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떼처럼 까악까악 비상하는 마음의 생각들—야차가 던지는 그물의 세계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사오니. 한때 세존께서는 수칠로마 야차의 영역, 가야의 탕키타만차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카라 야차와 수칠로마 야차가 세존께서 계신 근방을 지나가고 있었다. 카라 야차가 수칠로마 야차에게 말했다, “저분은 사문이다.” [수칠로마 야차는] 말했다, “저자는 사문이 아니다, 저자는 가짜 사문이다, 혹은 사문인지 혹은 가짜 사문인지 내가 알아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수칠로마 야차는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을 향하여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몸을 무르셨다. 그러자 수칠로마 야차가 세존께 말했다, “사문이여, 나를 두려워하는 게요?”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는 않으나 그대와 접촉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수칠로마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당신에게 하나 묻겠소. 만약 나에게 답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마음(心)을 사로잡든가 당신의 심장을 찢든가 두 발을 잡아 항하 저편으로 던져버리든가 하겠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벗이여, 신ㆍ마라ㆍ범천을 망라한 세계에서, 사문ㆍ바라문ㆍ신ㆍ인간을 망라한 중생 가운데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거나 심장을 찢거나 두 발을 잡아 항하 저편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자를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벗이여, 어찌하든 물으시오, 그대가 묻고 싶은 바를.”

그러자 수칠로마 야차가 세존께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270탐貪과 진瞋이 어디에서 인연하여서,
불락不樂과 낙樂과 촉수觸手가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디에서 각覺들이 일어나서, 마음(意)을 풀어놓는지요,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풀어놓듯이.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271탐과 진이 여기에서 인연하여서,
불락과 낙과 촉수가 여기에서 생겨나서,
여기에서 각覺들이 일어나서, 마음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풀어놓듯이,

272반얀나무 뭉텅이에서 생겨나듯 애집愛執에서 ‘나’라는 존재들이 생겨나서,
말루와 넝쿨이 숲으로 뻗어가듯 욕락欲樂을 향한 집착들이 가지가지 뻗어가서.

273그것이 어디에서 인연하는가를 온전히 보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떨쳐내는 것이니, 야차여 들으십시오,
그들이이야말로 건너기 어려운 이 폭류를 건넙니다,
그전에는 건너지 못했던 이 폭류를, 다시 존재가 되는 일 없나니.

— 「숫타니파타」 270-273, “수칠로마 경”

* * *

야차는 천인의 짝패다. 즉 수행을 통해 체득한 바 있으나, 그 체득한 바를 바탕으로 비천飛天을 지속하면 천인이 되며, 그 체득한 바를 바탕으로 낙천落天을 지속하면 야차가 된다. 그들은 범부의 차원을 뛰어넘은 자들, 경전의 용어로 말할 것 같으면, 비인非人들이다. 따라서 야차가 내놓는 질문은 범부가 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며, 야차에 대한 붓다의 답 역시 범부가 소화할 수 없는 답이다.

어찌하여 야차는 천天을 상승하지 않고 하강하는가? 여타 범부는 전혀 접해보지 못한 천天에 올라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더 이상 공부가 진척되지 않자 마침내 뭇 범부를 향하여, “너희는 아름다운 난다나 정원을 본 적이 있느냐?” 물으면서 하강을 시작한다. 그는 난다나 정원을 본 적이 있으나, 즉 선정체험을 통해 소위 “법열”을 맛본 바 있으나, 그것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자, 그것을 맛보지 못한 이들과 다툼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이 맛보았던 법열을 기억의 공간으로 불러온다. 그렇게 허상의 공간을 짓고 그 허상의 공간으로 상승함으로써, 그렇게 비천飛天을 작파하고 천天에서 떨어짐으로써, 타락한 천인, 야차가 탄생한다. 이렇듯 야차와 천인은 짝패이며, 천사와 마귀 역시 짝패이다.

