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음악사적 성취

알프레트 아인쉬타인은 쾨헬번호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음악학자로서, 이미 소개해 드렸듯이, «모차르트: 그 인물과 작품»이라는 표준적인 저서까지 저술한 분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그 책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독특하게도 그의 “Greatness in Music”이라는 책은 «위대한 음악가, 그 위대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2001년 “음악세계”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한 명의 음악가가 어떤 식으로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되는가에 대한 과정을 흥미롭게 탐색하고 있는 책인데, 워낙에 여러 음악가를 다루니만큼 한 작곡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긴 합니다.

모차르트에 관한 대목도 대단히 산발적으로 언급되고 있어서 별도로 소개할 만하지 않는데요, 다만 모차르트의 음악사적 성취와 관련한 대목만큼은 예외입니다.

대위법과 ‘갈랑’ 양식이 충돌하는 음악사의 위기적 상황에서 모차르트가 어떠한 답을 내놓았는가에 대하여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대목이지요. 그 대목을 소개해 드립니다.

 

알프레트 아인쉬타인, «위대한 음악가, 그 위대성», 215면 이하

모차르트는 분명히 음악사에 있어서 위험한 순간에 태어났는데, 바흐가 죽은 지 6년 후였다. 바흐의 모습은 이미 ‘갈랑’화한 시대에 대위법의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즉 가볍고, 장난스럽고, 피상적이며 향락적인 것들이 유행하던 시대, 페르골레지가 우상이던 시대였다.

최초의 바흐 전기 작가인 엄격한 신사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 같은 몇 안 되는 학자나 고루한 노인들만이 페르골레지와 페르골레지적인 모든 것들을 경멸하고 저주했다.

모차르트가 받은 음악 교육은 매우 독특했다. 그것은 거의 완벽하게 이탈리아적, 다른 말로 ‘갈랑’적이었다. 만일 그가 어린 시절에 위대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로서 ‘밀라노의 바흐’ 혹은 ‘런던의 바흐’라고 알려져 있었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손에 맡겨지는 행운이 없었다면 그도 이를테면 보케리니의 음악처럼 우아하지만 공허한 작품들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른다.

모차르트는 본받을 여러 선배들 가운데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로부터 선율의 단순성과 따뜻한 마음을 배웠다. 그렇지만 만일 그런 것들이 이미 그에게 내재해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것들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모차르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종종 이 단순성을 잊어버리고 ‘갈랑’이나 ‘오로지 갈랑’적인 얕은 강물에서 노를 젖기도 했다. 이것이 모차르트의 배우는 시기의 한 모습이다.

또 다른 측면은 가장 조잡하고 건조한 대위법, 가장 경직된 ‘현학’이다. 그것은 생동적인 다성음악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젊은 모차르트는 이러한 대위법으로 스스로를 심각하게 괴롭혔다. 그는 당대의 음악적 계시자였던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 아래에서, 그 다음에는 잘츠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과 요한 에르스트 에벌린 쓴 고풍의 교회음악을 베껴 쓰면서 자신의 오선지를 한장 한장 채워갔다.

이러한 홰해할 수 없는 모순과 양식상의 단절은 이 시기 내내 그의 창작에서 갈라진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틈은 그가 처음 빈에 머물렀던 1782년경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오르간 트리오>, 그리고 <푸가의 기법>에 이르기까지 활기찬 다성음악의 진수를 알게된 무렵에는 너무 많이 벌어져서 위험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창작 과정에서 똑같은 갈등을 경험한 연상의 동료 하이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든도 역시 ‘갈랑’ 작곡가로 시작했다. 하이든도 4중주곡들과 교향곡에서 대위법, ‘학자적’인 다성음악이 자신의 양식에는 이질적임을 느꼈다.

단순히 갈랑적인 양식이 지닌 취약성을 의식한 그는 그래서 4중주를 쓰면서 피날레를 푸가로 썼고, 교향곡에 카논풍의 미뉴엣을 넣었다. 마침내 50의 나이게 그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갈랑적이지도 학자적이지도 않으면서 그 둘을 하나에 모두 담고 있는 4중주를 썼다.

