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산 위로 서리 묻은 달이 떠오르고 — 강진 월남사터에서

유적지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현대의 어느 시인은 강진행 버스 오른편 차창 밖으로 보이는 월출산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바위와 하늘이 서로 치차처럼 물려 돌고 있다.
같이 내려앉고 같이 솟구치며 몸부림치고 있다.
몇 해 전 대흥사행 때 뛰어들었던
월출산 남쪽 무위사 극락보전도 월남사 터 5층석탑도
몸부림 속에 물려 돌고
솟구쳤다가 가라앉는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대가 몸부림치고 있다

— 황동규, <다산초당> 일부

img01.jpg
영암읍에서 강진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월출산의 모습. 시인 황동규는 이 영험한 월출산을 보고 지극히 평범한 시구를 남겼다.

시인은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평야를 가로질러 온 버스가 영암에 당도하여 강진으로 넘어가는 길에, 평지 위에 신화처럼 솟아오른 월출산을 보고서, 톱니바퀴(치차)처럼 뻑뻑하게 몸부림치며 돌아가고 있는 시인 자신의 심회를 가탁하고 있다. 그 뻑뻑한 몸부림이 비끗 튕겨나가 어딘가로 함부로 날아가는 화살이라도 되는 날엔, 즉 시에서처럼 일상을 벗어나 강진행 버스를 타기라도 하는 날엔, 그토록 단정하게 자리잡은 무위사 극락보전도, 천년의 세월을 탄탄하게 버틴 월남사터 삼층석탑도, 그만 솟구쳤다 가라앉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대가 몸부림치고 있다”. 다 마음이 지어낸 일이다. 산 위의 하늘이라는 티끌 없는 허공조차도 월출산 암벽에 썰릴 정도로, 그대의 마음, 시인의 마음이 꿈틀대고 버둥거리고 있는 것임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시적禪詩的인 전통의 시인가? 아니다. 마음의 몸부림, 마음의 흔들림을 명확하게 간파한 육조 혜능의 펄럭이는 깃발이 사물의 움직임조차 허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러나 시인의 시구는 여여한 사물들조차 솟구치게 하고 가라앉게 만드는 분란의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임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시는 선취禪趣가 묻어나는 시가 아니라 지극한 번뇌의 시이다.

시인이 차창 밖으로 보았던 월출산은 영암읍에서 강진으로 건너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누릿재(찻길은 풀치)를 분기점으로 하여 영암을 떠나 강진에 닿는다. 이 누릿재 고개길이 월출산 동쪽 자락을 둥글게 휘돌며 마무리 될 즈음, 왼편으로는 강진에서 크기로 첫 손을 다투는 월남저수지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영암과 강진의 군계를 넘는 동안 지봉들에 가려져 듬성듬성 보이던 월출산이 갑자기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미왕재, 향로봉, 천황봉, 그리고 천황봉 동남편의 지봉에 이르는 거의 대부분의 주능선이 훅 펼쳐진다. 이것은 월남리라는 산중평지가 있기에 가능하다. 월남리를 지나게 되면 자그마한 구릉들에 가려져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은 추운 겨울날 유배길에 누릿재를 넘어 강진 땅으로 접어들면서, 그만 뼈아프게도, 산중평지인 월남리로 고개를 돌리다 월출산을 쳐다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강진의 농촌 풍경과 실상을 묘사한 연작시 <탐진촌요> 첫 수에서 “월남리로 눈길을 돌리다 월출산을 쳐다보지 말라”1고 하였다. 월출산이 다산이 늘 보았던 도봉산을 닮기도 닮았으려니와, 겨울 유배길이라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에 그토록 영혼을 안기고 싶은 산을 만났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겨운 참혹한 사실이었던 까닭이다. 오죽하면 월출산의 봉우리마다 길손의 눈물이 흩뿌려져 있다고 하였으랴. 아마도 영암 쪽에서 검은 성채처럼 형형히 번뜩이며 우뚝 솟아 뵈는 영험한 월출산보다 강진 쪽에서 고향의 품처럼 다사롭게 품어주는 월출산의 면모가 유배객의 심회를 깊이 건드렸던 것이리라. <탐진촌요> 첫 수는, 황동규의 시처럼 월출산을 향해 폭력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월출산에 속절없이 흡수되는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img02.jpg
월남리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월출산 천황봉(왼쪽 봉우리)과 동남쪽 지봉(오른쪽 봉우리). 그리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나 천황봉 왼쪽으로는 향로봉에서 미왕재에 이르는 주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다산은 누릿재를 넘어 월남리 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미왕재에서 향로봉, 천황봉, 그리고 동남쪽 지봉에 이르기까지 장려하게 펼쳐진 월출산을 보았다.

