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봉우리에 꽃이 빼어나 숲에 향을 흘리니 — 양양 진전사터에서

양양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터 입간판을 지나니 시야 한 가운데로 저 멀리 시든 잔디빛 저수지 둑이 보이고, 그 위로 설악의 대청봉이 까마득한 거리 저편에서 환영처럼 희다. 한가운데 하나의 소실점처럼 보이는 대청봉과 둑 양편으로는 잔설로 등어리를 식히고 있는 설악산 자락들, 오호라, 정오의 태양 아래 청결한 물빛을 띠고 철렁 펼쳐져 있다. 유연하게 휘어가는 길을 타고 굽이굽이 달려드는 탈곡된 겨울 논은 또 봄날을 기다리며 그 짚가리 색을 고이 썩히고 있으니, 진전사터 가는 길은 아득한 옛 시절부터 전수된 인간의 들녘인 것만 같다. 수천년 동안 저 들녘에 무슨 일이 있었으려나. 순환적인 생의 풍경이 있었으리. 갈빛 논과 검푸른 물빛 산자락과 만년설같은 대청봉, 이 아름다운 그림도 반복되고 은둔도 반복되었으리.

진전사 삼층석탑
억새풀 너머 진전사터 삼층석탑. 설악의 산자락도 폐사지의 따스한 들녘도 이 아담하고 야무진 석탑 하나의 기운에 넋을 빼앗긴 듯하다.

폐사지를 찾아오는 손들에게 아득한 시절의 인간 들녘이 보이자마자, 둔전리 마을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모든 풍경은 일거에 사라지니 잠시 환영처럼 비쳤던 저수지 둑과 대청봉을 머리 속에 꼭 집어넣고서 그 방향을 향해 가야 한다. 여느 시골마을과 다름없는 마을길을 통과하면 저 멀리 갈빛 억새풀 우거진 들녘에 석탑 한 기가 검푸른 기상을 드날리며 탄탄하게 서 있다. 남북으로 훅 펼쳐진 크나큰 산자락의 품도, 넓고 따사로운 폐사지 들녘도, 그 아담하고 야무진 석탑 하나의 기운에 온통 넋을 빼앗긴 듯하다.

새해 들어 벌써 두 번째 찾아온 진전사터. 대단히 짧고 대단히 깊은 벗나무 길 앞에 서면 약간의 거리를 띄우고 조용히 선보이는 석탑의 탑신. 홍예문같은 벗나무 아래 공간을 거니는 동안 탑신이 점점 사라지더니 계단 밑에 이르러서는 석탑의 상륜부 언저리만 슬쩍 비친다.

이제 계단을 오른다. 다시 석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단 한단 드러나는 석탑의 강인함에 오르는 이의 발걸음마저 바짝 긴장된다. 흡사 사자의 아귀에 삼켜지듯 석탑의 턱밑으로 강렬하게 빨려드는 느낌인데, 석탑의 선 하나 건드리지 않고 딱 상륜부 위로 홍예처럼 우우 드리워진 벗나무 가지들은 실상 너무 유려하고 너무 야들야들하다.

진전사터 진입로는 누하진입하여 대웅전 뜨락에 들어서는 구조와도 같다. 낮은 자리에서 석탑을 가파르게 올려보는 구조이므로, 정작 옥개석에 어린 햇살은 잘 보이지 않고 옥개받침의 그늘진 선이 깊이 패여 보이며, 몸돌의 부피 또한 지붕돌에 가려져 얇게 보인다. 그런데다 미려함을 선보이지 않고 간결하기 짝이 없는 민무늬 정면이다. 그리하여 강렬한 흡입의 과정이 한층 한층 깊어지다가 어느 순간 일층 몸돌의 석불이 불쑥 떠오른다. 결가부좌의 남면 석불이다. 그리고 이내 기단부의 팔부중상. 둘러진 울타리만 없다면 아래 기단의 비천상도 둥실 떠오르리. 이 굵은 서사는 단 몇 걸음으로 완결되는 구조이므로, 진전사터 진입로를 오르는 이는 모름지기 유장한 호흡으로 최대한 느리게 상승하여야 할 일이다.

진전사 삼층석탑
산의 외피를 걷어내고 뼛빛 능선을 드러내는 설악의 잔설을 배경으로 검푸른 석탑은 강인한 기상을 내뿜고 있다.

