게 생각하려 하지만 차분할 수가 없다. 이런 큰 판에서 이런 상상 불가능의 수를 던지다니!

왕레이는 고분고분 흑D로 받아주는 방법을 모색해 본다. 약간의 물러섬이기도 하고 백에게 탄력을 주는 수이기도 하다. 백이 탄력을 받으면 축머리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이 과정에서 좌변의 흑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흑E로 막으면? 그건 흑 진영에서 수가 확실하게 난다. 그러면 뻣뻣한 수로 반발하면? 이창호의 기발한 수를 거의 승부수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백이 흑 진영에서 패가 나든 죽든 결정적 국면에 이른 시간에 도달하게 된다. 더구나 튼튼한 흑 진영에서의 싸움 아닌가? 오히려 이것은 나에게 기회이지 않을까? 조금씩 물러서다가 조임을 당하는 코스보다 괜찮은 선택이지 않을까? 이창호가 계속해서 나를 혼동스럽게 하고 있지만, 반발해 볼 만하다. 그리고 흑3으로 뻗는 것이 미력하나마 좌변 흑을 돕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왕레이는 흑3으로 뻗었다. 강인한 자세다. 이 수에는 그동안 세 번에 걸쳐 때리고 치고 습격했던 기억의 잔영이 어려 있다.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다.

왕레이는 흑3으로 반발함으로써 강인한 선택을 하였지만, 관전자의 입장에서 그 과정을 돌아보면 좀 신기하다. 이창호는 결정적인 국면일 때마다 선택권을 왕레이에게 넘기고 있다. 선택권을 쥔 자가 결국은 바둑의 흐름을 주도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흑1로 백 두 점을 칠 때도 왕레이의 선택이었고, 흑3으로 승부수에 가까운 수를 띄운 것도 왕레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창호에게 끌려가는 느낌이 든다. 왕레이의 선택은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접어드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이창호의 수들은 어느 길로 접어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60수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이창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전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는 단 한 수의 실마리도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흑은 그 심리 상태나 전략이 훤히 드러난다. 어쩌면 그 “침묵하는 빙산”(박치문)을 견딜 수 없어 왕레이는 흑3의 강수를 날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창호는 그의 생각, 그의 전략, 그의 면모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서서히 드러날 이창호의 면모를 관전자들은 숨죽이며 기다린다. 상대의 승부수에 가까운 도전이 있을 때에만 그 면모를 드러내는 이창호, 그 이창호가 지금 우리 눈앞에 그의 일면모를 드러내려고 한다.

장면5도(60~76)
백17, 이창호의 얼굴

이창호가 흑의 진영에서 정교한 수순으로 타개하는 장면은 한걸음 한걸음 벼랑을 타오르는 암벽등산과도 같다. 또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가 가파른 동네 동산을 영차영차 올라가는 듯하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수순 하나하나는 굳건하면서도 무슨 시름같은 것이 묻어 있지 않아 보인다. 차츰차츰 수가 놓이고 보니 흑 진영에서 패가 나는 모양이다. 이제 모든 이들이 그 패를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한창 골몰하고 있을 때 이창호는 백15로 흑을 향해 하나 찔러둔다. 흑이 “A”로 곧바로 막으면 패를 이길 승산이 없으므로 흑은 한 수 늦추어 흑16으로 받는다. 흑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마침내 백17. 모두가 경악한다. 아마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수였을 것이다. 해설자는 바로 이 장면에서 “왕레이가 얼어붙었다”는 표현을 썼다. 백17은 흑B로 끊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흑은 흑B로 끊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럼, 흑B로 끊으면 우하귀의 백은 어떻게 되는가? 버리는가? 그렇게 공들여 작업한 돌들을 버린다고? 그렇다. 백17은 이창호 9단이 우하귀의 백 돌들을 모두 버리겠다는 눈짓을 보내며 짓는 눈웃음이다.생각해 보라. 지금 모두가 흑 진영에서 “패”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패”가 난다는 것이 확실한 이상 그 “패”를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이후의 수순들은 “팻감”의 증감을 위한 수싸움이 된다. 그래서 백이 백15로 찔렀을 때 흑은 “A”로 곧장 막지 못하고 흑16으로 늦추어 받았다. 왕레이는 “패”와 “팻감”에 골몰하였고 “패싸움”을 위한 최선의 수를 둔 것이다. 그는 패를 둘러싼 공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이창호의 백17은, 이창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머리 속에 팽팽하게 형성되어 있던 “패”라는 관념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백17이 놓임으로써 우하귀에 침투한 백 전체를 버리려는 이창호의 전략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이 수는, “제가 언제 패를 하자고 했죠?” 하고 천진하게 되묻고 있다. 이 수는, 우하귀의 백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군중들의 수근거리는 모습을 한 점 티끌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창호의 얼굴이다.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 관념에 물들거나 관념에 찌들지 않은 그 얼굴.

