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천인의 질문 — 폭류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거하셨다. 그때 밤이 깊어지자 한 아름다운 자태의 천인이 숲 전체를 환히 비추면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세존께 예를 올리고 한쪽에 섰다. 천인은 한쪽에 서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존사(尊師)시여, 당신께서는 어떻게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나는 가만히 있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습니다.”
“존사시여, 당신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가만히 있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았으며 애쓰면 떠내려갔습니다. 이와 같이, 벗이여, 가만히 있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도다,
온전한 열반의 바라문을,
가만히 있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세계를 향한 집착을 건너신 분을.”

천인은 이와 같이 말했다. 큰스승께서 인가하셨다. 그때 천인은 “큰스승께서 나를 인가하셨다”고 알고, 세존께 예를 올리고, 오른돌이를 하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 「상윳타니카야」, “폭류경” 전문

* * *

초기불경에 나오는 여러 천(天)이 선정의 차제를 비유하듯이, 천인(天人)은 성스러운 흐름에는 들었으나 온전한 열반에 이르지 못한 공부인들을 비유한다. 그러므로 천인이 던지는 질문은 수행 중에 체득한 바가 있으나 아직 그 끝에 이르지 못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질문은 범부가 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며, 그에 대한 세존의 답 역시 범부가 소화할 수 없는 답이다.

어느 한 천인이 밤이 깊어지자 세존께서 계시는 숲을 환히 비추며 나타난다. 합리적 인식세계에서는 이 이야기는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되지만, 공부인의 관점에서는 공부여정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이다. 범부로서 가지고 있던 강고한 인식체계가 허물어지면, 마침내 분별의식이라는 대낮의 세계가 파괴된다. 그 파괴의 여정에는 탐진치의 염리, 유신견의 소멸, 거룩한 길에 대한 믿음이 함께한다. 천인은 바로 그 거룩한 길을 걷는 공부인, 어두운 밤을 지나는 공부인이다.

낮의 인식을 거둬낸 여정에서 드러나는 세계는, 이전의 세계가 아니다. 천인의 자태가 아름답다는 것은 천인에게 보이는 세계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천(天)을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이 나뉘어진 시절, 그의 밤의 여정은 얼마나 길게 이어질 것인가? 그것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어두움일까?

경에서는 천인이 등장하는 때를 “밤이 깊어지자”로 표현하고 있거니와, 거룩한 제자, 아직 배울 것이 남은 유학(有學)은 공부여정에서 인식의 밤이 점점 더 깊어져간다. 밤이 깊어질수록 심중에 품은 의문덩어리가 커지며, 마침내 커다란 의문에 이끌리고 휩쓸려 더 높은 가르침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된다. 마치 살타파륜 보살이 담무갈 보살을 향하듯이, 정등각자 부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깊은 밤에 천인이 세존께서 계신 숲을 환히 비추며 등장하였으니 바야흐로 무상정등각의 법문을 향한 대발심과 함께 미세하게 잔존한 인식체계가 허물어질 기연을 맞이한 것이다. 천인의 가슴은 환히 빛난다. 무르익은 의문을 던질 순간, 질적 전환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존사시여, 당신께서는 어떻게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세계를 향한 집착(loke visattikā)을 두고 거센 물결, 폭류라고 보는 것 자체가 범부로서는 불가능하다.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 세계이며 일체이니, 세계를 향한 집착을 건넜다는 것은 곧 생각과 감각과 감정과 기억이 세운 세계에 더 이상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룩한 길에 들어선 공부인은 세계 자체가 실은 집착임을 안다. 세계는 집착으로 인하여 세워지며, 세계의 운동은 집착을 에너지로 삼는다. 세계도 폭류이며 집착도 폭류이다. 이 앎 자체가 거룩한 혁명이다. 거룩한 제자는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추구한 모든 것이 사실은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집착이었음을 알고 보았으되, 그런데도 여전히 집착이 되살아와 자신의 존재를 휩쓸어감을 겪어 알고 있다. 무섭게 범람하는 우기의 항하처럼, 세계도 집착도 폭류가 되어 건널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 폭류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건너려고 애쓰자니 물결이 너무 거세 휩쓸려갈 뿐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물결 속으로 그대로 빠져버리고 만다. 건너려고 애쓰자니 애쓰려는 집착에 빠질 뿐이요, 가만히 있자니 가만히 있으려는 집착에 빠질 뿐이다. 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아름다운 천인이 숲 전체를 비추며 세존께 다가왔던 것이다: “존사시여, 당신께서는 어떻게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세존께서는 “나는 가만히 있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다”고 답하신다. 우리의 인식체계에서는 “가만히 있다”와 “애쓰다” 사이에 중간은 없다. 모든 사고와 모든 행동은 이 두 가지 정의에 포함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가만히 있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어떻게 폭류를 건널 수 있단 말인가? 이 의문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가만히 있으면 물속에 빠져버리고 애쓰면 물결에 휩쓸린다는 경험칙을 보여줌으로써, “가만히 있다”와 “애쓰다”라는 양 극단을 쳐버린다. “가만히 있다”라는 상과 함께 폭류처럼 펼쳐지는 세계와, “애쓰다”라는 상과 함께 폭류처럼 펼쳐지는 세계, 즉 인식과 감각 체계가 찰나찰나 그려내는 환(幻)의 세계를 모두 쳐버린다. 이것은 선객의 풍모다. 이것이 중도다. 기실 중도라는 것은 현악기의 줄을 적절하게 조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팽팽함도 버리고 느슨함도 버림으로써 적절함도 버리는 것이다. 팽팽함도 폭류이며 느슨함도 폭류이며 적절함도 폭류이므로.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언제나 극단의 삶, 폭류의 삶, 중도가 아닌 삶이다. 언제나 선과 악, 시와 비, 유와 무, 번뇌와 보리, 집착과 열반 등등 양 극단의 언어들이 치열하게 그려내는 풍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천인은 이와 같은 양 극단의 언어들이 가상적임을 체득했지만, 여전히 그 가상적 힘에 지배를 받고 있다. 경에서는 그 지배력, 그 휩쓸어버리는 힘을 “폭류”로 비유한 것이다. 이 폭류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폭류에 폭류를 더하는 인간사의 방식을 정확히 간파하고, 질문자가 폭류의 정체를 스스로 체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체득하고 보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실은 폭류이다. 의문 자체가 사실은 폭류이다. 그러나 이 안내에 대하여 생각으로 정리하거나 느낌으로 감잡거나 하면 또다른 폭류를 더할 뿐이다. 인식의 밤이 깊어지고 깊어져 일대사 승부를 벌이듯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리고 그 질문이 정등각자의 금구성언에 의해 단칼에 베임으로써, 그리하여 그 질문에 온통 실린 천인의 존재가 산산히 흩어짐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천인은 세존의 답을 받고는 온전한 열반, “반열반”에 이른 바라문을 친견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가만히 있다”와 “애쓰다”라는 양 극단의 세계가 지멸함을 체득한 자의 고백이며, 이 고백, 이 앎과 함께, 천인의 존재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천인의 존재 자체가 사실은 가상에 휩싸여 드러나는 환이요 이슬이요 꿈에 불과하므로, 열반에 이름과 동시에 의문이 사라지며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자신이 세운 세계, 자신의 존재 자체가 폭류임을 안 것이다. 이로써 아름다운 빛과 어둠과 의문과 천인이 단 한 방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의문이 올라올 것이며, 다시 천인의 존재로 나타날 것이며, 다시 빛나는 가상에 휩싸인 채 다시 정등각자를 향하게 될 것이다. 또다른 밤의 여정, 즉 천(天)의 상승, 비천(飛天)이 시작될 것이다.

