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송하는 이 몸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 이포의 한글 금강경을 읽고

“수보리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깊은 뜻은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이 가르침의 큰 열매 또한 헤아림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37) — 그 가르침 그대로, 금강경은 금강경을 읽는 이들의 생각과 헤아림을 금강처럼 자른다. 경전이란 독자의 생각과 헤아림을 바수어 흩고, 그의 안을 환히 비추고, 그의 밖을 환히 비추고, 그의 안팎을 환히 비추어, 그 가르침 하나하나가 안팎에 사무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경전을 읽는 자와 경전의 문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문자 너머의 금강 같은 지혜만 오롯이 천지간에 빛나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따라서 경전을 읽으려 들어갈 때에는 일개 독자로 들어갈지라도, 읽고 나올 때에는 반드시 수행자, 아니 깨달은 자, 부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경전을 경전답게 하는 길이며, 그것이 금강경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된다. 일반적인 독서행위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경전은 ‘독서’나 ‘읽기’라는 말보다 ‘독송’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독송’이라는 말에는 몸으로 받들고 입술 위로 삼가 올리고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수순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몸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입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마음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내 모습을 보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내 목소리 듣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58)

역자 이포는 금강경 번역문 뒤에 금강경 해설을 실은 것이 아니라,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을 마무리하는 찬을 올린다. 금강경 번역문 앞에서도 찬과 진언을 올린다: “입으로 지은 허물 맑아지이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10). 역자의 이름만 있고 아무런 소개문도 없는 까닭에 역자가 스님인지 재가불자인지 모르겠으나, “금강 같은 지혜를 이루는 길”(28)의 가르침, 금강경을 공경히 대하는 그 정결한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도 사라지고 금강경의 문자도 사라지고 오직 금강 같은 지혜만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 나 없는 지혜, 나 없는 자비»(호미 2007)는 금강경 한글 번역의 수승한 사례이다.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금강경 해설서와 번역서가 숱하게 있다. 어지간한 책들은 대부분 접해 보았지만, 이제까지 이포의 한글 금강경만큼 감동을 주는 책은 만난 바 없다. 번역 의도와 방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책 앞의 「일러두기」를 보면, 역자의 공경하는 마음과 비원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키는 역량 또한 놀랍다:

구마라집 삼장스님은 전란이 중국 천하를 휩쓸던 때에 장안에 들어와 곧바로 「금강경」을 번역했습니다. 스님이 「금강경」을 먼저 번역한 배경에는 이 경의 가르침을 통해 천하가 평화로워지고 온 백성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절박한 염원과 확고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한글 금강경」도 스님의 염원과 믿음이 날로 절실해지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생각하며 옮긴 것입니다.(2)

그리고, 책 뒷편에는 (한문본으로 따지면, 앞쪽이 되겠다) 유공권 글씨의 「金剛般若波羅密經」 서첩이 실려 있는데, 이포는 이 서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하여 최대한 공경히 예를 갖춘다.

공경히 들으니 오조홍인 스님께서는 “「금강경」을 보아라. 그러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거사의 글씨가 한 자가 백금에 값하는 글씨라면 그 글씨로 「금강경」을 읽고, 쓰고, 받아 지니고, 소리쳐 노래하는 공덕의 값은 또 얼마이겠습니까? 굳세고 ‘나 없는’ 획 사이로 금강의 빛을 만나고, 맑고 서늘한 글자 너머로 반야의 달을 보리니, 아, 쓰고 외우는 그 공덕이여, 어찌 셈이나 비유로 다 일러 말할 수 있으리오.(60)