장면6도(77~89)
모래성을 쌓고 허물듯이

백이 우하귀에 한수 한수 공들여 놓은 결과 비로소 패 모양이 났는데, 이창호는 그 전체를 버리는 길을 간다. 버릴 돌들에 대하여 그토록 공을 들였기에 그 돌들은 비정하게 토사구팽처럼 버림받았다는 느낌보다는 필시 그 돌들을 이창호가 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심부름을 가던 어린아이가 도중에 친구들을 만나 심부름을 까먹고 신나게 노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무심히 모래성을 쌓았다가 무심히 모래성을 허무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창호가 이미 허물어버린 그 모래성을 허물기 위하여 왕레이는 흑1로 끊는다. 달리 어쩔 수가 없다. 이창호는 백2로 한 수 조여붙히고는 백4~백8까지 흑을 몰고가며 중앙으로 머리를 내민다. 그리고 흑이 장면4도에서 심호흡 끝에 쳐서 제압했던 백 두 점을 살려낸다(백10). 이제 우변의 백을 습격하고 쳤던 흑돌들이 알뜰히 백의 영역에 들어감으로써, 백을 둘러싸고 있는 흑돌들이 튼튼한 외벽이 아니라 백의 담장에 말라붙은 담쟁이넝쿨이 되고 말았다. 한편으로, 방금 전까지 암벽을 타오르며 꿈틀대던 백돌들은 거의 죽고, 거의 죽어 있던 백돌들은 살아났다. 생사를 윤회하는 돌들이 왕레이를 희롱한다. 더 나아가, “A”로 끊기면 한때 영화로왔던 흑의 진영은 그대로 고적의 풍경이 될 것이다.

이렇게 흑이 바짝 말라버린 메마른 이 상황에서도 우하귀의 백은 아직도 패로 숨쉬고 있다. 왕레이는 흑13으로 쳐서 아직도 숨쉬고 있는 백의 숨통을 끊지만, 이는 어쩐지 무너진 모래성 터에서 바리바리 모래를 헤집고 흩뿌리며 바둥거리는 손짓 발짓과도 같다. 승부가 결정적으로 갈리고 말았다.
 

왕레이는 대국후에 “이번 대국에서 난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겉보기에는 흑57(장면4도 흑1)의 시점에서 흑백이 어울리는 바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양일 뿐, 연이어 이창호에게 의표를 찔렸던 내상을 들여다보면 비참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창호가 왕레이를 어딘가 구석으로 몰아넣어서 비참함에 빠진 것도 아니다. 이창호는 그저 이창호의 바둑을 두었을 뿐이다. 더구나, 때마다 왕레이 자신이 바둑의 흐름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왕레이는 계속해서 이창호를 때리고 습격하고 쳤다. 그런데도 자신의 마음만 답답하고 자신의 가슴만 멍든다. 이창호는 “맞는다”는 언어를 모르는가? 이창호는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가?

장면7도(90~105)
허무한 관념의 되풀이

장면7도는 왕레이가 이창호에게 결정적으로 압도 당한 뒤에 진행되는 수순이다. 이 수순들은 신기하게도 그동안 진행되었던 심리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1의 기묘한 침투는 하변 2선으로 침투한 백A를 상기시킨다. 백3, 백5로 흑의 약점을 끊고 올라섰을 때 이 백 두 점을 향하여 접근하는 흑6은 우변의 백을 습격했던 흑C를 떠올린다. 흑더러 끊어달라고 요구하며 흑의 진영에 던져놓는 백11은 이창호의 얼굴, 백B를 얼핏 보여준다. 이창호의 얼굴은 백3, 백5, 백13, 백15, 이들 백 네 점의 머리를 두들기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문제는 왕레이가 이창호의 요구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왕레이는 흑12, 흑14로 백을 찌르고 끊은 다음 흑16으로 백 넘 점 머리를 통쾌하게 두들긴다. 이 흑16은 그가 초반에 백을 때리고 쳤던 흑D, 흑E의 수순을 응집시킨 듯하다.

백을 두들기는 흑의 기분은 통쾌하지만, 그러나 어쩐지 나풀거리는 안개와도 같이 허무한 짓을 되풀이하는 것만 같다. “패”를 비롯하여, 사실은 “습격하다”, 치다”, “때리다”, “아프다” 등등, 이런 술어들조차 관념에 속한다. 이창호는 그것을 알고 있다. 왕레이는 “습격하다”, “치다”, “때리다”, “두들기다”는 허무한 관념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창호의 바둑세계에는 “맞는다”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의 반대 관념은 공허하고 공허하다. 그래서, “왕레이 8단과의 대국은 비교적 편했다.”(이창호)

