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비제 예찬, 그리고 <추천사>

두서없이 이런저런 상념들을 풀어놓은 이 글을 읽기 전에 관련 연보를 잠깐 확인해 두자:

1875년 비제, <카르멘> 초연 석달 뒤 사망
1878년 바그너와 니체의 최종적 단절
1881년 니체, <카르멘>을 처음 봄. 닷새 뒤 두번째 봄
1883년 바그너 사망
1888년 니체, «바그너의 경우» 저술

1888년 니체가 편지 형식으로 쓴 «바그너의 경우»는 “나는 어제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제의 걸작은 오페라 <카르멘>을 가리킨다. 오늘날에야 오디오에 시디를 집어넣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니 오페라를 스무 번째 들었다는 게 별다른 이야기거리가 아니겠지만, 당시에 스무 번째 오페라를 들었다는 것은 곧 스무 번째 오페라극장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니체는 1881년에 <카르멘>을 처음 들었으니, 그 이후 일년에 두어 번은 꼬박꼬박 <카르멘>을 듣기 위하여 오페라극장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의 의문문은 바로 이러한 있을 성싶지 않은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다. 또 제아무리 바그너리안이라해도 바그너의 어느 한 음악극을 스무 번이나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니, «바그너의 경우»의 첫 문장은 바그너리안을 도발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청년 니체는 바그너리안이었고 베토벤 예찬자였다. 그러나 청년이 아닌 니체는 비제를 열렬히 예찬했고 모차르트의 “황금의 심각함”, “명랑함”을 좋아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대한 언급은 단편적이기 때문에 “니체의 모차르트 예찬”이라는 표현은 쓰기가 힘든 반면, “니체의 비제 예찬”이라는 표현은 충분히 정당하다. 사실 니체가 비제의 음악을 두고 한 예찬 내용은 대부분 모차르트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가 미학의 제일 원칙으로 내세운, “선한 것은 가벼우며, 모든 신적인 것은 여린 발로 달린다”는 명제는, 비제보다는 오히려 모차르트 음악에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그래서 그가 비제를 극찬한 내용으로 모차르트를 예찬했더라면 후대에 그의 음악적 감각과 표현력이 더 훌륭하게 평가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듬직하다. 비제와 모차르트는 음악사적인 무게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체의 비제 예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음악적 감각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바그너 음악과 강렬히 대비시키기 위해 비제를 일부러 과도하게 높힌 것일까? 다시 말해 니체의 비제 예찬에는 (바그너리안의 입장에서 보기에) 뭔가 악의적인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이래저래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인데, 먼저 니체가 비제를 예찬했던 대목을 일부나마 읽어보자:

사람들은 이 작품[카르멘]으로써 바그너식 이상의 온갖 수증기, 축축한 북방과 작별을 합니다. 이미 줄거리만으로도 그로부터 구원합니다. 줄거리는 메리메에 의하여 격정의 논리, 가장 짧은 선, 탄탄한 필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열대에 속하는 것, 공기의 건조함, 공기의 청명함(limpidezza)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기후가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감각, 다른 감수성, 다른 명랑함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명랑한 것이지만, 프랑스식이나 독일식의 명랑함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음악의 명랑함은 아프리카식입니다; 이 명랑함에는 숙명이 있으며, 그것의 행복은 짧고 돌발적이며 양해를 모릅니다. 이제까지 유럽의 기존 음악에는 없었던 언어가 비제에게 있다는 점에서 저는 그를 질투합니다 — 한층 더 남방적이고 한결 더 짙은 갈색이고 한층 더 그을린 감수성이 있다는 점에서 . . .