짧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공경히 역자의 글을 읽으니, 문득 등하스님의 법구경 번역이 생각난다.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품고 있으나 빙산의 일각만 드러내는 솜씨가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 드러난 일각은 금강과 연꽃을 동시에 든 자처럼, 서슬이 푸르되 자비롭다. 이 때문일까. 이포의 금강경 한글 번역문은 과연 빼어나다. “가르침에 대한 감흥을 살리고자 운율을 중시하며 옮겼습니다. 하여, 토씨를 없애거나 구절을 되풀이하거나 숨은 뜻을 드러내 덧붙이기도 했습니다.”(2) 구마라집 스님이 천재적인 안목으로 원문을 통찰하여 위없이 아름다운 운율의 한문으로 옮겼듯이, 이포의 한글 금강경 또한 능히 독송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때, 성스러운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장로가 일어났네. 망고 숲에 달이 뜨듯 자리에서 일어났네. 오른쪽 어깨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 땅에 꿇고 장로는 두 손 모으고 부처님께 여쭈었네.

“둘도 없는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자비로 감싸 주시고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지혜로 밀어 주십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은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합니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13)

금강경을 실제로 독송해 보면, 조계종 표준번역본은 도저히 독송이 불가능할 정도로 운율이 좋지 않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조계종 표준번역본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구마라집 한문본의 번역을 적당히 뒤섞은 듯한 느낌이며, 유감스럽게도, 산스크리트 문헌을 연구한 학자들치고 서구언어의 개념과 문장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자를 만난 바 없다. 요컨대, 영어나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에 능숙할지는 몰라도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영한사전 수준을 벗어나는 역량을 만나지 못했다. 서구언어의 개념과 문장구조에 깊이 오염되어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가 지리멸렬한 것이다. 조계종 표준번역본을 보면 그 오염원이 감지된다. 그래서 나는 그 번역본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구마라집의 천재적인 솜씨와는 별개로 구마라집 한문본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같은 개념은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지 않는 이상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천년 이상을 독송해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만큼 구마라집 한문본은 아름답다.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번역을 통한 재해석의 역량도 감탄할 만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아 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은 일러두기에서 밝힌 바대로 운율을 중시하였으며, 몇 가지 개념은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희유하십니다, 세존께서는 . . .”으로 번역되는 문장을 이포는 “둘도 없는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 . .”로 옮겼다.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죽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숨 쉬는 나’가 있다는 생각”(14)으로 옮겼다. 앞의 번역은, “불법을 처음 공부하는 분들이나 청소년 불자들이 가르침을 더 가까이 느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경전의 전문 용어를 되도록이면 삶 속에서 날마다 쓰는 생활 용어로 풀어 옮기고자 했습니다”(2)는 역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뒤의 번역은, “경전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네 가지의 나라는 생각’(四相)에 대해서도 새로운 풀이를 시도”(2)한 결과이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덧붙혀 펴낼 「금강경 용어풀이」에서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상에 대한 역자의 번역문에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참고한 노력이 엿보인다. 구마라집의 번역어로는 도무지 산스크리트 원문을 역추적할 수 없거니와 그 번역어가 새로 창조된 추상적 개념어인 까닭에, 후세인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 탁월한 감산 스님의 주석도 사상의 원뜻을 놓치고 있으며, 그 폭넓은 역량의 남회근 선생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이다. (물론 문헌학적 해석에서 잘못을 범한들 그분들의 관련 해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헌학적 입장에서는 비판받을지언정 반야의 입장에서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기 때문이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은 현 시대에 접할 수 있는 문헌은 모두 참조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번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운율 감각도 뛰어난 만큼 이 번역본으로 독송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인다:

수보리여, 보살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습에 걸림 없이, 소리에 걸림 없이, 냄새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맛에 걸림 없이, 느낌에 걸림 없이, 생각의 대상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되,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15)

역자는 스스로 본 금강경의 빛나는 지혜, 빛나는 자비를 이웃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번역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의 변함없는 운명처럼, 소리소문 없이, 빗돌에 새겨진 글씨처럼 말없이, 보살처럼,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이, 이 책을 펴냈을 것이다.

