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의 여정에 이르는 길, 옛길 — 피야닷시 스님의 「붓다의 옛길」을 읽고

사단법인 고요한소리에서 법륜 시리즈물로 펴낸 첫 책은, 초기불전에 의지하여 붓다의 생애를 짧은 분량으로 그려낸 피야닷시(삐야다시) 스님의 「부처님, 그분」(정원스님 옮김, 1988 초판)이다. 그만큼 훌륭한 저술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 내용이 하도 간결하고 마음속 깊이 여울지기에 수년 전 인도 순례여정 내내 조용히 읽었다. 힌두스탄 대평원의 안개처럼 만상을 가리고 밀려오던 그 자욱한 감동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때로는 고요한 바람으로 때로는 진군하는 수레바퀴로, 대평원의 한그루 한그루 나무와 함께 살아오던 붓다의 가르침과 생애….

나는 법의 바퀴를 굴리러
까아시의 도성으로 가노라.
무지가 군림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불사의 북을 울릴 것이니라.

— 「부처님, 그분」(고요한소리 2005년 2판) 34면

그것은 나와 같이 갈망과 애욕에 물든 범부의 생애를 휩쓸고 지나가는 승리자의 발걸음이었으며, 아라한ㆍ무상정등각자의 가르침, 붓다의 옛길이었다. 나로서는 감당할 수도 없었고 감히 엿볼 수도 없었던 불사의 길, “과거의 정등각자들이 따라갔던 옛길”.

참으로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나는 과거의 정등각자들이 따라갔던 옛길과 옛 도로를 보았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과거의 정등각자들이 따라갔던 옛길이며 옛 도로인가? 그것은 팔정도, 즉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과거의 정등각자들이 따라갔던 옛길과 옛 도로이니,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노老ㆍ사死를 수승하게 알았으며, 노ㆍ사의 집集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노ㆍ사의 멸滅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노ㆍ사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생生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생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생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생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유有를 수승하게 알았으며, 유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유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유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취取를 수승하게 알았으며, 취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취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취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수受를 수승하게 알았으며, 수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수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수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촉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촉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촉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촉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육처六處를 수승하게 알았으며, 육처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육처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육처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명색名色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명색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명색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명색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식識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식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식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식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행行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행의 집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행의 멸을 수승하게 알았으며, 행의 멸로 인도하는 향상의 길을 수승하게 알았다.

나는 그것을 수승하게 알고서 비구ㆍ비구니ㆍ청신사ㆍ청신녀에게 가르쳤다. 이와 같이 하여, 비구들이여, 범행梵行이 결실을 맺고 번성하고 퍼지고 많이 알려지고 널리 보급되어 마침내 신들ㆍ인간들과 함께 훌륭하게 빛나게 되었다.

— 「상응부」 12.65, “도시경”에서

과거의 정등각자들이 따라갔던 길, 세존께서 따라갔던 길이니, 그 길은 범부로서는 차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길이리라. 그것은 “수승한 앎”, 즉 전통적으로 “신통지神通智”, “증지證智” 등으로 번역된, 선정 속의 앎이 함께해야 하는 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행고行苦를 알고 보고서 걷는 길, 즉 팔정도인 것이니, 팔정도야말로 불교의 위없는 가르침이며, 윤리적 수준의 기초적 가르침이나 초학자를 위한 가르침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붓다의 옛길”은 실은 나와 같은 범부를 위한 길이 아니라, 선禪에 들어 수승한 앎으로 행行의 집과 멸, 고苦의 집과 멸, 법法의 집과 멸을 알고 보는 자를 위한 길이라 할 것이다.

* * *

인도 순례여정을 돌아보니, 여섯 해 전의 일이다. 그리고 불교를 공부한 지는 어언 십여 년 정도 되는가보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십여 년이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불교공부의 위력 때문일 것이다. 피야닷시 스님의 「부처님, 그분」을 처음 접했던 시절에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문외한이었다. 이제 수년이 흘러 초기불교의 문 안에 들고서 나름의 견해를 갖고 다시 읽어보니, 그래도 피야닷시 스님의 저술은 여전히 잘 읽힌다. 아마도 스님의 서술이 철저히 경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 그분」이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을 연대순으로 압축하여 서술한 짧은 분량의 소책자라면, 얼마 전에 우리말로 새로 번역된 피야닷시(삐야닷시) 스님의 「붓다의 옛길」(유미경 옮김, 달물 2015)은 앞부분에 붓다의 생애를 약술하고 나머지는 붓다의 가르침 소개에 역점을 둔, 붓다의 가르침에 관한 한 서양인들에게 첫손 꼽히는 저작이다.

