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오이겐 노이만을 생각하며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맛지마니까야»(중아함경), «쌍윳타니까야»(잡아함경)를 팔리어에서 완역한 분으로 잘 알려진 전재성 박사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분이 번역한 «숫타니파타»의 머리말에서 «숫타니파타»의 운율상의 미적 아름다움을 살려서 번역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노이만을 극찬하는 대목에서였다:

앞에서 언급한 자비경의 두 싯구를 정말 아름다운 독일어 시로 되살려낸 노이만의 탁월한 번역은 글자 그대로의 번역이 아니라 그 정신을 살려내 새로운 언어로 창작한 것으로 그 아름다움은 분명 번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번역시를 독일어에서 중역해서 여기에 실어봅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모태의 열매인 외아들을 목숨 바쳐 수호하듯 지어진 모든 것을 한량없이 가슴속에 품어지이다. 이 온 세상에 사랑이 빛으로 관통하여 한량없이 품어지이다. 위로, 아래로, 가운데로, 옆으로 원한 없이, 적의 없이 무한하게 빛나게 하여지이다.”[1]

어느 한 인문학자가 다른 학자를 두고 열광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보통의 성실근면한 학자들에게는 냉담 혹은 냉철이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열광의 상태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은, 그 대상이 그만큼 자신의 내면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내면을 사로잡았다”는 표현은 약하다.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 뭔가를 폭발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좀더 그 사태에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폭발을 신뢰하는 편이며 그 폭발의 연쇄를 따라가는 축에 속한다. 그것이 분야가 다르고 경계가 다를지라도 일단 따라가고 본다. 탁월한 독일어 역경집이라는 찬사와 나의 원시불교 경전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결국 나는 노이만이 번역한 독일어 아함경 두 권을 구입하였다. 현재는 간간히 필요한 대목을 찾아 비교해보는 수준으로 참고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매일 공들여 조금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노이만의 역경집이 대단한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노이만의 생애 역시 흥미롭다. 죄송하다, 흥미롭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그의 생애를 접하면서 나는 그를 휩쓸어가버린 밀물과 썰물을 보았다. 한 사람의 생애가 극적일 경우에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그의 인물도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노이만의 경우가 그러하다.

노이만은 1884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는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이것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다. 1897.8.27에 데 로렌초(De Lorenzo)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그때, 그러니까 1884년에 하나의 태양이 내게 떠올랐다. 너 토이러에게도 비춰주고 있는 태양, 쇼펜하우어. 나는 내면적으로 엄습을 당했고 그전의 내 모든 인생이 부서졌다. 내면적으로 부서졌다. 낭만적인 청년의 열광이 제대 위의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나는 인도어 번역을 작정하였다. 내 직업상 낮에는 [베를린에 있는] 은행에서 시간을 소모하고, 저녁에는 철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새벽 3시, 혹은 그보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침내 나는 외적인 생활마저 바꾸었다. 실제로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은행을 사직하고 [프라하에 있는] 김나지움 상급반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아름다왔던 2년을 보낸 뒤, 1887년 여름에 베를린 대학으로 진학했다.

Damals, nämlich 1884, ist mir eine Sonne aufgegangen, die auch dir, Theurer leuchtet: Schopenhauer. Ich wurde so innig ergriffen, dass ich mit meinem ganzen bisherigen Leben brach, innerlich brach. Die romantische Jugendschwärmerei zerschmolz wie Blei auf der Opferplatte. Ich griff zu indischen Übersetzungen, und obzwar bei Tag in der Bank [in Berlin] durch meinen Beruf völlig absorbirt, versenkte ich mich bei Nacht, oft bis 3 Uhr morgens und später, in philosophische Studien. Endlich brach ich auch von außen durch. Ich studierte wieder praktisch, trat aus der Bank aus, ins Obergymnasium [in Prag] ein, das ich nach zwei schönen Jahren absolvierte, und zog dann zur Universität, nach Berlin, im Sommer 1887.[2]

그는 쇼펜하우어로 인한 충격을 묘사하면서 “태양이 떠올랐다”는 표현을 썼다. 그 뭔가가 태양처럼 환하게 자신의 내면을 비춰주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면이 폭발하여 부서졌고, 그것이 외부의 생활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류의 쇼펜하우어의 폭발력은 니체에게서도 증명된 바 있다. 라이프치히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난 뒤의 니체는 이러했다:

