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고독과 고요 속에 홀로 두셨으니 — 영화 «위대한 침묵»를 보고

필립 그뢰닝(Philip Gröning)의 <위대한 침묵>은 해발 1300미터의 알프스 산악지대에 위치한 엄률관상수도회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e Chartreuse) 수도원의 일상을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침묵 수도회인 만큼 수도원 내외부에서는 자연의 소리, 성가, 전례, 노동의 소리 등이 들릴 뿐, 인간적 대화는 일요일 산책 같은 한정된 시간으로 제한된다. 영화적 기법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으나, 내 경험으로는 이 영화처럼 정지된 영상을 길게 가져가는 영화를 본 적이 없으며, 대화 역시 무성 영화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언어가 없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수사들이 어둠 속에서 직접 부르는 샤르트뢰즈 수도회의 전래 성가 외에는 음악도 일체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침묵”과 “관상”과 “일상”, 즉 샤르트뢰즈 수도원 수사들의 엄격한 은수생활과 눈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자연의 흐름이다.

수사들마다 각자의 은수처를 갖고 성 베네딕토의 엄격한 규칙을 현재까지도 고수하고 있는 수도회인 만큼, 관람객들은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엄률수도회의 은수생활을 이 영화를 통하여 들여다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일년에 영화관에서 영화 한두 편도 채 보지 않는 내가 굳이 발품을 팔아서 이 영화를 본 것도 바로 그 은수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립 그뢰닝의 영화 <위대한 침묵>은 엄률관상수도회의 일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국내 배급사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서 일부 구절을 인용하여 이 영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막스 피카르트의 글은 머리를 쥐어짜 만든 잡문에 불과하며 수도원 전통 내지 신비주의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감독 필립 그뢰닝은 은수처의 침묵기도 장면과 함께 성서에서 흔치 않은 부류의 아름다운 구절을 독일어 자막으로 소개하며 영화를 시작한다: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열왕기상 19,11-12 (카톨릭 번역)

그리고 느리게 하염없이 눈발이 흩날리고 수도원의 종소리가 들린다. 뎅 뎅 뎅, 수도원의 고요를 조용히 깨트리는 작은종 소리. 이어 미사를 알리는 큰종 소리가 미로와도 같은 각 은수처들의 낭하를 타고 울려퍼진다. 은수처와 기도처를 오가는 수사들의 움직임이 이렇게 소개되고, 다시 은수처와 작업실의 일상이 소개된다. 독경, 옷 만들기, 식사, 설겆이, 삭발, 장작패기, 신발수리, 채소 가꾸기 등의 일상. 그리고 어둠 속의 성가, 신입수사의 입회, 독방 입실, 공동식사, 산책 등등 공동체 생활의 주요 일과도 소개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과를 품고 있는 알프스 산악지대의 자연 풍경과 간간이 삽입되는 “너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와 같은 불어·독일어 자막, 수사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찍은 컷, 마지막으로 장님 수사의 소박한 발언, 이것이 160분 동안 지속되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엄률관상수도회라고 하여 예상을 벗어나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수도원 생활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수행방법은 아마도 은수처의 관상기도가 중심인 듯했다. 수도회의 추가규칙을 엄수해야 하고 공동체 생활의 일과를 면제받는 듯한 독방 입실자의 은수생활은 영상에 담지 못한 듯하지만, 독방 입실자 역시 관상기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성싶다. 독방 입실자에게 온 우편물은 반입되지 않고 끈으로 묶인 채 개봉되지 않는다. 외부와의 소통이 최소화되고 고독과 고요와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고독과 고요 속에 홀로 두셨으니” — 수도회의 대표수사는 독방 입실자에게 기도와 인내를 요구하며 이렇게 규칙서를 낭송한다. 이어서 “오 주님, 당신께서 저를 유혹하셨나이다. 그리고 저는 유혹을 당하고 말았나이다”라는 자막이 삽입된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 20장 7절 일부를 인용한 것으로 “유혹”이라는 성적인 연상의 낱말을 쓰고 있다. 이는 “고독과 고요 속의 삶”, 구도자의 삶이 성적인 유혹을 넘어서는 설레임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하다는 명료한 인식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국내 배급사는 “주님께서 저를 이끄셨으니 제가 여기에 있나이다”로 밋밋하게 옮겨 이러한 호소력을 지우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삽입 구절에서 감독의 정신적 역량을 엿볼 수 있음은 당연하다. “보라 나는 사람이 되었으니, 너희가 나와 함께 하느님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나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나 “주님께서 그 스스로이신 말씀을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놔두는 것, 바로 이것이 침묵이니”와 같은 구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절은 성서와 같은 온건하고 대중적인 수준의 텍스트에서는 발견되기 힘들며, 오직 수도원 전통의 문헌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텍스트이다. (물론 국내 번역은 이상하게 번역하여 이런 높은 수준, 그네들 기준으로는 ‘위험하고 과격한’ 수준을 제거했다.)
 