그러므로 야차는 자신이 직접 대결하여 자기 기준으로 측정해 보기 전에는 그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그 어떤 인人도 비인非人도, 심지어는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자도 인정할 수 없다. 수칠로마 야차는 세존께서 자신의 영역에 있음을 알고서 말한다, “그는 사문이 아니다. 그는 가짜 사문이다, 혹은 사문인지 혹은 가짜 사문인지 내가 알아보기 전까지는.”

야차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가짜 존재이다. 자신에게 포착된 존재는 모두 예외없이 가짜이며, 오직 자신만이 진짜이다.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자도 야차의 세계에서는 “가짜 사문”에 불과하다. 수칠로마 야차는 모든 사문을 가짜 사문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한때 세존께서는 수칠로마 야차의 영역에 머물고 계셨다”—이렇게 수칠로마 야차는 진짜와 가짜를 전복시키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짜 사문’ 야차와 ‘가짜 사문’ 세존이 마침내 조우하게 되었나니.

천인이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라면, 야차는 무섭게 곤두선 존재이다. 그 이름 수칠로마(針毛)! 온몸뚱이에 날카로운 바늘 같은 털을 곤두세우고 사문과 바라문, 인과 비인을 향하여 전복적으로 비행飛行하는 야차! 그 어떤 범부도 감히 이와 같이 비행하지 못하리. 오직 야차만이, 오직 수행을 통하여 체득한 바 있었던 공부인만이 이와 같이 비행할 수 있으리.

“그리고 수칠로마 야차는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을 향하여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몸을 무르셨다.” 수칠로마 야차는 초기경전에서 이 이상 무례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거칠게 부처님과 대면한다. 그리고 질문 내용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다. “사문이여, 당신에게 하나 묻겠소. 만약 나에게 답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든가 당신의 심장을 찢든가 두 발을 잡아 항하 저편으로 던져버리든가 하겠소.”

이것은 법전法戰의 선언이다. 모든 야차는 법전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고자 하며, 모든 붓다는 (상대가 걸어오는) 법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온전히 보고 그 연기緣起를 명료하게 드러냄으로써 무장해제를 시킨다. 야차가 반얀나무, 말루와 넝쿨처럼 여타 존재를 향하여 마수를 뻗치는 존재라면, 붓다는 야차라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허공과도 같다. 얽히고설킨 반얀나무 뭉텅이가 허공을 사로잡고 허공을 찢고 허공을 던져버릴 수 있겠는가? 야차라는 존재가, 다시는 존재로 되돌아오지 않는 붓다를 향해 존재의 그물을 던져 잡을 수 있겠는가?

“벗이여, 신ㆍ마라ㆍ범천을 망라한 세계에서, 사문ㆍ바라문ㆍ신ㆍ인간을 망라한 중생 가운데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거나 심장을 찢거나 두 발을 잡아 항하 저편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자를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벗이여, 어찌하든 물으시오, 그대가 묻고 싶은 바를.”

그러자 야차가 비수를 꺼내듯, 범부라면 절대 답할 수 없는 비장의 질문을 꺼낸다.

270탐貪과 진瞋이 어디에서 인연하여서,
불락不樂과 낙樂과 촉수觸手가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디에서 각覺들이 일어나서, 마음(意)을 풀어놓는지요,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풀어놓듯이.