석탑의 전신이 훌쩍 드러나더니 어느새 검푸른 화강암의 빛깔이 나그네의 몸을 파르르 감아돈다. 형형한 빛깔 자장에 끌려든 나그네의 발길은 스스럼없이 석탑을 배회한다. 지금은 긴박한 서사의 순간, 간절히 기도를 올리리.

“당신은 아득한 옛 시절에 완성되어 예까지 이르른 것이어니, 부디 당신 면목을 천천히 조금씩만 드러내소서.”

“단 한번의 완성으로 천고의 세월을 뚫어 버린 당신 면목을 홀연히 환영처럼만 보여주소서, 당신 면목은 그저 꿈처럼만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이상의 진면목은 바라지 않습니다.”

느릿느릿 배회하다 동편에 이르니 석탑 서편으로 잔설에 의해 능선이 완연히 드러나 있다. 희부연 잔설은 나무들이 그려놓은 능선을 거죽으로 만들고, 진정한 뼛빛 능선의 흐름을 보여준다. 뼛빛 능선은 부드러울 지점에서는 완연히 부드럽게 각질 지점에서는 완연히 각지게 선을 긋는다. 산의 외피를 걷어내고 골격을 드러내면서 설악의 자락은 옹골차게 진전사터 계곡으로 나리고 있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그 흐름을 차단하며 검푸른 석탑이 시야에 급부상한다. 갑자기 떠오른 석탑의 존재감으로 하여 이제 산의 뼛빛 능선은 어쩐지 허상적이다.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진전사터 삼층석탑은 크기에 상관없이 어느 존재보다 육중하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망실된 상륜부와 찰주를 머리 속에 그려보자면 석탑의 기상은 하늘 향해 극히 날렵하게 상승한다. 석탑의 이 무게감과 이 상승감을 공히 받아안은 지붕돌 전각의 탄탄한 수평선과 극미한 반전은, 빛을 감추고 은둔한 자의 미소와도 같다.

 
교종 일색이던 당대의 신라 불교에 선종을 도입한 도의선사의 은둔처. 진전사의 역사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비중이 있다. 최치원은 도의선사에 관하여 말한다:

문득 고요한 물이 잔물결을 잠재우고, 높은 산이 빛나는 햇살을 두른 듯한 사람이 대개 있었을 것이나, 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승려 道義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西堂의 奧旨를 보고서 지혜의 빛이 智藏禪師와 비등해져서 長慶 초(821년)에 이르러 돌아왔으니, 玄契[=禪法]를 처음 말한 분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남쪽을 향한 채 북쪽으로 달리려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높은 소망을 꾸짖었다. 이미 외우는 말에만 마음이 쏠려 [선종의 가르침을] 앞다투어 魔語라고 비웃는 까닭에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협소한 곳에 감추었는데, 동해의 동쪽(서라벌)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설악산)에 은둔하였으니 어찌 «주역»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으며, «중용»에서 말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더라도 회한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겨울 산봉우리에 꽃이 빼어나 禪定의 숲에 향기를 흘리니 덕을 사모하는 자가 산에 가득하였고, 사람마다 유순한 자 되어 골짜기를 나섰으니, 도는 폐해질 수 없으며 때가 그러한 뒤에 행해지는 것이다.[1]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일부
최치원이 문장을 짓고 직접 글을 쓴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오른편 첫줄에 “신 최치원이 받들다”는 글귀가 보인다.

불교에 관하여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고운 최치원은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을 찬술하면서 신라 선종의 역사를 약술하고 있는데, 위 인용문은 신라 선종의 시원인 도의선사의 진전사 은둔 수행을 서술하는 대목이다.

최치원은 당에서 신라로 돌아오자마자 헌강왕으로부터 지증대사의 비문을 찬술하도록 명을 받았다. 885년, 그의 나이 29세. 그는 각종 비문을 섭렵하고 글귀를 열람하여 보았으나, 문장들이 구태의연한 것을 확인하고는 “돌이 능히 말하지 못함을 알았다.” 그리고 “돌이 능히 말하지 못함”을 “道가 멀리 있는 것”과 동일하게 보았다.

