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세 변신에 관하여

정신의 세 변신에 관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라.

무거운 것이 허다히 있나니, 정신에게라, 외경畏敬을 품고 있는 강인한 정신에게라: 무겁고도 가장 무거운 것을 정신의 강함이 염원한다.

무엇이 무거운가? 그렇게 견디는 정신은 묻는다, 그렇게 그는 꿇어앉는다, 낙타마냥, 그리고 쾌히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너희 영웅들이여, 내가 그것을 떠맡아 나의 강함을 즐기리니. 그렇게 견디는 정신은 묻는다.

이것인가? 자신의 오만을 탄식하기에 이를 만큼 낮아지는 것? 자신의 지혜를 조롱하기에 이를 만큼 자신의 어리석음을 빛나게 하는 것?

아니면 이것인가? 우리의 것이 승리의 축제를 벌일 때 그것과 결별하는 것? 고산高山에 올라 유혹자를 유혹하는 것?

아니면 이것인가? 인식의 도토리와 풀을 섭취하며 진리를 위하여 영혼의 허기를 겪는 것?

아니면 이것인가? 병들고, 위로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대가 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비둘기들과 우정을 맺는 것?

아니면 이것인가? 오염된 물이 진리의 물이라면 그곳으로 들어가 차가운 개구리들도 뜨거운 두꺼비들도 마다하지 않는 것?

아니면 이것인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겁주려고 하면 유령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

가장 무거운 이 모든 것을, 그 견디는 정신이 떠맡는다: 짐을 지고 사막으로 서둘러 가는 낙타마냥, 그렇게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간다.

그러나 더없이 고독한 사막에서 두번 째 변신이 일어난다: 거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그는 자유를 탈취하고자 하며 제 나름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최후의 주인을 구한다: 그는 그에게 그리고 자신의 최후의 신에게 적대적이 되나니, 거룡과 승리를 다투기 위해서라.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이라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그 거룡이란 어떤 것인가? “너는 해야 한다”Du sollst라고 불리는 것이 그 거룡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Ich will를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가 그의 길에 놓여 있으니, 황금빛 반짝이는 한 마리 비늘짐승이라, 비늘마다 빛나고 있는 황금의 “너는 해야 한다!”

천년의 가치들이 그 비늘들에서 빛나고 있으니, 모든 용들 중에서 가장 강한 용이 이렇게 말한다: “사물들의 모든 가치 — 그것이 내게서 빛나고 있다.”

“모든 가치가 이미 창조되었으니, 창조된 모든 가치 — 그것은 나로다. 진실로, 더 이상의 “나는 하고자 한다”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이렇게 그 용은 말한다.

형제들이여, 무엇을 위하여 정신에 사자가 필요한가? 짐을 질 수 있는 짐승, 체념하고 외경하는 그로는 어찌하여 불충분한가?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 — 이것을 사자 역시 할 수 없으되: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자유를 창조하는 것 — 이것을 사자의 권력이 할 수 있다.

자유를 창조하는 것, 그리고 또한 의무 앞에서의 성스러운 ‘아니오’: 그것을 위하여,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들을 위한 권리를 취하는 것 — 이것이, 외경하고 견디는 정신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부담이다. 진실로, 그것은 그로서는 강탈이요, 강탈하는 짐승의 일이라.

위없이 성스러운 자신의 일로서, 한때 그는 “너는 해야 한다”를 사랑했다: 이제 그는 위없이 성스러운 것에서도 광기와 자의를 발견할 수밖에 없으니,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하기에 이른다: 이 강탈을 위하여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무엇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이로되 사자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어찌하여 강탈하는 사자조차도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천진하니 어린아이요 망각이라, 하나의 새로운 시작, 하나의 유희, 스스로 구르는 하나의 수레바퀴, 하나의 최초의 운동, 하나의 성스러운 긍정.

그렇다, 창조의 유희를 위하여, 형제들이여, 하나의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를 이제 정신이 원한다, 자신의 세계를 세계상실자가 획득한다.

정신의 세 변신을 나는 일렀노니: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던 것이라. — —
 

이렇게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때 그는 한 마을에 머물고 있었으니, 그 이름은 ‘얼룩소’였다.

[1부] 세 변신에 관하여”에 대한 12개의 댓글

  • 번역된 문체의 속도에 무릎치며 감탄하고 갑니다.

