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 법구경 1~2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께 귀의합니다.

1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오염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그를 뒤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ṃ dukkhamanveti cakkaṃ va vahato padaṃ.

2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명징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열락이 그를 뒤따른다,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sann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ṃ sukhamanveti chāyā va anapāyinī.

* * *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께 귀의합니다”.

불교전통에서는 경전을 열기 전에 붓다와 선각들께 귀의하고 예를 올리는 귀명례를 송한다. “나모 탓사 바가와토 아라하토 삼마삼붓닷사”, 그리고 경전을 연다. 경전이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법을 비장하고 있는 보고, 법장(法藏)이므로, 경전을 열기 전에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을 삼가 입술과 숨결 위에 올린다. 혀와 숨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이 화염의 관문을 지나 경전으로 들어설 때에만 비로소 법장이 열리는 법이다. 후대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을 입에 올리기 전에 먼저 입을 정화하는 진언을 송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이다.

팔리성전협회 판본은 이 귀명례를 생략했지만, 다른 상좌부 전통의 판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의 우리는 아카데미에 익숙하지만, 적어도 경전 앞에서는 아카데미의 습성을 벗어버리고, 입술과 혀와 숨결을 정화하고서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을 삼가 입에 올려 귀의를 표해야 한다. 이보다 수승한 정화는 있을 수 없다.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을 육성으로 바르게 송하고 엎드려 절함으로써 우리는 “눈에 티끌이 적은 자들”이 되며, 그와 동시에 법구경의 깊고깊은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앞서가고. . .”

법구경은 “마음”(mano)이라는 말로 첫 장을 연다. 우리는 법구경의 언어를 해석함에 있어 후대 논서에서 정치하게 규정한 의미로 포착하려는 갈망을 버릴 필요가 있다. 언어라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변하지 않는 고정된 의미를 가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역사적 생물과도 같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며, 동시대에도 발화의 주체에 따라, 경전에 따라, 경문에 따라 의미가 제각각이다.

전통적으로 “citta, mano, viññāṇa”는 각각 “심(心)•의(意)•식(識)”으로 번역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말의 활용상 이 경문에서 “mano”를 “의”나 “뜻”으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우리말 “마음”이라는 말이 세 낱말을 모두 포괄하기도 하거니와 이 경문의 “mano” 역시 다른 낱말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자는 “mano”를 “마음”으로 번역하되 “마음”으로 번역해서는 안되는 맥락에서는 전통역어 “의”나 다른 역어를 쓰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법구경은 평담한 언어로 법을 깊게 설하는 고층(古層)문헌에 속하므로 니까야 경전이나 후대 논서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다른 경전의 활용예와 배대시켜 꼬박꼬박 그에 맞추어 번역할 필요는 없다. 이 경문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여기에서 “mano”는 “citta, mano, viññāṇa”를 포괄하는 의미에 가깝다 할 것이므로 그 번역어로 굳이 “뜻”, “의”를 고집하지 말고 “마음”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경문에서 “마음”을 “식”으로 읽으면, 초기경전의 언어에 익숙한 이들은 훨씬 깊게 읽을 수 있다. 식(마음)은 마치 은신술을 펼치는 술사와도 같다. 은신술사는 보이지 않지만, 모래 위에 찍힌 그의 발자국은 보인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지나가면 주객이 벌어지고 제법, 모든 것, 일체, 세계, 세간이 나타난다.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 세계가 사라진다. 이 경문은 이 세계가 식이 펼치는 환(幻)임을 선언한다.

이는 인류의 정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강의 선언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소화할 수 없는 이들은 그저 모든 일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수준에서 해석한다. 그들은 아직 이 선언을 소화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해석은 그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하고 갈등이 없는 해석, 무난한 해석, 세간적 해석, 소위 가독성이 있는 해석이다. 모든 해석은, 즉 의견, 평, 생각, 취향, 기호, 습관, 언어, 말, 눈빛, 표정, 어조 등등 모든 것은, 해석자의 식이 펼친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다. 그 세계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 무슨 언어든, 그 무슨 의미든, 제아무리 성스러운 언어일지라도 자신의 세계로 남김없이 빨아들여 소화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면 “해석자의 식이 펼친 세계”, 마치 아귀와도 같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폭식의 세계, 즉 자신의 해석체계에 안주하고 있는 범부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가르친다한들 어차피 그들의 먹잇감, 그들의 음식이 되고 말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경전은 아귀의 거대한 아가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설한다. 이것이 경전의 생태학이요 운명이요 위험이다.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오염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그를 뒤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마음이 오염되었다는 것은, 일체, 세계, 모든 것이 마음과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요, 세계를 대상화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면서 대하는 것이요, 좋아함과 싫어함이라는 감정과 생각이 가공할 만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요, 마침내 호/오, 유/무, 시/비, 선/악 등등의 감정•생각이 마음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녹이 슬어 쇠를 갉아먹듯이, 도적이 주인노릇 하듯이, 호오, 유무, 시비, 선악 등등이 갈수록 덩치가 부푸는 아귀가 되어 끝없이 음식을 요구한다. “오염된 마음”에는 이와 같은 깊은 차원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이 “악한 마음”으로 옮겨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선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모두 오염된 마음이므로.