찬술의 명을 받은지 8년 만에 비문을 완성한 그는 자신의 문장이 ‘돌이 능히 말하는 비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굳이 그 말을 꺼낸 것은 아닐까? 위 인용문에서만 살펴보아도, ‘고요한 물이 잔 물결을 잠재우다’, ‘높은 산이 빛나는 햇살을 두르다’, ‘겨울 산봉우리에 꽃이 빼어나다’ 등의 묘사력은 과연 그 확신을 엿보게 해준다.

최치원은 이 비문을 찬술하기 위하여 지증대사 문하의 행장뿐만 아니라 각종 선비(禪碑)를 찾아보았으며, 신라 선종의 역사까지 조사하였고, 이 비문의 완성에 8년의 세월이 걸렸으니까, 비문의 서두 부분에 도의선사의 생애를 약술하기 위하여 진전사를 직접 방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전사터 삼층석탑을 남겨두고 서편으로 잠시 산등성이를 오르면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도의선사의 부도가 서 있고 그 가까이에는 현재 발굴 중인 절터가 있다. 그 절터에서 앞산을 마주하면, 겨울 산봉우리의 빼어난 일면목을 볼 수 있다. 폐사지 앞의 겨울 산봉우리는 잔설과 함께 눈부신 햇살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최치원이 진전사를 방문하였다면 다름아닌 바로 이 겨울의 풍광을 보았으리라. 그리고 산봉우리 앞으로는 깊은 계곡이 흘렀으니 어느 지점에 고여들어 고요했던 물을 보았으리라.

진전사터 계곡과 산
도의선사 부도 바로 옆에는 발굴 중인 절터의 영역이 있다. 절터 앞 겨울 산봉우리는 밝게 빛나고, 그 사이로 깊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계곡물이 저수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 겨울 풍경은 천 이백년 전 도의선사 은둔지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의선사는 35년간 외국에서의 수행을 마치고 마침내 고국에 귀국한다. 그러나 당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서라벌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선법을 펼치기 위하여 변방인 이곳 설악으로 은둔한다. 은둔지에서 선법을 펼치다가 생을 마친다. 그리고 우리나라 부도의 시원을 이루는 도의선사의 부도가 진전사 서편 산마루에 건립된다. 수십년 뒤, 신라 선종의 역사를 지증대사 비문에 약술하기로 마음을 굳힌 최치원은, “돌이 말할 수 있는 비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도를 가까이 접하기” 위하여, 신라 선종의 시원이었던 도의선사의 은둔지를 찾아 추운 겨울날 길을 나선다. 마침내 설악의 은둔지 진전사. 최치원은 은둔지의 겨울 풍경을 맑은 시선으로 찬찬히 응대한다. 계곡의 찬물에서부터 산정 위의 햇살까지 전체 풍경을 오래도록 가만히 껴안은 채 은둔자 도의선사를 그린다. 그리고 문득 비문을 쓰기 시작한다, “문득 고요한 물이 잔물결을 잠재우고, 높은 산이 빛나는 햇살을 두른 듯한 사람이 대개 있었을 것이나, 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승려 도의는…” ― 고증될 수 없는 역사는 이렇게 흐르지 않았을까?

도의선사 부도
도의선사의 부도 상단. 겨울 산봉우리의 뼛빛 능선을 앞에 두고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 송림에 깊은 향을 흘리고 있다.

풍경은 역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주는가? 한 철학자의 말대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최치원은 눈부신 산 고요한 계곡의 묘사로 도입부를 장쾌하게 열어젖힌 뒤 도의선사가 이곳 설악에 은둔하기까지의 행적을 약술한다.

그리고 다시 진전사의 풍경을 끌어들인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설악의 설경을 보았으리, 아니면 잔설로 드러난 뼛빛 능선의 산봉우리를 보았으리. 그리고 그 눈부신 은빛 공간에 피어난 꽃을 보았으리, 또 그 흘려나는 향을 알았으리. 그 그윽한 경계 속에서 문득 도의선사의 생애가 떠올랐으리니, 마침내 “華秀冬嶺 芳定林”, “겨울 산봉우리에 꽃이 빼어나 선정의 숲에 향을 흘리더라”.

