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맑은 나라의 상실∙1

전라도 동부지방의 상여소리

허~농~ 허~농~ 어이~가리~ 어허~농
허~농~ 허~농~ 어이~가리~ 어허~농

늦가을비가 쏟아지기 직전, 앞소리꾼이 메기는 소리가 이슬비처럼 내린다. 거의 들리지 않는다. 연로하고 파리한 그 소리, 요령소리에 뎅 뎅 묻힌다. 그것을 이어받는 상여꾼들의 뒷소리만 망울져 뚝 뚝 떨어진다. “허~농~ 허~농~”, 풀어졌다 뭉쳤다 한다. “어이~가리~ 어허~농”, 낮은 들녘을 너울대듯 가라앉았다 일었다 한다. 꽃 상여,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어이 가시는가? 집을 나선 상여는 좁은 골목길을 출렁이며 천천히 빠져나간다. 살아 생전 자주 머물렀던 곳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머리를 돌려 마을 어귀로 향한다. 살아 있는 마을친구는, 어디에서 만날까아, 어디에서 만날까아, 울부짖으며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앞에서 만장이 휘날린다. 상주들의 곡소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허~농~ 허~농~ 어이~가리~ 어허~농”, “허~농~ 허~농~ 어이~가리~ 어허~농”, 상여소리는 모든 울음을 달랜다. 울부짖어도 통곡해도 상여소리는 계속된다. 여인네들은 마을과 들녘이 만나는 마을 어귀에서 상여와 이별한다. 여인네들의 울음이 그치고, 이제 상여는 들녘을 향해 나아간다.

내 어린 시절에 수시로 헤맸던 들녘이다. 이것이 그 들녘이었던가? 이렇게 아늑한 공간이었던가? 저 멀리 사방으로 산이 두르고 있고 들녘은 아득하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마을사람들에게 한철의 쉼을 허락하기 시작했다. “허~농~ 허~농~ 어이~가리~ 어허~농”, 상여소리가 그 소리를 제대로 받을 줄 아는 공간을 만났다. 들녘으로 조심스럽게 흩어진다. 꽂히고 맺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스스르 사라진다.

낮은 바람이 소리를 흩고, 넓은 들녘과 허공이 소리를 받고, 산들이 지켜본다. 상여는 들녘의 길을 따라 어기적어기적 나아가고, 소리는 잔잔히 흩어진다. 후두두둑 가을비. 먹구름이 하늘을 쓸고, 가을비 쏴 쏟아진다. 상여소리는 조용히 숨쉰다. 온마을과 온들녘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상여소리는 너울너울 풀려나와 허공으로 들녘으로 흩어진다. 들녘과 산들이 그 널다란 품을 펼쳐서 모든 것을 거둬들인다. 비도 공기도 상여소리도 상여 안에 누우신 분도 모두 거둬들인다. 편히 안기시는 분, 편히 가시는가. 누군가가 상여를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가 들녘 한복판을 지켜보고 있다. “허~농~ 허~농~ 어이~가리~ 어허~농”, 구만리 들판 위에서 누군가가 거대하게 숨쉬고 있고, 나는 상여소리처럼 흩어진다.

상여
막내 고모님께서 상여소리와 함께 들녘으로 산허리로 가셨다. 편히 가소서

전라도 동부지방의 상여소리를 잔잔히 타고 들녘으로 산허리로 가시는 분, 고모님. 아버지 세대 중 마지막으로 살아계셨던 분이 이승을 떠나셨다. 밍그적밍그적대는 듯한 구례 사투리처럼, 상여소리는 거센 구석이 없다. 낮고 아늑하고 조심스럽다. 맑고 작고 고우셨던 막내 고모님을 닮았다.

 

옛 세대의 정신세계

올해는 큰일이 많았다. 조부모님 묘소를 부모님 묘역으로 이장하고 난 뒤, 여러 해 병치레를 하셨던 큰고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또 막내 고모님마저 돌아가셨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아직까지 그토록 맑고 순수한 분들을 뵌 적이 없다. 그 두분을 비추어 짐작하건대 나의 할머니도 성품이 온화하시고 지극히 맑으셨으리라.

