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천품千品」

100 천 마디 말이 있어도
도리에 맞지 않게 결집된 것이라면
일구一句의 도리道理[1]“도리道理”라고 번역한 팔리어 “attha”의 사전적인 뜻풀이는 ‘뜻, 의미, 목적, 유익” 등이다. 그러나 이 낱말은 사전적인 정의를 넘어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유컨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선가의 격언에서, “attha”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 즉 ‘달’을 말한다. 이는 언어의 의미론적 규정이나 해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가리키는 지점 내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라는 것이 언어적・사유적 결과물인 반면, “attha”는 탈언어적・탈의미론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attha”라는 지향점(달)은, 반드시 쟁론과 사유와 언어를 벗어나야(손가락을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아야) 드러나는 것이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고요함에 이르게 하는 것’, ‘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제100송~제102송의 마지막 일구 그대로, “들으면 고요해지는 것(yaṃ sutvā upasammati)”이다. 고대 한역에서는 “의義”, “도의道義”, “도리道理” 등으로 옮겼다.가 낫다,
들으면 고요해지는 일구의 도리.

101 일천송의 게偈가 있어도
도리에 맞지 않게 결집된 것이라면
일구의 게偈가 낫다,
들으면 고요해지는 일구의 게偈.

102 일백송의 게偈를 설할지라도
도리에 맞지 않게 결집된 것이라면
일구의 법法이 낫다,
들으면 고요해지는 일구의 법.

103 싸움에서 천의 천 번[2]“천의 천 번”은 백만 번을 말한다.
사람들을 이기는 자가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 한 명을 이기는 자 ―
그가 바로 위없는 승리자여라!

104 참으로 자신을 이기는 것이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낫다.
자신을 길들인 사람은
늘 조심操心하며 노니는 자.

105 천신도 건달바도
마라도 범천도
그와 같은 유정有情의 승리를
패배로 만들지 못하리라.

106 백년 동안 다달이 천번 씩
제사를 올리는 자가 있은들,
‘자기 자신이 계발된 한 명’을
잠깐이라도 공양하는 자 ―
바로 이 공양이
저 백년 동안의 제물보다 낫다.

107 어느 유정이 있어 숲에서
백년 동안 화제火祭를 올린들
‘자기 자신이 계발된 한 명’을
잠깐이라도 공양하는 자 ―
바로 이 공양이
저 백년 동안의 제물보다 낫다.

108 세간에서 공덕을 구하며
일년 동안 온갖 공물과 제물을 바친들
반듯하게 간 자들을 공경함에 비하면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109 계戒를 공경하는 자,
존대함이 늘 증장하는 자 ―
그에게는 사법四法이 증장한다,
수명, 낯빛, 안락, 힘!

110 백년을 살아도
계戒가 하잘것없고 입정入定하지 못하느니,
하루를 살아도
계戒가 있고 입선入禪한 자의 삶이 낫다.

111 백년을 살아도
혜慧가 하잘것없고 입정하지 못하느니,
하루를 살아도
혜慧가 있고 입선한 자의 삶이 낫다.

112 백년을 살아도
나태하고 정진이 형편없느니,
하루를 살아도
굳세게 정진하는 자의 삶이 낫다.

113 백년을 살아도
성쇠盛衰[3]경에서 “성쇠(udayavyaya)”라는 복합어는 “오온의 성쇠”(Dhp 374, A ii.14), “세간의 성쇠”(S i.46)와 관련하여 쓰인다. “성쇠”라 함은 오온이나 세간이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 증대와 감소, 흥성과 쇠퇴를 되풀이하는 불안정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바로 이 [육근・육경] 두 쌍이 불안정하고 쇠퇴(vyaya)하고 무상하고 변하고 달라지며, 육식六識도 무상하고 변하고 달라진다.”(S iv.67~68)는 표현이 보인다.를 보지 못하느니,
하루를 살아도
성쇠를 보는 자의 삶이 낫다.

114 백년을 살아도
불사의 길을 보지 못하느니,
하루를 살아도
불사의 길을 보는 자의 삶이 낫다.

115 백년을 살아도
위없는 법을 보지 못하느니,
하루를 살아도
위없는 법을 보는 자의 삶이 낫다.

