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모차르트를 말하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두고, “비천한 자들에게는 그분을 칭찬하는 것마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여기 모차르트에 관련해서라면 진정 적절하리라. 그러나, 이 땅의 청중이나 선생이나 모두 염치라는 염치는 전혀 없다.

—1873년, 반시대적 고찰, 다비트 슈트라우스, 5절
 

독일적인 음악이 독일인 사이에서 전복적이고 개혁적인 치유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만약 모차르트와 베토벤 같은 인물들이 현재 전기적인 것에 관한 박식한 허섭쓰레기로 온통 뒤덮혀 있거나 역사학적 비평이라는 고문체계로 수천가지 찔러대는 질문에 답하도록 강요 받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그것을 두고 우리 문화의 가장 생생한 것에 가한 불의라고 간주할 것이다.

—1874년, 반시대적 고찰, 역사학의 공과, 7절
 

괴테의 기품과 사무사思無邪, 베토벤의 고결한 은자적 체념, 모차르트의 마음의 매혹과 살가움, 헨델의 불굴의 남성성과 율법 내에서의 자유, 바흐의 태연자약하고 밝히 빛나는 내면의 삶, 굳이 영광과 성공을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삶.

—1879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견들, 298절

 

[노래와 춤에서 선율을 발견한 베토벤과는] 전혀 다르게, 모차르트는 자신의 선율을 향하여 선다: 그는 음악을 들을 때가 아니라 삶을, 가장 활달한 남국의 삶을 바라볼 때 영감을 얻는다: 이탈리아에 있지 않을 때면, 그는 언제나 이탈리아를 꿈꾼다.

—1880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랑자, 152절
 

음악 연주의 원칙에 관하여. — 과연 정말로, 음악 연주를 하는 현 예술가들이, 각 작품에 가능한 한 많이 고부조高浮彫를 부여하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극언어로 말하는 것이 그들 예술의 지고한 계명이라고 믿고들 있는 것인가? 이를 모차르트의 예에 적용한다면, 과연 전적으로 그 정신을 거역하는 죄, 명랑하고, 햇살이 비치고, 유연하고, 가벼운 모차르트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가 아니겠는가? 그의 심각함은 공포스러운 심각함이 아니라 훌륭한 심각함이며, 그의 영상들은 놀란 나머지 도망가는 관객들을 사냥하기 위해 벽을 뚫고 튀어나오려는 것이 아니다. 혹여 그대들은 생각하는가, 모차르트의 음악이 “석상 손님의 음악”과 같은 의미라고? 심지어 모차르트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이?

—1880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랑자, 165절
 

베토벤의 음악에는 거칠고 독선적이고 참기 힘든 음이 얼마나 많으며, 모차르트에는 정직한 장인의 명랑함—여기에서 마음과 정신은 얼마간 사랑을 얻는다—이 얼마나 많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에는 치솟아 파고드는 불안—여기에서 가장 인내심 있는 자라도 좋은 기분마저 망친다—이 얼마나 많은가.

—1881년, 서광, 4권 219절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은 모차르트에서 한껏 노래되었다—그 로코코가 아직도 우리에게 말을 걸다니, 그 “좋은 사회”, 그 유연한 열광, 중국적인 것과 소용돌이 문양에 대한 그 아이 같은 욕망, 마음의 그 정중함, 우아한 자, 사랑스러운 자, 춤추는 자, 눈물의 복된자에 대한 그 염원, 남부에 대한 그 신앙이 우리 속에 있는 어느 잔재에 아직도 호소해도 된다니, 이 얼마나 우리는 행복한가! 아아, 그런데도 언젠가 어느 때엔가는 그것도 사라지리라—아니, 누가 의심하리오, 베토벤을 이해하고 맛봄으로써 그것이 더 이르게 사라지고 말 것임을!—그렇다, 베토벤은 양식-변화와 양식-단절의 종음終音에 불과하였을 뿐, 모차르트처럼, 수백년에 걸친 위대한 유럽적 취향의 종음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지속적으로 허물어져가는 흐늘흐늘한 옛 영혼’과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장래의 지나치게 젊은 영혼’, 그 중간에 있는 사건이다; 그의 음악에는 ‘영원한 상실’과 ‘영원히 빗나가는 희망’의 노을빛이 어려 있다—그 빛이 루소와 함께 꿈꾸었을 때, 그 빛이 혁명의 평화수平和樹 주위를 돌며 춤추고 마침내 나폴레옹 앞에서 빌다시피 했을 때, 유럽은 그 빛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나 신속하게 지금 바로 이 감정이 시들고 있는가, 오늘날 벌써 그 감정에 대한 지식은 얼마나 무거워졌는가—저 루소, 실러, 셸리, 바이런의 언어가 우리 귀에 얼마나 생소하게 들리는가! 베토벤 속에서 노래할 줄 알았던 유럽의 운명과 함께 언로言路를 찾았던 저들이거늘!