조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혼인하시기 전에 작고하셨으며 부모님은 내 어린 나이에 작고하셨으니,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견문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 몇 가지 풍문처럼 들려오는 이야기만이 전부인데, 그것으로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복원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조부 대의 이야기는 누대의 선대 이야기처럼 까마득하다. 동리에서 우리 웃마을에 서생들이 많았다는 이야기, 할아버지께서 마을 훈장 노릇을 하셨다는 이야기, 청렴했고 언제나 서책만 가까이하셨다는 이야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할머니께서 집안의 서책들을 모두 불태우셨다는 이야기 등이 할아버지에 관한 풍문의 거의 전부이다.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서책들을 소각했다는 이야기는 그 충격만큼이나 빈번하게 회자되고 있다.

할머니는 왜 할아버지의 서책들을 소각하셨을까? 후손들의 말로는 할아버지가 일은 안 하시고 서책만 들여다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흔한 말대로 책을 보면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하는 인식을 가지셨다는 게다. 게다가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신 뒤로 아버지의 독서마저 금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책을 몰래 감춰놓고 읽으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그토록 할아버지의 서책을 미워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말 할아버지가 서책만 들여다보셨기 때문에? 나는 그 이유가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경우라면, 굳이 아버지의 독서마저 금하실 이유는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도 가난한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군다나 할머니의 딸들, 그러니까 내 고모님들은 한결같이 맑고 고운 분들이셨으므로, 할머니의 성품은 전혀 괴팍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되었다. 그런 분이 그런 식으로 화풀이를 하셨다는 것이 매우 이상했다. 그러다가 여러 친지들을 만나는 중에 할머니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촌 집안에 성직자가 여럿 나온 것도 모두 할머니의 신앙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고모님들도 모두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사촌을 포함한 일가에서 오직 나 홀로 불교 쪽에 있다.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일제강점기 때, 전통문화와 신식문화의 충돌이었던 게다. 할머니의 서책 소각은 가족사적인 충돌이 아니라 민족사적인 충돌의 지점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할머니의 정신세계에서 옛 시대의 서책들은 모두 없어져야 할 구습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보셨을 서책들은 다름아닌 유가와 불가의 서책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고 있다.

 
서책을 몹시 사랑하셨던 할아버지의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책을 가까이할 때마다 일가 친적들은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고들 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항상 할아버지의 세계가 궁금했다. 작은 비가 내리던 구월 어느 날을 기다려 할아버지에게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조부모 묘소에 간단히 산신제를 올리고 개토를 했다. 너댓 명의 산역꾼들이 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조부모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어쩐지 도연명과 소동파를 좋아하셨을 듯한데. 불가의 경전도 가까이하셨을 듯한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과 서책, 경전을 할아버지의 과거속에 자꾸만 넣어보고 싶었다.

드디어 땅속 유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칠팔십 년의 세월을 뚫고 살아남은 뼈들을 하나하나 수습하니 그 형상이 완연했다. 평생 뵌 적이 없는 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골로 뵌 것이다. 나는 흥분과 감격에 휩싸였다: 할아버지, 저 분으로부터, 저 뼈로부터, 저 흙으로부터 내가 나온 것이로구나! 어느 시인을 좋아하셨나요? 어느 경서를 가까이하셨나요? 누구의 서화를 사랑하셨나요? 원교 선생께서 쓰신 천은사 일주문과 명부전 편액을 보셨지요? 창암 선생의 보제루와 회승당 편액도 보셨지요? — 대지 위로 안개비 내리듯 내 마음속 질문은 나직나직 이어졌다.

그리고 할머니, 부디 할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해 주소서. 이렇게 뼈에는 욕망도 없고 신앙도 없는데, 살아 생전 의견 차이, 사상의 차이, 종교의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곱고 맑은 성품으로, 옛 시대의 서책과 유품도 성서와 찬송가처럼 소중히 여겨주소서!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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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모와 함께 한 이미륵(오른쪽).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한 이듬해(1947년) 찍은 사진이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정규화 옮김, 범우사). 대학 입학 전에 독일어를 공부하려고 처음 잡은 책이 «Der Yalu fliesst»(1946년)였는데, 이십 여년이 흐른 뒤 처갓집의 서재에서 우연히 이 책의 번역본을 접했다. 조부모의 선물이었던가? 이 책은 내가 할아버지에게 던진 감격어린 질문들에 대한 상세한 답변서와도 같았다.