— 니체, «바그너의 경우» 2

니체는 비제를 예찬하면서 날씨와 기후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즉 축축한 날씨의 북방(바그너)과 공기가 청명한 남방(비제)을 대비시키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공기의 건조함, 공기의 청명함”은 니체의 경험을 가장 가깝게 비춰주는 요소인 동시에, 고전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가령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에서도 “공기의 건조함”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도 신성한 공기(에테르)는 건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유럽의 공기가 눅눅하다, 즉 축축한 날이 많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조한 공기를 별도로 예찬하지 않는 것도 축축한 날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장마철에 한국을 방문한 맨유의 스콜스가 “한국에 오게 돼 기쁘다. 이번이 두번째다. 비 오는 날씨가 맨체스터와 비슷하다”고 했다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우리나라 날씨는 원래 이렇지 않다고 설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자연적 환경은 누구나 늘상 거론할 수 있는 요소이기에 역설적으로 무시되는 요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요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비제는 끝없는 바다의 파도처럼 나를 도취시켰고 압도하였다. 다음날 기차가 나를 국경 넘어 넓은 세상으로 실어갈 때 카르멘의 멜로디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뮌헨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고대문화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비제의 음악과 합쳐서 내 속에 내가 그 깊이와 의미의 무게를, 그저 예감할 수는 있으나 파악할 수는 없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봄과 같은, 결혼의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1900년 12월 1일에서 9일 사이의 흐린 주간이었다.

— 아니엘라 아훼 정리, 이부영 번역, «회상, 꿈, 그리고 사상» 131면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C.G. 융의 자서전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융 역시 <카르멘>을 처음 듣고 압도당했다. 어쩌다 한 사상가가 비제를 예찬했던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또 다른 사상가가 거의 비슷하게 예찬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뭔가 내가 모르는 필연적인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혹시 19세기 내지 20세기 초의 독일어권 사상가들은 남방의 요소, 정열의 요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는 <카르멘>을 처음 듣고 페터 가스트에게 쓴 편지에서 “격정과 아름다움의 영혼”을 언급했으며, 융은 “봄과 같은, 결혼의 축제 같은 분위기”를 언급했다. 한 마디로 그들이 비제의 음악에서 발견한 것은 비독일적 요소들인 셈이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 비제의 음악과 같은 “음악의 남방”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의 희소성이 비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경험의 희소성은 니체와 융에게서 하나의 날씨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에게 카르멘은 맑고 투명하고 건조한 날씨보다 더욱 만나기 힘든 음악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의 오페라란 오늘날처럼 영상매체나 음반을 통하여 늘상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많아야 한두 번 접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경험의 희소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음악이 음반으로 존재하지 않고 공연이나 연주회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음악은 훨씬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더구나 그 음악이 살아오는 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부류의 음악이라면 더욱 놀라울 것임은 분명하다. 재작년 연말에 황병기 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들과 그의 가야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지만, 그 음악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황병기가 서정주의 <추천사>를 가사로 하여 작곡한 가곡이었다. 다른 곡들은 모두 음반을 통하여 익히 들어왔던 터라 새삼스럽거나 놀라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추천사>를 듣는 순간 나는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의 그 능청능청대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무반주의 느린 진양조로 시작되는 “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는 구절에서는 정신이 아뜩했다. 약간은 과장된 듯한 창자 강권순의 표정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집에 돌아와 <추천사>가 녹음된 음반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곡은 아직 음반에 녹음되지 않은 음반미발표곡이었고, 그래서 더 이상 들어볼 기회도 없었다. 그 음악은 온전히 일회적이었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되풀이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얼마나 자주 그 가곡을 떠올렸던가. 그러나 이렇게 기억만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이 어쩌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라 생각하며 더욱 좋아했다. 더불어 이 경험을 가지고 니체의 비제 예찬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나는 어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는 니체의 문장은 얼마나 도발적이고 얼마나 집요한가! 그러고 보면, “카르멘의 멜로디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융의 서술도 현대인의 서술보다 훨씬 진실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추천사>가 녹음된 음반이 출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황병기 가야금작품집 제5집 «달하 노피곰» 음반에 그 가곡이 실려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나에게서 하나의 진기한 경험이 막을 내린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어제 이 음반이 집에 도착했고, 지금 나는 서정주 작사, 황병기 작곡, 강권순 창의 <추천사>를 듣고 있다.

