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맑은 나라의 상실∙2

옛 시대의 아이

옛 세대의 정신세계가 과연 그토록 고귀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물론 그 시대의 병폐와 그로 인한 암울한 인생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고귀한 정신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그런 고귀함이 오늘날에는 왜 그토록 희귀할까? 이 의문의 일면을 풀기 위해서 한 소년의 학습과정을 살펴보자. 이미륵은 열 살 즈음에 이미 <통감>, <사략>, <맹자>, <중용> 등을 읽었고 소동파의 시들을 줄줄 외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서법을 익혔으며 퉁소를 불 줄 알았다. 이런 사항은 기실 외적인 데이타에 불과한 것이고 그 내면이 중요하다.

그런데 옛 시대의 아이들이 가졌던 감각과 생각은 지금 사십 대를 목전에 둔 나의 감각과 생각이 아닐까 할 정도로 고상한 면모가 있다. 가령 이미륵의 어진이 누나는 신식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워온 동생 이미륵에게 유럽에 대하여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유럽에도 백합이며, 개나리며 진달래 같은 꽃이 핀다고 생각하니?”(78), “너는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을 수 있게 그 고장에서도 남풍이 불어온다고 생각하니?”(78)

이뿐만이 아니다. 십대에 불과한 그 어진이 누나가 이미륵이 신식학교에서 배우는 책들을 들춰보며 애석해 하는 장면은 지금 나의 생각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이 책들은 참 이상하구나.”
그 누나는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한문자(漢文字)도 없고, 깊은 뜻을 지닌 문장도 없으니 말이다. 너는 이 책으로 현명해지리라고 믿느냐?”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너는 뭘 배우니?”
그 누나는 소중한 듯이 이 책 저 책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너에게는 참으로 애석하다. 벌써 <중용>을 읽었고 또 많은 시를 읽었으며, 심지어 율곡까지 청서한 너 같은 재주 있는 애가 이게 뭐냐? 그런데 넌 이제 이런 가치도 없는 책으로 너의 재능을 낭비하고 있잖아.” (77)

어릴 때부터 이러한 정신세계를 형성했던 이들의 삶이 바로 옛 세대의 삶이다. 물론 이러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일부분에 국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신분제의 찬성자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분제가 없어짐으로써 상실된 커다란 가치들이 있다고 본다. 가령, “고귀”, “긍지”, 이런 낱말들은 옛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노비나 상민과는 다르다는 명백한 의식, 일가권속을 거느려야 한다는 대단위의 의식이 만들어낸 “고귀”와 “긍지”는 오늘날에는 생겨나기 어렵다. (물론 그런 의식이 만들어내는 악질적인 병폐 또한 오늘날에는 없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고귀”와 “긍지”가 이 시대의 학문하는 이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실 대부분의 학자에게는 그러한 면모가 없다. 니체의 견해를 빌면, 훌륭한 학자 배후에는 훌륭한 인간이 아주 드문 반면, 평범한 예술가의 배후에는 훌륭한 인간이 많다.

이미륵이 독일에서 그토록 존경과 흠모를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훌륭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전혜린의 수필 <이미륵 씨의 무덤을 찾아서>에는 함께 성묘를 갔던 50대의 독일 여인 ‘S양’이 등장한다. 여러모로 비추어 보건대 그녀는 이미륵을 평생 흠모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S양은 이십대에 역시 이십대의 이미륵 씨와 피서지에서 우연히 만나서 서로의 이념과 사고와 취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S양은 그의 사진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찍은 깨끗한 옆 얼굴, 또 뮌헨 교외의 정원의 나무 숲 사이에서 테이블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명상적인 얼굴 등이었다. S양은 그가 한국의 높은 귀족 출신이었다고도 말했다.

