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제1장

‘예술의 계속적인 발전이, 생식이 두 성에 의존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투쟁하고 주기적으로나마 화해가 대두하는 가운데, 아폴론적인 것디오뉘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통찰하게 되고 또 직관을 통해 직접적인 확실성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미학을 위해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을 우리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빌린다. 그들은 통찰자들에게 심오한 예술관의 비밀스런 가르침들을 깨닫게 해주되,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연할 만큼 명료한 신들 세계의 형상을 가지고 한다. 그리스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대립이, 근원에서나 목적에서나, ‘조각가의 예술 즉 아폴론적인 예술’과 ‘비조형적인 음악 예술 즉 디오뉘소스적인 예술’ 사이에 존속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신, 아폴론과 디오뉘소스와 연계되어 있다. 그토록 상이한 두 충동이, 대개 공공연히 서로 함께 갈등하거나 서로를 두고 갈등하는 가운데, 갈수록 강력한 새로운 탄생을 하도록 유혹하면서, 서로에게 접근하여, “예술”이라는 공통어를 통하여 가상적으로나마 연결되는 대립의 투쟁을, 그들 속에 항구화한다. 그들이 마침내 헬라스의 “의지”라는 형이상학적인 기적의 행위를 통하여 함께 짝을 지어 나타나고, 그렇게 짝을 지어 마침내 아티카 비극이라는 디오뉘소스적이자 아폴론적인 예술작품을 태동시키기까지.

두 충동에 접근하기 위해, 그것을 우선은 도취라는, 분리된 예술 세계로 생각해 보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 사이에서 간파될 수 있는 대립과 비슷한 대립이 저 생리적인 현상들 사이에서 간파될 수 있다. 꿈 속에서 처음으로, 루크레티우스의 상념을 따르자면,[1] 신들의 장려한 형상들이 인간의 영혼 앞으로 다가왔으며, 꿈 속에서 위대한 조각가는 초인적인 본질의 고혹적인 골간骨幹을 보았다. 그리고 헬라스의 시인은, 시적인 창작의 비밀에 관한 물음을 받기라도 했다면, 마찬가지로 꿈을 회고하였을 것이며, 노래의 명인名人들에서 한스 작스가 제시한 바와 비슷한 가르침을 제시하였으리라:

친구분이여, 시인의 일이란 바로 이런 것,
자신의 꿈들을 해명하고 밝히는 것이라지요.
믿어 주시오, 인간의 가장 진정한 망상은
그의 꿈 속에서 드러난답니다:
모든 시 창작과 시 짓기는
예지몽의 해명 작업에 불과하다오.[2]

꿈의 세계들을 내놓을 때 인간은 저마다 온전한 예술가가 되며, 꿈의 세계들의 아름다운 가상은 모든 조형예술의 전제이다. 아니,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창작의 절반, 중요한 절반의 전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면서 향유한다, 형태들이 우리에게 말을 한다, 권태로움도 없으며 불필요한 것도 없다. 그 꿈 현실의 지고한 삶에서도,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가상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이 남아 있다: 적어도 이게 나의 경험이다. 그 경험의 빈번함, 그러니까 그 정상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인들의 여러 증언과 진술을 끌어대야 하겠는가. 철학적 인간은 우리가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이 현실 아래에 제2의 전혀 다른 현실도 있겠거니, 그러므로 이 현실조차도 하나의 가상이겠거니 예감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때에 따라서는 인간들과 모든 사물들을 순전한 허깨비나 꿈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재능을 두고 바로 철학적 소양의 표지라고 지적한다.[3] 바야흐로 철학자가 현존의 현실과 관계를 맺듯이, 예술적이고 민감한 인간은 꿈의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그는 정확하게 그리고 흔연히 직시한다: 그 영상들로부터 그는 삶을 해명하고, 해명하는 과정에서 삶을 위해 수련하기 때문이다. 그가 저 총괄적인 이해 상태에서 경험하는 것은, 가령 편안하고 정겨운 영상들만이 아니다: 심각함, 서글픔, 슬픔, 암담, 돌연한 가책, 운運의 조롱, 불안한 기다림, 요컨대 삶의 “신곡” 전편이 지옥편과 더불어 그의 곁을 지나간다. 그러나 그림자극처럼 지나가지는 않으며—그는 그림자극의 장면에서 함께 살아가고 함께 괴로와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상의 저 덧없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그리고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나처럼, 꿈의 위태로움과 공포스러움을 보고 간혹 용기를 내어 “이건 꿈이야! 이 꿈을 더 꿔도 좋다!” 하고 성공적으로 외쳤던 일을 상기하리라. 동일한 꿈을 사나흘 밤 이상 계속 인과에 맞추어 꿀 수 있었던 사람들에 관하여 사람들이 내게 설명하다시피: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본질이,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근저가, 깊숙한 욕망으로 그리고 반가운 필연성에서 꿈 상태를 경험한다’는 증언을 분명하게 내놓는다는 사실.