참으로 경이로운 질문이다. 야차는 극히 미세한 움직임에서부터 거센 물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신체적ㆍ심리적 흐름을 알고 있는 존재이다. 첫째, 청정한 마음(心)을 오염시키는 탐과 진, 둘째, 탐과 진에 바탕해서 촉수처럼 거의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거두거나(不樂) 닿으려고 뻗는(樂) 신체적ㆍ심리적 반응들(lomahaṃsa), 셋째, 그 신체적ㆍ심리적 반응들이 물결을 이루어 대상을 향해 눈을 뜨는 각覺(vitakka)—이 모든 것이 인연이 되어 기분ㆍ정서ㆍ감정ㆍ언어ㆍ생각ㆍ견해ㆍ주장 등의 바탕, 한 마디로 “마음”(意; mano)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흔히 “탐욕/욕망”으로 번역되는 “탐貪”과 “성냄/분노”로 번역되는 “진瞋”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늘 감정과 욕망과 생각이라는 표층에 휩쓸려서 존재를 영위하고 있는 까닭에, 이 경문에서 언급되는 “탐”과 “진” 역시 감정이나 욕망이나 생각의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전이 인간 심리의 표층(감정ㆍ욕망ㆍ생각)만을 다루는 것이라면 경전에 값하지 않는다. 경전은 범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의 심층(탐진→불락/낙→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한다. 더구나 “탐욕”과 “분노”가 “마음(意)”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탐”과 “진”을 그와 같은 감정ㆍ욕망ㆍ생각으로 읽으면 곤란하며, 적어도 감정ㆍ욕망ㆍ생각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일종의 흐름이나 탁함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하면서 경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면, “탐”과 “진”은 마음(心)을 오염시켜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봄이 경전을 경전답게 읽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탐”과 “진”은 “탐욕”이나 “성냄”보다 훨씬 근원적인 힘, 감정ㆍ욕망ㆍ생각의 밑바탕을 이루는 힘인 것이니, “탐욕”과 “성냄”이라는 번역어는 결과를 원인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불락”과 “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이를 “싫어함”, “좋아함”과 같은 감정ㆍ욕망ㆍ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불락”을 슬픔ㆍ괴로움ㆍ싫음ㆍ미움ㆍ증오ㆍ혐오ㆍ악ㆍ그름 등등의 인연(원인), “낙”을 기쁨ㆍ즐거움ㆍ좋음ㆍ애정ㆍ애착ㆍ욕망ㆍ선ㆍ옳음 등등의 인연(원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탐진貪瞋→낙수樂受→각覺들→마음”의 물줄기와 “탐진貪瞋→불락수不樂受→각覺들→마음”의 물줄기를 살펴볼 것 같으면, “탐진貪瞋→수受→각覺들”이 있어 까마귀(감정ㆍ욕망ㆍ생각)를 풀어날리는 것이지, 까마귀(감정ㆍ욕망ㆍ생각)가 있어 “탐진貪瞋→수受→각覺들”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탐진”은 감정이나 욕망이나 생각의 범주에 속하는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것이며, “불락”과 “낙” 역시 그렇다. 그것들은 심층의 언어이지 표층의 언어가 아니다. 야차는 적어도 이와 같은 심층의 흐름을 알고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야차의 질문은 범부를 능히 쓰러뜨리고도 남을 비수와도 같은 날카로움을 갖고 있다.

경문의 팔리어 용어와 전통적인 번역어를 고집하지 않고 야차의 질문을 쉽게 번안해 보자면, “어디에서 탐진에 의한 마음(心)의 오염이 일어나는가? 어떤 자극에 대해서는 반사적으로 다가가고 어떤 자극에 대해서는 반사적으로 피하는 촉수와도 같은 반응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촉수의 반응과 함께 흐릿하게 형성되는 대상을 향해 일렁이는 흐름, 즉 마치 이브가 선악과를 향해 눈을 뜨는 것처럼 환영(대상)을 향해 눈을 뜨는 각覺들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생겨나서 어떻게 얽혀 감정ㆍ욕망ㆍ생각의 바탕, 한 마디로 “마음(意)”을 형성하는가?”로 읽어볼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야차가 던진 것이다.

우리 같은 범부들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심리와 정서와 감정과 욕망과 생각의 내용을 두고 시/비, 선/악, 성/속, 귀/천 등등을 논했으면 논했지, 자신의 심리와 정서와 감정과 욕망과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생기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본 바가 없다. 그런데 야차가 그 심원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야차의 질문은 얼핏이라도 진리의 맛을 본 자가 아니라면 결코 던질 수 없는 질문이다. 야차는 한 사문, 붓다에게 묻고 있다. “당신, 진리의 맛을 보았는가? 심리와 정서와 감정과 욕망과 생각이 일어나는 흐름을 보았는가? 까마귀떼처럼 까악까악 비상하는 감정과 욕망과 언어와 생각과 견해를 보았는가? 그 본 바를 내놓아 보시게.”