최근에 영어로 쓰인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많은 책이 출처가 불분명하고 붓다의 말씀을 바르게 설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다행히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전통을 보존해 온 상좌부의 빠알리 삼장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최대한 정확하게 해설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공부 경력을 바쳐 이 책을 기획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불교를 만날 때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중심 개념인 사성제와 불교 수행방법인 팔정도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 「붓다의 옛길」 머리말에서

스무살에 상좌부 전통으로 출가한 비구가 사십대 후반에 “모든 공부 경력을 바쳐” 쓴 저술이라 하니, 이 한 권에 출가비구의 삼십 여년 공부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사정을 살펴보면, 수행에 관해서는 미얀마식 위빠사나 수행이 대체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교학에 관해서는 붓다고사의 「청정도론」 교학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자면, 상좌부 전통의 스님이 자신의 “모든 공부 경력을 바쳐” 쓴 이 책은 당연히 상좌부 교학 내지 수행방법론을 설파했겠구나 싶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자 본인의 해석은 물론 상좌부 전통의 해석도 지양하고, 다만 5부 니카야의 경문을 가장 우선하여 서술했기 때문이다. 종종 주석서와 인연담에 의존한 서술도 보이지만, 그것은 교학적인 내용을 상좌부 전통의 해석으로 각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정황이나 교훈을 곁들이기 위한 목적에 국한되어 있어 이 또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영어로 쓰인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많은 책들이 […] 출처가 불분명하고 붓다의 말씀을 바르게 설명하고 있지 못합니다”는 평을 내리고 있는 만큼, 「붓다의 옛길」에서는 인용문의 출처를 분명하게 밝히고 붓다의 말씀을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음은 불문가지이다. 더 나아가, 교학적으로 완비된 체계로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하고자 하였으며, 사성제와 팔정도의 체제로 단일하게 맞추어 붓다의 가르침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피야닷시 스님의 「붓다의 옛길」은 팔리 니카야 경문을 위주로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소개한다. 출가비구의 삼십여년 공부 역량을 집약하여 저술한 것으로, 초기불교 입문서로서는 서양인들에게 첫손 꼽히는 저작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의 체제에 맞추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내 견해로는, 사성제, 팔정도, 그리고 앞서 언급한 행行과 고苦, 수승한 앎 등등의 것들은, “불교를 만날 때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중심 개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성자들”을 위한 가르침, 불교공부 최후의 가르침, 가장 어렵고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가르침이며, 삼업청정ㆍ자비희사ㆍ입출식념ㆍ사념처ㆍ사선四禪을 기반으로 하여 비로소 알려지는 가르침이다.

무릇 경전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고苦”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고苦”나 “괴로움”이 아님을 아는 것이며, “행行”이 우리가 알고 있는 “행行”이 아님을 아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성제와 팔정도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 불교의 가르침은 윤리적 수준의 가르침, 평범한 가르침, 너무 쉽고 간단하지만 다만 행하기는 어려운 가르침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 수준의 가르침이라면 불교가 이토록 장구한 세월을 살아남을 가치가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아직 정각에 이르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것이 고苦다”라는 수승한 앎에 의하여 비로소 사성제가 알려졌던 것이니, “고”를 아는 자는 최소한 성자이며, 보살이며, 사실은 붓다이다. 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와 같은 높은 삼매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는 “고”를 알지 못한다. 그만큼 “고”는 어렵고 높은 가르침이다. 그러하니 나 같은 범부는 “고”를 감히 운위할 자격도 없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과연 “고苦”, “괴로움”, “둑카dukkha”란 무엇이냐?