꿈 경험이라는 반가운 필연성도 역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아폴론에서 표현되었다: 아폴론은 모든 조형력의 신으로서 예언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 어원상 “빛나는 자”,[4] 빛의 신인 그는 내밀한 환상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까지도 다스린다. 더 높은 진리는, 이해에 흠결이 있는 대낮의 현실과 대립하는 더 높은 진리 상태에서의 완전함은, 다음으로 잠결과 꿈결에 치유하고 돕는 자연에 관한 가장 깊은 의식은, 예언하는 능력과 뭇 예술들, 즉 삶을 가능하게 하고 살아갈 만하게 하는 예술들의 상징적인 유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병적인 결과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꿈의 영상이 뛰어넘어서는 아니되는 가느다란 선 역시—선을 넘기라도 한다면 가상은 둔중한 현실이 되어 우리를 속이리라—, 아폴론의 그림에 없어서는 아니된다: 저 절도있는 한정限定, 좀더 야생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난 저 자유, 조각가 신의 저 지혜롭기만 한 휴지休止. 그의 눈은 그의 근원에 걸맞게 “태양”과 같아야 한다.[5] 혹여 그 눈빛이 성을 내고 마뜩찮게 본다할지라도, 아름다운 가상의 숭엄함이 그에게 어리어 있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가 마야라는 너울에 사로잡힌 인간에 관하여 하는 말은, 의미의 핵심을 비켜서 아폴론에 관하여 적용하고 싶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집 416면: “격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에서, 사방으로 막막하기만 한 가운데, 산채만한 물결이 포효하며 치솟았다 내리꽂는 곳에서, 허술한 배를 믿고서 뱃사람이 일엽편주에 앉아 있듯, 그렇게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서 단 한 명의 인간이 개별화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를 의지하고 믿으며 고요히 앉아 있다.” 그렇다, 저 원리에 대한 흔들림없는 믿음과 저 원리principium에 사로잡힌 자의 고요한 좌정은 아폴론 안에서 가장 탁월하게 표현되노라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빛남”의 전 욕망과 지혜가 아폴론의 몸짓과 시선으로 그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우리에게 말을 한다면서, 다름아닌 아폴론을 두고 개별화의 원리라는 장려한 신들의 영상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같은 대목에서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이 그것의 형태들 중 어느 한 형태에서 하나의 예외를 겪는 듯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현상의 인식 형식들에서 아연 길을 잃을 때에 인간을 사로잡는 무시무시한 소름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다. 우리가 그 소름의 순간에,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가 바로 그렇게 파열될 때에 인간의 가장 내밀한 근저로부터, 그렇다, 자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에 젖은 황홀을 받아들인다면, 바로 전에 도취의 유비를 통하여 소개된 디오뉘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보게 된다. 모든 근원적인 인간들과 민족들이 찬가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취적인 음료의 영향 때문에, 혹은 욕망으로 차올라 온 자연을 돌파하는 봄의 위력적인 접근으로 하여, 디오뉘소스적인 움직임이 깨어난다. 이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주체는 완전한 자기 망각에 빠져든다. 독일의 중세에서도 동일한 디오뉘소스적인 위력으로 점점 세를 불리는 무리가, 노래하면서 춤추면서,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녔다: 바로 그 성 요한제와 성 비투스제의 춤추는 무리들[6]에게서 우리는 소아시아와 바빌론, 문란한 사카이아[7]에 전사前史를 두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박코스 가무단들을 재발견한다. 경험이 모자라서 혹는 어리석어서, “민족의 질병들” 같은 현상들을 자기네의 건강함이라는 감각으로 비웃거나 애통하면서 외면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 불쌍한 자들은 디오뉘소스 열광자들의 작열하는 삶이 노호怒號하며 그들 곁을 지나칠 때에 그네들의 그 “건강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체처럼 창백하고 허깨비 같은가를 알 턱이 없다.