역자는 한글 금강경의 부제로 “나 없는 지혜, 나 없는 자비”를 택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금강과 연꽃이다. 금강 같은 지혜가 있어야만이 연꽃 같은 자비가 있을 수 있으며, 연꽃 같은 자비가 있어야만이 금강 같은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자가 침묵 속에 보여준 그 지혜와 자비, 잊지 않으리라.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 이포의 한글 금강경에 실린 글씨는 이와는 약간 다른 판본으로부터 손질된 것으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으며 크기가 좀더 작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실린 글씨가 약간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말라 보이며, 결과적으로 풍부한 느낌이 덜하다.

책에 실린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은 “군더더기가 없는 가운데 힘찬 기운이 생동하는, 고매하고 맑은 품격을 이룬 글체”(59)로서, 미불은 유공권의 글씨를 두고, “선생은 푸른 산 속에 노니는 스님과 같아 몸과 마음에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 정신은 해맑고 기운은 굳세니 한 점 속된 잡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평했으며, 소동파는 “’한자 한자가 백금百金에 값하는 글씨다’라는 세상 사람들의 찬탄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60)고 평했다고 한다. 경전에 한없는 공경을 바치는 역자가 서첩에 대한 안목까지 갖추고 있어 고맙기 짝이 없다. 덕분에 백금에 값하는 글씨를 뵈는 행운을 누렸다. 역자는 유공권의 서첩을 부록으로 실은 것이 아니라, 서첩에다 “외람되게도 제가 어둔 눈을 빌어 옮긴 한글 금강경을 덧붙여 엮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몸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 이포의 한글 금강경을 읽고”에 대한 8개의 댓글

  • 정말 끌리는 번역본이네요. 저도 금강경 조계종표준번역을 읽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낭독의 맛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휘들에서 고졸한 맛이라고는 없었거든요. 노자나, 논어도 그 어투를 고려하여 번역하면 좋을텐데, 그런 번역들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던차에 소개해주신 금강경을 보니 눈이 번쩍 뜨입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역시 경은 소리내서 읽어야 그 맛을 알 수 있죠. 정말 깔끔하고 바른 우리말을 구사하는 분들이 근래에는 너무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처럼 약간 낯설더라도 그 운율을 살려서, 고운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시도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권상일
  • 안녕하세요 ^^. 훌륭한 블로그를, 항상 구경만 하다가 처음 인사 올립니다 ^^.

    저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라고만 알고 있던 불교가, 어느새 저와 꽤 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계기들이 많았지만, 고싱가 숲의 글들로부터도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귀한 생각들을 나누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믿을만한 한국어 역본을 고르기가 어렵다는 게, 불경을 읽을 때 만나게 되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있다니 빨리 찾아보고 싶군요. 이어서 욕심을 내자면, 이제 금강경이 나왔으니, 화엄경이나 대반야경도 좋은 한국어로 읽어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블로그에서 비판해 주셨던 [불교가 좋다] 라는 책을, 저로서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워낙 없던 터라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감정 상태는, “happiness” 라기 보단 “安心” 에 가깝다, 즉 기분이 좋아서 마음이 들뜬 상태라기 보단, 고통이 제거되어서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이다, 라는 취지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많이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는데, 일면적인 비교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확실히 불교의 웃음과 기독교의 웃음은 성격이 많이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상의 즐거움 속에서 조용히 미소짓는 마음과, 성경의 시편같은 곳에서 신을 찬양하며 감격과 환희에 가득차 할렐루야를 외치는 마음은, 정말 다른 것이겠지요. 한편, 불경 가운데에도 “환희용약” 같은 말이 종종 등장하니, 기쁨으로 가득차 소리를 지르고 싶고 손발을 움직이고 싶은 감정을 불교가 꼭 낮추어 본다거나, 극복되어야할 상태로만 보고있는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위의 소개해주신 역본에도 부처를 “행복하신 분” 으로 칭하고 있거니와, 특히 신행을 통한 공덕을 강조하는 불교 서적들에서도 이 “행복” 이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과연 이 말이 불교와 얼만큼 어울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싱가 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길게 쓴 질문으로 귀찮게 해드려 죄송하오나, 고싱가 숲의 글들을 읽고 불교에 더욱 이끌려 여기까지에 이른 인연을 생각하시어, 귀한 가르침 내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합장).

