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곱게 날개 젓는 나비처럼 — 다산생가에서

다산의 천주교 신봉 문제로 시비가 끊이지 않자 정조는 삼십 대 후반의 다산을 황해도 곡산의 부사로 내려보낸다. 유배되기 이삼년 전(1798년), 이 곡산부사 시절에, 다산은 곡물을 방출하는 뱃길에 곡산 북쪽의 산수를 유람하고 <곡산북방산수기>를 남겼다. 봄과 여름이 바뀌는 시절, 그는 풍광을 세심하게 묘사하는 한편으로, 산봉우리, 여울, 마을마다 이름을 캐물었고 그 이름들을 꼬박꼬박 기록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사대부가 거처할 만한 곳”, 강안으로 수백 그루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는 곳, 멱미라는 곳의 양지와 음지를 발견하고는 이름을 짓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을의 두 촌로를 불러 그 이름을 전한다. 앞으로는 그곳을 지전촌芝田村과 유랑촌柳浪村이라 부르라고 명한다. 유유자적 배를 타고 산수를 유람하던 다산과 생애의 강가에 나온 두 촌로는 그렇게 어느 양지와 어느 음지의 이름을 위하여 만났다가 헤어졌다. 늦은 봄날, 옅은 저녁노을 아래 다산이 뱃머리를 돌리는 순간, 그 촌로들은 수양버들 출렁이는 강물을 따라 흐르는 다산의 뒷모습을 보았으리라. 이로부터 먼 훗날,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노년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배를 띄운다. 그때 그는 수양버들 아래에서 어룽거리는 사람들을 유난히 시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자신마저 수양버들 강가에 묻히고 말았으니, 삶은 이리도 반복되는 것이런가.

곡산에서 수양버들 즐비한 강안을 따라 흘러갔던 다산은 이듬해(1799년) 형조참의로 제수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그러나 임금의 총애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가을날 잎이 떨어지듯 이곳 두물머리로 낙향한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뱃집을 지어 “바람을 먹고 물 위에서 잠을 자고[風餐水宿] 마치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동동 떠다니다가, 때로 짧은 시가를 지어 스스로 팔자가 사나워 불우하게 된 정회를 읊고자 하였다”(<苕上煙波釣水之家>에서). 그 떠나니는 뱃집, 즉 부가浮家에 걸어놓을 편액까지 두어 해 전에 판각해 두었으나 정조는 다산을 다시 서울로 불렀고(1800년), 곧이은 정조의 죽음 뒤에 다산은 겨울날 또 다시 낙향하였다. 그리고 여유당與猶堂 당호를 걸었다. 몇달 뒤, 나이 마흔이 되던 해에 옥사와 유배가 시작되었고, 여유당으로 재귀하기까지는 이십 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여유당 당호는 유배 이전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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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생가의 여유당 당호는 옥사와 유배 이전에 쓴 다산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노자의 도덕경 제15장에서 따온 여유당 당호는 위爲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무위인無爲人의 모습을 포착할 때의 형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들의 시선에 비치는 무위인은 매사에 차가운 겨울 시내를 건너듯 망설이고 어느 누구든 두려워하고 조심한다. 여와 유, 즉 망설임과 두려워함의 뜻을 품고 있는 여유당 당호는, 부득이한 일일지라도 되도록 그만두겠으며, 하고 싶은 일일지라도 되도록 그만두겠다는 다산의 다짐을 담고 있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 다산은, 오로지 과거 공부에만 빠져들었던 젊은날을 후회하였으며,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선명하게 나섰던 지난날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러한 무위 지향적인 그의 안목은 유배되기 육칠 년 전, 즉 벼슬의 절정기로 오를 때에 이미 열려 있었다. 그래서 진작 여유당 당호를 걸고 싶었으나 이마저 주저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아이들이 보도록”, 무위와 너무도 거리가 먼 우리가 보도록 당호를 상인방에 걸고 그 연유를 기록하였다.

부가浮家의 편액을 이미 만들어 놓았으며 여유당 당호를 이미 상인방에 걸어놓아 부유浮游와 무위의 세계로 첫 진입을 하던 그 다산에게 옥사와 유배형이 내려졌다. 무위의 세계에서 정치의 세계로 다시 끌려나오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정치의 세계에서 다시 또 하나의 무위의 세계, 유배지로 버려지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곡산 산수를 유람할 때 산봉우리의 이름을 물어서 적고 물어서 적고 하였듯이, 유배의 길에서도 과연 또 산봉우리의 이름을 물으며 유배지로 향했으려나.

강진에 도착하였을 때(1802년) 그곳 사람들은 “유배된 사람 보기를 마치 큰 해독처럼 여겨서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어뜨리면서 달아났다”. 그런데 한 노파가 다산을 집에 머물게 해 주었고, 다산은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 없이 “창문을 닫아 걸고 밤낮 혼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喪禮四箋序>에서).

