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句의 법

100비록 천 마디 말이 있어도
義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일구의 義가 낫다,
들으면 쉼에 이르는 義 일구.

101비록 일천송의 偈가 있어도
義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일구의 偈가 낫다,
들으면 쉼에 이르는 偈 일구.

102비록 일백송의 偈를 설하여도
義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일구의 法이 낫다,
들으면 쉼에 이르는 法 일구.

— 법구경 100~102

sahassam api ce vācā
anatthapadasaṃhitā,
ekaṃ atthapadaṃ seyyo
yaṃ sutvā upasammati.

sahassam api ce gāthā
anatthapadasaṃhitā,
ekaṃ gāthāpadaṃ seyyo
yaṃ sutvā upasammati.

yo ca gāthā sataṃ bhāse
anatthapadasaṃhitā,
ekaṃ dhammapadaṃ seyyo
yaṃ sutvā upasammati.

* * *

위의 경문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는 “義”(attha), “不義”(anattha)이다. 흔히 “attha”는 “의미”, “이익”, “유익”, “목적” 등으로 번역되며, 고대한역에서는 “義”, “道義” 등으로 번역된다.

고래로부터 인도에서는 하나의 일을 두고 “카마ㆍ아르타ㆍ다르마”의 관점에서 각기 파악하는 전통이 있다. 마하바라타를 읽어보면, “카마에 입각해서 보나, 아르타에 입각해서 보나, 다르마에 입각해서 보나 이 일을 행해야 합니다”와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산스크리트어 “아르타artha”에 해당하는 것이 팔리어로 “앗타attha”, 즉 “義”이다.

이제까지 경전을 읽어본 경험에 의하면, “카마/欲樂”은 욕계ㆍ세간의 관점, “아르타/義”는 출세간의 관점, “다르마/法”은 깨달음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카마”에서 벗어나 “다르마”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두고 “아르타/義”라고 칭하며, 그 반대로 오히려 “카마”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것을 두고 “안아르타/不義”라고 칭한다.

세간의 공부는 뭔가를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출세간의 공부는 오히려 덜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뭔가를 구하고 파악하고 잡으려 하는 공부는 세간의 공부, 不義이다. 설령 그 대상이 “법”이요 “경전”이요 “깨달음”이요 “열반”이라고 해도 그런 식의 구도求道는 不義이다.

“천 마디 말”, “일천송의 게”, “일백송의 게 설법”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뭔가를 더하기를 추구한다면, 이는 “義에서 벗어난 것”, 不義이다. 그런 천마디 만마디 말보다, 그런 일백송 일천송의 게보다, 그런 장광설보다, “쉼에 이르게 하는” 일구의 義, 일구의 偈, 일구의 法이 오히려 낫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不義를 지향하는 공부인은 소털처럼 많아도 義에 합한 공부인, 쉼에 이르는 공부인은 기린뿔처럼 드물다. 그만큼 義와 不義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십우도의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소를 본 자, “見牛”의 경지에 든 자만이 義와 不義를 가까스로 구분할 줄 아는 여정을 밟는다. 그런 경지에 들지 못한 우리 같은 담판한擔板漢들은 義와 不義를 구분할 줄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일구의 法, 들으면 쉼에 이르는 法 일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이 경문의 요지라고 하겠다.

하나의 偈는 보통 四句로 이루어진 頌이다. 가령,

102비록 일백송의 게를 설하여도
義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一句의 法이 낫다,
들으면 쉼에 이르는 法 一句

는 한 송의 偈로서 네 구, 열 다섯 마디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문학용어로 바꿔 말하자면, “4행”(四句)으로 이루어진 “1연”(一頌)의 “시”(偈)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게는 이와 같은 四句偈가 일반적이며, 때로는 二句偈, 三句偈, 一句偈도 보인다. 법구경은 一千言, 一千頌, 一百頌說法에 一句義, 一句偈, 一句法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쉬는 공부”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역설한다.