    數數入火
  • 권상일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시는군요. 저 역시 이십대 후반부터 고졸한 맛의 어투를 선호했는데, 그 기호에 맞는 책을 만나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이든 분들만 그런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數數入火님께서 거론하신 “행복”이라는 말, 저도 참 안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표현이 닳고 닳아 귀한 느낌이 들지 않죠. 그런데도 이 번역본에서는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더군요. “행복”이라는 표현이 이 번역본에 들어앉으면서 갑가지 없던 품격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참 모를 일입니다.

    어느 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관으로 들어가면, 예전 세계관에서 익숙했던 표현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저 역시 그랬으며, 예전의 세계관에서 통용되던 어휘들이 값싸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예전의 세계관에 머문 바 없었던 분들은 그 세계관의 어휘들이 또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겁니다. 결국,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개인의 역사적인 감수성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이죠. 거기에서 취향이 나오는 것이겠고, 거기에서 언어의 연금술이 나오는 것이겠죠. 옳고 그름은 없고, 개인의 역사적 감수성만 현존하는 세계, 바로 그것이 언어의 세계인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읽을 때 언어보다는 저자의 역사, 저자의 감수성이 먼저 보입니다. 그 감수성이 저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책을 놓아버리고, 가까이 있으면 듭니다. 언어의 시비는 결국 감수성의 투쟁이죠. 그러므로, 설득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길을 끝없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자 이포는 “행복”이라는 표현이 당연히 낯선 분일 겁니다. 그렇지만, 생활 속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한 의도 때문에 그 표현을 택한 것같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표현 외에 걸리는 다른 표현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행복”이라는 표현이 이 번역본에서는 귀하게 대접을 받는 듯합니다.

    “환희용약”이라는 표현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쁨으로 가득차 소리를 지르고 싶고 손발을 움직이고 싶은 감정”을 뜻하는지는 의문입니다. 혹시 “환희하며 뛰논다”는 의미가 아니라 “환희가 뛰논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문헌고증을 해봐야 알 일이겠지만, 제 감각으로는, 기쁨이 벅차 그 기쁨이 온누리, 온 우주로 솟구쳐 퍼진다는 의미로 읽히는데요. 이 역시 감수성의 차이인가요? 하하.

    살아가는 동안 서로 배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즐겁습니다. 스스로의 길 아름답게 걸으셔서, 저에게도 배울 기회를 주시기를 빕니다.

    고싱가
  • 별 생각없이 지나치던 말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환희용약” 이라는 말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대정신수대장경 웹사이트 (http://21dzk.l.u-tokyo.ac.jp/SAT/index.html) 에서 환희용약을 검색어로 넣어보니, 물론 수없이 많은 검색결과가 나왔습니다만, 거의 예외 없이, 바로 뒤에 부처에 대한 예배나 공양의 행위 (우요삼잡, 정례불족 등) 이 이어지고 있더군요. 환희용약은 거개의 경우, 부처의 설법이나 신통에 감동한 회중이, 부처께 경의를 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 또는 행동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환희가 용약한다” 는 해석도 물론 참으로 매력적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회중이 “환희하고 용약하며” 부처님께 예배드렸다, 는 식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불경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요즘 시작한 대반야경의 맨앞, 초분연기품에서 “환희용약” 의 양상이 어떠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의 묘사되는 부처님은, 어떻게 보면,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인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는 앉아서 명상에 들거나, 잠시 일어나서 세계를 관찰하고, 다시 앉아서 또 삼마지에 들어 갑니다. 그 자신은 행동이라고 할만한 것을 거의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무수한 사건들이 그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환희용약” 이 처음 나오는 부분도 이렇습니다. 세존께서 등지왕삼마지에 들어계신 가운데, 얼굴에서 혀 (廣長舌相) 를 내놓습니다. 이 혀가 세계를 덮고, 혀에서 빛이 나오고, 빛에서 꽃들이 피어나고, 각각의 꽃들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계시고, 이 부처님들이 설법을 하십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존이 다시 신통을 나타내어, 세계가 육변진동을 하니, 이 때 일체의 유정이 이고득락하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버리고 더 좋은 세계에서 태어나, 전생을 기억하고는, 환희하고 용약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의 발에 예배합니다.