둑가dukkha는 한 단어로 번역할 수 없는 빠알리어 가운데 하나다. 우리말에는 빠알리어의 둑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괴로움, 고통, 병, 불만족 등이 그나마 본래의 의미에 가까운 번역이다. 비참, 슬픔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둑카라는 단어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번역하지 말고 그대로 쓰기를 바라지만, 편의상 ‘괴로움’과 ‘둑카’라는 두 단어가 모두 사용될 것이다.(65)

“괴로움을 아는 자는 또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안다.”(69, S. v. 437)

“이 세계는 괴로움 위에 세워져 있다.”(70, S. i. 40)

붓다께서는 수행자들이 사선정을 얻고서 경험하는 느낌들조차 괴고성壞苦性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도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75)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76, S. iii. 158)

피야닷시 스님은 “고”, “괴로움”, “둑카”에 대해 일의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다양한 맥락의 경문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괴로움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 인용문,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와 같은 경전상의 정의를 소개한 다음, 이후 “오온”, 즉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온蘊에 대해 설명한다. 「붓다의 옛길」의 서술은 바로 이렇게,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즉 사성제와 팔정도를 경문 위주로 차근차근 소개하고 해설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한 꼭지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상적인 관점으로 불교교학을 소화하는 해설을 첨부한다: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암울하고 불교도들은 활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며 미소 짓는다. 삶의 진실한 본질을 이해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물의 무상함 때문에 당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늙음ㆍ병듦ㆍ죽음과 같은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한 용감하게 그것들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염세적인 것도 아니고 낙천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사실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다.(86-87)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오온의 취착에서 생성되고 유지되고 소멸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의 취착에서 벗어나면 크고 작은 괴로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모든 존재는 부조화와 불만족을 피하고 즐거움ㆍ기쁨ㆍ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지만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마치 두 고통 사이의 틈새처럼 보인다. 오온을 거머쥐고 있는 한 괴로움ㆍ불만족은 있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괴로움도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괴로움도 조건지어진 것이고 변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89)

따라서 「붓다의 옛길」은 두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두루두루 소개되는 여러 경문들 위주로 독해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경문과 교학의 가르침을 일상적인 수준으로 해설한 내용 위주로 독해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일상적인 수준에서 경문을 독해하는 방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므로 피야닷시 스님의 생활법문 수준의 해설, 즉 후자의 독해방식은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의 독해방식으로 이 책을 접근할 경우 많은 기쁨을 준다. 이 정도로 팔리 경문을 오롯이 소개하는 책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지금까지 미처 접하지 못했던 경문을 빛나게 마주쳤을 때의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내가 보는 견해로는 사성제와 팔정도는 성자들을 위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은 범부의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피야닷시 스님은 이러한 수준의 해설을 시도했으며, 이는 불교초학자들에게 도움과 감동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팔리 경전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학인에게는 그런 해설보다는 다채롭게 소개된 경문 자체가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바라문이여, 이 법과 율에도 점진적인 배움과 점진적인 행과 점진적인 향상의 길이 시설되어 있습니다”(「중부」 107)는 경문에서 보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다처럼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며 천상의 허공처럼 점점 더 향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진적인 배움, 즉 수습차제修習次第와 점차제작漸次第作에 따라 불교교학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성제와 팔정도는 최후의 수습과정이라 하겠으므로, 기초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 가르친 경들과 수행 관련 경들을 골간으로 하여, 예시컨대 “정직한 말”—“삼업의 청정”—“사무량심”—“부정ㆍ무상상”—“입출식념”—“사념처”—“사정근ㆍ사신족ㆍ오근ㆍ오력ㆍ칠각지”—“사성제ㆍ팔정도” 등의 순으로 교학을 정비해서 점차로 소개해야 한다고 본다. 꼭 이 순서가 바르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팔리 경전에 정합한 수습차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습차제를 정비하여 수행과 교학의 근간으로 삼지 않으면 끝내 부처님의 가르침이 차제가 흐트러져 학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굳이 이렇게 수습차제를 이야기한 것은, 「붓다의 옛길」이 피야닷시 스님의 삼십 여년 “모든 공부 경력을 바쳐” 쓴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수습차제를 중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삼업의 청정과 관련한 내용을 팔정도에 편입시켜 소개하는 식의 착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두서없이 뒤섞여서 하향 평준화 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는 물론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평가될 부분이겠지만, 적어도 사성제와 팔정도가 지극한 향상인을 위한 가르침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착간이 예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도 팔리 경문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어 미덕이 대단히 크며, 하여 마치 팔리 경전 편집본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예전에 어느 한 분이 한 권으로 된 팔리 경전을 소개해 달라고 하기에, 부득이 일아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민족사 2008)을 소개한 바 있다, 번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평과 함께. 이제는 같은 부탁을 받으면 피야닷시 스님의 「붓다의 옛길」과 「부처님, 그분」을 추천하고 싶다. (마침 「부처님, 그분」은 고요한소리 웹사이트에서 훌륭한 번역문으로 공개하고 있는 만큼, 독자들은 그 글을 통해 피야닷시 스님의 역량을 온전히 살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붓다의 옛길」은 조심스럽게 공들여 번역되었다. 경문의 번역은 대부분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의 번역을 인용하였으며, 일부는 전재성 박사의 번역을 인용하였다. 역자 유미경은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종교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392)이었지만, 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부역량을 발휘하여 역서에서는 원서와 달리 일부 게송과 문장에 팔리어 원문을 추가하여 인도 고전어를 배우는 학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아마도 역자는 팔리어를 공부하였으니 기존 번역어에 대해 견해가 상충되는 바가 있었겠지만, 인용되는 팔리 경문의 경우 대부분 기존 번역문 그대로 인용한 까닭에 본인의 독자적인 번역어나 견해를 드러내지 않고 주로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어를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이 역서는 초기불전연구원의 경계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불교를 전혀 몰랐던 일상인이 불과 몇년 간 불교를 접하고 이 정도 결과물을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텐데,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역량을 배가시키는 힘이 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연방죽선원의 법주스님은 과거에 피야다시 스님의 저작을 “초기불교 공부에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해준” 것으로 만났던가 보다. 그만큼 「붓다의 옛길」은 초기불전의 경문을 위주로 붓다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미덕 덕분에 초기불교를 공부하려는 학인들에게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1996년에 시공사에서 나온 「붓다의 옛길」은 번역에 대한 평이 상당히 좋지 않았던 데다가 절판이 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던 차에, 이번에 팔리어를 공부한 역자에 의하여 새롭게 번역되어 이제나마 이 귀중한 책을 읽게 되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 * *

