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떨어진다, 새가 날아든다 — 동학농민전쟁의 유적지에서

부안 백산
백산에 봄나물이 움튼 것을 보고 마음은 들뜨지만, 갑오년의 봄날에 이 길을 타고 오른 것은 다름아닌 죽음보다 강한 열기와 분노였다.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모를 비가 내리고 있다. 남도로 향하는 버스의 차창은 내내 습기가 가득하여 만경강과 김제평야를 바라볼 수 없다. 물기를 닦아내며 밖을 바라보려 한들 희부연 안개가 강과 들녘을 낮게 보듬고서 보여주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부안의 백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이제 내리는 비가 들녘을 포근히 감싸안는 봄비인 것을 알겠다. 봄동나물이라며 조용히 탄성을 지르는 일행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반가움을 출렁 파급시킨다. 가무잡잡한 흙길은 봄기운을 흠뻑 머금고 있어 그 들뜨는 흙을 밟아주지 않으면 안될 듯, 보리밭을 꾹꾹 밟듯이 밟아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시라.

산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낮고 지세가 안온하다. 동네 언덕만 같다. 이 언덕에 무리지어 올랐던 갑오농민들의 옷차림에서 유래한 이름 백산. 이 낮은 산에 동학창의를 기리려고 기념물을 조성한들 이 ‘백산’이라는 무형의 이름보다 소중하지는 않으리. 탄압으로 인하여 마침내 분출되고 만, 죽음보다 강한 열기와 분노를 형상화한 이름 백산, 마음이 에리도록 가파르고 높은 산.

 

가파른 산에 올라 김제평야를 바라본다. 봄비 내린다. 시야가 풀풀 날리는 안개로 가득하다. 이제 초목들이 애송이처럼 푸릇함을 띠기 시작한 때이니 그 푸릇함은 시야에 들어오지 못한다. 백산에서 바라보이는 들녘과 낮은산의 흐름은 비가 내리는 바다가 검푸른 물결을 유장하게 출렁이는 듯하다. 산야의 앉고 서는 모습이 어쩐지 부안의 녹색혁명처럼 일상을 거스르고 거대하게 일어섰다가 고요하게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닮았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의 돌파력은 오늘날 동일한 땅에서 또 되풀이되고 있는 것인가. 일상으로 돌아가 앉아 있는 부안 군민들의 분노는 현재 죽산을 이루고 있을 터, 이를 보지 못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부안 산야
백산에서 바라본 봄비 내리는 산야.
부안 산야의 앉고 서는 모습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의 움직임을 닮아 있다.

점심식사를 위해 들렀던 식당 입구에는 “핵폐기장 반대”라는 연노랑 깃발이 걸려 있다. 녹두꽃과 같은 빛깔이다. 예술적 힘은 바로 이러한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리. 이 진정성을 결여한 조형물들은 제아무리 뛰어나도 한갓 치장물에 지나지 않으리.

동학농민전쟁의 계승자들답게, 지금 부안은 집집마다 녹두꽃 깃발을 간직하고 있을 듯하다. 그들은 이 깃발을 들어올리며 무슨 열기를 쏟아냈던 것일까. 이 지역 전체를 휩쓸어버린 열화의 불길은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화인(火印)을 찍어버린 것일까. 훗날 이 깃발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로 남아 있을 것이며, 이 깃발을 떠올리는 상징물을 접하게 될 때 어떤 심리적 반응을 하게 될 것인가.

>부안사태
한겨레신문의 부안사태 보도사진

군민 자치의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국가체계의 폭력성을 통쾌하게 까발린 그들은 지금 승리의 고지를 향해 육박하고 있다. 그들은 운명처럼 녹두꽃의 노랑색을 기치로 내세우고 역사의 최선두에 다시 등장하였다. 그들은 또 다시 패배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까지의 아픈 역사를 전복시키며 기적의 승리를 얻어낼 것인가.

부디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마소서. 이제까지의 역사만으로도 당신들은 생의 비밀을 터득할 수 있는 아픔을 충분히 겪었던 것이니, 부디 반복하지 마소서. 동학농민전쟁의 아픔도 채 씻기지 않은 마당에 패배가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당신들의 깃발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승리의 상징물이 되어야 합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이렇게 낮은 음조의 노래가 또 다시 창조되어서는 안됩니다.

 

은선리 삼층석탑. 동행한 선생님의 조용한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백석의 시구에 어울리는 백제계열의 석탑, 밀어내어도 밀어내어도 자꾸만 동학농민전쟁과 연결된다는 석탑.

은선리 삼층석탑
은선리 삼층석탑, 폭력적인 개발의 환경을 말없이 받아들여 답사객의 낮은 숨결을 위로한다.