    一切有情。皆離苦難。從此捨命。得生人中及六欲天。皆憶宿住。歡喜踊躍。同詣佛所。以殷淨心。頂禮佛足。

    그러므로, 환희용약은 중생이 하는 일이지, 부처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위와같은 이미지만을 놓고 본다면, 부처는 삼매에 들어있고, 삼매에서 나타나는 신통 (설법을 포함, 설법은 본인이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신통의 일부로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에 감동한 중생들이, 환희용약하며 부처께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대승 경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장면입니다.

    문제는, 불교에서 중생은 중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할 것을 적극 권장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환희용약하는 중생이어도, 결국에는 삼매에 들어가 세계를 관찰하고 신통을 내보이는 부처가 되는 것이 불자의 할 일이겠지요.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환희용약은, 결국은 지양되고 극복되어야할 경지로서만 제시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계율에서, 비구는 노래하거나 춤추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반면, 기독교에서 환희용약은, 신을 믿는 자들이 가져야할 합당한 자세로까지 생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전고는 구약의 시편입니다. 여기서 신은 무엇보다도, 강한 자를 꺾고 약한 자를 들어높이는, 사람들 사이 또는 존재들 사이의 평등과 공존을 지향하는 존재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이 나타내 보여주는 (顯示?) 극락의 전망 앞에서, 인간은 환희와 감동으로 찬양의 춤과 노래를 바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행위가 오히려 궁극적입니다. 앞의 경우, 반야경을 비롯한 많은 불경들에서, 환희용약은 정례불족하러 가기 전의 상태입니다. 불자는 환희용약하고 나서, 또는 환희용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예경을 올립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환희용약의 행위가 그대로 예배의 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신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만큼, 인간이 신이 되어 찬양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될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희용약은 기독교인의 참으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의 맨 마지막 150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할렐루야!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성소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웅대한 창공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위업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가없는 위대함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뿔 나팔 불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수금과 비파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손북과 춤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현악기와 피리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낭랑한 자바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우렁찬 자바라로.
    숨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같은 환희용약이지만, 더 적극적인 태도이고, 그런만큼 더 풍부하게 묘사되게 있습니다. 반면 불경에서 이같은 자세한 묘사는, 더 중요한 행위인 예배와 공양에 할당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야경의 앞의 인용 부분 조금 뒤에 보면, 환희용약한 그들이 부처님을 어떻게 공양하는지가 길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체중생이 여래의 위광이 대금산 (大金山) 과 같음을 보고, 환희용약하여, 전례없는 찬탄을 발하며, 여러가지의 천화, 향만, 도향, 소향, 말향, 의복, 영락, 보당, 번개, 악기들, 무량한 종류의 천청련화, 천적련화, 천백련화, 천향련화, 천황련화, 천홍련화, 천금철수화, 그리고 천향엽, 또 무량한 물과 뭍의 생화를 들고, 부처님 계신 곳을 예방하여, 부처님 위에서 뿌려 드렸다는 것입니다.

    皆見如來處師子座。威光顯曜如大金山。歡喜踊躍。歎未曾有。各持種種無量天花。香鬘塗香。燒香末香。衣服瓔珞寶幢幡蓋。伎樂諸珍。及無量種天青蓮花。天赤蓮花。天白蓮花。天香蓮花。天黄蓮花。天紅蓮花。天金錢樹花。及天香葉。并餘無量水陸生花。持詣佛所。奉散佛上。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환희용약보다는, 그 뒤에 오는 공양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러한 공양 행위야말로 수행의 일부이고, 수행은 그를 부처로 이끌어 줄 테니까요. 환희용약은 별로 중요한게 아닐 것입니다.