그리고 그곳을 부가로 삼았고, 겨를을 얻었음을 흔연히 기뻐하였다. 그는 그 허름한 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담백한 생각, 단정한 외모, 과묵한 언행, 중후한 거동”(<四宜齋記>에서)을 통하여 부유하는 몸을 수신하였다.

 

마침내 다산초당으로 생을 부유시킨 다산은 부가의 이상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안개와 노을을 마시고 꽃과 나무를 구경”(<贈別李重協詩帖序>에서)하면서 시름을 잊는 한편으로, 꽃과 약초를 심고 연못과 도랑을 만들며 부유의 만남을 기뻐하였다.

그러자 초당을 지나가던 어느 신선같은 노인이 삶의 부유浮游함을 운위하며 “무엇 때문에 꽃을 모종하고 약초를 심으며, 샘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도랑을 만드는 등 이와 같이 구원한 계획을 세우는가” 하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답한다. “저 꽃이며 약초, 샘, 괴석은 모두 나처럼 부유하는 것이다. 부유하다가 서로 대면한 즉 흔연히 여기고, 부유하다가 서로 헤어진 즉 호연히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무위의 원칙을 파고든 그 부부자浮浮子 노인에게 다산은 무위의 흔연과 호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부가의 꿈, 부가에서의 만남, 부가에서의 헤어짐, 부유의 삶이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고향 여유당에서 맞은 첫 봄날과 그 해 가을날(1819), 그리고 두 번째 봄날과 그 해 가을날(1820)에, 무엇보다도 먼저 다산은 이십여년 전의 꿈을 실현시켜 부가를 띄우고 풍찬수숙風餐水宿하였다.

이 해 봄에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충주에 있는 선산에 성묘하였다. 가을에 용문산에 유람갔다. 경진년 봄에 배를 타고 汕水[=북한강]를 거슬러올라가 춘천과 청평산 등지를 유람했다. 가을에는 다시 용문산에 가서 유람하는 등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

— <自撰墓誌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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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를 방문하던 날 비는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내리고 풍경은 서럽고 아팠다. 다산은 저 강물 위로 배를 띄웠으리라.

남한강과 북한강에 배를 띄운 다산은, 예순에 이르러 스스로 찬한 묘지명에서, 노년의 나이를 따고 떨어지는 봄날의 꽃잎도, 선홍빛 불을 지르는 가을날의 단풍도, 절실한 언어가 필요했던 산봉우리도, 마을도, 그 무엇도 아지 못하겠다는 듯 오직 목적지만을 기록하였다.

이곳 두물머리의 여유당 앞에서 배를 띄워 충주, 춘천, 용문산으로 유람한 과거를 다만 간결하게 회고하였다. 빠른 화살처럼 집에서 충주로, 집에서 춘천으로, 집에서 용문산으로 단숨에 날았던 것이다. 이름을 전해주기 위해 만난 촌로도, 닫힌 어두운 방에서 불을 당기는 유배자의 그림자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았을 노파도, 허허롭게 다산초당을 지나가던 부부자 노인도, 아무런 인연도 더 이상 그의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해배 이후 환갑을 지나기까지의 유람과 관련하여 별도의 유람기도 없이 그저 적적한 시들만 남겼다. 그리고 그 시들로 수양버들의 그늘, 흐르는 강물 위로 떨어지는 꽃잎, 무덤에 핀 붉은 꽃, 미혹하는 산빛 등을 “강물에 임하여 홀로 길게 읊조렸다”(臨流獨永歎).

 

남한강과 북한강은 여유당 앞에서 서로 만나 한강을 이루어 서울로 향한다. 예나 지금이나 욕망을 폭력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서울로. 그리로 가는 흐름들을 다산은 거슬러 오르며 유람한다. 그리고 해배 후 수년간 유람의 세계는 다산의 과묵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버들잎의 그늘에 가리운 다산의 유람은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그저 시가만을 읊을 뿐이다.

뒷산은 멀고 앞산은 가까운 사물의 원근을 유년시절의 시로 포착했던 다산은 이제 노년이 되어 원근을 모르는 배에 올랐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저 연파煙波 속에 잠기고 말았으려나. 세월도 격정도 슬픔도 아픔도 그저 물안개와 물결에 휩싸여 흐를 뿐이었는가. 그렇다, 다산이 숭모해 마지않았던 두보는, 마치 다산의 노년을 예언하기라도 하듯, 다산이 배를 띄우며 보게 될 정경을 선구적으로 보았다:

봄물을 타고 흐르는 배는 천상의 자리와 같아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에서 보이는 듯하고
곱게 곱게 나비 노닐며 한적한 장막 지나더니
하나 하나 갈매기 가벼이 여울을 내려가더라

春水船如天上坐 老年花似霧中看
娟娟戱蝶過閒幔 片片輕鷗下急湍

— 杜甫, <小寒食舟中作>에서

한 생애가 그렇게 흘러갔고, 우리는 거기에서 기대할 법한 격정적이고 비애로 가득찬 드라마를 읽어 내지 못한다. 만년의 두보처럼 다산도 안개 속에서 혼미로이 자맥질하는 몇 송이의 꽃, 곱게 곱게 날개 젓는 몇 마리의 나비, 여울 따라 가볍게 비행선을 긋는 갈매기 몇 마리를 보았으리라.