그러나 대부분의 역자들은 범부의 해석체계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기 때문에, “오염된 마음”(mano paduṭṭho) 대신 “나쁜 마음”, “악한 마음”, “악한 생각” 등으로 옮긴다. 결국 독자가 “오염된 마음” 대신 “악한 마음”으로 읽게 되면, 번역자가 폭식한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경전을 읽는 셈이다. 이는 경문이 번역자의 아귀에 잡아먹힌 것이며, 독자의 아귀에 잡아먹힌 것이다. 왜 그럴까? 사전에서는 “paduṭṭha”의 기본 뜻을 “나쁘다, 악하다” 등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그렇게 보아도 경문이 무난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귀는 경전을 집어삼킬 수 있는 위력과 세력과 역사와 학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문은 다시 살아나 “악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그를 뒤따른다”고 설한다. “오염된 마음”으로 읽든 “악한 마음”으로 읽든, 괴로움이 뒤따른다는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괴로움은 너무나 진실되고 너무나 분명하여, 마치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악한 마음과 괴로움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경문이 아귀 앞에서 다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설한다: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명징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열락이 그를 뒤따른다,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경전은 해석의 전장(戰場)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경전은 전쟁의 새 판을 짜면서 다시금 최강의 선포를 한다. 그리고 “명징한 마음”(mano pasanno)을 내놓는다. 사전의 정의상 경문 1의 “paduṭṭha”는 “나쁘다•악하다”나 “망가지다, 오염되다”로 번역될 수 있는 반면, “pasanna”는 “선하다•좋다”의 뜻이 없고 “맑다, 깨끗하다, 가라앉다, 명징하다” 등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서 경문 1에서 “나쁘다”를 역어로 택할 경우, 두 경문이 “쌍”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경문 2에서는 쌍이 아닌 역어를 택하게 된다: “나쁘다/깨끗하다”(일아), “나쁘다/맑고 순수하다”(법정), “삿되다/청정하다”(정태혁), “evil/pure”(Müller, Norman). 경전은 “paduṭṭha”를 “나쁘다”로 읽은 해석자를 강하게 흔들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은 역자들이 다수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학술적으로는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반면에 여기에서 강하게 흔들리면서 오히려 정반대로 경문 2의 역어를 엉뚱하게 대체하는 역자도 등장한다: “나쁘다/선하다”(김서리), “惡/善”(한역법구경). 이것은 오역이다. 이 오역에서는 경전의 깊은 함의가 완전히 패퇴한다. (물론 한역법구경은 그 시대의 “선악”의 의미가 오늘날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는 있다.)

문제는 “명징한 마음”이 출세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경문 1에서는 “오염되다, 망가지다”로 번역하든 “나쁘다, 악하다”로 번역하든 결과적으로는 모두 세간사의 고통을 드러내기 때문에 비교적 손실이 크지 않다. 그러나 경문 2는 온전히 출세간을 드러내고자 하므로, “pasanna”의 역어는 그 의도에 십분 부응해야 한다. “impure/pure”(Buddharakkhita, Narada), “corrupted/peaceful”(Fronsdal), “polluted/pure”(Wallis)의 번역이 좋지 않은 이유이다. 출세간의 언어는 사고의 언어가 아니라 관찰의 언어다. 몸으로 본 언어, 체득한 언어다. 이 지점에서 수행자/학자, 성인/범부가 갈라진다. 경전은 이와 같은 출세간의 언어 하나로 해석자의 수준을 탈탈 털어버린다. 어떤 해석이 경전 편에 가까우며, 어떤 해석이 아귀 편에 가까운 것일까? 이 물음에는 각자 스스로 답해야 한다. “더럽다/깨끗하다”(이원섭), “오염되다/깨끗하다”(전재성), “corrupted/calm, bright”(Thanissaro), “corrupt/serene”(Maitreya), “tainted/purified”(Varado) 등의 역어 중에서 무엇이 자신이 관찰한 바에 맞는가를 분명하게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

경전은 경문 2에서 일차로 “pasanna”로 해석자를 강하게 흔든 뒤, 다시 한 번 출세간의 언어, “sukham”을 제시한다. 역자들은 “복락”, “안락”, “즐거움”, “기쁨”, “행복”, “happiness” 등으로 옮긴다. “고통”과 “괴로움”의 반댓말을 택하면 되겠지만, 사실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언어들은 출세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행복”이라는 역어는 세간적 해석이 아주 농밀하게 침윤된 언어여서 출세간을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이 시대는 “행복”이라는 낱말을 선호한다. 그만큼 오염되어 있다는 얘기이며, 그만큼 아귀 진영의 깃발이 높이 펄럭인다는 얘기이다. 어찌하든 출세간의 기쁨은 시대마다 그 역어를 달리 선택할 테지만, 경전은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라는 비유를 남김으로써 언어의 농밀성과 오염을 쓸어버린다.