디오뉘소스적인 것의 마력으로, 인간과 인간의 유대만 다시 묶이는 것이 아니다: 생소한, 적대적인, 혹은 억압된 자연이, 잃어버린 아들,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제전을 벌인다. 대지는 자원하여 선물을 내놓는다. 그리고 암벽과 황야의 야수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디오뉘소스의 마차는 꽃송이와 화관으로 뒤덮힌다: 그 멍에를 쓰고 표범과 호랑이가 달린다. 베토벤의 “기쁨”의 환희송[8]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변모시키라, 수백만이 흠뻑 젖어 티끌로 화하여 사라질 때면 상상력을 발휘하여 뒤처지지는 말라: 그러면 디오뉘소스적인 것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이제 인간들 사이에 필요냐, 자의냐 아니면 “버릇없는 풍조”냐를 확정하던, 요지부동 적대적이던 온갖 한정이 무너진다. 이제, 세계 조화의 복음으로, 각자가 옆사람과 하나가 되고, 화해하고, 융화됨을 느낄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라는 너울[9]이 갈래갈래 찢기어 신비로운 원초의 일자das Ur-Eine 앞에서 산산히 팔랑거리기라도 하듯, 하나임을 느끼기도 한다. 노래하면서 춤추면서 인간은 더 높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걷기와 말하기를 잊었으며, 춤을 추어 허공으로 둥실 비상하려는 참이다. 그의 몸짓으로부터 마력이 발설된다. 이제 동물들이 말하는 만큼, 대지가 젖과 꿀을 내는 만큼, 그로부터 뭔가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나온다: 그는 신이라고 느낀다, 신들이 꿈 속에서 거닒을 보았을 때처럼 황홀해지고 숭고해져서 이제 그 자신이 거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작품이 된다: 온 자연의 예술적인 위력이, 원초 일자의 지고한 희열과 평온을 맞아,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에서 계시된다. 더없이 귀한 점토,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대리석이 여기에서 빚어지고 다듬어진다, 인간이 빚어지고 다듬어진다, 그리고 디오뉘소스적인 세계예술가의 끌질에 맞추어 엘레우시스의 비의의 외침이 울린다: “수백만이여, 너희는 부복하느냐? 세계여, 너는 창조자를 예감하느냐?”[10]

  1.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제5권 1169행 이하 []
  2. 리하르트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노래의 명인들>(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3막 2장. 여인 하나를 두고 광기어린 소동이 온동네 소란스럽게 벌어진 다음 날 아침, 간밤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는 기사 발터 폰 슈톨칭에게 노래의 명인 한스 작스가 하는 말. []
  3. Aus Schopenhauers handschriftlichem Nachlaß, hrg. J. Frauenstädt (Leipzig 1874), 295면. 그리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집 1권 5절 참조 []
  4. 아폴론의 별명 중 하나는 포이보스Phoibos이다. 희랍어로 포이보스는 빛을 뜻하는 포스phos를 어원으로 한다 []
  5. 플로티노스, Enneades, I.6.9:

    눈이 태양을 닮지 않았다면 전혀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며,
    영혼이 아름답지 아니하다면 아름다움을 볼 수 없으리라

    괴테, ‘Zahme Xenien’ III:

    눈이 태양과 같지 아니하기라도 하다면
    태양을 전혀 보지 못할 것이요,
    신 고유의 힘이 우리 안에 없기라도 하다면
    어찌하여 신적인 것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오?