 

이 산이 허물어지더라도 이 돌은 옮겨지지 않으리
 

월남저수지 인근이 현재에도 “사문寺門안골”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보아, 누릿재를 타고 넘어와 오른편으로 꺾어드는 약 1.5킬로미터에 이르는 월남사터 진입로, 즉 다산이 유배길에 이율배반의 심정으로 바라보았던 월출산의 품안으로 곧장 안겨드는 길은, 월남사가 폐사되기 이전에는 일주문이나 표지석, 혹은 입상을 지나 사찰로 진입하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사찰 안의 진입공간을 거쳐가듯 월남리 마을을 관통하면 그 끝은 월출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최단거리로 닿을 수 있는 금릉경포대 쪽 입산로이다. 이 입산로에 좀 못 미쳐 월남사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보이는 월출산의 남쪽 모습은 가히 월출산의 얼굴이라 할 만하다. 이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월남사의 옛터에는 현재 민가들이 스며들 듯 들어서 있으며, 이들 민가들로부터 북쪽으로 화살 한 바탕의 거리를 띄우고 월남소류지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다. 경포대 계곡에서 흘러 온 물은 잠시 이 연못에 고였다가 돌개울을 따라 월남사터 동편을 지나 월남저수지로 흐른다. 이러한 지형조건을 사역寺域 내외로 끌어안았던 월남사의 옛터에는 현재 삼층석탑과 석비가 남아 있어 그 옛날 누군가의 생을 증거하고 있다. 시인 황동규나 시인 정약용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어느 시인의 생이 그리하여 내 생애와 내 마음 속에서 부활한다.

진각국사 무의자 혜심(1178∼1234). 그의 비가 월남사터에 있다. 그러나 그와 월남사의 관계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에는 진각국사가 월남사를 창건했다고 기록2하고 있지만, 백제계 석탑이나 발굴된 유물로 보아 사실이 아닌 듯하다. 다만 정황 파악에 보탬을 주는 문헌의 기록들과 유물들을 종합하여 추론하자면, 진각국사가 수선사(현 송광사에서 결성된 수행결사) 주석 시절 전라도 인근의 폐사되거나 퇴락한 사찰들을 다시 세우면서 월남사를 중창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각국사가 중창한 사찰들은 최소 십 수 사찰에 이르고, 그마저 수선사에 집중된 물질적 부를 분배하는 절차를 통하여 중창한 것이므로, 이 사실만으로는 월남사와 진각국사의 관계가 각별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왜 진각국사비가 월남사에 건립된 것일까. 진각국사와 그의 부도가 세워진 송광사의 관계가 그토록 긴밀한 마당에, 그의 비가 있는 월남사와의 관계는 단순한 중창자라는 헐거운 관계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진각국사의 행적을 소개하는 국내의 거의 모든 글들은 이규보가 찬술한 월남사터 진각국사비의 비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진각국사와 월남사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몇 글자 이외에는 없으되, 역설적이게도 월남사터의 비문이 진각국사의 행적을 가장 상세하게 조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산이 허물어지더라도 이 돌은 옮겨지지 않으리此山寧騫此石不遷”라는 비문의 마지막 구절처럼, 산천이 바뀌면서 월남사와 진각국사의 관계를 기록하였을 문헌들은 사라져버렸고, 대지와 나무와 숲과 집은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거듭하고 있고, 답사객들은 무수히 왔다가 무수히 돌아가고 있으되, 석비는 깨어진 채로나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이 석비는 어둠과 무명의 세월을 뚫고 살아남아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돌은 능히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동백은 저렇게 꽃을 피웠는데
 

이러한 사정 탓인지, 진각국사의 어록과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비를 떠올리기만 하면 어쩐지 미안하고 허전한 마음 가눌 길 없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놈으로서 객진의 번뇌를 떨치지 못한 사람. 그리하여 끝내 차가운 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월남저수지 앞에 당도하니 오후 1시가 좀 안 되었다. 월남리 마을 입구에서 월출산의 품안을 향해 들어가다보면 월남사터에 자연 당도하게 되니 어느 길로 접어들어도 무관하겠지만, 마을의 속을 들여다보며 가고 싶다면 찻길을 버리고 미로같은 마을길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가야 한다. 경포대 근처에 이르기까지 상점 간판 하나 없는 역력한 촌락을 거닐며 월남사터를 향하다보면, 차밭과 보리밭과 대숲이 겨울빛을 무색하게 만든다. 겨울바람은 집집의 대숲을 통과하느라 찰랑찰랑 부숴지고, 또 구불구불 흐르는 돌담길을 따라 흐르느라 칼지지 못하고 유연하게 곡절한다.

img03.jpg
월남리에 있는 한 폐가로 들어섰다. 대숲도 동백나무도 그대로 서 있건만 주인은 손자국 묻은 장독만을 남겨놓고 이 마당을 떠났다. 부디 행복하소서.

