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현대교육을 이수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 좀더 친근함을 느낄 것이다. 신화와 기복의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논리가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법문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초기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게,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 설한” 설법이 주를 이룬다. 그에 비해 대승불교의 경전은 신화적이고 신이한 요소가 많이 보이며, 좀더 문학적이며, 논리적인 이해로는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다소 불명확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41)이 있다.

한국불교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 이래로 대승불교의 전통에 서 있다. 우리나라의 대승불교는 무려 천 오백 여년의 세월을 건너 살아남은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니, 현재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승단이나 전래된 불교문화, 애송하는 주요경전은 예외없이 대승불교 문화권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 유구한 대승불교 전통의 나라에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전래되기 시작했다. 아함경 경전 번역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법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불교 관련 번역자나 학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대승불교 내지 선불교 전통에 대한 반감 비슷한 감정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대승불교 내지 선불교 수행자들 역시 남방불교 전통에 대해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두 전통간에 주고받는 비판들은, 때로 상대방의 전통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동반하기도 한다. 가령, 초기불교 전공자들이 대승불교 전통에서 언급되는 “일심”이라든가 “참나”, “불성” 등을 두고 불교의 무아론과 배치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초보적인 수준에서 저지르는 오해가 아닌가 한다. 그토록 쉽게 언어에 끄달려 넘어가서야 어찌 수천 년의 불교전통을 논할 수 있겠는가. 또한, 초기불교 전통에 대한 대승불교(선불교) 수행자들의 비판 역시 초기불교의 수행 전통인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게 혹시 상대방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전통에 대한 이해는 학문적인 연구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각각의 수행전통에 입문하여 실제로 수행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수행의 경험으로부터 솟아나는 안목이 중요하다. 그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인연에 따라 때로는 위빠사나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간화선을 쓰기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초기불교 관련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항상 아쉬웠던 것은 거의 대부분이 학자의 견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학자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논하고 가지런하게 정리하면서 정법을 수호한다고 자부하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스스로의 견해와 스스로의 관념에 끌려들어가 무수히 상대를 만들면서 스스로의 업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업식은 상대방도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며 정법을 수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남회근은 “서생의 견해는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단언을 했을 것이다. 초기불교 관련 글들을 읽을 때마다 이와 같은 안타까움이 늘 있었다. 그런데,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명진출판 2010)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 안타까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며, 학문의 태생적인 편협함에서 벗어난 수행자의 푸른 안목을 접할 수 있었다.


초기경전에 정통한 학자이자, 선불교와 위빠사나의 수행 이력을 두루 갖춘 수행자의 초기경전 강의이다. 일반 불자를 상대로 한 강의인만큼 쉽고 간결하지만,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는 여법한 수행자의 혜안이 들어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산스님이 상도선원의 일반 불자를 상대로 한 초기경전 강의를 녹취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빨리 읽히지만, 갈피갈피에 숨어 있는 서늘한 안목 때문에 파도처럼 다가오는 감동이 있다. 특히 선불교와 남방불교의 수행전통과 학문적인 수련을 거친 이력 때문에, 초기불교 경전과 대승불교 경전, 위빠사나와 간화선 수행를 회통시키면서 연기법, 일체법,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업과 윤회를 설명해내는 솜씨는 여타의 초기불교 관련 서적들과는 수준을 달리한다. 좀더 학적인 방식으로 치밀하게 좀더 많은 내용이 실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강의라는 성격상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어떤 학문적인 책에서도 접할 수 없는 깊은 안목과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근본경전이라는 용어도 저는 배제하고 있어요. […] 불교에도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있답니다. 오직 초기불교만이 옳고, 대승경전이나 선불교의 가르침은 전부 가짜요, 이른바 ‘짝퉁’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요. 그래서 행여 그런 근본주의와 연결될까봐 그 단어를 쓰는 것이 꺼려집니다.(47)

빨리어만이 진설眞說이고 다른 것은 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심지어 [한역]아함경도 원전이 아니라며 안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아함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지만 서기 300~400년에 번역되어서 부처님 말씀의 초기 형태가 많이 보존되어 있습니다.(57)

초기경전에 정통한 학자가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린 사례를 나로서는 처음 접했다. 미산스님은 개념과 관념에 끝없이 희롱당하는 학자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 세계의 한계를 명료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어느 학자보다도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며, 어느 학자도 미치지 못할 통찰들을 설핏설핏 내비친다. 그렇기 때문에 또, 어느 대승불교 수행자보다도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초기경전을 소개한다. 예컨대, 분석과 직관이라는 학문적인 은유를 써서 초기경전의 유익함을 설명하는 대목을 읽어보자:

사실 분석과 종합이 동시에 되어야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분석에만 치중해도 문제가 있으며, 또 직관으로만 해놓고 이걸 풀어주지 않으면 대중은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가 어렵다, 특히 대승불교는 너무 철학적이고 어렵다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직관만 강조하면서 여러 우주현상과 심리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분석과 사유는 없고, 그런 분석적인 생각을 전부 번뇌나 망상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앞에 말한 프리즘을 통과한 사람에게 그건 망상이 아니고 중생을 위한 고구정녕한, 즉 입에서 쓴 내가 나도록 강조해서 말씀하실 만큼 절실한 친절함이고 자비심입니다.