    이처럼 동일한 것을 통하여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는 인식론은 엠페도클레스까지 추적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 딜스-크란츠 단편 109:

    우리는 흙을 가지고 흙을 보며, 물을 가지고 물을,
    천공을 가지고 신성한 천공을, 보거라 불을 가지고 태워버리는 불을,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슬프기만 한 미움을 가지고 미움을 본다.

    []

  6. 세례자 성 요한 축제는 하지(6월 24일) 무렵에 열렸기 때문에 여러 민간신앙이 이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간질은 ‘요한 질병’Johanneskrakheit이라고 불렸다. 14세기와 15세기에 특히 라인 강과 모젤 강 유역, 네델란드 등지는 ‘요한 춤’의 무리로 몸살을 앓았다. 비투스의 날이나 요한의 날에 이르러서야 그 질병들이 잦아들었다. 성 비투스는 304년경 시칠리아에서 죽은 순교자로서, 무엇보다 간질, 히스테리, 광견병, 광기를 막아주는 수호성인이었다. []
  7. 천랑성Sirius의 여신 이쉬타르Istar를 기념하는 바빌로니아 축제에서 기원한다. 칠팔월에 열린 노예들의 축제였던 듯한데, 사카이아 기간에는 노예들이 주인노릇을 했으며, 사형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통치좌에 오르고 만취한 상태에서 후궁을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축제 기간이 끝나면 사람들은 그 범죄자를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처럼 관계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사카이아 축제가 소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열광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
  8. 베토벤은 d단조 9번 교향곡, op.125, 제4악장에 기존의 틀을 깨고 합창을 도입하였다. 이 합창의 가사는 실러의 찬가 <기쁨을 맞아>(An die Freude)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9.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집 2권 3절에서 “인도인 태고의 지혜”를 소개하면서 이 마야에 대하여 언급한다: “마야, 미혹의 너울, 이것이 명멸자의 눈을 두르고 있어서 [그 상태로] 세계를 보게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계에 관하여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도 못하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세계는 마치 꿈과도 같거나, 혹은 멀리서 거니는 자가 물이라고 간주하는, 모래사장에 쏟아지는 빛과도 같거나, 혹은 한 마리 뱀이라고 보는, 버려진 밧줄과도 같기 때문이다.” []
  10. 실러, <기쁨을 맞아>, 33-34행. 앞서 인용된 “버릇없는 풍조” 역시 이 찬가에서 나온 것이다. []

«비극의 탄생» 제1장”에 대한 4개의 댓글

  • 기존에 출간된 니체 번역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다름아닌 니체 저작의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해서다. 각 장마다 대표적인 것 두어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1.
    . . .wie sie Hans Sachs in den Meistersingern giebt:
    Mein Freund, das grad’ ist Dichters Werk,
    dass er sein Träumen deut’ und merk’.
    Glaubt mir, des Menschen wahrster Wahn
    wird ihm im Traume aufgethan:
    all’ Dichtkunst und Poëterei
    ist nichts als Wahrtraum-Deuterei.

    강대경 역 ::
    이는 한스 작스가 직장시인(職場詩人)이란 노래 속에서 말한 바와 같다.
    친구여, 자기의 꿈을 해몽하여 적어두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의 일이로다.
    믿을지어다, 인간의 가장 진실된 상념想念은
    꿈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모든 노래와 시는
    진실의 꿈의 해석에 불과한 것을.

    이진우 역 ::
    이는 한스 작스가 직장가인(職場歌人)이라는 노래에서 전해준 가르침과 같다.
    나의 친구여,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기억해두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나를 믿어라, 인간의 가장 진정한 환상은
    꿈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모든 시 예술과 시작은
    다름 아닌 예언적 꿈의 해석이다.

    => 두 번역자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극 < 뉘른베르크의 노래의 명인들>(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기이하고 한스 작스의 말을 높힘말이 아닌 예삿말로 옮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성실은 성 요한제와 더불어 언급하고 있는 성 비투스 축제를 두 번역자가 각각 “화이트제”, “파이트제”로 옮긴 데에서도 드러난다.