번역, 특히 경전 번역은 여러 판본이 나와야 한다. 범부에서 시작하여 초학자를 거쳐 성자에 이르기까지 불교서적 독자의 스펙트럼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넓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라는 한 단어를 대하는 각인각색의 독자들을 생각해보라. 범부의 “괴로움”, 초학자의 “괴로움”, 신참 비구의 “괴로움”, 장로 비구의 “괴로움”, 성자의 “괴로움”, 붓다의 “괴로움”, …. 낱말은 하나이지만 그 내용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를 위한 번역본도 필요하며, 초학자를 위한 번역본도 필요하며, 성자를 위한 번역본도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누구나 수월하게 읽히는 번역본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일상적 의식수준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난해한 번역본도 필요하다.

팔리 경전 중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숫타니파타」를 가장 난해한 경전으로 꼽는다. 나는 「숫타니파타」야말로 역사상 가장 불행한 경전으로 본다.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쉬운 내용으로 번안하여 번역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원뜻이 현저히 훼손될 수밖에 없는 경전. 한 번 예를 들어보자.

“현자가 늘 같이 있기에 그를 가벼이 여기고 있지는 않느냐?
그는 사람들 중에서 횃불을 든 자로서 너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냐?”

“저는 현자가 늘 같이 있다 하여 그분을 가벼이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중에서 횃불을 든 분으로 저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색色을 좋아하고 즐거움을 꾀하는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서
신심으로 집에서 출가하여 괴로움을 끝내는 자 될지니

선우善友들과 동떨어진 거처, 외딴 정처靜處,
그들과 어우러질지니, 음식의 적정량을 알지니

옷과 걸식, 약과 거처,
그것들에 갈애를 일으키지 말지니, 세간으로 되돌아가지 말지니

계조戒條를 지키는 자, 오근五根을 지키는 자,
신지념身至念 하는 자, 염리厭離가 무르익은 자 될지니

반작이는, 탐貪이 따르는 상相을 피할지니,
반작이지 않는 상相을 위하여 일경一境의 잠잠한 마음을 계발할지니

무상無相을 계발할지니, 만수면慢隨眠을 내려놓을지니,
그리하여 만慢이 수승하게 가라앉음에 평온한 자 되리니.”