선 수행의 차원에서는 이렇게 분석해서 풀어놓은 것을 ‘사구死句’라고 하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죽은 구절’, 즉 ‘평범하고 속되어 선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적은 구句’입니다. 사구냐 활구냐 하는 차원에서는 물론 활구로 확 찍어서 직관의 세계를 열어줄 방법을 써야겠지요. 하지만 직관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 중생의 근기에 맞에 설법하기 위한 기제를 새롭게 만들 때는 분석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경전은 바로 그런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불교가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직관적 기제와 분석적 기제가 아주 원할하게 자유자재로, 역동적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요즘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직관적 기제를 쓰다가도 어떤 때는 완전히 반대되는 기제를 써서 바르지 못한 견해들을 송두리째 끊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분이 바로 21세기형 선지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75-76)

명민한 독자라면 위 인용문을 토대로 미산스님 강의의 의도와 역량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초기불교의 국내소개와 함께 대두하고 있는 인터넷 상의 초기불교/대승불교 대립의 허망함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립과 다툼을 접할 때마다, “나는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세간이 나와 더불어 다툴 뿐이다. 무슨 까닭인가? 법답게 말하는 자라면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我不與世間諍 世間與我諍 所以者何? 比丘! 若如法語者 不與世間諍)는 잡아함경 제3권 <我經>의 구절이 떠오른다. 미산스님의 강의에서는 이 구절의 원전인 상윳타 니카야로부터 번역되어 인용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
비구들이여,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210)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는 이렇듯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안목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초기경전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 내지 선불교에 대한 촌평들을 간헐적으로 접할 수 있다. 그 촌평들을 읽어보면,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는, 법답게 말하는 자의 면모가 확인된다고 말해도 허언이 아닐 것이다:

삶의 이치와 우주 만유의 이법을 가르쳐주는 연기법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설해집니다. 초기경전 말고도 연기법과 관련된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특히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화엄경은 연기법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총상’, ‘별상’, ‘사사무애’, ‘이사무애’ 등의 개념들을 도입하여 연기법을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연기緣起의 ABC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61)

앞에서 인드라망 얘기를 했는데, 초기경전을 거쳐 대승경전으로 넘어가면 연기법에 대한 설명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뤄집니다. 특히 화엄경이 그렇습니다. 연기법을 가장 깊고 광대하게 해석한 경이 화엄경인데, 나중에 함께 공부해봅시다(88)

선불교는 그냥 바로 그 직관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직관으로 들어갔다 할지라도 남들을 교화하고 그 직관의 세계로 인도하려면 자세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초기경전은 그런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68)

부처님은 사띠라는 말을 수행언어로 쓰십니다. 물론 이때 사띠에는 기억이라는 뜻도 분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에서 사띠라는 말을 쓸 때는 과거의 것을 끄집어내어 외운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한문의 ‘염念’자를 잘 보세요. ‘이제 금今’자에 ‘마음 심心’자,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 어떤 명상의 대상, 수행 대상—화두면 화두, 호흡이면 호흡—에 밀착해서 그것을 놓치지 않는 마음이 ‘염’입니다. […] 팔정도에서도 간화선에서도 사띠는 매우 중요합니다. […] 간화선의 경우는 화두를 놓치지 않으면 이게 의정으로 변해 의정이 우리 몸의 60조 세포에 가득 차고, 완전히 의심덩어리가 된 몸과 마음 전체가 의단으로 변했을 때, 바로 그때 완전한 삼매가 형성되고, 여기서 굉장히 강한 사띠가 형성됩니다. 간화선의 중요 포인트도 여기에 있습니다.(263)

그렇다면 수행은 무엇인가요? 위빠사나 수행, 관법 수행은 순간순간 이 세 가지 느낌[좋은 느낌, 싫은 느낌, 무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게 미얀마 쉐우민 센터에서 하는 심념처 수행입니다. 이건 선 중에도 ‘묵조선’하고도 매우 닮아 있어요. 쉐우민 센터의 수행 방법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자세히 이야기해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169)

대승불교 쪽의 여래장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실체론적으로 흘러버릴 요소가 있습니다. 불교는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여래장 사상은 ‘여래장’, ‘불성’이라는 영원불멸의 뭔가가 있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 설령 여래장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것이 연기적, 중도적인 관점에서 다시 걸러져야 합니다. 이런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여래장을 이야기하게 되면 실체론으로 갈 가능성이 다분하지요. 그러나 연기의 프리즘을 통해 이야기하면 일반적인 실체론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됩니다.(74)