    비교 대상이 서로 잘 설정된 것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차이가,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 일상적인 행동양식 상의 큰 차이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래서 예술도 무척 다른 방향으로 발달되었다고 봅니다. 그 원인이 꼭 불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동양에서는 확실히, 부동의 자세, 정중동, 에 대한 다소간의 환타지가 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수행의 힘에 의해서, 흔히 내공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대상에게 영향을 미친다, 는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영화 [동방불패] 같은 곳에서 보이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승 경전의 특정한 부분, 특히 [불설관불삼매해경] 같은 것은 무협지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중국 무술의 발상지가 소림사인 것도 우연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움직임의 경제성,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냄, 이것은 또한 예술에 있어서는 표현의 경제성으로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요. 동양의 회화, 건축, 음악, 그리고 극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담백함과 고졸함은 상당 부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서양은 표현하는 것 그 자체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의 예술은 동양에 비해 훨씬 덜 경제적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질료를 훨씬 후하게 투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들에게서는 “不動” 을 이상화하는 면모가 현저히 덜 감지됩니다. 카톨릭 수도회들의 규칙에 가무를 금하는 조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성가는 불교에 비해 훨씬 더 음악적으로 들립니다 (이 부분, 석가모니께서 친히, 승가의 합송이 고급예술화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다고, 고싱가 숲에서 잘 읽고 배웠습니다). 서양인들이 일상의 회화나 제스쳐에서 보여주는 표현력은, 많은 동양인들이 쉽게 따라잡지 못하는 (따라잡을 필요가 없기도 하겠지만) 부분이기도 하지요. 서구 문화에 별다른 취미를 갖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언급하곤 하는 그들의 “느끼함” 은, 곧 그들이 우리들만큼 표현의 경제성을 덜 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 같습니다 (이러한 느끼함은 카톨릭 전통이 짙은 나라일수록 더 심해진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어떠한 문화가 늦게 수입되었을수록, 본고장에서는 사라진 원형 또는 구태가 더 질기게 남아있는다는 일반적인 경향 때문에, 이 느끼함은 카톨릭교가 늦게 지배적인 것이 된 중 그리고 남 아메리카에서 그 끝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환희용약” 이라는 어구를 찾아 보다가, 뜻하지 않게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군요. 고싱가님 덕분에 경전도 더 자세히 읽어보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전개시키면서 일요일 저녁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전도망상을 탐닉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요). 좋은 인연 베풀어 주신 데 감사드리고, 더 공부하고 속을 채워서, 앞으로는 좀더 “경제적인” 모습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주말 마무리 잘 하십시오 ^^ (합장).

    數數入火
  • 數數入火님 덕분에 저도 환희용약에 대하여 찾아보았습니다. 數數入火님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구절들도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저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구절들도 보이는 듯합니다.

    결국 번역과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문 아함경에 무수한 용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결국 환희용약이라는 표현은 빨리어 (내지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복합어가 대단히 발달한 빨리어의 특성상 “환희하며 용약하다”와 “환희가 용약하다”는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할 겁니다. (한문번역도 이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하지요.)

    법화경 신해품 서두에 보면, 환희용약이 나오고 동국대역경원 번역에서는 數數入火님의 견해처럼, “뛸 듯이 기뻐하면서”로 번역했습니다.

    爾時慧命須菩提、摩訶迦旃延、摩訶迦葉、摩訶目犍連,從佛所聞未曾有法,世尊授舍利弗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發希有心,歡喜踊躍,即從座起,整衣服偏袒右肩,右膝著地,一心合掌,曲躬恭敬,瞻仰尊顏而白佛言

    이 때 혜명(慧命)인 수보리와 마하가전연과 마하가섭과 마하목건련이 부처님으로부터 일찍이 듣지 못하였던 법과, 세존께서 사리불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 주심을 듣고, 희유한 마음을 내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일심으로 합장한 채, 허리를 굽혀 공경하며 부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면서 여쭈었다.