이 가곡이 후대의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이미 평가가 끝난 것이나 많은 평가가 이루어진 작품에 대하여 평하는 것은 안전하다. 지금 이 시대, 현 시기에 출현하는 새로운 예술, 동시대 예술, 소위 “컨템포러리” 예술에 대하여 평하는 것에 비하자면 이전 세대의 예술을 평하는 것이 좀더 안전하고 쉽다는 말이다. 그러나 니체와 융이 들었던 <카르멘>은, 나의 경험으로 번역하자면, 황병기가 작곡한 <추천사>처럼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괴테의 감식안이 크게 그리친 사례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그가 동시대의 베토벤을 애써 무시하고 오히려 지금은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않는 다른 동시대 음악가를 고평가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구보다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 간파했던 그 괴테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동시대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니체는 정말 겁없이 동시대 예술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즉 니체 당시에 바그너의 음악과 비제의 음악은 웬만한 감식안이 아니고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하기도 어려운 동시대 예술이었지만, 니체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젊은 시절에는 바그너의 선전대 역할을 했고 후기에는 그와 반대로 비제를 예찬했다. 두 음악가가 동시대 예술가이면서도 그 음악언어는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니체의 흥분상태를 잘 입증해 준다.

이 대목에서 바그너의 음악극 이론과 비제의 음악을 비교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으나, 이는 또 한 편의 글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아무튼 나는 니체의 비제 예찬이라는 숙제를 경험의 희소성의 문제, 그리고 동시대 예술의 문제로 풀고 싶다. 현시대의 정보 소통은 전지구적이고 동시적이어서 현대인은 옛 시대의 사람들만큼 경험의 희소성을 겪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의 동시대 예술은 옛 시대의 동시대 예술보다 새로움이 적고 생소하지 않다. 예술과 관련한 거의 모든 시도가 이미 행해졌고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래서 현대의 평론은 태생적으로 옛 시대의 평론처럼 모험적일 수 없으며,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적다. 이것이 현대의 비극이며 이것이 옛 시대의 풍요를 말해 주는 것이다. 풍요는 창조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존의 예술적 관념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동시대 예술의 출현 못지않게 그 예술을 간파해 내는 과정도 창조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니체 당시에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평하는 것보다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 즉 바그너와 비제를 평하는 것이 좀더 창조적이고 흥분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니체의 비제 예찬은 악의적인 과장이 아니라 필연적인 진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비제라는 인물은 진정 “새로운 아름다움과 매혹을 보았던, 한 편의 음악의 남방을 발견했던 최후의 천재”(«선악의 저편» 254)였다. 니체가 보기에 음악은 비제의 음악처럼 “지중해의 음악이 되어야 한다”(«바그너의 경우» 3).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 “음악의 남방”, “지중해의 음악” 등의 표현은 독일인이 경험하기 힘든 날씨와 예술,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니체는 위악적으로 비제를 예찬한 것이 아니다.
 