바로 이렇게 세존께서 존자 라훌라를 이 게偈로 되풀이하여 가르치셨다.

— 「숫타니파타」 335-342, “라훌라 경” 전문

시험 삼아 「숫타니파타」의 “라훌라 경”을 번역해 보았다. 부처님께서 아들 라훌라를 가르치신 것으로, 이 짧은 게로 출가에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의 공부여정을 이르시는 경이다. 사실 이와 같은 번역문은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를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번역문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내 입장이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데도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사항이 대단히 많은데, 하물며 성자의 법과 율을 배우는데 일상적인 의식수준으로 모든 것이 다 소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기본적으로 익혀야 할 학습내용이 제법 있을 수밖에 없다. 색色, 오욕락, 오근五根, 신지념身至念, 염리厭離, 탐貪, 반작이는 상相, 심일경心一境, 무상無相, 만慢, 수면隨眠 등등, 처음에는 이를 언급하는 경문들이 암호나 공식처럼 낯설겠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4부 니카야에서 정치하게 시설된 법문法門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며, 공부인의 수습차제에 살과 피를 입히는 경문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쉽게 번역해 버리고 나면, 다른 경문에서 같은 어원의 팔리어를 맥락상 필연적으로 다른 번역어로 대체하여 번역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팔리 경전의 정합성 내지 자증성이 무너지고, 이해에 착간이 발생하게 되며, 더 나아가 수습차제가 무너져 범부와 아라한이 혼잡하게 뒤섞이며, 급기야 경전의 깊고 고준한 가르침이 일상적 훈계, 윤리적 가르침으로 전락하고 만다. 위의 “라훌라 경”에서 마지막 세 게송(340-342)을 다른 번역문으로 읽어보자:

계율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네 육신을 살펴라. 참으로 세상을 지겹게 생각하라.

애욕 때문에 깨끗이 보이는 겉모양을 떠나 생각해라.
육신은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두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마음에 자취(相)를 두지 말라. 마음에 도사린 오만을 버려라.
오만을 없앤 너는 마음 편안한 나날을 보내리라.

— 법정스님, 「숫다니파아타」(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201, 1971년 3판) 83면
 

계율의 규정을 지키고 오관을 지켜
그대 육신을 바로 보라. 참으로 속세에 싫증을 느끼는 자가 되라.

애욕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모든 외형적인 것을 버리고 생각을 골똘히 하라.
그리하여 몸을 부정한 것임을 통찰하고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라.

마음에 자취(相)를 두지 말며, 마음속에 숨어 있는 오만을 버리라.
그렇게 되면 너는 오만을 없애 마음이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리라.

— 김운학, 「숫타니파아타」(범우사, 1980) 65면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을 회피하라.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인상이 없는 경지를 닦아라. 교만의 잠재적 성향을 버려라.
그리하여 교만을 그치면, 그대는 고요하게 지내리라.

— 전재성, 「숫타니파타」(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4) 222-223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계율의 항목에 따라 절제하라.
몸에 대하여 마음집중을 하라. (윤회하는) 세상에 대하여 아주 싫어하라.

기분 좋고 욕망에 연결된 겉모양을 피하라.
기분 좋지 않은 대상에 대하여 집중되고 하나 된 마음을 닦아라.

(‘나’라는) 상相이 없음을 닦아라. 교만의 잠재적 경향을 버려라.
그러면 교만의 온전한 이해에 의해 평온하게 유행하리라.

— 일아스님, 「숫따니빠따」(불광출판사 2015) 126면

위에 예시한 네 번역문은 팔리 경전의 근본개념을 한껏 일상화하여 다루고 있다. 가령, 신지념身至念, 염리厭離, 탐貪, 상相, 심일경心一境, 무상無相, 만慢 등이 차지하는 교학상의 위치나 수행상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면, 위와 같은 일상적 개념으로 치환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들은 선정에 들지 않고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알 수 없는 경지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역자들은 위에 예시했던 바대로 일상적 개념으로 번역하며, 나처럼 전통적 역어를 고집할 경우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힐난을 받을 수도 있다. 이해에 커다란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경전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것일까? 선정에 들지 못한 자가 선정에 든 자의 말, 비유, 의미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팔리 경전의 교학을 무너뜨리지 않고 경문을 그 깊이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으려면 고집스런 장인의 정치한 번역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데, 과연 이 견해가 외람된 것일까?