    해맑밥
  • 해맑밥 님 반갑습니다. “무릎치며 감탄한다”는 말씀이 운치롭습니다. 옛 사람들의 운치가 그립군요.

    고싱가숲
  • 기막힌 번역입니다. 경탄입니다.
    (흑. 제 번역은 비천하고 조악합니다. 마음 공부를 하지 않고 사납게 살아온 사람의 냄새가 고스란히 납니다. 사납게 살아 왔다고 하더라도, 진하게 살아온 이상, 그의 눈에도 니체가 조금은 보이겠지요. 그 눈으로 사납게 번역한 니체를 옮겨 봅니다.)

    그래! 가 필요해, 형제들!
    창조를 위해선 가 필요해.
    정신은 이제 *그 자신의* 의지를 원하거든.
    세계와 분리된 정신은 이제 *그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 거니까.

    Weltverlorne…..그거…”세계상실자”라고 하니까 좋네요.
    영역본들을 보면, 한 군데는 ‘세계와 분리된 자’이고 다른 한 군데는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나옵니다. 저는 ‘세게와 분리된 자’를 썼습니다만…

    백석현
  • 님의 글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어, 출판사에 부랴부랴 이 메일을 보내 원고에 주석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여기 이 ‘세계와 분리된 정신’… 님이 말씀하시는 ‘세계 상실자’가 뒷 대목과 연관되어 있다는 게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뒤에 보면 다음 대목이 나오지요. 이 대목은 제2부 앞대가리 말로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22:51 형제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시각으로
    /길 잃은 / 사람들을 찾게 될 거야.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사랑으로 자네들을 사랑할 거야.

    이게 그 ‘세계 상실자’와 연결되는 군요. 아!

    제가 이 깨달음을 얻어 첨가한 주석입니다.

    “mine Verlorene. 성경의 ‘길 잃은 양’과 같은 표현이지만 실은 전혀 다름. 1:25에 보면 정신의 세가지 탈바꿈을 이야기하면서 ‘세계와 분리된 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함. 이 때 원문이 Weltverlorene임. 즉 정신이 독립성을 획득한 상태를 의미함.
    즉 이 때 Verlorene의 속뜻은 Weltverlorene임. 짜라두짜는 제자들의 정신이 독립성을 획득하려면 짜라두짜와의 이별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음. 한마디로 이 대목은 표면적 표현은 성경의 ‘길 잃은 양’이지만 내면적 의미는 ‘한층 성숙하여 독립성을 획득한 정신’을 뜻함. 니체는 인간의 엄숙하고 비극적인 성장과정을 말함과 동시에, 기독교적 정신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음.”

    감사합니다. 이건 모두 이 사이트와 님 덕분에 생긴 깨달음입니다. 이거 정말 중요한 대목이었는데…22:51 말입니다. 안개가 걷힌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석현
  • 차라투스트라 서문을 몇 번 끝내고 오늘부터 1부 들어가려고 합니다(독일어로). 근데 아시다시피 워낙 비유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좋은 주석서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데요. 예를 들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같은 경우 각 절별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놓은 주해서들이 있는데, 혹시 ‘차라투스트라’에 대해서 그런 주해서를 알고 계신 것이 있다면 하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참, 그리고 영어 번역 중에서는 어떤 번역이 좋은지도 같이 알려주시면 쫌더 고마울 것 같은데…

    조호영
  • 너무도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정말 놀랍네요.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정보들을 얻으시는지. 정말 이 싸이트를 알게 된게 너무 다행입니다. 니체를 공부하고 싶은데 마땅히 도움을 구할데도 없고… 참 막막했었는데… 주신 정보 고맙고, 아주 잘 사용하겠습니다.

    조호영
  • 번역과 관련된 질문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의 1부 제일 처음에 나오는 “세 변신에 대하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Du-sollst” heisst der grosse Drache. Aber der Geist des Löwen sagt “Ich will.”