수행 체험을 직접 해보면 불성, 참나, 이런 것이 어떤 자리인지를 스스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체득한 상태에서는 어떤 용어를 쓰더라도 걸리지 않죠. 그 말을 쓰는 당사자는 체득해서 걸림이 없는데, 혹 다른 사람이 그걸 듣고 실체론적으로 뭐가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어요.(314)

위와 같은 인용문들은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개괄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강의의 독보적인 특성과 미산스님의 혜안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미얀마 쉐우민 센터의 심념처 수행과 간화선·묵조선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역량인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여래장 사상과 연기법, 화엄경과 연기법을 회통시켜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상좌부 불교의 재생연결식과 대승불교의 중음을, 다투지 않고 양자를 여유 있게 수용할 수 있는 역량 역시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릇 수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은 현대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함부로 재단해도 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전통에는 평생을 걸쳐 배운 방식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한 깊이가 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수천 년의 전통을 두려움 없이 막힘 없이 파헤칠수 있는 파겁(破怯)의 경지에 이르려면, 무릇 알음알이를 버리고 하심하는 가운데 수천 년의 전통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대승불교 전통에 있는 이들도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매우 적합한 설명 도구가 될 수 있는 초기경전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초기불교/대승불교의) 불교학·불교학자라는 또 다른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는 여법한 수행자가 필요한 새로운 시대이며, 현대인의 어법과 사고 구조를 파고드는 가르침도 필요한 시대이다.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는 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책, 새로운 안목의 탄생을 알린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강의가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법답게 말하는 자는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고 —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를 읽고”에 대한 8개의 댓글

  • 반갑습니다. 요즘은 건강하신지요?

    초기불교는 제 마음에도 더 이해가능 합니다.

    그 수수하고 정결함을 좋아합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아비타불비
  • 수수하고 정결함을 좋아하시는군요. 이 책과 좋은 인연 되기를 빕니다.

    고싱가
  • 전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간화선과 인도 힌두 수행법이 너무 비슷해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힌두 쪽은 참나, 아트만을 깨닫는걸 목표로 합니다. 자아탐구나 니사르 요가라고 한국에 많이 알려진 수행법을 보면 참선이 자꾸 떠오릅니다. 달마가 남인도 출신이란 것도 오버랩되죠 저같은 사람은 자꾸 헷갈립니다. 간화선도 결국 사념처 수행의 일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가다
  • 글쎄요, 초기불교 전공자들이 선불교의 참나와 힌두교의 아트만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는 경험으로부터 언어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언어로부터 경험을 추정하는 길을 걷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경험으로부터 언어로 내려가는 자들은 어느 언어든 자유롭게 쓰고 자유롭게 버릴 수 있지만, 언어로부터 경험으로 올라가려는 자들은 다름아닌 바로 그 언어 때문에 늘 헤맬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부처님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흐름을 보시고 ‘연기’라고 이름하셨지만, 선지식들은 그 생멸의 흐름을 보시고 ‘참나’, ‘주인공’, ‘불성’ 등등으로 이름하였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까?

    니체의 말을 빌자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는 것이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연기’라고 하든 ‘주인공’이라 하든 ‘참나’라고 하든 ‘불성’이라고 하든 아무런 걸림이 없겠지만,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은 언어가 다르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마련이죠. 그러면 사사건건 걸려 넘어지게 되지요. 한갓 언어에 그토록 쉽게 매몰되는 것이 과연 수행의 길에 도움이 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고싱가
  • ‘고싱가숲’에 와서 다른 내용을 검색하다 이 글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책에 관하여 본 서평 중 가장 훌륭하고 명료한 내용이라 상도선원 카페에 담아가 여러 법우님과 함께 읽으려고 스크랩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

    소나
  • 먼저 허락을 얻고 퍼가는 게 도리일 터인데, 제가 카페지기로서의 습과 착을 버리지 못해(^^) 먼저 퍼간 다음에 인사를 드렸네요.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소나
  • 강의내용을 편집하신 소나님이신가 봅니다. 덕분에 귀한 책을 접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이곳에서 뵙게 되어 기쁩니다만, 이 하찮은 글이 상도선원에 오르내리다니 송구한 마음 뿐입니다. 성불하십시오. ()

    고싱가
  • 연기법을 우주에 적용한 것이 바로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중관논리로 화엄을 설명하려면 삼라만상 하나하나에 논리를 만드는 두뇌적인 번거로움이 필요한 억지논리가 되지만,
    범아일여 사상으로 화엄경을 해설하면 단 1%의 막힘도 없이 모든 부분이 아주 쉽게 설명됩니다.
    어느 쪽이 해석에 적합한이론인지는 분명하지요.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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