자, 이렇게 야차가 한 사문을 향하여 그물을 던지고 있다. “당신의 마음(心)을 사로잡겠다”고 번역한 원문을 어원을 풀이하여 보면, “당신의 마음에 그물을 던져 씌우겠다(khipati)”는 뜻이다. 만일 그 사문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다면, 즉 체득한 바를 내놓지 못한다면, 야차의 그물에 사문의 마음이 잡히거나 심장이 찢기거나 항하 저편으로 던져질 것이다. 답하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야차는 사문의 마음을 휘어잡고 자신의 존재감을 증장시키는 법문을 설하여 마침내 사문으로서의 생을 종결시키거나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먹이감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야차의 법문은 좋아함과 싫어함, 우와 열, 옳음과 그름, 증오와 분노, 논쟁과 법전이 펄펄 살아있는 법문, 까악까악 비상하는 생각들과 감정들로 잘 짜여진 법문인 것이니, 그것은 실은 법문法門이 아니라 법의 탈을 쓰고 법을 파괴하는 사견문邪見門이다.

우리는 불교를 배우면서 그 무엇보다 야차가 던진 그물의 세계, 야차가 장악한 세계를 조심해야 한다.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불교를 배우는 바로 우리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야차가 되고 마는 것이며, 급기야 심중에 무수한 화살을 품고서 어느 한때 어느 한 사문에게 다가가 허공을 뒤덮으며 화살을 퍼붓는 존재가 될 것이다. 범부보다 훨씬 위험하고 사악한 존재, 법을 파괴하는 존재, 법으로써 법을 파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허공을 뒤덮는 화살의 그림자, 야차의 그물을 보며, 그러나 세존께서 답하신다.

270탐과 진이 여기에서 인연하여서,
불락과 낙과 촉수가 여기에서 생겨나서,
여기에서 각覺들이 일어나서, 마음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풀어놓듯이

“여기에서.”—이 한 마디로 인하여 그 모든 화살, 그 모든 창칼이 꽃잎이 되어 낙화한다.

세존께서는 야차가 질문을 통해 건립한 세계로 들어가 응수하지 않으신다. 그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야차와 접촉하는 순간”, 야차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그분은 오히려 야차의 그물이 허공을 뒤덮으며 펼쳐지는 것을 두렷하게 보실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질문자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탐진에 오염되는 일이 일어나며, “지금 여기에서” 촉수가 어떻게 생겨나며, “지금 여기에서” 대상을 향해 눈을 뜨는 각覺이 어떻게 연유하며, 마침내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어떻게 까마귀처럼 푸드득 비상하여 감정ㆍ욕망ㆍ언어ㆍ생각ㆍ견해ㆍ질문의 창칼로 어지럽게 비행하고 있는가를, 두렷하게 보실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식ㆍ명색ㆍ육입의 접촉(觸)과 함께 마음(心)이 오염되고 있음을, “지금 여기에서” 그 오염을 타고 촉수가 일어나 어떤 자극에 대해 뻗치거나(樂受) 움츠리면서(不樂受) 흐릿한 환영幻影이 그려지고 있음을, “지금 여기에서” 그 흐릿한 환영을 향해 물결이 출렁이며 다각도로 눈을 뜨고 있음(覺)을, “지금 여기에서” 환영과 각覺들이 서로를 상승시키면서 환영이 갈수록 권력을 얻게 되고 각覺들도 더욱 뚜렷해짐으로써 마음(意)를 풀어놓고 있음을, “지금 여기에서” 그 모든 것이 인연이 되어 감정과 욕망과 언어와 생각과 기억과 견해 등등으로 비상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 여기에서” 야차가 이렇게, “탐과 진이 어디에서 인연하여서, 불락과 낙과 촉수가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디에서 각覺들이 일어나서,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풀어놓듯이, 마음(意)을 풀어놓는지요?”라고 까악까악 질문하고 있음을, 낱낱이 투명하게 비춰내고 계신 것이다.

