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시다 — 법희스님의 전기를 읽고

수행자의 삶은 등잔이 없는 불꽃과 같고 뿌리가 없는 연꽃과 같고 자취가 없는 새와 같아 그 생애를 복원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형식의 평전 역시 불가능하다. 예로부터 행장과 어록의 형태로만 수행자의 전기적 삶이 희미하게 전해질 뿐 그 이상의 기록이 거의 없는 것도, 그 삶이 훨훨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아 뭔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과 글을 경계하는 세계에서, 움직이는 몸뚱어리의 앞뒤를 캐묻고 따지고 기록하는 것은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역사학적 비평에 의한 평전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렇듯 수행자의 삶이 시간에 갇혀 있지 않으며, 행위에 갇혀 있지 않으며, 말과 글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승들의 경우에랴.

조영숙의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민족사 1998)은, 부제처럼, “법희선사, 그의 생애와 禪”을 다룬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진작부터 구입하여 읽고 싶었으나, “선사”와 “전기”라는 어울리지 않는 결합 때문에 일년은 머뭇거린 듯하다. 그전에 고승들의 생애를 다룬 책들을 접하고 실망한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희라는 커다란 산의 그늘은 깊되 관련 자료는 다른 아무 것도 없어 마침내 이 책을 구입했다.

법희스님을 알거나 가까이 모시고 살았거나 한 번이라도 만났던 이들은 한결같이 스님의 깊은 눈에 빛을 내쏘는 듯한 안광(眼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마주선 이의 속을 투명하게 꿰뚫는 눈빛, 조용하고 정결한 움직임, 언제나 선정에 들어 있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스님에게서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귀의하게 하는 숭고함이 배어 나왔다고 한다.(47)

“마주선 이의 속을 투명하게 꿰뚫는 눈빛, 조용하고 정결한 움직임” — 책 서두에 있는 이 표현에서 나는 작가의 역량에 대한 의심을 온전히 거두었다. 도인을 누구나 알아볼 수는 없듯, 작가라고 해서 누구나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문을 쓴 승혜스님의 글에 따르면, 1968년에 자신을 포함하여 학인들이 처음 법희스님을 뵙고 “너무나 평범한 모습 그 자체”에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용납한 듯 깊고 그윽한 기품과 부단한 수행을 닦은 결과 저절로 발현되는 노스님의 성스러움을 알아차리는 데 근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4)고 고백한다. 도인은 진정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던가. 그리고 범인은 도인을 보면 비웃는다고 하던가. 불문에 들어선 수행자도 도인의 면목을 알아보는 데 20년이 걸렸다는데, 나같은 범인이야 도인을 만난들 무심코 지나치고 말 것 아니겠는가.

7563
심우장에 전시되어 있는 만해스님의 오도송 필묵의 각자. 이 오도송과 관련하여 법희스님이 만공회상에서 한 마디 일렀다.

내가 법희스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만해스님의 오도송과 관련한 일화 때문이었다. 현재 심우장 내에 전시되고 있는 만해스님의 필묵을 보면 오도송의 마지막 구절은 “雪裡桃花片片飛”인데 «한용운 전집»에는 “雪裡桃花片片紅”으로 다르게 실려 있었다. 궁금하여 자료 조사를 해보았더니, 만공스님이 “飛”자를 “紅”자로 고치는 게 어떻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공법어»를 살펴보니, 마침 이 오도송과 관련한 선화(禪話)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만해 한 용운 스님이 오도송을 지어 와서 이르되,

남아가 이르는 곳마다 다 내 고향인데,
몇 사람이나 객의 수심 가운데 지냈던고!
한 소리 큰 할에 삼천 세계를 타파하니,
설한에 도화가 조각조각 날으네.

스님이 반문하여 이르되, “날으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고?” 하였다. 용운 스님이 답하여 이르되, “거북털과 토끼 뿔이로다.” 하였다.

스님이 크게 웃으며 다시 대중에게 이르되, “각기 한 마디씩 일러라” 하니, 법희 비구니가 나와서 이르되, “눈이 녹으니 한 조각 땅입니다.” 하거늘, 스님이 이르되, “다만 한 조각 땅을 얻었느니라” 하였다.

— «만공법어»(덕숭총림 1986) 134면

만공스님이 만해스님의 오도송을 들려준 뒤 대중에게 한 마디 이르라고 했을 때, 한 스님이 나와 “눈이 녹으니 한 조각 땅입니다.”는 한 마디를 내놓았다. 나는 그 한 마디에 놀랐고, 또 만공과 만해라는 거인들 사이에 한 마디 내놓은 분이 비구니 스님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분은 누구일까? 그러나 그분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그저 이야기로만 전할 뿐.

자연인 그대로의 맑은 삶. 그 자체로 많은 수행자들을 교화한 법희선사. 그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선사의 삶을 따르고 그분의 수행을 흠모하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오늘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빛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 남아 한 가닥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렇듯 훌륭한 삶이 머지않아 잊혀질 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던 스님도 그것을 못내 애석해하였다.