    고싱가: “Du sollest”라 불리는 것이 그 거룡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를 말한다.
    정동호: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Kaufmann: “Thou shalt” is the name of the great dragon. But the spirit of the lion says, “I will.”
    Common: “”Thou shalt,” is the great dragon called. But the spirit of the lon saith, “I will.”

    heisst에는 ‘-라고 불리다’란 뜻도 있지만 ‘명령하다’란 뜻도 있더군요. 따라서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그 거대한 용은 명령한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로 번역할 수는 없을까요? 왜냐하면 첫째로, 이 문장 앞의 지문에서 알 수 있듯이 큰 용은 그동안 사자가 (낙타처럼) 섬겨왔던 주인(Herr)이자 신(Gott)이기 때문에 그는 명령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낙타는 사자로 변하여 이 주인(신)의 명령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자신의 자유에 의지해서 ‘나는 (-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니체가 용의 ‘명령'(Du sollst)과 사자의 ‘자유'(Ich will)를 서로 대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과 자유의 대조는 다른 글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 ‘heisst’를 ‘-라고 불리우다’로 해석할 경우 ‘will’과의 대칭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eisst는 자동사이고 will은 타동사인데, 그렇게 되면 문장의 구조가 [‘자동사+주어’와 ‘타동사+주어’] 형태로 됩니다. 물론 이런 형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서로 대칭관계가 되도록 [‘타동사+주어’와 ‘주어+타동사’]의 구조가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가 서로 대칭을 이룬다는 면에서 상관이 있고, 저는 이것이 니체의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즉,
    큰 용은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불린다.
    그러나 나는 ‘(-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보다는

    큰 용은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나는 ‘(-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다음 구절에서 ‘큰 용’이라는 표현대신 ‘Du sollst’가 대신 쓰이고 있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자’로서의 ‘큰 용’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Kaufmann과 Common의 번역과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sollst’를 ‘shalt’로 옮겼는데 그럴 경우 ‘thou shalt’에서 shalt는 의지미래로서 ‘내가 너를 -게 하겠다’라는 뜻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you shall die.’라고 했을 경우 그 의미는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Kaufmann과 Common은 니체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오역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니체의 의도는 ‘-해야 한다’라고 하는 주인(신)의 명령과 그 명령에서 이제 주체적 삶을 사는 자유인으로서의 사자, 즉 ‘-을 원한다’를 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Thou shalt’에서 shalt가 혹시라도 should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가요? Kaufmann과 Common이 니체의 의도를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이 sollst를 should가 아닌 shalt로 번역을 했을 때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 더 질문을 하겠습니다.
    Seinen letzten Herrn sucht er sich hier: feind will er ihm werden und seinem letzten Gotte, um Sieg will er mit dem grossen Drachen ringen.
    위의 문장을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셨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최후의 주인을 구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최후의 신에게 적대적이 되나니, 거룡과 승리를 다투기 위해서라.
    원서의 ihm을 님께서는 주어인 er를 가리키는 ‘자신과’로 옮기셨는데 ihm은 er 보다는 앞에 나오는 letzten Herrn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그(그의 마지막 주인)와 그의 마지막 신에게 적대적이 되나니’로 옮겨야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구절 위에서 ‘주인’과 ‘신’이 같이 언급되고 있고 그 다음에서도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이라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서처럼 그 둘(‘주인’과 ‘신’)이 정신과 대립되는 관계로서 같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님의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조호영
  • 조호영님께서 제안하신 대로 “heissen”을 “명령하다”로 읽자면, 독일어 문장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다시 말해, 의미상 “heissen sollen + 본동사”의 구조가 되어 조동사가 두 개나 등장하게 되지요. 그게 아니라면 “heissen”과 “sollen”이라는 유사한 의미의 낱말이 중복되는 모양새가 되고요. 니체가 따옴표까지 곁들이면서 “Du-sollst”라고 표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것은 다름아닌 성서의 패러디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터번역 성서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곳곳에서 “Du sollst . . .”로 시작되는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니체는 바로 그것을 겨냥한 것이지요. 이 점을 감안하면 “heissen”을 “~라 불리다”로 읽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제가 “wahrlich”를 “참으로”나 “정말로”로 옮기지 않고 비교적 장중한 느낌의 “진실로”로 굳이 옮기는 것도 다름아닌 성서의 문체를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번역자의 취향과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니체의 의도와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영어의 “의지미래” 운운은 학교문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Common이건 Kaufmann이건 모두 “shall” 대신 “shalt”를 쓴 것도 아마 King James Version의 성서 문체를 따르고자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최후의 주인을 구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최후의 신에게 적대적이 되나니, 거룡과 승리를 다투기 위해서라”고 옮기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최후의 주인을 구한다: 그는 그에게 그리고 자신의 최후의 신에게 적대적이 되나니, 거룡과 승리를 다투기 위해서라”고 옮겼습니다. 조호영님께서 오독하셨거나, 아니면 제가 맨 처음 번역했던 문장을 복사해서 가지고 계신지도 모르겠군요. 후자의 경우라면 중간에 제가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척 열심히 공부하시는군요. 공부 잘 될 때 무진장 공부하시기를 빕니다..^^

