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 현악4중주—길고도 수고로운 산고 끝에 낳은 작품

모차르트 특유의 경쾌함, 가벼움, 화사함 등에 취하여 모차르트에 입문한 분들이 모차르트 음악에서 난관에 부딪히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면, 혹시 현악4중주곡이 아닐까요? 물론 출발점인 경쾌함과 화사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차르트의 슬픔과 환희, 격정과 투명함 속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부딪힐 수 있는 지점 말입니다. <1782년 바로크 음악의 대가 바흐의 곡을 접하기 이전 모차르트 음악의 경쾌함과 화사함>, <바로크의 대위법과 하이든의 주제음악을 자신의 음악 언어로 만든 이후 모차르트 음악의 격정과 투명함>, 그리고 <오페라 음악의 마성과 유희>, 이런 식으로 모차르트 음악의 맛을 무식하고 과감하게 구분해 본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지점에서 모차르트를 사랑하고 계신가요? 혹시 아주 간혹가다 그 화사함과 투명함과 현혹적인 마성으로부터 벗어나(말 그대로, “외도”하여) 베토벤의 의식적인 정열과 낭만파 음악의 병든 감성 등을 살짝 맞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는 없었는지요? 제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곡, 하이든에게 헌정한 현악4중주곡은 바로 그런 유혹을 느끼시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1781년엔가 1782년에 처음으로 바흐의 곡을 접합니다. 바흐의 곡을 접한 다음 1782년에서 1785년 사이에 작곡된 곡이 바로 쾨헬번호 387, 421, 428, 458(일명, 사냥), 464, 465(일명, 불협화음)의 ‘하이든’ 현악4중주곡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바흐의 곡은 다성음악과 대위법으로 유명합니다. 고전파 이후의 음악과 같이 주제를 형성하는 하나의 선율이 존재하고 나머지 음은 그 선율을 반주하는 화음으로 구성되는 화성음악과는 달리, 대위법에서는 하나의 선율(정선율cantus firmus)이 존재하고 그 선율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흘러가는 선율(대위선율punctum contra punctum)이 별도로 존재합니다. 선율이 여럿이지요. 그 여럿의 선율, 여러 목소리(다성)를 완벽하게 조율한 대위법의 대가 바흐의 음악은, 비유로 설명하자면, 위대한 건축의 장엄한 내부공간에서 느껴지는 공간감, 전체성, 정치함, 위상감, 신비스러움의 음악입니다.

이 바로크 대가의 대위법을 접하기 이전에 물론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의 다성음악을 접하긴 했지만, 그는 이탈리아의 다성음악과 바흐의 다성음악이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건축물의 내부공간이 확 달랐거든요. 이탈리아의 다성음악이 아기자기하고 따사로운 공간이었다면 바흐의 다성음악은 깊숙하고 신비로운 공간이라고나 할까요. 이 대위법과 다성음악이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음악언어였다면, 하이든의 음악은 당시에는 새로운 음악언어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흔히 주제음악이라고 말하는데, 그 음악에서는 선율로 구성되는 기본 주제가 있고 그 주제의 변주, 그리고 연결된 주제가 음악을 시종일관하게 됩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건축물을 쌓아올리기 위한 각 작업의 반복성, 방향성, 역동성의 음악입니다. 주제음악이 그 뭔가를 향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공간을 형성해 나간다면, 대위법은 정지된 상태만으로도 이미 완성된 공간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자칫 적멸감과 권태로움을 선사할 수 있는 대위법과는 달리 과단성 있는 결단과 거친 돌진을 표현하기에 적격인 주제음악이 고전파 이후에 대위법을 대신하는 것은 이후의 정신사적인 흐름상 당연한 귀결이 됩니다. 하이든의 새로운 음악이 그만큼 미래의 음악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하이든의 음악이 이후의 주제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낭만파의 효시가 되었던 베토벤의 경우와 같이 웅변적인 과시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일어나는 궁금증! 바흐에게서 차원이 다르게 깊어진 대위법의 공간 안에 주제선율을 스윽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위상감과 역동성이라는 상반된 두 언어가 결합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존재, 꿈틀대는 역동성과 고요한 신비스러움을 동시에, 자유로운 비상과 웅장한 공간을 동시에 표현하는 존재, 혹시 천사였을 지도 모르는 존재, 아- 모차르트가 이 지구상에 등장했다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입니까!