1899년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 잠시 신식학교 공부, 독학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3학년이 되던 1919년 삼일운동에 가담한 뒤 망명의 길에 올라 1920년 독일에 도착 — 이것은 이미륵의 스물 두 살까지의 이력이면서 동시에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사구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미륵의 어린시절에 대한 자전소설이다. 독일 출판사 사장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이 소설의 의도를 제시하고 있다:

나의 소설은 나의 소년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소박하게 그려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체험담을 서술하는 데 장해가 되는 모든 설명과 묘사는 피했읍니다. 동시에 동양인의 내면 세계에 적합하지 아니한 세계적인 사건들은 비교적 조심성 있게 다루었읍니다.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그려냄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 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는 아주 친근한 것으로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281면)

아마 이미륵이 이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쓰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시절 한학을 이수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내용”과 전면적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한학은 일반인에게 서양의 그 어떤 학문보다도 낯설다. 그 정신세계도 아주 낯설다. 그 정신세계에 접근하는 방식과 자세도 옛 세대와는 완연히 다르다. 그래서 나는 초중고 교육 및 대학 교육에서 이수한 학문적 방법만으로는 옛 세대의 정신세계를 파악하기는커녕 접근하기조차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그러나 옛 세대의 내면세계는 “이미륵에게 아주 친근한 것”이었고, 그는 그 “친근한 것”이 서양의 정신세계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알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인들에게 “이미륵 자신의 것”, “소년 시절의 체험”을 보여줌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동양인의 내면 세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미륵이 제시하려고 시도한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는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 세대의 정신세계이며, 우리 아버지 세대를 가르쳤던 할아버지 세대의 정신세계이다. 그것은 동양의 내면세계에 문외한인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른 이 시점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정확히 우리 세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보아도 전혀 틀리지 않다. 그는 오늘날 우리 세대 중 어느 한 사람도 재현할 수 없을 세계를 재현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이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듬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인들의 정신적 폐허에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가 주어진 것이다. 어느 독일인들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경과했던 한 연약한 이방인이 그토록 맑은 정신과 그토록 고귀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아마 충격과 경이를 느꼈을 일이다. 이미륵은 이 소설에서 그 맑은 정신, 그 고귀한 내면이 동양의 한 구석진 나라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던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한 소년의 성장과정에는 무엇보다도 동양의 시적인 세계가 있으며, “[신식학문에는] 깊은 뜻을 지닌 문장이 없다”(76)고 평하는 어린누이의 고고함, “네 정신이 언제나 맑아야 한다”(63)고 가르치는 아버지의 고귀한 위엄, 어머니의 그림자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 “맑음”, “내면”, “품위”, “고고함”, “고귀”, “위엄”, “아름다움” 등의 낱말들을 쓰긴 했지만, 이것들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으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현대의 감수성을 버리고 오직 옛 세대의 세계에 온전히 들어서는 자만이 그 낱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낱말들은 이 시대에 제 품위를 잃은 채로 유포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옛 세대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너는 종종 용기를 잃는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네 길에 너는 충실했었다. 나는 너를 크게 믿는다. 그래, 용기를 내거라. 너는 국경을 쉽게 넘고 결국 유럽에도 갈 것이다. 이 어미 걱정은 전혀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매우 빨리 가느니라. 비록 우리들이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내 생애에 있어서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얘야! 이젠 너 혼자서 네 길을 가거라! (144)

위 인용문은 이미륵이 불과 스무 살 남짓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기약없는 망명길을 권하며 한 말이다. 이 망명길은 아들과 어머니의 영원한 이별길이 되고 말았다.

(2부로 계속될 예정)

작고 맑은 나라의 상실∙1”에 대한 2개의 댓글

  • 올해 제게 귀한 두 분과 사별하고 저의 감정을 제어한 채, 꿋꿋하게 살다가
    우연히 어제 ‘상여가’ 공연을 보면서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 감정 억제치 못하고 사이트 들렀다가 형의 글을 읽고 또 다시
    눈물 짓네요.

    헛망한 세상, 모든 것 포기하고서도 흥에 겨워 놀 수 있는 각설이가 되고 싶네요.

    형, 고마워요.

    淸安
  • 마흔이라는 나이는 참 많은 관문을 거쳐야 하는가 보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삶을 바치기 원했던 젊은날과 방황들, 숱한 지적 고민의 편력, 수행자적인 응시, 소탈한 삶, 자연스런 삶, …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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