이 대목은 도의선사의 면목을 한 방의 은유로 드러낸 것이지만 어쩐지 진전사터 도의선사 부도의 직접 묘사에도 쏙 어우러진다. 석탑 형식의 기단 위에 8각원당형의 탑신부를 얹은 도의선사 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부도로 추정된다. 장식도 최소한의 수준이어서 상단 굄돌에는 보일듯 말듯 앙련이 은근히 새겨져 있다. 나머지 몇 가지 장식 또한 단촐하기 짝이 없다. 이 부도는 상단의 언어와 기단의 언어가 강하게 분리되어 있으므로 한 단씩 떼어놓고 보아야 제맛이 나는데, 그 중 상단만을 떼어놓고 보면 은둔자의 엷은 미소가 보이는 듯, 가공되지 않은 강미(强味)가 느껴진다. 그리고 나서 부도 상단을 남측의 설산과 송림 위에 겹치어 보면, 과연, “겨울 산봉우리에 꽃이 빼어나 숲에 향을 흘리고 있다”. 도의선사 부도 건립 시기는 그의 제자 염거화상의 부도(844년 건립)와 비슷하거나 그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치원이 진전사를 방문하였다면 이 부도를 보았다는 가정도 성립하는 것이다.

진전사터 발굴 개토제
1974년 진전사 삼층석탑터 발굴 개토제. 이때 발굴된 와편에서 “진전사”라는 사찰명이 발견되었다.

수백년의 세월 동안 긴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1974~75년도에 발굴된 진전사터. 1974년도 삼층석탑터 발굴 개토제 사진을 보자. 석탑 앞에 수박 몇 덩이 올려놓고는, 대표 한 명이 석탑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엄숙하게 목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무리들의 엄숙함과 만장의 휘날림 뒤로는 설악의 자락이 숲의 안개를 적묵하게 흘려내고 있다. 이 경건한 세계가 조형된 뒤 폐사지가 개토되고, 마침내 와편에서 “진전사”라는 사찰명이 발견된다. 그리하여 도의선사의 은둔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최치원의 관련 비문을 비로소 풍경 속에서 되비춰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그네는 또 이렇게 폐사의 대지에 우두커니 서 있고.

인간은 무슨 동물이기에 이러한 역사적 유물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절을 올릴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부활이 과연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일까. 폐사지의 와편을 수습하며 인간은 무엇을 수습하는 것인가. 또 우리는 어찌하여 일상을 떠나 폐사지의 풍경으로 들어가고자 하는가. “겨울 산봉우리에 꽃이 빼어나 숲에 향을 흘리다”는 명문을 온전히 받아안기 위해서인가.

최치원이 귀국 이후 첫 과제로 받은 지증대사 비문 찬술. 선사인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유장하게 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선종 전래사를 다루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그는 이곳 은둔의 진전사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은둔의 근원지를 적어도 마음만으로라도 찾아왔으리라. 그는 빛을 감춘 은둔의 선사에 미치지 못하는 유학자의 본분을 통절히 인식하고서, 겸허하게 풍경과 함께 선사의 생을 되살리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풍경의 장쾌함을 보았을 때 비로소 선사의 생을 이해했던 것이리라.

진전사터 가는 길은 은든의 근원지, 부도의 시원지로 가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최치원이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혹은 직접 응시하였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백년간 망실되었다가 수십년 전에 발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므로,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묻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발굴을 통하여 우리는 최치원의 비문을 새로이 읽게 되고, 은둔의 선사를 그리워하며 진전사터를 거닐게 된다.

진전사터 삼층석탑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너끈히 받아내며 형형히 번뜩이던 진전사터 삼층석탑

이 몇 자락 풍경, 몇 마디 언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노동과 지식과 자본을 투입하여 과거 속으로 회귀하는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삶은 몇 자락 풍경을 절실히 받아안기 위하여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번에 보았던 풍경, 아침햇살을 눈부시게 받아안던 석탑을 떠올려본다. 지붕돌 전각의 수평선이 희끗 그어진 것이 마치 등골이 불끈 드러난 듯하여, 석탑의 풍모가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 기운이 형형히 번뜩이고 있었다.

최치원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무엇이라 하였을 것인가. “동해가 마르고 설악이 무너질지라도 은둔의 석탑이여 영원히 번뜩여라”는 식으로 기렸을 일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식의 호쾌한 언어를 토할 만한 자질도 없고 이해할 만한 능력도 없는 듯하다. 어쩐 일인가? 혹 풍경 속에 침잠하는 법을 망실한 것은 아닌가? 학문적 방법이라는 건조한 수법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묻는다, 겨울 산봉우리를 한번 본다. [2004년 글]

  1. 최치원,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에서(이우성 역주와 최영성 역주를 참고하여 윤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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