선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분의 아름다운 삶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치졸한 필치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생애를 글로 옮겨 보았다.(9)
 

우리 옆에 너무나도 조용히 왔다 갔던 훌륭한 도인을 이렇게라도 남겨서 전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47)

이렇게 해서 «법의 기쁨 사바세계에 가득»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만공어록에 실려 있는 법희선사의 선화 몇 가지, 탄허선사가 쓴 비문, 그분을 가까이 모셨던 분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그분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남들의 전언에 따른 생애의 복원은 요원한 일이며, 특히 수행자의 전기적 생애를 기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은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리 문헌자료를 토대로 한 전기적 생애가 주를 이루지는 않으며, 그분의 수행과정과 선화,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감화받은 이들의 증언이 중심이다. 그리고 그분의 구도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불교적 전통과 가르침들이 밑그림으로 많이 보태졌다. 선불교 전통에 대한 설명 내용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없었지만, 법희라는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기라성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교유, 후학들의 존경과 증언 내용은 법희선사의 일면모를 그려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에 밝혀진 자료들을 토대로 유추해 보니, 법희스님이 만해스님의 오도송과 관련하여 한 마디 일렀던 때는 놀랍게도 서른을 갓 넘은 젊은 시절이었다. 속된 편견으로 말하자면, 서른 초반의 여자인 것이다. 서른 초반의 여자, …, 놀랍지 않은가?

전기는 법희스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서너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어린 소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읜 것이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조율하는지 나는 안다. 나 역시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덟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 막막함, 내가 무너질 때 나를 받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 절망감. 여덟 살의 아이가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기억. 그 어둡고 광막한 하늘이 어쩌면 그토록 내 마음과 흡사하던지, . . . 나는 아직도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일들이 더 정확하게 기억난다. 아마도 그 기억들이 나를 지금과 같은 종교적 인간으로 이끌었는 지도 모르겠다.

법희스님의 수행과정을 읽어가다 보니 내가 어린 시절에 올려보았던 밤하늘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마도 그 밤하늘과 같은 거대한 침묵이 희노애락에 물들지 않는 삶, 그림자 같은 생활을 선사했을 것이다. 남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자세, “조용하고 정결한 움직임”, 그리고 안목을 갖춘 뒤에도 대중들의 눈에 띄지 않는 변함없는 생활.

그 날 이후에도 법희의 생활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달라진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더욱 깊어진 눈빛은 맑고 밝았다. 하루 일과를 보내며 잠시도 부질없는 것에 마음 가는 일이 없었으며 일상에 반드시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묵언으로 지냈다. 그에게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어른스님 두어 명에 불과했다.(178)

만공스님이 법희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린 것은 법희스님 나이 서른의 일이다. 만공스님은 전법게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부터 자네는 오후(悟後) 수행에 전념하고 금생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할 생각 말게나. 요즘 사람들은 용심이 지나쳐 시기하는 자가 많으니 자네의 시절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201)

시절은 1916년, 나이 서른의 비구니 스님. 만공스님의 당부대로 법희스님은 평생동안 단 한 번도 법석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분의 법문도 없고 그분의 어록도 전하지 않는다. “법희선사는 스스로 남긴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 오도송도 열반송도 법어도 남아 전해지는 것이 없으며, 유별난 행적도 특기할 만한 일례도 없다.”(46) 작가의 표현대로, “그림자조차 거두어 가버린, 자신의 자취를 철저히 지워 버린 법희스님의 일생”(47)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매우 열악한 집필조건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작가의 감정을 개입시키는 바 없이, 증언을 토대로 그분에 대한 존경의 념을 품고 전기를 집필한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조용히 와서 조용히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신 자리를 그려볼 수 있었다.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버린 일생인 만큼 독자들은 이 책에서 구체적인 전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그와 반비례로 감화는 더욱 클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전기적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고 법희선사의 면모만 선명하게 남는다. 그분의 고요하고 정결한 움직임을 그려보면서 오늘 하루를 보낸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큰 시냇물로서도 그의 청백함을 비유할 수 없고 하얀 눈으로서도 그에 소박함을 비유할 수 없다. 앞으로 백세의 과거와 이후로 백세의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성대한 일이 없을 것이다.

考其一生컨데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니 未有如此之威事者也로다

— 탄허스님의 법희선사 탑비 중에서

조용히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시다 — 법희스님의 전기를 읽고”에 대한 5개의 댓글

  • 며칠전에 우연히 다른 분의 링크를 통해 건너왔다가 지금은 RSS구독을 해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철학 책의 번역에 대한 글들도 그렇고, 오늘 적으신 글에서도 조용한 감동을 받고 갑니다. 저는 철학과 불교를 잘 모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쉽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좋아합니다. 고맙습니다.

    가즈랑
  • 반갑습니다. 저도 철학과 불교를 잘 모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한테요. 그저 배울 뿐이지요.

    가즈랑님의 블로그 디자인이 참 좋습니다. 오랫만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만났네요. 한때 저도 텍스트패턴이냐 워드프레스냐의 갈릴김에서 많이 갈등했지요. 좋은 날들 되시길 빕니다.

    고싱가
  • ㅎㅎ 데비안 설치에 관한 글을 찾다가..
    메뉴 태그에 있기에.. 읽고 갑니다..^^

    다음글 읽어보러 가야겠습니다^^..

    덧. 텍스트 페턴쓰시는군요..^^.. ㅎㅎ

    사진우주
  • 데비안 설치 글은 몇 년 전에 쓴 것인데, 아직도 많은 분들이 읽으시는 것같네요. 그런데 이 블로그는 워드프레스를 쓰고 있어요^^

    고싱가
  • 안녕하세요, 법희 스님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그분이 만공스님의 시에 대한 답변으로 남긴 오도송의 연기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사실을 만해의 글과 만공 스님의 글을 비교해서 알아내신 필자님은 한국 불교 연구 내지 비구니사 연구에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제 논문에 인용하려고 하는데 필명을 모르겠네요. 제게 개인적으로 메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은수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