결국 야차의 입에 올려진 탐진은 “의意” 이후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이므로 가짜 탐진이며, 같은 이유에서, 야차의 입에 올려진 수受 역시 가짜 수, 각覺 역시 가짜 각이다. 야차는 “의意”로부터 탐진을 탄생시키고, “의意”로부터 수受를 탄생시키고, “의意”로부터 각覺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차의 입에 올려진 “탐진”은 지금 여기 현장에서 일렁이는 탐진이 아니라, “탐진→수→각→의(→탐진→수→각→의(→탐진→수→각→ … )))))”의 흐름 끝에 탄생한 가짜 탐진, 환영 속의 탐진인 것이니, 사실을 말하자면, 환영 속의 환영 속의 환영 속의 환영 속의 환영 속의 … 환영이다.

세존께서는 “여기에서” 그 환영의 중첩과 분신을 낱낱이 보시고서, 환영의 실체, 견해의 실체, 질문의 실체, 야차의 실체를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이렇듯 경문의 “여기에서”는 감정ㆍ욕망ㆍ생각ㆍ견해ㆍ주장이라는 세계로 들어가 구성되는 내용물로서의 “여기에서”가 아니라, 그 감정ㆍ욕망ㆍ생각ㆍ견해ㆍ주장이 형성되고 표출되고 있는 현장, 일종의 실시간 해부학 실습현장, 야차의 살과 뼈, 실핏줄이 낱낱이 해부되고 있는 현장이다. (돌이켜보면, 야차가 처음에 부처님과 대면할 때 접촉하려고 몸을 들이밀자 부처님께서 “그대와 접촉하는 것(samphassa)은 나쁜 일”이라며 물러선 것은, 촉ㆍ수ㆍ애ㆍ취라는 폭류에 휩쓸려 문답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비유적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애ㆍ취가 연기緣起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질문자의 실시간 심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야차는 굉음의 화살과 창칼이 되어 붓다를 향해 비행하였으나, 존재로 되돌아오지 않는 붓다에게 야차의 화살과 창칼은 “환영의 환영의 환영의 환영의 환영의 … 환영”에 불과하며, 하여 떨어지는 꽃잎과도 같다. 장엄한 허공에서 하염없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허다한 꽃잎들의 그림자!

그렇다면 수칠로마는 무엇인가? 아직 수칠로마는 태어나지 않았다. 수칠로마라는 존재가 있어 심리적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애ㆍ취)으로부터 수칠로마라는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기에.

271탐과 진이 여기에서 인연하여서,
불락과 낙과 촉수가 여기에서 생겨나서,
여기에서 각覺들이 일어나서, 마음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까마귀를 풀어놓듯이,

272반얀나무 뭉텅이에서 생겨나듯 애집愛執에서 ‘나’라는 존재들이 생겨나서,
말루와 넝쿨이 숲으로 뻗어가듯 욕락欲樂을 향한 집착들이 가지가지 뻗어가서.

위의 두 연에서 주절의 한 동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동사는 종속절의 동사로서, 주절의 “마음을 풀어놓는다”를 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연의 경문은 마음(意)의 건축학이며, “나”라는 궁륭의 건축학이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의 법문에서 “마음”과 “나”가 공명하며 수칠로마가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한 자락 안개와도 같은 마음(心)속 흐릿함(탐진)”에서부터 “환영(대상)을 향해 눈뜸(覺)”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수많은 인연이 연기하여 마음(意)이 탄생하고 있는 순간인 것이며, 동시에 그 모든 인연이 반얀나무 뭉텅이처럼 들러붙어(애집ㆍ오취온) 그로부터 마침내 “나라는 존재들”(有)이 탄생하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라는 존재들”이 마음(意)을 까마귀처럼 풀어놓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그것이 수칠로마라는 존재이다.