석탑이 서 있는 은선리의 한편 산은 채석장이 들어섰는지 산등성이 절반이 흉칙하게 깎여 있다. 그리고 고색의 석탑을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선 전봇대가 보는 이의 시선을 까끌까끌하게 만든다. 청보리가 무성했다는 몇년 전과는 달리 이제는 허름한 겨울논만이 주위에 펼쳐져 있다. 이처럼 석탑을 홀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까.

그러나 김제평야 들녘에서 나고 자란 숨결들을 이보다 더 잘 대변하는 경우가 과연 또 있을까. 동학농민전쟁의 민요처럼 낮고 느린 음조로 흐르는 숨결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알기에 스스로 흩어져 허름한 숨결들, 홀로 선 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자신을 수려하게 꾸밀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한다. 살살 보듬고 있는 자신의 연약한 영역을 무턱대고 침범해 들어오는 외부의 폭력조차 그저 하나의 자연현상처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지속적으로 물러서고 있는 숨결들, 하지만 그들은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거대한 물결이 되어 만석보를 터뜨렸던 분노와 슬픔의 후예들이다.

지금은 홀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은선리 석탑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으리라.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은선리 석탑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확산하는 심리적 상승을 겪고 놀라워하리라. 심리적 상승 이후 한없이 느리게 한없이 치밀하게 밀려드는 동질감을 불현듯 감지하고서 이 석탑 앞에 우두커니 서는 분들도 있으리. 그분들은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되리: “아득한 옛 시절부터 저는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제야, 이렇게 늦게서야 당신을 알았습니다. 어찌 이리 늦게 당신에게 돌아왔을까요. 늘씬하게 상승하는 당신 내면의 혁명탑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살아 생전 결코 받지는 못하리라 여겼던 위로를 당신한테서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디어 황토현,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던 곳. 깔끔하게 정돈된 계단을 딛고 오르면 갑오농민혁명탑이 황토현 유적지임을 표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전봉준의 동상과 부조들. 현대의 유형적 치장물들은 오히려 동학농민군의 분노와 환희와 서러움을 덮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무형 언어는 그토록 크고 위대해서 황토현에 오른 순간 그 누구도 흥분을 억누르지는 못할 것이다. 답사처에 오기 전 제아무리 정성을 들여 마음속에 동학농민전쟁을 그려보더라도 이곳에 올라 얻게 되는 한순간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은 국보급의 역사적 유물을 대면할 때의 흥분 이상이다.

거기가 관군들 밥해 준 곳은 내촌이라고 이쪽 내머립니다. 그리고 저쪽 상악, 중악, 하악 쪽은 동학군들 밥을 해다 줬어. 이렇게 양쪽에서 밥은 해다 주었는디, 관군들은 대덕산이라고 거기서 진을 치고 동학군은 얕차운 가정리 위에 가서 진을 쳤는디 [관군이] 자기들이 높은 디 진을 치고 무기도 좋고 헌게 자만해 버렸어.

— 무장의 농민군 접주로 1차 기병 때부터 전봉준을 보좌하였던 고순택 손자의 증언

그러나 황토현 전투를 전해주는 후손의 증언은 관군과 동학군 양쪽에 이편 저편 마을에서 밥을 해다 주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있다. 밥과 관련한 이 증언은 황토현 전투에 대한 후손들의 감각적 기억이 역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임을 말해준다. 역사와 일상이 겹쳐 있는 이들은 그 역사에 대하여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숨기고픈 자신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며, 그 상처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개의 답사객은 황토현에 올라 억누를 수 없는 흥분과 감격을 맛볼 수도 있겠으나, 동학농민전쟁의 후손들은 이곳 황토현을 오르는 것 자체가 함부로 벌이는 모독 행위인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황토현 기념 조형물들 중에는 시가비(詩歌碑)가 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하늘은 어쩌다 이런 노래를 남겼는가. 학자들은 ‘파랑새’, ‘녹두꽃’, ‘청포장수’ 등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리저리 대입해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설득력을 잃는다. 그들은 관군과 동학군에게 밥을 해다 주었다는 등등의 근원적인 행위를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과부가 되셔가지고 무슨 기술을 가지셨냐하면 쪽물 기술을 가지셨지요 […] 그걸로 생계를 유지했어요. 쪽물로 물들이고, 동네 사람들 쪽물허는 집에 가서 물도 쳐준 게 말하자면 기술자지요. 염색 기술자. 아버지까지도 할머니한테 배워가지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농사마지기나 짓고해서 우리를 키웠지요 […] 거기서 새파란 물이 나오는데, 시집갈 양반들 이불 홑데기도 물들이고, 모시 같은 것을 물들이면 참 물이 곱고, 그 베가 겁나게 찔겨요. 중간까지도 그 물들인 이불이 있었는데 다 없애 버렸어요.

