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죽음

알프레트 아인쉬타인의 모차르트 연구서는 ‘인간’편과 ‘작품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편의 첫 장은 “여행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여행객 모차르트! 어린시절 첫 유럽여행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마차에 올라탄 소감을 발랄한 글머리로 하고 있으며, 여행을 제한하였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에게는 그토록 반감을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여행이 드물었던 빈 시절에는 하릴없이(하릴없이? 그러나 아닙니다) 도심과 교외를 번갈아 이사라도 해야 했던 모차르트는, 여행이라는 생소한 공간으로의 이동과 거주지의 변경이라는 日新의 혁신을 많이도 그리워했나 봅니다. 그는 여행을 통하여 전 유럽에 명망을 드높이기도 했지만 여행길에 가장 친밀한 어머니를 잃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마차를 타고 가면서 작곡을 하였던, 異 속에서 親을 발견한 여행객, 지상에 온 손님이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이미 외국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홀로 지켰던 그는 타지에서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위독함을 계기로 죽음에 관한 명상을 편지에 담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죽음은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므로, 저는 지난 수년동안 인간의 이 진정한 최상의 벗과 친숙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죽음의 그림>은 저한테는 더 이상 섬뜩한 모습을 전혀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대단히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 하느님께서 <죽음>을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축복을 여는 열쇠>로 알아볼 기회를 얻는 행운을 제게 선선히 허락하셨으니, 저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1787.4.4 빈에서. 괄호는 역자)

현실의 부모님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에게 드러난, 죽음을 진정한 벗으로 바라보는 모차르트의 이 시선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시공간을 여행의 시공간, 온통 나의 것이 아닌 것들에 둘러싸여 있기에 나의 열망의 진의를 확인할 수 있는 시공간, 새로와지는 시공간으로 재편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섬광처럼 다가오면, 즉 전적인 他者가 가장 친한 벗으로 다가오면, 성서의 말씀대로,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에서 물건을 꺼내러 내려오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뒤돌아서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찰나에 전면 재조명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깊이를 지닌, 죽음에 대한 이 음미를 통하여, 모차르트는 음악적 죽음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집니다.

 

음악적 죽음이라 함은, 때마다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다시 소진시켜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예술적인 여정입니다.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허무한 이 여정은 온갖 것을 사랑하면서 또 온갖 것의 반대물을 사랑하는 것이며, 오로지 자기 자신과 환영같은 꿈만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온갖 것을 그 극까지, 그 죽음까지 밀고 나가 모든 가능성을 소진시키는 모차르트는 그 죽음과 함께 자기 자신도 죽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작품이 탄생합니다. 천재의 영상은 이처럼 극한치의 창조와 영점으로의 소진 사이에서 돌아가는 필름이며, 죽음으로의 영원한 회귀입니다. 가능성을 끊임없이 해체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길, 즉 죽음의 길은 온갖 가능성을 극복하고서 개선하는 영웅의 길, 귀향, “참으로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곳”으로의 귀환입니다.

인간의 풍경 속에 은폐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협 지점을 남겨 놓지 않고서 일직선으로 가상(假像)을 향하여 둥싯 떠올랐다가 다시 죽음으로 급전직하하는 모차르트 자신은, 죽음을 딛고 일어섰던 가능성을 끝내 환영과 꿈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리움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음악적 죽음, 가능성이라는 환영, 음악, 다시 음악적 죽음 ― 천재의 운동은 우리가 추적할 수 없는 궤적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다만 혜성의 꼬리처럼 끊임없이 흔적을 지우며 사라지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죽음을 향한 전광석화같은 포물선을 아스라히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현실태)의 주제를 변주하는 환영(가능태)의 소나타를 들으면서 그 누구도 전해준 적 없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아니 인류의 역사 이래 그 누구도 몰랐던 가능성의 영토를 거닐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게 우리 삶에서 과연 가능할까 하고 던지는 물음은 비단 어느 한 사람만의 물음이 아니라 아마 우리 모두의 물음일 것입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음악적 정신의 발견, 이제까지 실현되지 못했던 꿈의 실현!

죽음의 섬뜩함을 극복할 수 있다면
지상에서 하늘로 사뿐 날아오르리.
(마술피리 2막 27장)

우리의 시선을 내내 지상에다 붙들어 두다가 홀연히 하늘로 향하게 하는 모차르트 음악은 이처럼 천재만이 추진할 수 있는 운동과 그 운동이 불가분 결부된 인간 삶의 심대한 비밀에 대하여 누설합니다. 세상의 (무섭기까지 한) 어두움과 (숨을 멎게까지 하는) 아름다움 — 모차르트와 풍경, 모차르트와 음악적 죽음은, 죽음이 편하고 아늑하다고 말하며,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우리 삶이 아름다운 환영, 즉 음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피리]소리의 위력으로 기쁘게
죽음의 어두운 밤을 답파(踏破)하고.
Wir wandeln durch des Tones Macht
Froh durch des Todes düstre Nacht.
(마술피리 2막 27장)

죽음을 답파하고 가능성의 환영을 찾아 세상을 유랑하도록 이끄는 그 피리는 다름아닌 마법의 플루트, 마술피리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가상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승리하였으며,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지속적인 죽음의 되풀이 끝에 최종적으로 죽음을 벗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자신의 음악을 저 산 너머 사랑과 그리움으로 남겨 둔 채… 모차르트의 죽음은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했던 자기 자신으로의 궁극적인 회귀이며, 수없이 죽음을 딛고 솟아오르던 꿈과 환영의 영원한 해체입니다. 죽음은 “참으로 아늑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삶은 삶 자체로서 이미 음악이요 사랑이라고 전언합니다. 하오니, 그 죽음은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며,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쉬타인의 명언처럼, “모차르트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숭고한 지성도 상상도 아니다. 이 둘이 앙상블을 이룬다 해도 천재를 만들지는 못한다. 사랑! 사랑! 사랑! 이것이 천재의 영혼을 만든다.

고이 잠드소서, 우리에게 슬픔과 기쁨과 격정을 가르쳐주셨던, 그래요 아름다움과 사랑을 가르쳐주셨던, 이 지상에 오신 손님, 모차르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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