과연,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와 배를 띄우고서 읊은 노년의 시는, 안개를 헤치고 꽃을 보기 위해 배를 옮기는 서정, 실바람을 나는 새, 물결 위에 어리는 버들잎의 무늿결, “갈매기 따라 여울을 내려가는”(隨鷗下急湍) 정경을 어김없이 포착하였다. 하여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안개 자락의 휘날림이요 바람의 느릿느릿한 팔랑임, 물결의 유연한 찰랑임이요 수양버들의 하늘거림, 한 마디로 “촛불이 놓은 국화 그림자”(<菊影詩序>에서)였으리라.

공자 같은 성인도 일찍이 떠다님[浮]에 뜻을 두었으니, 떠다님은 정말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물 위로 떠다니는 자도 그러하거늘, 땅 위에서 떠다니는 자야 무엇하여 스스로 아파하리오?

— <浮菴記>에서

유배로 인한 폐족廢族의 아픔마저 부유해 버리는 탈격정적인 삶을 이미 이렇게 체득하였으니, 부유의 절정을 이미 맛보았으니, 꼿꼿이 앉고 몸을 단속하고 꽃을 심고 도랑을 치고 차를 마시고 간결하게 유람하는 다산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읽어줄 이 없는 글들이 장마비처럼 쏟아졌다.

그토록 깊은 부유의 심연 속에서 반평생을 보냈던 다산은, 1820년 북한강 유람의 목적지 춘천의 협곡을 빠져 나오던 날, 그 부유의 심연, 상처의 심연을 우리에게 드러내거니와, 그 심연으로부터 글이 읽히고 글이 쓰여졌으며, 단정함이 성립하였음을 알려준다:

물 위로 왔다가 돌아가게 되나니
인간사에 취하여 깨지 못함이라
이 시절을 아파한들 어쩔 것인가
머리 희도록 다시 경전을 파련다

水上來還去 人間醉不醒
傷時竟何補 頭白且窮經

— <出峽> 전문

4년 뒤인 1823년 초여름에 다산은 열흘 남짓 또 북한강에 배를 띄웠고, 이전의 북한강 유람과는 달리 유람기 «汕行日記»와 하천지 «汕水尋源記»를 남겼다. 그리고 유배 시절에 저술하였던 글들을 완성해나갔다. “유암화명柳暗花明”(«汕行日記»에서), 그렇게 버들잎의 그늘은 깊었고 꽃은 말갛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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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의 다산생가 내부. 삶의 표표함을 아는 듯 담장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단정하였다.

다산의 태어남과 유배와 죽음을, 부유와 수신을 지켜본 두물머리의 여유당은 삶의 표표함을 아는 듯,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조용하고 단정하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서야 여유당을 첫 대면하던 날 빗줄기는 무섭도록 내리고 있었고, 여유당의 은은하기만 한 빛깔은 어둠 속에서 단아하였다. 저 표표의 단정함이 느린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딱 꽂히던 순간, 무더웠던 여름은 하염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탄성을 지르며 “촛불이 놓은 국화 그림자”를 완상하던 다산은, 풍찬수숙하며 북한강의 유로流路를 기록하던 다산은, 곱게 곱게 날개 젓는 나비처럼, 그렇게 나의 무력한 삼십대의 여름날 한복판에서 팔랑거렸다.

사무치는 아픔이란 이런 것이던가? “하눌이여 한동안 더 모진狂風을 제안에 두시던지, 날르는 몇마리의 나븨를 두시던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던지”(서정주, <祈禱 壹>에서) 애원하던 나의 여름날은 그렇게 과거가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2003년 글]1

  1. 다산 선생의 산문 중 일부는 박석무·정해렴 편역의 «다산문학선집»(현대실학사, 1996)을 따랐다. 그러나 다산선생의 산문을 읽고 싶다면 이 책보다는 박무영이 옮긴 «뜬세상의 아름다움»(태학사, 2002)을 권한다. 각 글에 대한 요긴한 설명이 있고 번역이 좀더 부드럽다. 다만 전자의 책보다 분량이 약간 적긴 하다. 두 책 모두 원문을 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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