<위대한 침묵>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불교의 수행 전통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원 건물의 은수처 공간이 답답하다는 느낌, 우리나라 산사 같으면 방문만 열면 바로 앞산이 장쾌하게 펼쳐지는 자유로움이 있는데, 뭔가 밀폐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은수처에서 침묵기도를 하는 자세, 무릎을 꿇고 탁자에 두 팔을 괴고 두 손을 모으거나 엎드리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자세가 매우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일과 중에 낭송된 삼위일체론이나 마지막 장면의 죽음에 대한 생각 등에 비춰볼 때 카톨릭 전통의 수행 전통이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조심스런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간간이 낭송된 규칙서가 수행자의 생활을 적절하게 조율하는 것같아 흥미로웠다. 좀더 심원한 세계를 보여주었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감독 역량의 한계 탓인지 아니면 카톨릭 수도원 전통의 한계 때문인지 모르겠다.

영상은 근접촬영과 화면을 유화처럼 뿌옇게 처리한 기법이 돋보였다. 그리고 눈이 나풀나풀 흩날리는 장면과 비가 내리는 장면은 아름다웠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그런 장면이 많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적어 아쉬웠다. 그리고 수사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찍은 컷이 여럿 있는데, 얼굴이 생각보다 맑고 활달하지는 않았다. 젊은 수사들의 얼굴이 오히려 맑은 느낌이 들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맑고 담박한 기운이 덜한 느낌이어서 의외였다. 그래도 일반인들의 얼굴보다 맑은 것은 당연하다. 수행자는 얼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도 자막으로 인용한 구절처럼,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므로, 수행자의 얼굴은 모름지기 부드럽고 맑아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

— 에제키엘 36,26

그대를 고독과 고요 속에 홀로 두셨으니 — 영화 «위대한 침묵»를 보고”에 대한 5개의 댓글

  • 저도 눈여겨본 작품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온종일, 일년 내내 타인을 위해서만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나를 잊을 때 맑은 얼굴이 드러나겠지요….

    강물
  •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내면 카톨릭적 얼굴이 드러나고,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조차 (오염된 마음으로 보고) 지우면 불교적 얼굴이 드러나는가 봅니다.

    이 영화는 저한테는 하나의 일상처럼 특별할 것 없는 영화였는데, 다른 관람객들에게는 무척 생소하고 충격적인 영화인가 봅니다.

    고싱가
  • “마음을 두고 흔적이 없다”는 말과 “머물지 않으면(고착-집착-想)이미 완벽하다”말이 같은 뜻을 표현한 다른 말이라고 보아도 좋을까요.
    “의문이 풀려도 답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어서 입니다.

    고견을 청 합니다. ()()()

    이덕호
  • 인용하신 표현들이 어리숙한 데가 많아서 묻고 답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공부는 남의 뜻을 묻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고싱가
  • 살면서 두려운게 착각이고 착각인 줄 모르고 지금 여전히 산다면 읽고 느끼고 말했던게 다 아이들하루와 다를바 없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메조지면 더욱 바쁘니까요.
    어차피 불경도 남의 뜻… 궁금한게 하나라도 끝까지 이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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