그 존재가 이세상에서 어떻게 위상을 확립할 것인가? 존재는 권력의지가 있으므로 “욕락을 향한 집착들”로 화하여 또 다른 “나라는 존재들”을 탄생시키고자 한다. 모든 존재는 기분과 정서와 감정과 욕망과 언어와 생각과 견해와 주장을 먹으며 분신分身, 확장한다. 마치 숲으로 가지가지 뻗어가는 말루와 넝쿨처럼, 존재는 마수魔手이다. 이렇게 하여 존재는 황홀하게 마라의 영토로 들어서나니, 이것이 너로다! 이것이 바로 너 수칠로마, 이것이 바로 너 탐진, 이것이 바로 너 감정, 이것이 바로 너 생각, 이것 바로 너 마음, 이것이 바로 너 질문, 이것이 바로 너 침모針毛로다!

273그것이 어디에서 인연하는가를 온전히 보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떨쳐내는 것이니, 야차여 들으십시오,
그들이이야말로 건너기 어려운 이 폭류를 건넙니다,
그전에는 건너지 못했던 이 폭류를, 다시 존재가 되는 일 없나니.

탐진ㆍ수ㆍ각들이 “마음”이라는 까마귀를 풀어놓는 흐름, 그리고 그 인연들이 한 뭉텅이로 얽힘으로써 나라는 존재들이 탄생하는 흐름, 그리고 또 나라는 존재들과 탐진ㆍ수ㆍ각들이 인연이 되어 다시 “마음”이라는 까마귀를 풀어놓는 흐름——이 모든 거침없는 기세의 급물살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 인연하는가를 온전히 보는 이들, 한 마디로 말해서, “환영의 환영의 환영의 환영의 환영의 … 환영”이라는 우로보로스적 회귀를 온전히 보는 이들, 그들은 “→마음→나→마음→나→마음→나→마음→나→마음→나→ …”의 나선형 소용돌이, 존재의 회오리, 존재의 흐름을 명료하게 보고 안다. 그들은 “마음—나”, 존재 자체가 폭류임을 안다. 존재는 여타의 것들을 휩쓸어가는 거센 소용돌이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까마귀떼처럼 까악까악 비상하는 벗이여, 그대 자신이 소용돌이치는 폭류임을 알지니!

너는 침모針毛, 너는 반얀나무 뭉텅이, 너는 말루와 넝쿨, 너는 까마귀떼, 너는 복수대명사, 너는 영원회귀, 너는 폭류! 심리ㆍ정서ㆍ감정ㆍ생각ㆍ견해의 뭉텅이로서의 네가 어디에서 일어나 어디로 거세게 흐르고 있는가를 온전히 보면, 폭류로서의 너를 건너리니, 다시 존재가 되는 일 없으리라. 네가 전에는 건너본 적 없는, 건너기 어려운 너를 마침내 건널 때, 존재로 되돌아와 심리ㆍ정서ㆍ감정ㆍ욕망ㆍ증오ㆍ언어ㆍ생각ㆍ견해ㆍ주장의 내용물이 되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니, 마침내 네가 너를 건널 때, 더 이상 환영幻影의 물살이 소용돌이치지 않으리니.

그러나 벗이여,

764존재의 탐(有貪)에 빠진 이들, 존재의 흐름에 휩쓸린 이들,
마라의 영토에 들어선 이들, 그들에게 이 법은 깨닫기 어려워라.

— 「숫타니파타」 764

까마귀떼처럼 까악까악 비상하는 마음의 생각들—야차가 던지는 그물의 세계에서”에 대한 1개의 댓글

  • ^^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가뭄의 단비처럼 혼돈과 게으름으로 갈라진 마음을 적셔 아물게 합니다.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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