    저는 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라면 “환희가 솟아올라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고…”로 번역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희용약” 뒤의 술어들이 한결같이, 數數入火님의 표현을 빌면, “정중동”, “움직임의 경제성”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기뻐하며 뛰놀다”는 번역은 허용이 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만큼 고요하고 여법한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뛸 듯이 기뻐하다”로 의역을 했겠지요.

    그런데 만일 이 표현이 빨리어에서 유래했다면, “뛸 듯이 기뻐하다”는 표현은 접속법으로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한문번역 역시 如자를 활용하여 접속법의 표현을 살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달마다라선경의 또 한 구절을 예로 들면,

    修行三昧觀此淨相已。乃至命終無復憂悔。亦無熱惱不復恐怖。安悅歡喜踊躍增長。生寂止樂麁澁四大滅。如是等名修行憶念中相。

    삼매를 수행하여 이와 같은 청정한 모양을 보고 나면 그 뒤 목숨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어떤 근심 걱정이나 후회가 없으며, 또한 그 열뇌(熱惱)가 없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안열(安悅)과 환희가 용약(踊躍)하여 증장하고 적지(寂止)의 즐거움이 생기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소멸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이름하여 억념(憶念)을 수행하는 모양이라고 한다(역경원 역)

    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대목은 “환희가 용약한다”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 번역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數數入火님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고, 또 일반적인 한글번역도 그 견해를 지지할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반적인 번역보다는 “환희가 솟아오르다”는 번역을 지지합니다.

    서로 의견차가 있긴 하지만, 사실 이런 차이는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數數入火님의 견해를 보고 저는 數數入火님의 모습과 인생을 보는 것이며, 數數入火님께서는 저의 견해를 보시고 저의 모습과 인생을 보실 겁니다. 그럼으로써 배우는 것이고, 바로 이 배움이 중요하겠지요.

    덧붙이자면, 數數入火님의 “서구문화의 느끼함”이라는 표현이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이긴 하지만 십분 공감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계 내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느끼하지 않고 아늑하고 위로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참 모를 일입니다. 모든 교육과 가르침은 따라서 지난한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느끼함”을 스스로 느낄 연륜이 될 때까지 느끼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또, 대정신수대장경 웹사이트는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數數入火”도 14군데 나온다고 검색이 되네요^^ 멋진 이름이십니다.

    고싱가
  • 제가 봐도 환희용약에 곧 이어지는, 옷깃을 가다듬고 (整衣服) 이하 극진한 공경의 행위들은, 결코 기뻐서 춤추고 (踊) 뛰는 (躍) 것과는 거리가 멀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희용약 역시 삼매 수행의 양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참 제가 보고싶은대로만 보았군요. 환희용약에 대해서 완전히 엉뚱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책을 혼자 읽는다는 게 참 위험한 일이 될수 있겠구나, 하고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오해하고 있어도 아무도 지적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동안 제가 잘 알고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어떤 분야의 지식이든, 다른 사람들과 부단히 교류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 아니라면, 정말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해와 사견 (邪見) 을 자꾸 쌓고 있을 게 아니라, 정말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 자기의 일이어서 남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해나갈 수 있는 일에 역량을 집중해야겠다는 생각도 새삼 더 하게 됩니다. 다른 분야의 이야기는, 좋은 기회를 당해서, 그 세계에서 오신 분에게 고맙게 청해 들으면 되겠지요.

    좋은 깨우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부하며 살겠습니다 ^^.

    數數入火
  • 발끝마치 따라갈라치면 또 저만치….

    미산스님 빌려다놓고 애기 나오기 기다리고 있습니다.
    뒤꽁무니, 발뒤꿈치, 끝이라도 따라갈래면 총총 걸음.
    쉬지 않고 쫓아가겠습니다.

    armani
  • 참 맛있게 은근히 음미했습니다.

    hie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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