피야닷시 스님의 저술을 소개하는 김에 경전번역 문제를 살짝 언급해본 것은, 번역 문제가 불교공부에 상당한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심미묘한 법문이 번역으로 인하여 얕고 쉬운 훈계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쉽게쉽게 접근하려 해서는 경전의 심오가 세계가 열리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생각보다 엄밀하고 섬세한 접근이 요구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더욱 깊고 더욱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일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수많은 공덕자들, 수많은 세월이 있어야 가능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라면 유장한 호흡으로 사람과 세월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번역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난 것은 「붓다의 옛길」이 주로 계승한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어들이 어느 한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하여 설산의 빙설과도 같고 태양의 뜨거움과도 같은 경문들이 인간적인 훈계로 읽히는 경우들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나마 이와 같은 팔리 경전 번역이라는 기초작업을 토대로 점진적으로 나아가 수십년에서 수백년에 걸친 공동체의 수습차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사의 여정”을 위하여, 수천년 인류 역사에서 일점일획과도 같은 한 시대의 재가불가로서 나는 팔리 경전 역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린다.

두려움이 있음에 방일放逸을 보고 안온함이 있음에 불방일不放逸을 보아,
팔정도로 계발하라, 불사不死의 여정에 이르라.

— 「장로게」 980

불사의 여정에 이르는 길, 옛길 — 피야닷시 스님의 「붓다의 옛길」을 읽고”에 대한 5개의 댓글

  • 1. 사성제와 팔정도
    사성제와 팔정도가 사실상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이 항상 고민이었는데, 어쩐지 그것이 최상의 과정이었군요. 최후에, 닦아온 모든 수행과 가르침을, ‘포괄하여 집약하는 힘’으로 생각한다면, 정말로 큰 삼매와 지혜를 일으키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또한 거꾸로 고,집,멸,도 사성제가 통용되던 당시의 그 불교적문화권(?) 내의 사람들의 수행적 성숙도도 상당한 것으로 유추됩니다.

    어쩌면(불교적문화라 하긴 그럴테고.. 아마도) 베다와 브라만, 이들의 수행이 극의에 이르러서 그러한 문화적 토양 위해 부처님이 성도하신 것은 아닌가 합니다. 재채기가 나올락 말락 나올락 말락 하는 사람들 가운데, 부처님이 크게 재채기 한 방 하시고, 다들 코를 살살 긁어서 끝끈내 그 간질간질하던 재채기가 다 튀어나오게 하신 것은 아닌가…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하하^^;)

    2. 법구경
    제 책장에는 전재성님 역 법구경과 거해스님 역 법구경이 있습니다. 역시 하… 전재성님 역이 학적으로 뛰어나고 원문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번역이고, 더 명확한 근거가 있음은 알겠는데, 역시나 마음에 들어차는 것은 ‘소설적 번역’이라 비판받는 거해스님의 역본입니다.

    번역 자체에는 미흡하였는지 모르겠으나, 거해스님의 법력이 고스란히 담긴 책인 것 같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감흥과 깊은 내적 만족을 주고, 전재성님의 역쪽은 머리만 복잡하게 할 뿐이어서, 돈 아깝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가슴 저 속에서부터 피어오릅니다. ‘미리 읽어보았다면 사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게 되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 입니다. (이쪽의 책들은 진짜 값도 더럽게 비쌉니다.)

    (두 권 모두 게송이 설해진 인연/설화를 함께 싣고 있는데, 게송 자체보다는 이 인연담 부분에서 소설적이라 비판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것도 어느 한 쪽의 주장이긴 합니다. 제가 빠알리어를 모르니 그 사실여부를 확인 할 수 없는.)

    이런 바탕에서 저 역시 고싱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차제나, 수준, 깊이, 수행력 뭐라 표현하든 그것에 따른 차이를 깊이 공감합니다.