1782년에 착수하여 완성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고 음악학자들이 판단하는 모차르트의 두 음악 언어의 종합, 그 첫 시작은 바로 이 글 제목의 ‘하이든’ 현악4중주곡입니다. 음악언어를 터득하는데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발휘하였던 모차르트가 손수 고백하기를, 길고도 수고스러운 작업 끝에 내놓은 것이 바로 이 여섯곡입니다. ‘하이든’ 현악4중주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후기 피아노협주곡(주로 20번대 이후), 후기교향곡, 후기오페라, 종교음악등에서 찬란하게 꽃피울 모차르트만의 음악언어를 쏟아내기 위한 지난한 탐색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든’ 현악4중주곡을 듣는 동안에는, 양식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긴장감, 탐색의 지난함을 타고 모차르트를 엄습하는 마성이 선사하는 무거움과 어두움, 그러나 그러한 기나긴 긴장감과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아연 쏟아져내리는 선명함, 우리가 사랑하는 모차르트가 겪은 백개의 고독과 하나의 투명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투명함은 앞으로 인류의 크나큰 축복이 될 음악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나가 확산하게 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대위법적인 공간을 표현하는데는 관현악, 저음부 악기가 어울리고, 주제 선율을 표현하는데는 독주 악기, 고음부 악기가 어울립니다. 그리고 마성을 표현하는데는 관현악, 저음부 악기가, 마성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게 비상하는 선율은 독주 악기, 고음부 악기, 인간의 목소리가 어울립니다. 그래서, 후기 피아노 협주곡을 듣노라면, 피아노의 주제 선율이 율동감 있게 비상하고 관현악은 그 춤추는 존재를 포위하려는 듯 대위법의 선율을 강타하며 달려가는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주제 선율의 역동성에 대위법의 공간이 함몰되는 해결책(베토벤은 이 방향으로 치닫게 됩니다)은 모차르트에게서는 단 한번 예외적으로만 등장하며, 오히려 계속해서 신비스러운 마성의 공간을 형성하던 관현악이 순간적으로(아, 이 순간은 얼마나 시적이고 황홀한 순간이던가요! 그것은 기적이고 마법입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 있다면 십중팔구 바로 이 기적적인 순간일 것입니다) 정화되고, 그 정화된 선명함에 피아노의 주제 선율이 통통통 안깁니다. 그리하여 농밀하면서도 역동적인 대위법, 날렵하면서도 웅혼한 주제선율이 동시에 가능하게 됩니다. 모차르트만의 음악언어는 이렇게 하여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정치한 대위법의 공간에 안겨서 자유롭게 노니는 주제 선율, 주제 선율의 투명한 비상을 감싸면서 공간을 자유자재로 유영시키는 대위법,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차르트만의 대위법은 바로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길고도 수고스러운 작업 끝에 피어난 천송이 만송이 꽃입니다.

그 찬란함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를 모차르트와 같이 겪어보시려면, ‘하이든’ 현악4중주곡을 한번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거기 백개의 고독한 고원에서 희끗희끗 비치던 하나의 투명함, 즉 그 이후의 피아노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종교음악 등으로 확산되어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될 모차르트 음악언어의 면모를 슬쩍 엿볼 수 있습니다. 여타 모차르트 음악을 들을 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질 것이며, 이 음악을 들을 때에는 부디 딴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서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 음악의 유적지라 할 그 음악을 듣고 나면 모차르트라는 존재에 대하여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며, 처음에 말한 외도의 유혹은 어느새 사라질 것입니다. 참고로,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바친 헌정사를 번역해 올립니다(여기에서 언급하는 여섯 아들은 ‘하이든’ 현약4중주곡 6곡을 가리킵니다):

친애하는 벗 하이든 님께

자신의 아들들을 넓은 세상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던 어느 아버지는, 다행스러운 운명으로 최고의 벗이 되었던 한 저명한 동시대인의 보호와 인도에 그 아들들을 맡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없이 사랑하는 벗이자 고명하신 분이시여, 바로 그 의미에서 여기 저의 여섯 아들을 보아 주십시오! 이들은 길고도 수고로운 작업 끝에 낳은 아이들입니다. 한 가지 희망이 조금이나마 용기를 주고서 저를 위로하였습니다. 제게 살갑게, 이 음악 작품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벗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던 희망이었지요. 더없이 신의 있으신 벗, 당신은 저희 수도에 최근 체재하셨을 때에 이 아이들에 대하여 친히 만족감을 표하셨습니다. 그 약속 때문에 저는 무엇보다도 안심이 되었으며, 그래서 저는 제 아이들이 당신의 사랑에 값하지 못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간곡히 당신께 부탁드립니다. 이들을 호의로 받아 주시고 이들의 아버지, 보호자, 벗이 되어 주시기를! 이제부터 저는 이 아이들에 대한 저의 권리를 당신께 양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청하옵기는, 제가 눈먼 아버지가 되어 미처 놓쳤을 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결함과 약점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다른 모든 것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 당신의 우의를 앞으로도 계속 보내 주십시오. 저 역시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의 진정한 벗으로 남을 것이오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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