100 sahassam api ce vācā anatthapadasaṃhitā
ekam atthapadaṃ seyyo yaṃ sutvā upasammati.

101 sahassam api ce gāthā anatthapadasaṃhitā
ekaṃ gāthāpadaṃ seyyo yaṃ sutvā upasammati.

102 yo ca gāthāsataṃ bhāse anatthapadasaṃhitā
ekaṃ dhammapadaṃ seyyo yaṃ sutvā upasammati.

103 yo sahassaṃ sahassena saṅgāme mānuse jine
ekañ ca jeyyamattānaṃ sa ve saṅgāmajuttamo.

104 attā have jitaṃ seyyo yā cāyaṃ itarā pajā,
attadantassa posassa niccaṃ saññatacārino.

105 n’ eva devo na gandhabbo na Māro saha Brahmunā
jitaṃ apajitaṃ kayirā tathārūpassa jantuno.

106 māse māse sahassena yo yajetha sataṃsamaṃ
ekañ ca bhāvitattānaṃ muhuttam api pūjaye,
sā yeva pūjanā seyyo yañ ce vassasataṃ hutaṃ.

107 yo ca vassasataṃ jantu aggiṃ paricare vane
ekañ ca bhāvitattānaṃ muhuttam api pūjaye,
sā yeva pūjanā seyyo yañ ce vassasataṃ hutaṃ.

108 yaṃ kiñci yiṭṭhañ ca hutañ ca loke saṃvaccharaṃ yajetha puññapekho
sabbam pi taṃ na catubhāgam eti, abhivādanā ujjugatesu seyyo.

109 abhivādanasīlissa niccaṃ vaddhāpacāyino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

110 yo ca vassasataṃ jīve dussīlo asamāhito
ekāhaṃ jīvitaṃ seyyo sīlavantassa jhāyino.

111 yo ca vassasataṃ jīve duppañño asamāhito
ekāhaṃ jīvitaṃ seyyo paññāvantassa jhāyino.

112 yo ca vassasataṃ jīve kusīto hīnavīriyo
ekāhaṃ jīvitaṃ seyyo viriyam ārabhato daḷhaṃ.

113 yo ca vassasataṃ jīve apassaṃ udayavyayaṃ
ekāhaṃ jīvitaṃ seyyo passato udayavyayaṃ.

114 yo ca vassasataṃ jīve apassaṃ amataṃ padaṃ
ekāhaṃ jīvitaṃ seyyo passato amataṃ padaṃ.

115 yo ca vassasataṃ jīve apassaṃ dhammam uttamaṃ
ekāhaṃ jīvitaṃ seyyo passato dhammam uttamam.

* 각주   [ + ]

1. “도리道理”라고 번역한 팔리어 “attha”의 사전적인 뜻풀이는 ‘뜻, 의미, 목적, 유익” 등이다. 그러나 이 낱말은 사전적인 정의를 넘어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유컨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선가의 격언에서, “attha”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 즉 ‘달’을 말한다. 이는 언어의 의미론적 규정이나 해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가리키는 지점 내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라는 것이 언어적・사유적 결과물인 반면, “attha”는 탈언어적・탈의미론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attha”라는 지향점(달)은, 반드시 쟁론과 사유와 언어를 벗어나야(손가락을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아야) 드러나는 것이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고요함에 이르게 하는 것’, ‘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제100송~제102송의 마지막 일구 그대로, “들으면 고요해지는 것(yaṃ sutvā upasammati)”이다. 고대 한역에서는 “의義”, “도의道義”, “도리道理” 등으로 옮겼다.
2. “천의 천 번”은 백만 번을 말한다.
3. 경에서 “성쇠(udayavyaya)”라는 복합어는 “오온의 성쇠”(Dhp 374, A ii.14), “세간의 성쇠”(S i.46)와 관련하여 쓰인다. “성쇠”라 함은 오온이나 세간이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 증대와 감소, 흥성과 쇠퇴를 되풀이하는 불안정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바로 이 [육근・육경] 두 쌍이 불안정하고 쇠퇴(vyaya)하고 무상하고 변하고 달라지며, 육식六識도 무상하고 변하고 달라진다.”(S iv.67~68)는 표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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