    3. 해심밀경
    최근에 읽어보던 것은 (원측의 소에 의한) 해심밀경 (김윤수님 역) 인데, 이것 역시 줄창 한문단어가 연이어져 있어서, 사실상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번역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번역이 엉망이라고 굉장히 투정부리고 있었는데, 고싱가님의 이 글을 보고 나니, 섣부른 번역을 피해야 함과, 한자투 나열식의 불가피함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무슨 말인지 모르더라도, 그 모르는 말을 읽다보면 오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참 그게 경전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다만 애교어린 투정이 일어나는 부분은, ‘하.. 이걸 또 한자사전 펴 놓고 봐야 하는건가..’ 하는 부분과.. ‘내가 그렇게 잘난 것도 아닌데 잘나신 분들이 좀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면 안될까..’ 하는 부분입니다. 하하;)

    현재 계획은 지운스님 역의 해심밀경을 더해서 한 번 봐 보는 것입니다.

    4. 청년 불자
    아 참, 저는 27세의 일반 청년 불자입니다. 요즘의 저는 깨달음이란 ‘정보(혹은 에너지)를 처리하는 특정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감을 통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경험, 즉 정보(에너지)로써 식에 함장되며, 이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처리되어지는 것이 수행과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낱낱의 정보를 집착 없이 집약/결집 시켜서 대단위의 정보를 굴리는 것, 이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선정을 통해 낱낱의 정보와, 낱낱의 정보가 들어오는 통로와, 그것을 받아보던 의식을 끊고, 기존에 누적되고 있는 오류를 일소하고, 비워내, 다시 새롭게, 그리고 한 층 더 크고 높은 차원에서의 정보를 축적하도록 하는 것이, 매일매일 하는 수행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곧, 집약되고 집약된 정보의 흐름이라 생각합니다. 지혜가 나오는 의식이란.)

    여기에서 분명 이러한 정보들을 처리하게 되는 ‘특정의 방식’이라는 것이 중요할 텐데, 저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방향으로의 처리, 정보의 집적, 에너지의 투자, 그러한 방향이면 적어도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정확히는, 경전 등에서 말하는 무념, 등으로 훈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치하듯이, 경전을 읽고, 오류발생시에 재설치/복구 하듯이 경전을 다시 읽고, 하는 과정을 통해 이것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러한 체화를 이룩한 대상과 만남, 어록이든 스님분 그 자체이든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오감과 맞대응하는 상대(너끈한 법력으로 틈 없이, 사실적인 측면에서 맞대응이지, 실제적으로는 ‘맞추어서 재접’해 주시는,), 그리고 맞대응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제 오감을 조율시켜버리는’ 상대를 만나, 그 경우, 그 한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선정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경험담입니다. 제 수준에서는 긴가민가 미심쩍어 ‘분명히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하나..)

    곧, 저는 제 안에 내재된 데이타들을 통해, ‘귀의 한다’는 명목하에(행위로 인해, 그것을 구실,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서(해주셔서)) 제 안의 내재된 데이타(정보,에너지)들을 큰스님들께서 ‘특정의 방식’으로 흐르도록, 마치 전기 배선을 만지듯이 만져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특정한 방식’으로의 사고관의 확립, 그러한 생각 통로의 배열, 사고/에너지의 흐름, 그러한 것이 분명 깨달음, 혹은 최소한 깨달음을 달성캐하는 무언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복 유도됨으로 인해, 반복 유도됨을 통해, 달성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체계’적 완성, 단계적인 말고, system적 완성, 일종의 체계)에서 (외형적인) 팔정도가, 흔들림 없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5. 사이비 교설
    음… 역시 너무 사이비 교설 같나요? 항상 제가 불교나 기독교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굉장히 당혹스러워 하더라구요..