— 전혜린, <李彌勒 씨의 무덤을 찾아서>에서

이미륵
뮌헨 시절(1930년) 삼십 대 초반에 하숙집 주인과 찍은 사진이다. 그는 다른 사진에서도 거의 항상 이런 명상적인 얼굴로 등장한다. 전혜린의 수필에 등장하는 ‘S양’도 이 시기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 출신”, 이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낯선가! “명상적인 얼굴”, 이런 표현을 받을 수 있는 얼굴이 오늘날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미륵 기념사업회에서 공개하고 있는 이미륵의 사진들을 보면 전혜린의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매 사진마다 거의 항상 “명상적인 얼굴”로 등장한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던 전혜린은 또한 “李彌勒 씨가 살고 생각한 것은 현대의 한국 사람으로서는 이해보다도 선망이 앞서는 유리알처럼 맑고 조화에 찬 고전의 세계”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귀족”, “명상적인 얼굴”, “깨끗함”, “맑음”, 이런 낱말들을 쓸 수 있었던 전혜린의 감각을 찬탄하고 싶다. 그에 비하면 “섬세한 얼굴선과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선비풍의 사내”(정미경)라는 현대작가의 수사는 얼마나 격이 낮은가. 전혜린 세대만 하더라도 그런 감각들에 어느 정도 익숙했는데, 정미경 세대에서는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소박함과 온기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을 알맞게 붓고 장작불을 정성껏 지펴서 갓 지어 낸 더운 쌀밥 같은 글”이라고 평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로서는 흉내내기도 힘든 명상적인 얼굴을 가졌던 그 이미륵은 서양문물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가졌을까? 이제 우리는 온통 서양화된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이미륵이 살아 있다면 우리들에 대하여 어떤 인상을 가질까? 열한 살 때 신식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날, 이미륵은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이 그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에도 여전히 유효했으리라고 본다:

“학교의 모든 것이 낯설었어요. 오랫동안 저는 무서워지기도 했어요. 거기는 전혀 내 마음에 안 들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제가 익숙해 있던 것과는 모든 게 너무 다른 까닭인가 봐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럼 슬프더냐?”
아버지는 나중에야 이렇게 물었다.
“좀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요. 옛 서당과 우리집을 자꾸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68)

아버지는 아들의 두려움을 달래려 아들을 가까이 불러 소동파의 시를 외워보라고 한다. 아버지의 권에 따라 아들은 몇 편을 읊는다. 그중에는 오십 구에 가까운 “영탄가”도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적벽부>였을 것이다. 열한 살의 아이는 소동파의 <적벽부> 수준의 시를 읊고는 마침내 마음이 진정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에게는 품위가 있고 침묵이 있고 고고한 내면이 있다.

그 훌륭했던 이미륵의 아버지는 이미륵이 신식학교를 다닐 때 작고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들은 신학문에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수학, 물리, 화학이 어렵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어머니는 공부하느라 늦게 자려는 아들을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낯설기만 한 이 새로운 문화는 네게도 맞지 않은거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 대가와 시를 배웠었니! 너는 정말 총명했단다. 너를 그토록 괴롭히는 신식 학교를 그만두거라. 그리고 몸도 회복할 겸 올 가을에 시골 송림 마을에 가 있거라. 그곳은 제일 작은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농토이다. 그곳에는 밤나무며 감나무도 있단다. 거기 가서 푹 쉬거라. 우리의 농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을 익혀두어라. 이 불안한 도시보다 오히려 한적한 시골에서 너는 잘 자랄거다. 너는 바로 옛 시대의 아이다.(98-99)

옛 시대의 아이, <맹자>와 <중용>을 배웠고 율곡의 글을 청서했고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는 아이, 아버지로부터 “상대방이 돌을 놓거든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는 기다려라”는 말과 함께 바둑을 배운 아이, 아버지의 시조창을 들으며 술을 배운 아이, 그 아이가 이제 바다를 이웃한 송림 마을에서 농부와 어부의 생활을 보고 느끼며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훗날 그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회상되었을 것인가!

(3부로 계속될 예정)

작고 맑은 나라의 상실∙2”에 대한 2개의 댓글

  • ‘압록강은 흐른다’가 고싱가숲에서 새로이 더 환하게 깊게 살아나고 있군요.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니 아!!! 그랬구나… 머리가 끄덕여지면서 다시 읽어야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특히 어린 누나와의 대화 참 인상적입니다. 1부에서 고모님 상여나가는 사진도…. 몇십년 전의 상여 모습에…상여소리의 메기고 받는 소리, 들녘에 스미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어젯밤에는 뜬금없이 사진 장면을 꿈에 봤겠지요..^^ ‘허~농 허~농’은 그냥 의성어인지… 허무하다는, 비었다는 의미인지요?

    강물
  • ‘허~농 허~농’의 의미는 추적할 수 없는 듯합니다. 아마도 ‘아리아리랑’ 이런 소리와 같은 차원의 것이겠지요. 받는 소리를 실제로 들어보면 정확한 발음조차 얻어내기 힘듭니다. 이 소리를 녹취했던 어느 분께서 ‘허~농 허~농’으로 표기했기에 저도 그 방향을 따른 것입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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