    고싱가
  • 빠른 답변 감사합니다. 두 번째의 ihm과 관련된 질문은 보니까 제가 님께서 처음 번역하셨던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정하신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첫 질문과 관련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한번 더 번거롭게 해드려야 될 거 같네요.
    [“heissen”을 “명령하다”로 읽자면, 독일어 문장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다시 말해, 의미상 “heissen sollen + 본동사”의 구조가 되어 조동사가 두 개나 등장하게 되지요. 그게 아니라면 “heissen”과 “sollen”이라는 유사한 의미의 낱말이 중복되는 모양새가 되고요.]라고 답을 주셨는데 어떻게 해서 heiseen sollen + 본동사가 된다는 건지요? 지문은 그저 “Du-sollst” heisst der grosse Drache.가 전부인데 말입니다. der grosse Drache가 주어이고 heisst가 동사인데 또 무슨 본동사가 있다는 말씀인지? 그리고 sollst는 Du와 함께 그냥 하나의 명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요? 왜 sollst가 전체 문장의 조동사로 쓰인다는 건지?
    제가 지금 님의 설명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건가요? 조금만 더 쉽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heisst를 ‘명령하다’로 해석할 경우 ‘Du sollst’는 하나의 명사로서 heisst의 목적어가 되면 안 되나요? 자꾸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

    조호영
  • 이것은 독일어 기본용례에 관한 것입니다. “heissen”이 “명령하다”의 의미일 때에는 대개는 “in Verbindung mit einem Inf.+ Akk.”의 용법으로 씁니다. 즉,

    er hieß mich stehen bleiben;
    er hieß ihn ein ehrlicher Mensch werden;

    과 같은 형식으로 쓰게 됩니다. 물론 이와 다른 형식도 드물게 있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명령하다, 요청하다”는 의미인데 “heissen + 명사”의 구조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드시 본동사가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heissen”을 “명령하다”로 읽자면 문법상 본동사가 있어야 하는바 어쩔 수 없이 sollen을 본동사로 취하는 형식으로 독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님께서 “heissen”을 “명령하다”로 읽자는 주장은 곧 “sollen”을 본동사로 읽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sollen”을 본동사로 읽게 되면 이 “sollen” 역시 또 다른 본동사를 취하기 때문에, 제가 “조동사가 두 개나 등장”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구문이므로, “Du-sollst” heisst der grosse Drache에서 “heissen”을 “명령하다”로 읽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요컨대, “heisst를 ‘명령하다’로 해석할 경우 ‘Du sollst’는 하나의 명사로서 heisst의 목적어가 되면 안 되나요?”라는 님의 질문에는 “문법적으로 허용이 안된다”고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님이 의도하는 “그는 네가 ~해야 한다고 명령한다”는 의미에 가깝게 문장을 구성하려면, “er heisst dich, du solltest . . . Inf.”와 같은 식으로 써야 합니다. 즉 heissen의 목적어로 Inf. 대신에 접속법 구문을 써서 내적으로 종속시켜야 합니다. 게다가 그 의미는 순화되어 명령보다는 요청에 가깝게 됩니다. 니체가 이것을 의도했다면, “Du solltest . . .” heisst der grosse Drache와 같은 식으로 썼을 겁니다. 그렇다면 “er heisst dich, du sollst . . . Inf.”의 문장도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제가 이제까지 독일어를 독해한 바로는 이런 식의 문장은 본 적이 없습니다. 매우 어색한 것이지요. 즉, “그는 네게 명령한다, 너는 ~해야 한다”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문장구조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구문론 용어를 써서 말하자면, 이것은 “내적으로 종속되지 않은” 문장이어서 하나의 문장인데도 내용이 따로 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게 아니라면 heissen과 sollen이라는 유사한 의미의 낱말이 중복되는 모양새”가 된다는 의견을 말했던 것입니다.

    조호영님께서 제안하신 대로 “heissen”을 “명령하다”로 읽자면, 독일어 문장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다시 말해, 의미상 “heissen sollen + 본동사”의 구조가 되어 조동사가 두 개나 등장하게 되지요. 그게 아니라면 “heissen”과 “sollen”이라는 유사한 의미의 낱말이 중복되는 모양새가 되고요.

