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하는 풍경 — 샤트야지트 라이의 «아푸 삼부작»을 보고

캘커타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 벵골 지방은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이 가장 일찍 침투한 곳이다. 그 지역에서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타고르가 나온 것도 그러한 역사와 무관치 않다. 샤트야지트 라이(Satyajit Ray, 1921-1992) 역시 캘커타라는 대도시에서 나고 자랐으며, 일찍이 서구식 교육을 받아 서구식으로 성장한 인도인이다. “우리는 서구식 교육을 흡수했다. 서구 음악, 서구 예술, 서구 문학이 인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샤트야지트 라이) 그런 그가 벵골 지방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 <길의 노래>를 데뷔작으로 찍은 것은, 비부티부산의 동명 원작소설이 그린 시골마을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샤트야지트 라이의 영화 <길의 노래>는 대도시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란 교양인이 자신의 뿌리, 자신의 원형을 발견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 나는 길의 노래를 찍는 동안 시골 생활을 발견했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외부인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시골의 삶, 시골의 풍경 속으로 스며들어간 셈이다.

샤트야지트 라이의 아푸 삼부작(Apu Trilogy)은 <길의 노래>(1955), <불굴의 인간>(1956), <아푸의 세계>(1959)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적으로는, 아푸라는 인물이 어린아이 시절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과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제작자가 인도의 풍경, 인도인의 삶을 재발견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에게 인도의 풍경, 평범한 인도인의 삶은 그의 뿌리, 인도인의 뿌리,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푸 삼부작의 배경들은 남루하고 가난하지만, 풍경들은 관조적이며 느리고 아름답다.


<길의 노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을 수 있는 몬순이 내리는 장면(화면을 누르면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가난의 낭만화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의 재발견, 서구식 교양에 의해 망각되었던 원형의 재발견이다. 재발견한 모든 것은 시적이며 움직임이 느리며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재발견의 궁극에는 죽음이 있다.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과 영화를 모두 꺾어버리는 죽음은,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재평가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평등하다. 허울좋았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진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한 인간이 삶을 바라보는 가장 정직한 관점이 된다. 샤트야지트 라이가 묘사하는 죽음은 마치 자연의 생성소멸과도 같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죽음을 두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택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을 택했다. 죽음은 구체적인 원인이 없이 완성되고, 죽음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인간”은 죽음과 (혹은 죽음의 환경과) 투쟁함으로써 불굴의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연의 흐름으로 수용함으로써 불굴의 인간이 된다.

매우 박한 대접을 받으며 사촌 집에 기거했던 할머니(정확히는, 아버지의 연로한 사촌)의 죽음은 숲속에서 자연의 흐름처럼 완성되며, 누나의 죽음은 인도 전역에 소생과 환희를 몰고오는 몬순의 강우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리고 <불굴의 인간>에서 이어지는 아버지의 죽음, 한 그루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죽음. 가장 가까운 인물들의 죽음이 지속적으로 등장함으로써 가장 커다란 비극과 슬픔이 영화의 소재와 서사가 되지만, 비극과 슬픔을 극적이고 파괴적으로 다루지는 않으며 최대한 관조적으로 침묵의 영상으로 다룬다. 그래서 죽음을 둘러싼 침묵을 바라볼 때의 아픔은,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의 한없는 고요함으로 다가온다.

혹시 진정한 슬픔과 진정한 기쁨은 동일한 리듬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슬픔도 벅차고 기쁨도 벅차고 풍경은 고요하고 아름답게 흐른다. 그리고 삶은 신산하고 문득 사람은 자연처럼 아름답다.


<아푸의 세계>의 가난한 신혼생활 장면. 아푸의 일생에서 눈물겹도록 환히 빛나는 순간들이다.

신산한 삶 속에서도 눈물겹도록 환히 빛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순간들만 지속되기에는 생이 너무 길고,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삶은 물결처럼 변화한다. 그 모든 변화의 시작과 끝은 삶과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을 다루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시간 관념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 관념은 근대물리학의 절대시간 개념에 의해 정의된 것이다. 그래서 영화제작자는 필연적으로 시간을 재정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영화론에서 시적 시간 개념을 내세운 것도 다름아닌 물리적 시간 개념에 대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절대시간 개념을 서구식 시간 개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이에 가장 반대되는 것은 아마도 인도의 시간 개념일 것이다. 끝없는 순환만이 존재하는 시간 개념.

서구의 대표적인 예술가적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잉마르 베르히만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늘 투쟁하는 예술가의 정신을 보았다. 기독교 정신에 대항하거나 그 정신을 재해석하려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예술가. 그래서 그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뭔가 억압적인 느낌(억압을 벗어나려는 의지 자체가 억압적이다)을 받는다. 마치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 다가오는 느낌, 그러니까, 얼핏 천상의 소리인 듯하지만 뭔가에 억눌려 있는 느낌, 억눌려 있는 상태에서 최대한 천상의 소리처럼 비상하려는 의지 같은 게 느껴진다. 그래서 감정을 꾹꾹 참고 있다가 끝내 감정을 찔끔찔끔 배설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보편적인 설득력이 없겠으나, 엄밀히 말해서, 보편적인 설득력이 있는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샤트야지트 라이의 영화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절대시간 개념에 지배되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에 대항하여 싸울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기독교 정신에 지배되지 않은 사람은 기독교 정신과 대항하여 싸울 필요가 없다. 다만 그는 스스로가 뒤늦게 발견한 인도인의 삶, 즉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다반사로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가난한 인도인의 삶을 인도의 풍경과 함께 기록한 것일 뿐, 서구적 정신에 대항한 흔적이 없다.

죽음도 결국 순환의 일부이며, 삶도 결국 순환의 일부이다. 때로는 순환의 어느 한 시점이 극도의 비극으로 점철되기도 하지만, 그 비극의 시점은 거대한 침묵과 관조적인 풍경으로 둘러싸인다. 느린 어둠, 느린 슬픔, 느린 방황이 모두 작은 방, 조용한 집, 맑은 마을, 커다란 나무들의 숲, 강과 산과 평원에서 고요하게 완성된다. 아픔과 슬픔은 덩어리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엷은 꽃잎이 활짝 피어나듯 아픔과 슬픔은 톡 피어나 아스라이 퍼진다.

아푸 삼부작은 팽팽한 정신적 긴장을 부여하는 서구적 예술영화가 아니라, 거대한 순환의 풍경을 찍은 동양의 영화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조차도 그 순환하는 풍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커다란 비극을 소재로 다룬 그의 영화가 격렬하고 쓰라린 아픔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아픔, 소리없는 눈물이 되어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작가적 시선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비난이나 반대 역시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기 자신에게 맞는 옷이 있다. 모든 관점은 곧 자신의 생존투쟁의 결과물이며, 자기방어의 본능이 내놓은 소산이다. 결국 모든 관점은 자기 삶과 자기 본능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 샤트야지트 라이의 생에 존경의 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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