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에 집 한 간을 맡겨두고 — 북한산 자락에서

지난 연말 국문학을 하시는 선생님 내외분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송순의 시조 한 수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이 시조가 참으로 좋고 좋다는 말씀과 함께.

十年을 經營하야 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淸風 한 간 맛져두고
江山은 드릴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이 시조를 경탄하셨던 그 선생님께서는 어디에 방점을 두셨는지 모르겠으나, 이 시조가 입에서 흘러나오자마자 내 마음은 “십년을 경영하야 . . .”에 딱 멈추었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스무 살 이후 맞이할 수 있는 십년 단위의 세월은 불과 너댓 번에 불과하다. 그만큼 십년은 큰 것이고, 그만큼 십년 동안 경영한 일도 큰 것이다. 그런데 그 십년 동안 경영한 것, 그 십년 동안 내내 마음속에 품고 실천해 나간 것, 그 성과물이 고작 초려삼간이란다.

송순은 마흔 한 살에 ‘초려삼간’ 면앙정을 지어냈다. 그러므로 그는 삽십대 초반부터 고향 담양에 초려삼간을 짓고 달과 청풍과 강산을 벗삼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삽십대 시절 한갓진 꿈으로만 남아 있었고, 마침내 마음속에 품은 지 십년 만에야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초려삼간은 ‘고작’ 초려삼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십년 동안 마음을 다스려 지어낸 탁 트인 공간인 것이다.

“나 한 간 달 한 간에 淸風 한 간” 맡겨두는 일은, 십년을 다스려 시원하게 트인 마음, 시원하게 트인 집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마음이 트였으니 어찌 그와 달리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여 면앙정을 마음속에 품고 지낸 송순의 삽십대는, 다름아닌 초려삼간을 지어낼 수 있었던 십년이요, 마침내 산과 시내를 두루 벗하고, 마침내 달과 바람을 집안에 들일 수 있었던 십년이다. 결과적으로 초려삼간으로 인하여 그 십년은 빛나게 된다.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송순의 십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닌 듯하다. 도시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경영해도 초려삼간을 지어내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이런 현대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한갓된 경영만 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숲을 보고 싶었다. 바람이 불고 큰 나무들이 흔들리는 땅을 보고 싶었다. 저 멀리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은 여간해선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띄엄띄엄 비쩍 말라 서 있고 바람길은 막혀 있고 숲은 깊지 않다. 영원한 흔들림, 전체적인 변화를 관조하기 힘든 도심에서 나는 불쾌했다. 이 불쾌감은 아마도 삼십대부터 시작되었던가 보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무들 곁으로, 숲 가까이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고, 나는 또 나대로 자연 앞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삭막한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한 시절을 마감해야 하는 나이. 연초부터 유난히 깊은 숲이 보고 싶었다. 뭔가 근원적인 것을 놓치고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 자괴감 탓인지 아니면 게으름 탓인지, 아마 둘 다 때문이겠지만, 나는 점점 창조력을 잃어가기만 했다. 숲으로 구름처럼 잦아드는 것,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서 숨을 쉬는 것,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것, 나무들 아래로 빗줄기처럼 떨어지는 것,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 만물의 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 이러한 움직임들과 느낌들이 좋고 또 그리워 몇달 전 아내에게 숲이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푸념 아닌 푸념이었으나, 아내는 이를 선뜻 받아들여 이사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기 처녀총각 시절부터 계산하여 십오년 가량 살아왔던 정든 동네를 훌쩍 떠나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를 했다. 매정한 나와는 달리 평소에 정 떼기를 힘겨워하는 아내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정릉의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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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북한산 자락의 정릉마을. 도심을 벗어나면 이런 풍경을 선물로 얻을 수도 있다.

이사하는 날 비가 쏟아졌다. 다음 날, 또 그 다음날, 짐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장마철보다 더한 비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내가 삼십대 시절에 보지 못한 광경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듯, 바람이 몰아치고 비가 내리쳤다. 비오는 날의 풍경이 이런 것이었던가? 어찌 이제까지 이런 풍경을 놓치고 살아왔던가? 그러나 이제, 창밖으로 장관이 펼쳐진다. 높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함성을 지르며 숲으로 폭우가 쏟아진다. 그리고 화살보다 빠르게 하늘을 나는 구름들, 바람이 분다. 폭풍은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가장 빠르게 달린다. 폭풍이 숲을 뒤흔든다. 산자락을 후비는 바람과 숲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나는 똑똑히 본다. 숲을 흔들던 폭풍이 빗방울을 뿌리며 어느새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그리하여 ‘초려삼간’ 중 한 간을 저 폭풍에 아니 맡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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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에 흔들리는 숲. 저 폭풍에 집 한 간을 맡겨두련다.

폭풍처럼, “강풍처럼, 우리는 저들 위에서 살아가겠노라, 독수리들의 이웃으로, 눈[雪]의 이웃으로, 태양의 이웃으로.”(니체) 차라투스트라의 문장들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기 위한 징검다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생략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략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빠르게 날아간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모든 것은 너무 느리다. 그는 말한다: “나는 너의 마차를 타노라, 폭풍이여! 그리고 너마저도 나의 악의로 더 채질하겠노라.” 많은 작가들에게 폭풍은 격정이나 거센 열망의 비유이겠으나, 차라투스트라에게 폭풍은 제 자신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절친한 사물일 것이다.

폭풍이 소소한 사물들에 걸려 지체되는 법이 없듯,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잡된 감정과 사고에 구애되지 않는다. 예술가의 감각과 감정도 잡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언어도 잡된 것에 불과하다. 학자나 성직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술가, 시인, 학자, 성직자의 감각과 감정과 가르침에 집착하거나 말려들지 않는다. 그것들은 고차원의 허위일 뿐이다. 폭풍같은 존재는 허위 위에서 살아가며, 독수리, 눈, 태양과 이웃할 뿐이다. 독수리의 고공비행, 설빙의 차가움, 태양의 뜨거움은 모두 동급의 높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잡된 감정, 인간 의식의 허위 위에서 살아간다. 설빙의 차가움에는 감정, 격정 같은 후덥지근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태양의 뜨거움에는 감정, 격정 같은 미지근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의식이 만들어낸 감정이나 격정은 후덥지근하거나 미지근한 것들로 어중간한 차원에 속한다. 독수리는 그런 온갖 어중간한 것들을 쓸고 그들 위에서 고공비행한다. “진실로, 모든 저지대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한 바탕 강풍”(니체)이요 폭풍이다.
 

폭풍에 집 한 간을 맡겨두니, 제일 먼저 차라투스트라가 들어온 셈이다. 먹구름이 북한산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으니, 한 번 본다.
 

폭풍에 집 한 간을 맡겨두고 — 북한산 자락에서”에 대한 3개의 댓글

  • 좋은 곳으로 이사가셨군요. 축하합니다.
    많은 열정은 사라졌건만 산 가까이 살아보고 싶은 기대는 아직 버리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 몇년을 경영해야 산가까이 갈 수 있을지..

    서성이다
  • 글을 읽으며 폭풍이 가슴을 에고 귀가 멍합니다. 아, 좋은 때를 맞아 이사를 하셨군요…

    다경
  • 두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곳으로 이사했으니 좋은 사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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