    가령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는 요한복은 1장1절 앞부분은 정혜쌍수이다. “태초”는 무시·무공간이고 “말씀”은 곧 지혜이다, 이건 정과 혜가 본래 불가분임을 의미한다. 곧 정혜쌍수의 본 뜻은,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닦지 않는다면 모를까 닦는다는 전제하에서는), ‘정과 혜는 함께 닦아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비우고 다 비운 고요한 선정에서도, 만큼은 오롯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울수록 더 밝아진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하는 요한복음 1장1절 후단은 견성성불이다. 본성품의 지혜를 보는 것으로 불도를 이루어 부처가 된다. 밝게 아는 스스로의 본 성품, 본성품의 지혜가 곧 부처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말씀)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는 요한복음1장 2-3절은 유식론이다. 본성품의 지혜를 짐짓 꾸며서 이라 하면 그것이 만물을 낳고 만물을 기르고 만물을 멸하고… 하는 수식어를 붙인대도 얼추 어울리지 않나요? 자성이라 갖다붙이든, 불성이라 같다붙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전.

    전 이렇게 요한복음을 굉장히 선종적/불교적으로 읽거든요. 아마 굉장한 근본주의자들이 볼 경우에는 대단한 공격을 받을 견해인 것 같긴 한데, 전 좀 이렇게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게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요.

    6. 달마혈맥론
    http://saaksoma.blog.me/220405972757
    여기는 제가 앞부분만 쬐금 번역해 본 달마혈맥론이에요.

    (적긴 길게 적었는데.. 올릴까 말까 한 참을 고민하다 올려봅니다!)

    법연
  • 감각(sensus)를 지켜 속세에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 가능한 지요?
    감각을 유지하여 속세의 관계망을 벗어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어찌 가능한가요?
    오히려 감각마저 버리고 관계망까지 벗어던지는, 그러니까 이생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저생에서의 삶을 기약해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생에서의 삶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 이 사이트 불교 글묶음에 나온 글들을 읽다보니, 고싱가 숲이 빛나는 것은 “내 마음이 집착을 여의어 번뇌에서 해탈하기 전까지는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가다듬기에 가능한 데, 그 집착을 버리는 것이 감각과 관계망을 벗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소견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감각에 속하는데, 그것을 버리고 어찌 사람이 살 수 있겠으며 어찌 불교의 가르침이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감각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만나면서 형성되고 누적된 호오好惡의 생각ㆍ감정ㆍ습관ㆍ기억을 떠나라는 것이겠지요.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탐ㆍ진ㆍ치”, 한마디로 “집착”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불교용어는 세간, 속세, 경계)는 그와 같은 양음(플러스ㆍ마이너스)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으로 덧칠되어 굳어진 것이므로, 강한 애증부터 옅은 호오까지 일체의 가치평가를 떠나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애증과 호오를 떠나고, 애증과 호오로 세워진 세계를 떠나는 것이지, 감각과 관계망을 떠나거나 환멸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출가한다고해서 감각과 관계망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감각을 지킨다”(불교용어로는 “육근수호”)는 것은 그와 같은 애증과 호오가 덧붙기 전으로 역류한다는 것이며, 내가 확립한 가치평가의 어둠(=“세계”) 속으로 흘러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각을 지켜 속세에 환멸을 느낀다”고 언급하신 것은 엄밀한 불교적 관점에서는 오류가 있습니다. “감각을 지키면 속세가 존립하지 못하며, 감각을 지키지 못하면 속세가 세워지고 속세에 대한 환멸도 존재한다”가 바른 표현이 아닐까요?

    더 나아가 “나의 애증과 호오를 온전히 버리고”(=“속세를 떠나”) 불교공부에 깊게 들어가게 되면, “인식이 곧 세계”라는 매우 철학적인 주제까지 이르게 됩니다. “앎=세계”가 분절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앎=세계”를 세우는 “나”를 향한 장엄한 물음이 시작되는 지점이지요. (불교는 기본적으로는 “앎=세계”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앎=세계”를 세우는 육근ㆍ육경ㆍ육식을 상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느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양한 수행법이 존재하는 것이며, 종교적 탐색이 존재합니다.

    불교공부의 스승은 “고통”입니다. 이 스승이 없으면, 우리가 출생 이래 세워온 세간의 구조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던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불교공부가 평생동안 몸담은 세간의 구조와 판이하여 접근이 힘들겠지만, 유장한 호흡으로 다가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고싱가
  • 감각하되 애증이나 호오를 버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좀더 성찰하는 공부를 통해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겪어 앎이 참 세상”임을 깨닫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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