‘주제적 발전’을 갖춘 4중주, 모든 성부가 ‘주성부’를 이루는 4중주, 또는 파리사람들이 멋지게 표현했듯이 ‘4인의 대화’quatuors dialogues를 완성하였다. 그 해결책을 발견한 이후 하이든은 더 이상 푸가를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엄격한 대위법을 아예 배 밖의 물 속으로 던져버린 것은 아니고, 이제는 그의 유머, 그의 변덕, 그의 반어의 소재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그 정도까지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음악의 한 요소로서 모든 형태의 대위법은 그에게 너무도 진지한 문제였다. 1782년과 1783년,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들을 알게된 후, 그는 매우 무뚝뚝하고 부자연스러운 구식 푸가를 몇 편 썼다. 그 이후에는 이런 류의 것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성음악을 포기하지도, 하이든처럼 대위법을 장난의 소재로 삼지도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의 양식 속에 대위법을 용해시킨 것이다. 그는 그것을 너무도 훌륭히 용해시켜서 더 이상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다.

사단조5중주 KV518의 미뉴엣, 내림마장조 피아노3중주 KV498—클라리넷이 포함된—, 혹은 사단조 교향곡의 미뉴엣이 ‘갈랑’ 양식으로 쓰여졌는지 또는 ‘학자적’ 양식으로 쓰여졌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학자적’ 양식은 아니다. 결코 학자적 양식은 아니고, 우리는 그 교향곡의 미뉴엣 악장에서 트리오가 끝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엄격하고 순수한 다성음악을 알아차리게 된다.

다장조 현악4중주의 느린 악장1이 갈랑적인가, 학자적인가? 그 성부들의 ‘실체’, 그 독립성이 그 이상 더 요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지 부분에서 제1바이올린의 끝맺는 선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대위법이다. 바흐가 타계한지 30년, 또는 40년 후에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도움을 받아서 음악사의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종결이고 최후의 결론이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모차르트로부터 단지 노래하는 듯한 새로운 양식, 새로운 선율의 감미로움을 차용했을 뿐이다.

또 하나의 최종적 결론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이 분야에서도 그는 몇 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전체적 발전의 순환주기를 완성했다.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시대에도 아직 성장기에 있는 분야였다. 그 출발점은 바흐의 협주곡들이 아니라 몇몇 독일과 프랑스인들, 이를테면 쇼페르트, 라우파흐 같은 폴란드인들, 특히 요한 사무엘 슈뢰터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차르트 이전에 이 협주곡은 피아노가 지배하고, 총주와 독주 사이의 관계가 느슨한 비교적 원시적인 구조였다.

피아노 협주곡에서 모차르트는 자신의 교향곡뿐 아니라—<프라하 교향곡>과 사단조, 내림마장조, 다장조 교향곡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기는 모험이지만—,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분야의 정점을 달성한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예술과 ‘재미’가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균형을 이루고, 독주악기와 관현악이라는 두 개체가 대립과 화합하는데 있어서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다. 교향곡적인 것과 협주곡적인 것이 완전한 균형을 이룬 것이다.

베토벤은 이 균형을 ‘극적인 것’을 위해서, 두 개체 사이의 경쟁을 위해서 다시 뒤로 미뤄놓아야만 했다. 이것은 그의 기질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정체나 단순한 반복을 견디지 못하는 이 분야의 발전상황에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행복한 역사적 상황이 이례적인 힘과 일치되는’ 가장 휼륭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세번째 예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그리고 <코지 판 투테>로 대표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이다. 이 곡들은 그 분야의 정점이자 모든 국가적 경계를 뛰어 넘는 정점이다.

  1. “다장조 현악4중주의 느린 악장”은 현악4중주 제19번 KV465, 일명 “불협화음” 제2악장 Andante cantabile 를 말합니다. 그 곡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부들의 ‘실체’, 그 독립성이 그 이상 더 요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지 부분에서 제1바이올린의 끝맺는 선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대위법이다” 하는 아인쉬타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입니다.

    연주는 The Lindsays의 것을 추천해 봅니다. The Lindsays의 연주를 들어보면 빠른 악장은 좀 허둥대는 감이 없잖아 있는데, 이 곡의 예처럼 모차르트의 느린 악장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득의의 연주를 하는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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