    &nbsp;

    2.
    Jetzt ist der Sclave freier Mann, jetzt zerbrechen alle die starren, feindseligen Abgrenzungen, die Noth, Willkür oder “freche Mode” zwischen den Menschen festgesetzt haben.

    강대경 역 ::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과 자의와 뻔뻔한 작태들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한 적대적 거리를 모두가 청산해 버린다.

    이진우 역 ::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 자의 혹은 “파렴치한 유행”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고하고 적대적인 모든 구분들이 부서진다.

    =>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오역이다. 이런 대목에서 니체가 곡해된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이제 인간들 사이에 필요냐, 자의냐 아니면 “버릇없는 풍조”냐를 확정하던, 요지부동 적대적이던 온갖 한정이 무너진다”로 옮겨야 한다.

    &nbsp;

    3.
    Der edelste Thon, der kostbarste Marmor wird hier geknetet und behauen, der Mensch, und zu den Meisselschlägen des dionysischen Weltenkünstlers tönt der eleusinische Mysterienruf:

    강대경 역 ::
    가장 값진 대리석이 이제 끌에 쪼여 세워지고 디오니소스적 우주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추어 가장 고귀한 음조가 울려퍼진다.

    이진우 역 ::
    여기서 가장 고귀한 점토가 가장 값진 대리석, 즉 인간이 반죽되고, 다듬어진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세계 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춰 . . .

    => 강대경은 Thon을 잘못 번역했고, 이진우는 비문을 썼다.
    이 대목은, “더없이 귀한 점토,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대리석이 여기에서 빚어지고 다듬어진다, 인간이 빚어지고 다듬어진다”로 옮겨야 한다.

    고싱가 숲
  • 독일어를 잘 몰라서 카프만이 번역한 영역본으로 [비극의 탄생]을 읽고 있습니다. 1장 마지막 단락에서 “너울이 갈래갈래 찍기어 신비로운 원초의 일자(das Ur-Eine)”로 번역하셨는데 ‘das Ur-Eine’란 표현이 몇번 반복되는 것을 통해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단어인 듯 싶습니다. 이 표현을 ‘원초의 일자’로 번역하셨는데 카프만은 ‘the primodial unity'(원초적 하나됨)로 번역했습니다. 선생님의 번역을 따르면 ‘das Ur-Eine’가 의미하는 것이 마지막부분에 나오는 ‘디오뉘소스적인 세계 예술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여겨지나, 카프만의 번역을 따르면 축제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원초적 하나됨’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독일어를 잘모르기 때문에 전,후 문맥만 놓고 보자면 카프만의 해석이 좀더 니체가 드러내고자 하는 뜻에 부합한 듯 보이는데(그 문자적 의미야 어떻든) 그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니체를 가지고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인데,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메일을 통해서도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 있는지요?

    조호영
  • ‘일자’라고 번역한 이유는 고대철학부터 유래한 개념임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번역하자면, ‘원초의 하나’라는 뜻이겠지요. 영어의 unity에 상응하는 독일어는 Einheit(하나됨, 통일)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이런 역어의 분별은 그다지 중요한 듯하지 않습니다.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에 따르자면, ‘세계 예술가’에 의하여, 혹은 ‘세계 예술가’ 안에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것이겠으므로, ‘하나’가 전자를 가리키느냐 후자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논의할 실익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독일어를 잘 모르신다면, 다른 모든 것 젖혀놓고 독일어만 하시기를 권합니다. 더 나아가 정말 니체를 전공하시겠다면, 문학과 예술, 희랍어, 라틴어도 공부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방명록에서도 질문하신, “수백만이여, 너희는 부복하느냐? 세계여, 너는 창조자를 예감하느냐”에서 창조자는 당연히 ‘디오뉘소스적 세계 예술가’이겠지요. 이런 정도의 의문사항은 질문을 통하여 해결하기보다는 홀로 스스로 음미하고 고심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조호영 님께 지속적인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고싱가숲
  • 답변 감사합니다. 그리고 충고하신대로 독일어와 문학, 예술, 다른 언어 공부등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니체 연구의 가장 어려운 점이 우리가 니체만큼의 문학적, 예술적 소양과 언어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 간격을 메꾸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조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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