어쩌면 이창호의 수에는 그 어떤 관념도 묻어 있지 않아 상대 대국자들로 하여금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지도 모른다. 불안을 견디지 못한 상대가 스스로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상대가 관념을 형성하여 전략의 길을 달릴 때 비로소 이창호는 그 상대의 관념에 휩싸인 채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한 판의 바둑이 바로 그렇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무런 언어도 없이, 무게도 부피도 없이 걸어가는 이창호가 그의 얼굴을 슬쩍 드러냈을 때 왕레이는 참으로 두려웠으리라. 그는 이창호의 얼굴 앞에서 “얼어붙었다.”그러나, 또 회상해 보면 이상하다. 이 바둑에서 결정적으로 왕레이를 농락한 것은 이창호가 아니라 왕레이 자신이 만든 관념이었다. 그는 “패”의 공방에 충실을 기하여 바둑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그것은 바둑에 대한 최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관념에 대한 최선이었다. 오, 관념의 희생물이여! 스스로 몰락한 이 모든 과정에서 이창호는 스치고 지나갔을 뿐 왕레이 자신이 이창호와 직접 대면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대국이 끝난 뒤에도 이창호의 모습을 그려낼 수가 없다. “할 말이 없다.”(왕레이). 이창호는 그냥 거기 그대로 있는데, 왜 나는 스스로 몰락했는가! 이 모든 신비로운 과정 앞에서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이창호는 작년 신년 인터뷰에서 바둑 실력이 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조언을 구하자 두 가지를 버리라고 하였다. 하나는 “고정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욕심”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창호가 버리라고 조언한 “고정관념”을 생각할 때에, 여러 바둑 격언, 모양에 대한 집착, 정석 등등을 생각한다. 상황에 맞게 생각하여야 하는데도 그런 유구한 고정관념에 지배당하여 바둑을 그르치는 경우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창호는 그런 단순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둑을 두면서 무수히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관념 자체를 버리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로서는 관념이란 관념은 모두 예외없이 고정관념이다. 장면5도에서 형성된 “패”라는 것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그 관념은 이창호가 만든 것이 아니라, 왕레이 스스로 만든 관념이다. 왕레이는 흑 16으로 늦추어 받음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만든 관념에 충실하였고 스스로 만든 관념에 희생당하였다. 그는 관념의 충신이었다. 왕레이의 관념이 왕레이를 가지고 유희한 것이다.

거기에다, 왕레이는 이 대국을 임할 때 그러한 관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의식세계에 겹겹이 갇혀 있었다. 국가라는 허울좋은 관념도 그런 의식세계 중의 하나이다. 의식의 층들이 겹겹이 쌓인 상태에서 관념에 물들지 않는 얼굴을 상대하였으니, 그 당혹스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오늘 이 한 판의 대국에서 이창호는 “관념을 버려라”는 가르침을 주었는데, 왕레이는 그것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기사들이 관념의 더께를 벗어버리려면 중국 사회가 좀더 사상적으로 성숙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예외적으로 마샤오춘처럼 한 사회의 성숙도와는 무관하게 비교적 관념에 덜 물든 출중한 기사도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마샤오춘의 때이른 은거가 가장 애석하다. “바둑은 자유의 세계다”라는 정의를 내렸던 후지사와는 그 누구보다도 마샤오춘을 아까워했다. 이창호의 면모를 끝없이 드러내라고 요구하며 휘청거리며 영혼의 승부를 벌였던 그 마샤오춘이 너무나 아깝다. 이창호의 진면목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려면 마샤오춘 같은 승부사가 출현해야 할 텐데, 안타깝다.

관념에 물들지 않는 얼굴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이창호 대 왕레이 관전기”에 대한 4개의 댓글

  • 소제목들을 읽으니 바둑이 藝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산자락에도 눈이 펑펑 내렸겠지요? 정윤이가 첫눈을 맞이하고 얼마나 신기해 했을까요… 어린 조카가 처음 눈을 보고 ‘마당에 소금이 가득하다’ 했던 말이 생각나요.^^

    강물
  • 눈이 펄펄 내리던 시간, 정윤이는 콜콜 자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창밖으로 눈이 쌓인 바깥 풍경을 보여주니까 눈만 껌벅이며 조용히 보던데요^^ 워낙 조용한 아이네요.

    고싱가
  • 올해 가기 전에 형네 한 번 놀러가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모친상중의 선생님이 아이아스와 명인을 연관지어 말씀하시길래 한5년만인가 명인(야스나리)을 다시 읽었는데 처음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아이아스를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니까 이런저런 말씀을 좀 해주신 거겠지요….
    저녁 먹고 와서 훈수로 바둑 배우던 때가 참 생생하게 그립습니다.
    기회가 되었을 때 진작에 좀 열심히 배워놨으면 지금보단 훨씬 나을텐데 -,-

    armani
  • 아이아스가 번역되었구나! 몰랐네 그랴. 야스나리의 명인을 소장하고 있으면 좀 빌려줘.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거든. 그거 절판되서 도대체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고싱가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