[ 중략 ]

이 슈만은 이미 음악에서 독일적인 사건에 불과하였을 뿐, 베토벤이 그랬듯이, 모차르트가 좀더 포괄적인 척도에서 그랬듯이, 유럽적인 사건이 아니었다—그와 더불어 유럽의 영혼을 위한 성부를 망실하고 그저 국가적인 차원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최대의 위험이 독일음악을 위협하게 되었다.

—1886년, 선악을 넘어서, 민족과 조국, 245절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신앙이라는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모차르트적인 음악 없이?

—1876.9.22 루이제 오트에게 보내는 편지
 

그래서 나는 자문한다: 과연 내 온 몸은 뭇 음악에 관하여 무엇을 원하는가? 영혼이란 없기 때문에 . . . 나는 믿는다, 그 몸의 가벼워짐이라고: 흡사 모든 동물적 기능들이 가볍고, 대담하고, 발랄하고, 자기 확신적인 리듬으로 날렵해지듯이; 흡사 청동의 삶, 납덩어리의 삶이 황금의, 살가운, 매끄러운 선율로 그 무거움을 상실하듯이. 나의 우울은 완전성의 은신처와 심연에서 쉬고 싶다: 이를 위해 나는 음악이 필요하다.

—1889년, 니체 대 바그너, 내가 반박하는 곳
 

어떤가? 음악 연주 예술가들이 현재 믿고 있는 것처럼, 어느 정황에서도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고부조에 도달하는 것이 정말로 연주의 제일가는 미덕이기라도 한가? 예컨대 이를 모차르트에 적용하면, 모차르트의 정신, 명랑하고 열광적이고 살갑고 사랑스러운 모차르트의 정신을 거역하는 본연의 죄가 아닐까? 모차르트는 다행히도 독일인이 아니었으며, 그의 심각함은 훌륭한 심각함, 황금의 심각함이요 우직한 독일인의 심각함은 아니거늘 . . . “석상 손님”의 심각함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 . . 그러나 당신네들은 생각하는가, 모든 음악이 “석상 손님”의 음악이라고, 모든 음악은 벽에서 뛰쳐나와 청중의 내장까지 뒤틀어야 한다고? . . .
(이 내용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실린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니체는 «니체 대 바그너» 서문에서 이전 내용에서 추렸음을 밝히고 있다.)

—1889년, 니체 대 바그너, 위험으로서의 바그너 2절
 

모차르트가 비로소 루이 14세 시대와 라신과 끌로드 로랭의 예술에 황금의 소리로 화답하였다. 베토벤과 롯시니 음악에서 비로소 —18세기가, 열광의 세기, 부숴진 이상과 날아간 행운의 세기가 한껏 노래되었다. 모든 진정한, 모든 본래의 음악은 백조의 노래이다.

—1889년, 니체 대 바그너, 미래 없는 음악
 

모차르트—심각함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살갑고 사랑스러운 영혼, 아니 —18세기 전체 . . . 프랑스적인 낭만주의 개념의 의미에서, 첫번째 위대한 낭만주의자 베토벤, 마찬가지로 마지막 위대한 낭만주의자 바그너 . . . 둘 다 고전적인 취향에 대한, 엄격한 양식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자—거기에 있는 “위대한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기 위하여.

—1880년대 유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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