    앞서 제가 위와 같은 의견을 제시한 것은 이번에 장황하게 설명한 문법과 구문론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독일어를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우는 초창기부터 모든 의문사항에 대하여 철저히 파헤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한번 두번 회피하다 보면, 나중에 박사학위를 받더라도 문법과 구문론에 취약한 버릇은 절대 고쳐지지 않습니다. 니체를 독해하시면서 국내 번역본들을 참조해 보면 아시겠지만, 국내 번역자들이 의외로 문법과 구문론에 허약한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제가 이번처럼 구문론이나 문법사항에 대하여 상세히 답하지는 못하겠지만, 혼자서 고민하고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는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싱가
  • 빠르고 상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질문을 던지면서 heisst를 ‘명령하다’로 해석할 경우 남는 쪼끔은 맘에 걸렸던 것이 님께서 지적하신 사항이었습니다. 영어에서도 보면 일반 구문론에서 ‘명령하다’가 오면 ‘-에게 -을’에 해당하는 구조가 뒤따라 와야 하는데 heisst다음에 ‘-에게’에 해당하는 것이 없더군요. 아뭏든 님의 명쾌한 설명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라도 답을 얻고 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해결하고 가지 못하면 왠지 꺼림칙해서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조호영
  • 먼저, 영어번역본은 종류가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으로 다섯 종류가 거론되나 봅니다. Thomas Common(1909), Walter Kaufmann(1954), R.J. Hollingdale(1961), Graham Parkes(Oxford, 2005), Adrian del Caro(Cambridge, 2006)입니다. 이들 번역본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Common 역본은 고풍적이고 성서의 문체를 많이 따랐으며, Kaufmann과 Hollingdale은 본문비평 작업과 함께 Common 번역의 오류를 상당 부분 줄이고 좀더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Common 역본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전자문서로 입수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번역된 것 중에서 Parkes 역본(옥스포드)은 «차라투스트라»의 음악성에 가장 비중을 두긴 했지만 Common 역본이 가진 활력과 기세가 없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장중하고 고풍적인 맛을 재연하지 못하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리고 Caro 역본(캠브리지)은 가장 최근에 번역되어서 그런지 위키피디아에 별도의 평이 올라와 있지 않네요. 사실 제가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Caro 역본인데 최근에야 구입한 까닭에 평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디자인이나 편집만 놓고 보더라도 마음에 쏙 드는 책입니다. 최근의 이 두 번역본은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의 이름을 걸고 시리즈의 일부로 나오는 것인데, 어째 표지와 디자인은 최하급과 최상급으로 갈라지는 듯합니다. 아래 책 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왼쪽에서부터 간행년도 순입니다. Hollingdale 역본과 Parkes 역본의 표지는 정말 ‘안습’입니다. 도대체 디자이너가 초인이나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원, 쯧쯧.
     


     

    그리고, 조호영님께서 원하시는 부류의 주해서는 Gustav Naumann, Zarathustra-Kommentar, 4 Bände(Leipzig 1899-1901)와 Hans Weichelt, Zarathustra-Kommentar, 2. Auflage(Leipzig 1922) 밖에 없을 겁니다. 이중에서 전자는 구입하기가 불가능하고, 후자는 독일 고서점에서나 구입이 가능할 겁니다. 현재 구입 가능한 요긴한 주해서는 다름아닌 KSA 14권의 279-344면입니다. 단락의 요지를 정리한다거나 해석하는 내용은 없지만, 비교해야 할 유고, 문헌 등을 깨알같은 글씨로 제시하고 있으며 본문비평 장치(apparatus)도 간략한 형식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차라투스트라»의 참고문헌 목록은 Peter Pütz가 제시한 목록이 가장 상세한데, 이는 Goldmann 출판사에서 간행한 «Also sprach Zarathustra» 판본에 실려 있습니다.

    국내에 번역되거나 저술된 «차라투스트라» 입문서는 뤼디거 슈미트, 김미기, «쉽게 읽는 니이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학사 1999)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가 있습니다. 뤼디거 슈미트의 책은 원문 인용을 주로 한, 초보자를 위한 간략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병권의 책은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고 있나 본데, 저로서는 읽는 내내 심한 거부감만 일었던 책이었습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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