서정주. 나 역시 이 시인의 시 앞에서 언제나 커다란 갈등을 한다. 갈등하면서도 그의 시를 좋아한다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다. <추천사>를 무척 좋아했던 나의 이십대 시절을 돌아보자니, 확실히 내게는 낭만주의 성향이 있었던가 보다. 그런데 그 시절에 주목하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새삼 서정주를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 2연의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香丹아”이다. 이 싯구는 서정주가 여인들이 베갯모에 수놓은 자수를 이미 1950년대에 눈여겨보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풀꽃더미, 나비, 꾀꼬리 등은 베갯모 자수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베갯모의 풀꽃더미, 작은 나비들, 새들은 춘향이 수를 놓았던 것들이지만 춘향은 그것들을 훌쩍 떠나고자 한다. 춘향은 그것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인다. 춘향은 더 이상 풀꽃더미, 나비, 새들 속에서 “西으로 가는 달 같이” 천천히 허우적일 수는 없다. 춘향은 “울렁이는 가슴”을 깨끗이 쓸고 먼 바다로, 먼 하늘로 날아오르고자 한다. 향단은 그네를 밀어 춘향의 울렁이는 가슴을 저 하늘로 저 바다로 아주 밀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1연, 2연, 마지막 연을 마무리하는 “향단아” 하는 부름은, 춘향이 먼 하늘로 먼 바다로 풍덩 빠져드는 소리, 의성어처럼 들린다. 황병기의 곡은 이러한 “울렁이는 가슴”과 “밀어올림”의 주제에 뛰어나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집중은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장단과 강약 구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강권순의 창은 이를 대비적으로 잘 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황병기의 <추천사>를 처음 들었을 때나 무수히 들어본 지금이나 서정주의 <추천사>를 읽을 때와 거의 동일한 감정이 내게서 일어난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체험이다. 강권순의 창은 재작년 공연장에서 들었을 때에 더 극적이고 흥이 더 들어갔던 듯한데, 녹음된 음반에서는 그때보다는 절제한 듯하다. 아마도 가곡의 단아함과 민요의 격정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강권순의 창이 아쉽지는 않은데, 가야금 반주가 너무 크게 녹음된 점은 아쉽다.

황병기가 작곡한 <추천사>를 들으면서 본문비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추천사>는 원래 «서정주시선»(1955년)에 처음 실렸던 시인데, 현재 그 시집은 판매되지 않는다. 하지만 근간된 민음사판 서정주 전집(1994년)은 초판본의 원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다행히도 원문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 서정주의 시들은 각종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데다가 한글표기법이 바뀔 때마다 원문의 옛 표기법이 편집자 임의대로 수정된 경우가 많았고, 또 그 수정이 시인 생존시에 벌어진 일이라서 과연 시인이 그 수정작업에 관여했는지 여부에 따라 원문을 확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황병기의 <추천사>와 민음사 전집판의 <추천사>의 불일치도 이러한 원문에 대한 무관심과 난삽한 수정작업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가령,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전집판),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음반),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음반내지)가 각각 다르고, “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눌로”(전집판),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나라로”(음반),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음반내지)가 각각 다르다. 이러한 상이함은 민음사 전집판이 초판본을 따르고, 황병기가 과거의 수정본을 따르고, 음반내지가 비교적 최근의 수정본을 따른 데서 비롯했을 것이다. 음반내지야 작품과 하등 무관한 것이니 음반사의 불성실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서정주의 시와 황병기의 곡이 서로 본문이 다르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고창 선운사 들머리의 바윗돌에 새겨놓은 <禪雲寺 洞口>라는 시 역시 이러한 원문의 불일치 문제를 남기고 있으니, 본문비평이 생각보다 경시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추천사>가 황병기의 가야금작품집 음반에 실려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제로 <추천사>를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이 얼마나 도발적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로 <추천사>를 스무 번 이상 들었으며, 이는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손쉽게 가능한 현실은 옛 시대의 문장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러한 손쉬운 현실과 허다한 정보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 “바람이 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香丹아.”
 




 

니체의 비제 예찬, 그리고 <추천사>”에 대한 2개의 댓글

  • 퍼가요 ^^

    커누
  • 니체는 1876 남방 이태리 지극히 비제의카르멘 스러운 소렌토를 요양차
    방문해서 놀라운 감격과 사고의 전환을 겪습니다. 진정한 본인 철학이 시작되는
    경험이었죠. 1881년에 카르멘을 처음 들었을 때 평생 처음 보는 지중해 소렌토의
    청명 랑랑한 하늘을 떠 올렸을 겁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지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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