고대 수행자들은 하루에 일천송의 게를 외우며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들은 몇만 송, 몇십만 송의 경전을 머리에 담고 수행했던 것이며, 수행을 통해 체득하는 순간 머리 속의 경문들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마치 헐벗고 굶주린 수행자가 히말라야 숲에서 얻은 꿀맛처럼. 비유컨대, 몇십만 송의 경문들이 종횡으로 누비면서 무봉탑으로 세워지는 잡화엄식의 광경을 목도했다고나 할까. 불교경전은 바로 이와 같은 위대한 대장부들의 기록이다.

오늘날의 역경자들은 그분들의 一句偈에 값하기 위해 모름지기 “義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義에서 벗어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쓴들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 마음을 쓰는 자체가 곧 不義이므로. “그것을 보려 하면 보이지 않으므로 이夷라 하고, 그것을 들으려 하면 들리지 않으므로 희希라 하며, 그것을 붙들려 하면 얻지 못하므로 미微라 하나니”(도덕경), “들으면 쉼에 이르는 法 일구”가 참으로 귀하다 하겠다.

* * *

쓸모없는 말을 엮어
늘어 놓는 천 마디보다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한 마디가
훨씬 뛰어난 말이다

쓸모없는 구절을 모아
엮어 놓은 천 편의 시보다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한 편의 시가
훨씬 뛰어난 시다

쓸모없는 구절로 이루어진
백 편의 시를 읊기보다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한 편의 시가
훨씬 뛰어난 것이다

— 법정, 「진리의 말씀」(이레 1999)
 

쓸데없는 천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들어서 안온해지는
한 마디의 말이 낫다.

쓸데없는 천 마디
시구를 외우는 것보다
들어서 안온해지는
한 마디의 시구가 낫다.

쓸데없는 백 개의
시를 말하는 것보다
들어서 안온해지는
한 마디 진리의 말씀이 낫다.

— 전재성, 「법구경-담마빠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8)
 

비록 천 마디의 말들이라도 의미 없는 말들로 구성된 것이라면
듣고 나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한 마디의 의미 있는 말이 좋은 것이다.

비록 천 개의 시들이라도 의미 없는 말들로 구성된 것이라면
듣고 나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하나의 시구가 좋은 것이다.

비록 백 개의 시들을 읊을지라도 의미 없는 말들로 구성된 것이라면
듣고 나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한 마디 진리의 말씀이 좋은 것이다.

— 김서리, 「담마빠다」 (소명출판 2013)
 

의미 없는 천 마디 말보다
들어서 평온해지는
의미 있는 한 마디 말이 더 낫다.

의미 없는 천 개의 시구보다
들어서 평온해지는
의미 있는 한 개의 시구가 더 낫다.

의미 없는 백 편의 시구를
말하는 것보다
들어서 평온해지는
한 마디 진리의 말씀이 더 낫다.

— 일아, 「담마빠다」(불광출판사 2014)

기존 번역들은 “anattha”를 “쓸모없음”, “쓸데없음”, “의미 없음” 등으로 옮기고 “attha”는 아예 번역하지 않거나 “의미 있는 말”로 의역했다. 이로써 “카마ㆍ아르타ㆍ다르마”라는 고대의 사유가 상실되고 출세간의 면모가 상당 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현대인의 의식세계에 맞게, 소위 가독성을 위해 중요한 술어를 일상언어로 번역할 경우 이와 같은 훼손이 발생할 수 있다. “의미 있는 말”, “쓸모 있는 말”이야말로 수행자들을 결박하는 가장 강한 족쇄가 아니던가? 그런 말 마디야말로 다르마의 탈을 쓴 카마의 언어, 法의 탈을 쓴 欲樂의 언어, 義의 탈을 쓴 不義의 언어가 아니던가?

이렇게 우리말 번역문들을 비교해 보는 것은 비평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경전의 세계와 오늘날 동시대인들의 의식세계가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해보기 위해서이다. 역자들은 자신의 의식세계에 충실하게 번역하였을 따름이며, 다만 우리는 그 결과물이 아쉽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경문이 끝없이 높게 비상하고, 그에 따라 역문이 늘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