집에 와서 나는 구입한 보물과 함께 소파 구석에 몸을 던지고는, 저 음울한 정열적 천재가 내게 영향을 끼칠 여건을 마련해 주기 시작하였다. 거기에서는 매 행마다 좌절, 체념, 부정이 외치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나는 [나의] 생과 특유의 취향을 경악스러울 만큼 훌륭하게 비춰주고 있는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서 예술이라는 태양의 눈, 전혀 사심이 없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질병과 쾌유, 추방과 도피처, 지옥과 하늘을 보았다. 자기 인식, 아니 [나] 자신을 뜯어보고 싶은 갈망이 나를 위력적으로 덮쳤다; 무익한 자기 고소가 있으며 인간 핵심 전체의 신성화와 변형을 바라는 절망적인 응시가 있는, 그때의 불안하고도 침울한 일기장들은, 아직까지도 내게는 바로 저 격동의 증인들이 된다. 내가 내 모든 성정과 내 모든 열심을 음산한 자기 멸시의 법정에 소환함으로써, 나는 나 스스로를 향한 증오 속에서 혹독했고, 불의하였으며,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육체적인 괴로움마저 따랐다. 나는 다그쳤다. 2주 내내 밤 2시에 잠자리에 들고 정확히 6시에 일어났다. 신경이 곤두서는 흥분 상태가 나를 지배했다. 만약 생활이나 허망한 일들의 유혹도 없고, 규칙적인 학교공부의 강압마저 없기라도 했다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경에 빠졌을까, 누가 알리.

Zu Hause warf ich mich mit dem erworbenen Schatze in die Sofaecke und begann jenen energischen düsteren Genius auf mich wirken zu lassen. Hier war jede Zeile, die Entsagung, Verneinung, Resignation schrie, hier sah ich einen Spiegel, in dem ich Leben und eigen Gemüt in entsetzlicher Großartigkeit erblickte. Hier sah mich das volle interesselose Sonnenauge der Kunst an. Hier sah ich Krankheit und Heilung, Verbannung und Zufluchtsort, Hölle und Himmel. Das Bedürfnis nach Selbsterkenntnis, ja Selbstzernagung packte mich gewaltsam; Zeugen jenes Umschwunges sind mir noch jetzt die Unruhigen, schwermütigen Tagebuchblätter jener Zeit mit ihren nutzlosen Selbstanklagen und ihrem verzweifelten Aufschauen zur Heiligung und Umgestaltung des ganzen Menschenkerns. Indem ich alle meine Eigenschaften und Bestrebungen vor das Forum einer düstren Selbstverachtung zog, war ich bitter, ungerecht und zügellos in dem gegen mich selbst gerichteten Haß. Auch leibliche Peinigungen fehlten nicht. So zwang ich mich vierzehn tage hintereinander, immer erst um 2 Uhr nachts zu bett zu gehen und es genau um 6 Uhr wieder zu verlassen. Eine nervöse Aufgeregtheit bemächtigte sich meiner und wer weiß bis zu Welchem Grade von Torheit ich vorgeschritten wäre, wenn nicht die Lockungen des Lebens, der Eitelkeit und der Zwang zu regelmäßigen Studien dagegengewirkt hätten[3]

니체 역시 아무런 이해 관계를 따지지 않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비추는 빛을 언급하고 있다. 그 빛이 너무도 환하여 자신의 성향, 자신의 내면이 거울의 상처럼 분명하게 보일 정도이다.

한 이십 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니체와 노이만의 쇼펜하우어 체험은, 공교롭게도 모두 빛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내면적 충격은 내면적 반조返照의 결과였다. 이러한 폭발의 연쇄는 결국, 한편에서는 바그너와의 만남과 결속으로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바그너의 시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박동호 박사는 2002년에 법보신문에 «유럽불교의 선구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유럽에 불교를 소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그중 첫 번째가 쇼펜하우어였고 다섯 번째가 노이만이었다. 그분의 안내를 따라가면, “노이만이 표현한 독일어는 주로 쇼펜하우어의 용어를 많이 따랐으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뮤지컬의 짧고 간결한 시어적인 표현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원전에 가까운 아름다운 표현은 독창적인 예술어를 낳게 됐다”.[4]

