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종소리

하루 해가 서녘의 형제봉에 뉘엿뉘엿 다가가면 샘물을 뜨러 집을 나선다. 이때쯤이면 하루 중 마주치는 사람이 가장 적어, 북한산 입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오르는 동안 느즈막이 하산을 마무리하는 몇몇 등산객만 눈에 띌 뿐이다. 그러다가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면 사람 하나 마주치기 어렵다. 이것이 모두가 이용하는 북한산인지 아니면 나만 홀로 걷는 정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적하고 아름답다.

개울 소리는 들리고 나무들은 우거져 있고 조붓한 길은 사라질듯 사라질듯 이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개울을 건너 숨은 오솔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제까지 이 오솔길에서 오가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마주친 바 없다. 때마침 이 숨은 오솔길로 접어드는 입구에는 조그만 평지가 하나 있다. 여기에서는 우거진 나무 틈새로 봉긋한 시야가 열려 멀리 칼바위 능선의 지능선 한 자락과 한 조각 하늘이 보인다. 마치 자궁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우묵한 공간에서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 듯 길을 오르면 마침내 석간수를 얻을 수 있는 샘터에 이르게 된다. 이 샘터는 형제봉 지능선의 작은 오솔길 중간에 있어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스쳐갈 뿐, 나처럼 정릉입구에서부터 숨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을 아직은 보지 못했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오르는 길은 동네사람 아니면 섣불리 가기 힘든 길이며,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언제나 낙엽에 가려져 있다. 샘터에서도 그 길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샘터에 오르면 사뭇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앉아서 쉬어갈 수 있도록 돌들이 놓여있다. 나무들은 높이 높이 솟아올라 평지를 크게 감싸고 있다. 그 큰 나무들의 무수한 잎사귀들을 흔드는 바람소리는 아름답다. 그리고 둥— 둥—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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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의 당좌와 비천상. 종소리는 멀리서 들을수록 좋다. 모든 것이 그 종소리 하나에 빠져들 수 있도록 아득하게 울려야 한다.

저녁 종소리가 깊이 깊이 울린다. 여름에는 7시쯤, 가을에는 6시쯤, 그 중간에는 6시 반쯤, 종적을 알 수 없는 어드메에선가 산사의 종소리가 울린다. 언제나 하루 해가 지고 잔잔한 어둠이 내릴 무렵에 맞춰 울리는 것이다.

서른 세 번의 울림. 이렇듯 종소리는 멀리서 들을수록 좋다. 모든 것이 그 종소리 하나에 빠져들 수 있도록 아득하게 울려야 한다. 범종의 당좌는 바로 이 하나로 빠져듦, 이 하나의 아득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암자터와도 같은 포근한 공간을 향해 잔잔한 어둠을 타고 우우웅 다가오는 종소리. 선경이 따로 없다.

종소리가 울리는 동안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 내리는 소리이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와와와 커진다. 어둠 속 산중의 후두두둑 빗소리, 그리고 유장한 호흡의 우우웅 종소리.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이 하나의 흐름만 남으시라.
 

하산하는 길에 늦게 산을 내려가는 청춘남녀를 만났다. 목소리를 듣자하니 서른 살은 넘어 뵈는데, 어둠 속 하산길이 무서웠던가 보다. 내가 동네사람이라고 하며 얼마 안 남았다고 했더니 매우 안도한다. 이 어둠 속에서 길이 보이느냐며, 아무리 동네사람이지만 어두운 산이 무섭지 않냐며 무척 놀란다. 건장한 사내가 조금 겁을 먹은 목소리다. 비오는 날에는 빛이 빗물에 반사되어 오히려 맑은 날보다 길이 잘 보인다고 했더니 믿지 못한다.

오랫만에 흠뻑 젖었다. 기분이 좋다. 이렇게 젖어도 그저 집에 돌아와 씻으면 그만이니, 산자락 밑에 사는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오늘 하루는 잘 살았다.

저녁 종소리”에 대한 2개의 댓글

  • 오랜만에 들러봅니다.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에 어둠속으로 가라앉는 종소리를
    상상해본답니다.
    가끔씩 이곳도 오래된 성당에서 저녁미사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수가 있답니다.

    은사시나무
  • 서양에는 저녁미사 종소리가 있겠군요. 뎅그렁뎅그렁 하는 소리. 제가 사는 동네에는 수녀원도 있어 가끔씩 수녀원 종소리가 들립니다.

    어떤 때는 새벽 네 시 경에 절집의 범종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 소리는 참 신비롭기도 합니다.

    개화기 개신교 신자였던 김교신의 일기에 보면, 그분도 정릉쪽에 사셨던 분인데, 절집의 저녁종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와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확실히 소리의 아름다움에는 종교 간의 장벽이 없는 듯합니다. 오직 교조적인 세계에서만 무수한 분별과 대결이 있는 듯합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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