경문 1에서는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라는 구상적인 비유로써 세간의 괴로움을 묘파한다. 그러나 경문 2에서는 출세간적 기쁨을 “그림자”로 비유한다. 왜 그랬을까? 단지 비유를 풍부하게 곁들여 경문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전혀 아니다.

고통은 눈앞에 구체적인 물상을 띠고서 마음에 굵은 바퀴자국을 남긴다. 세간적 행복도 고통과 다를 바 없이 마음에 구체적인 물상을 남긴다. 그러나 “그림자” 비유는 출세간의 기쁨과 즐거움이, 마치 물에 비친 영상처럼, 거울에 비친 상처럼, 허공에 그려진 자취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음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경전은 경문 2의 “그림자” 비유에 이르기 전까지 수많은 해석자들이 가한 세간적 해석의 공세에 대단히 심각한 상처를 입고 패퇴하기도 했지만, 이 비유 하나를 남김으로써 결정적인 반격을 한다. 세간적 해석은 이 비유를 그저 멋드러진 치레쯤으로 취급하고 건드리지 않는다. 이 비유는 막강한 세간적 해석의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수많은 세월을 걸쳐 살아남아, 어느 날 눈밝은 검객을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물에 비친 영상과도 같다면, 뜰을 쓰는 그림자와도 같다면, 그것이 기쁨이든 즐거움이든 행복이든, 심지어는 그것이 고통이든 괴로움이든 슬픔이든, 열락이다. 출세간의 비유는 세간의 모든 언어를 명징하게 비추어내어 승화시킨다. 그림자가 모든 것을 정화한다.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오염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그를 뒤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명징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하면
그로 인해 열락이 그를 뒤따른다,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출세간의 그림자가 승리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우선하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경문의 개선(凱旋)을 마침내 마주하게 된다.

이 마음, 이 식에 대한 가장 섬세한 해석은 구마라집의 필치로 소개된 나가르주나의 출가인연이다. 나가르주나는 젊은 시절 세 친구와 함께 은신술을 익혀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인들을 모두 범했다. 그러다가 어느 후궁이 임신하자 그녀는 이를 두려워하여 왕에게 알렸다. 지혜로운 신하들은 이것이 귀신의 짓이든가 아니면 은신술을 익힌 자의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궁중에 모래를 뿌릴 것을 조언한다. 은신술사의 소행이라면 모래 위에 그 발자국이 남을 것이므로.

그래서 문을 지키는 자에게 명령해서 면밀한 방법으로 시험해 보았는데, 네 사람의 발자국이 발견되어 급히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은 역사(力士) 수백 명을 데리고 궁정으로 들어와서, 모든 문을 닫아 수상한 자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모든 역사에게 칼을 휘둘러 허공을 베도록 했다. 그 결과, 선술을 사용한 자들 중 세 사람은 곧 죽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만은 몸을 움츠리고 숨죽여 왕의 머리 쪽에 있었다. 왕의 머리 쪽 칠척(七尺) 안에는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되었으므로, 칼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욕망은 괴로움의 근본이며, 모든 재앙의 뿌리이다. 덕이 상처입고 몸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맹세했다. ‘만일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사문에게 가서 출가의 법을 받겠다.’

— 나카무라 하지메, 이재호 옮김, 「용수의 삶과 사상」(불교시대사 1993) 15면에서

나가르주나는, 마음이 앞서가며 이 세계가 세워지는 찰나를 보았다. 이 세계는 마음의 흔적임을 보는 순간, 이 몸이 나라는 집착이 떨어져 나간다. 동시에 괴로움의 근본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본다. 이렇게 그는 출세간의 그림자와도 같은 기쁨을 맛보고 출가의 법을 받은 것이다. 모든 위대한 선각들의 신화는 이와 같은 출세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아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화로 은폐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후학들의 안목을 기다리며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을 은신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불교경전의 세계이다. 불교경전은 아귀와 대적할 수 있는 강한 전사를 원한다. 할!

“그림자가 떠나지 않듯이” — 법구경 1~2”에 대한 2개의 댓글

  • 오랜만에 들렸습니다. 관찰에 이름이 없이 머리로 읽고 있으니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세간을 정신 없이 떠돌던 마음이 잠시나마 가라앉는 듯합니다.

    박찬식
  • 다른 글보다도 이 글이 제가 잘 못 써서 그다지 잘 읽히지 않는 것같아요^^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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