국내에서는 바그너의 저술들이 거의 번역된 바 없어서, 그의 부정적인 면모(이기적인 성격, 반유대주의 등)만 부각되는 면이 없잖아 있으나 그의 음악극의 독일어 대본만이라도 읽어보면 아마 적잖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는 마성적일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자 음악가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음악이론가이자 저술가였다. 바그너의 음악극에 관한 혁명적 저술들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내용상 겹치기도 한다. 그래서 «비극의 탄생»은 바그너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폭발력이 결국 쇼펜하우어-바그너-니체-노이만의 연쇄를 만든 셈이다. 이 연쇄는 토마스 만까지 이어진다.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위대한가? 그러나 국내에서 쇼펜하우어만큼 곡해되고 있는 철학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자, 흥분해 보았자 소용없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 노이만은 간난과 신고 속에서 홀로 초기 불경들을 번역해낸다.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역경사업을 고되게 밀어부쳐 50세 때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다. 그의 지난한 번역과정과 그의 역경집에 대한 평들을 살펴보려면, 앞서 언급한 법보신문과 독일어권의 Materialien zum Neobuddhismus를 참고하기 바란다.

폭발의 연쇄의 끝으로는 토마스 만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니체, 바그너에 심취했던 문학가. 그는 미국, 스위스 등지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노이만의 역경집만큼은 항시 동반하였다.

내가 망명지를 떠돌 때마다 칼 오이겐 노이만의 손길로 번역된 고타마 붓다의 설법을 지켜낸 것은 행운이었다. 그래서 현재도 그것은 나의 킬히베르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것은 내게는 실로 귀중한 자산이다. 확신하건대, 칼 오이겐 노이만의 독일어 번역은 세계문학에서 위대한 번역 업적에 해당한다.

Die Reden Gotamo Buddhos in der Übersetzung von Karl Eugen Neumann habe ich durch alle Stationen meiner Wanderung glücklich hindurchgerettet, und noch heute stehen sie in meiner Kilchberger Bibliothek. sie bleiben mir ein wirklich Besitz. Ich bin der Überzeugung, daß die Verdeutschung druch Karl Eugen Neumann zu den großen Übersetzungstaten der Weltliteratur gehört.[5]

이 일화는 한국전쟁 피난시절 «법화경»과 «성서»만을 들고 남하했다는 이원섭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분은 동양고전과 불경해설서들을 뛰어난 문체, 뛰어난 표현의 우리말로 옮긴 탁월한 번역가였다.

  1. «숫타니파타», 전재성 역, 한국빠알리성전협회(2004), 10면 []
  2. Gesamtausgabe, Bd. 3, S. 959. 이 인용문은 Alois Payer의 홈페이지의 Materialien zum Neobuddhismus에서 재인용하였다. []
  3. 니체의 자서전적 서술인 “라이프치히 2년 간의 회고(ⅸ)”의 일부. 이것의 원문은 Nietzsche Spuren에서 확인할 수 있다. []
  4. 이동호, [유럽불교의 선구자들] ⑥ 칼 오이겐 노이만. 이 연재물의 부제는 “예술적 언어로 게르만에 불교 소개”이다. []
  5. Die Reden des Buddha, Mittlere Sammlung, aus dem Pali-Kanon übersetzt von Karl Eugen Neumann, fünfte Aufl., Verlag Bezerlein – Steinschulte(1995), 표지 날개 []

칼 오이겐 노이만을 생각하며”에 대한 2개의 댓글

  • 우연히 들르게 되었습니다. 요즘 조금씩 장자를 읽고 있습니다. 저 강물 건너편에 저렇게 아름다운 불꽃이 타오르는데, 국내 번역서로 그쪽으로 건너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더군요. 글을 읽고 어떻게든, 다리를 놓아보고 싶다는 뻔뻔스런 욕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Bukouski
  • Bukouski 님, 반갑습니다. 국내 번역서에 대하여는 저도 걱정스럽습니다. 번역 수준을 평가할 만한 역량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 학계의 사정인 듯합니다. 아마 그래서 Bukouski 님처럼 다부진 마음을 갖게 되는 분들이 꽤 계실 듯합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빕니다.

    고싱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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