마치 왕성한 불이 꺼졌을 때 비록 작으나마 열이 남아 있듯이
고요하면서도 미세한 나, 큰 괴로움의 바탕이 아직 남아 있나니.

— 「불소행찬」 권15에서

우리의 공부여정 또한 이와 같아서 끝없는 향상일로, 끝없는 비상, 끝없는 비천만이 있을 뿐이다. 비천은 다름아닌 가상적 힘, 미세한 나가 되살아오는 여정이며, 이 여정이 이어지는 한 비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마명보살의 안목을 빌어 표현하자면, “고요하면서도 미세한 나”, 즉 “큰 괴로움의 바탕”이 마침내 지멸할 때 반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집착에서 열반으로 비상하는 아름다운 수행자, 한 아름다운 비천상이 그렇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여 존재의 비상과 지멸을 그리며 다시 한 번 경을 독송해 본다: “그때 밤이 깊어지자 한 아름다운 자태의 천인이 숲 전체를 환히 비추면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다가왔다. […] 그리고 사라졌다.”

빛나는 천인의 질문 — 폭류경”에 대한 5개의 댓글

  • 오랜만에 들립니다. 위 내용을 읽고나서 오늘은 이 글만 담고 갑니다. 나름 비유와 추상적인 글귀로 극단적인 몸서리를 치고있지만 그 또한 똑같은 내 모습이 비추어지는 앎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길 영희
  • 여전히 폭류속에서 헤어날 방법을 알지못해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조금은 전보다
    물결이 덜 거칠고 조금은 전보다 덜 무섭다는 것을 느낍니다. 가만있거나 애를 쓰기를 번갈아 반복하면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폭류경은 정말 아름다운 환영이며 오랫만에 듣는 한줄기 시원한 죽비소리입니다.
    오랫만에 찾아뵈었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언제나 피곤할때 들어와 게으르고 오염된 거울을 씼을 수 있는 곳,
    어느만큼 키가 컸는지 가늠해 볼수 있는 곳,
    고싱가의 숲이 있어 감사합니다.
    자등루

    자등루
  • 경을 결집하셨던 대아라한들께서 폭류경을 상응부 첫 경으로 합송하신 이유가 아마도 자등루님과 같은 분을을 위해서겠지요.

    2,500년 전의 선각들과 경을 통해 그 숨결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기쁩니다.

    고싱가
  • 우리의 공부여정 또한 이와 같아서 끝없는 향상일로, 끝없는 비상, 끝없는 비천만이 있을 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갑자기 돈황의 벽화속에 수도 없이, 끝도 없이, 빈 공간 가득히 그려넣어져 있던 비천상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중에는 새는 물론, 소 나 말, 돼지, 개와 고양이 까지 모두 그려져 있었는데 그때는 동물들의 비천상을 보며 참 재미있다 생각했지만 왜 동물들의 비천상이 그려졌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고싱가님의 비천에 대한 구절을 읽으며 확연히 이해가 됩니다. 천인들만 비천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비천상이군요. 또 한번 이분법에서 깨어납니다. 감사합니다.

    자등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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