— 고순택 손자의 증언

 
그런디 그거 다 뺏겨버렸어요. […] 우리 할아버지가 잽혀간게 삼십 호가 다 부잔디 싹 충청도로 피난가서 삼년 만에 온게 암 것도 없어. 그래서 여기와서 품팔아 먹고 살았어. 시신을 못 찾았소. 어쩔 것이요. 일본놈들이 문가들은 싹 잡어 죽인다고 하는데.

전부가 농사를 안 짓는 것은 아니지만은 이 당대 내에서는 농사를 안 짓습니다. 왜냐하면 이 산과 들이 전부 덕중씨 땅이었습니다. 근디 그 땅을 뺏기고 나서는 결국은 그때 그 땅이 없었드라면 우리가 이렇게 집중폭격을 안 받을텐데, 그 땅이 있어서 이렇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후손이 땅이 무신 필요 있냐? 그런 상탭니다. 이 어른은 직업이 목수가 직업입니다. […] 이 동네에서는 그런답디다. 즈그 한아씨 때 갑오 동학에 살림 망하고는 저 사람도 미쳤는가 빌빌 돌아다닌다고 그런답니다.

— 무장의 농민군 접주 문덕중 가문 관련 증언

새야 새야 시가비
황토현 유적지에 서 있는 시가비(詩歌碑)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였던 이들은 몰살당한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도 처참하여 차라리 모르니만 못하다. 그들의 죽음 이후 일제에 의하여 농토마저 깡그리 빼앗기고 유리걸식 하다시피 생을 이어가야 했던 집안들, 바로 그들이 울고가는 청포장수이리라. 그렇다면 파랑새는 청나라군도 일본군도 관군도 아닐 것이다. 녹두꽃은 전봉준 장군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이상일 것이다. 그들은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언어를 알고 있는 것이다.

봄날, 대지 위에 파릇파릇 풀포기 움트던 날, 바람결에 청보리밭 수그리며 물결치던 날, 시야를 가로막는 높은산 하나 없어 평야의 들녘이 온통 녹두빛 물결에 휩싸이던 날, 홍건히 부드럽게 젖어드는 연노랑 빛깔의 녹두꽃처럼 듬성듬성 무리지어 녹두빛 들녘을 점유하였을 갑오년 봄의 농민들 — 갑오년 당시의 아낙네들과 어린아이들은 이 역사적 광경을 지극히 일상적인 처소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정보는 동학농민군의 세세한 전투일지와 역사적 위상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해도, 그들의 가슴에는 그 풍경이 얼룩처럼 선명히 남아 있어, 낮은 음조로 그 풍경을 고이 보듬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동학농민군 패배 이후 곧이어 일제 식민지 시대, 해방이후 친일파 제거의 실패, 군사정권의 독재를 거쳐야 했던 우리나라에서 동학농민전쟁 후손들은 괴이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을 깨기까지의 역사마저 또 하나의 전쟁이었으니, 그 침묵의 전쟁 내내 후손들을 위로하였던, 그들 스스로 ‘참으로 뜻 있는 노래’라고 받아들이는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과연 무엇인가.

영원히 논리화될 수 없는 음악의 선율처럼,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가사마저 영원히 논리화되지 못할 것이다. 말로나 선율로나 그 노래는 끝끝내 풀리지 않는 위대한 신비로 남을 것이다. 이 노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동학농민군 후손들 중 한 명인 김세진은 80년대 대학시절 봄날에 분신자살을 함으로써 최현대사까지 그 비극의 노래를 연장시켰다.

꽃이 떨어진다
꾀꼬리가 나빌 채 간다
(花妥鶯捎蝶)

— 두보의 ‘重過何氏五首一’에서

전란 속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의 유랑하다시피 하였던 두보는 과연 그 이력 때문에 비장미를 그려낼 줄 알았나 보다. 아마도 이 시구가 시공을 뛰어넘어 동학농민전쟁 민요에 가장 잘 호응하는 시구가 아닐런지. “새야새야 파랑새야”와 두보의 시구가 드러내는 것은 다름아닌 악(惡)의 신비가 아닐런지. 참혹함이 너무 서정적이어서 아름답다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과연 이러한 노래와 시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감격적인 승리의 현장 황토현에 서 있노라면, 역설적으로 승리의 노래는 찾을 길 없고 비극의 노래만 확인된다. 그리고 또 순간순간 분노가 치민다. 이 분노는 과연 무엇을 향한 것일까. 역사? 인간의 악마성? 국가체계의 폭력성? 그러나 나는 이 분노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비극의 노래를 이해해야 하리. 이른 나이에 생의 비극성과 물러섬의 언어를 알아버렸으므로, 노래하는 법을 먼저 배우리:

꽃이 떨어진다, 새가 날아든다.
새가 날아든다, 새가 날아든다.
당신의 텅 빈 들녘으로 새가 날아든다. [2004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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