청신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주인이 떠나 폐가가 되어버린 어느 집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온통 대숲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 소리, 마치 산들바람 소리와도 같다. 마당은 산중평지에서 느껴지는 안온함을 품고 있다. 갈대빛 잡초가 무성하지만, 그러나 마당 한 켠에는, 남도가 고향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환상처럼 다가오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반질반질 윤기를 흘리며 꽃을 피우고 있다.

누가 이 마당을 떠나게 하였던가? 대숲은 여전히 사운거리고 있고 동백은 땅의 물기를 빨아들이며 마침내 선홍빛 꽃을 틔웠는데, 댓잎을 흔들던 바람소리로 귀를 씻고 겨울철 붉은 꽃잎을 기다리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부디 행복하소서. 맑은 바람소리 끌어들이던 이 대숲을 부디 잊지 마소서. 더러는 차갑기도 했던 마음에 붉은 꽃이 피던 시절을 잊지 마소서.

월남리 마을의 농가들은 대부분 두어 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 행랑채, 헛간. 전형적인 구성이다. 좀 가난하면 두 채, 좀 부해도 고작 세 채이다. 그리고 집안을 드나드는 문들은 현대의 건축물에 비하면 대단히 작다. 아마도 개방적인 건축 구조상 문이라도 작게 하여 개방성에 따른 부담을 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현대의 주거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하나의 전설, 하나의 옛이야기처럼 다가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마을에는 벽돌담장마저 거의 없을 정도이니, 골목골목마다 전설이 구절구절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이토록 길손을 최고조로 안온하게 감싸는 마을을 아련한 분위기 속에 허위허위 걷다보면 마침내 월남사터 삼층석탑 윗층이 어느 농가 뒷편에서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어른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인간 정신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남사터 삼층석탑 앞쪽에 있는 농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녹차를 상품화한 이한영 씨의 옛집이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녹차 상품명은 “백운옥판차”로서, 그는 아홉번 찌고 아홉번 말리는 구증구포九烝九曝의 제다법으로 차를 만드는 다인이었다고 한다.

img04.jpg
길손을 안온하게 품어주는 월남리 마을길을 허위허위 걷다보면 어느새 월남사터 삼층석탑이 농가 뒷편으로 어른거리며 나타난다. 이 농가는 우리나라 최초로 상품화된 녹차인 “백운옥판차”를 제다하였던 다인 이한영 씨의 옛집이다.

이한영 씨는 월출산 미왕재에서 향로봉에 이르는 능선 아랫자락에 위치한 백운동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와 가내수제품을 상품화하였는데, 그의 제다법은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운동은 다름아닌 다산이 초의선사 등과 더불어 노닐었던 곳으로서 이 노닌 날들을 못 잊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백운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마을 어른들은 다산 선생이 백운동에 자주 다녔다더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다인들은 백운옥판차를 제다한 이 집을 차의 성지처럼 여기고 찾아오고 있으나, 현재는 제다의 맥은 끊어진 채 다른 농가와 뭐 하나 다를 바 없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곳을 찾아와 차를 찧던 절구만 유일하게 유물로 남은 것을 확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집 뒷뜰의 굵은 동백나무와 월남사터 삼층석탑을 망연히 바라볼 것이다. 저 탑과 저 동백은 저렇게 서 있는데, 찻잎을 따고 차를 덖고 차를 마시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다인들의 시선은 다인의 흔적에 집중할 뿐,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는 오히려 무심히 대한다. 마음이 다르면 저마다 존재물에 다르게 개입하기 마련이다. 월남사터 삼층석탑을 보러왔던 답사객들은 그와 반대로 이 다인의 집을 전혀 모른 채 무심코 지나칠 것이다.
 

안온한 돌담길에서는 더운 호흡이 살아나고
 

이한영 씨 옛집의 행랑채와 헛간이 우리네 고향처럼 스러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돌담길을 돌면 월남사터 삼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삼층석탑과 두어 집 건너 떨어진 곳에 남아 있는 진각국사비로 인하여 인근의 예닐곱 채 민가들은 헐릴 것이다. 아마도 다인의 집도 헐릴 것이고, 인근의 대숲들도 제거될 것이다. 절터의 경내로 추정되는 곳에 위치한 대숲은 이미 베어졌다. 동백나무도 옮겨지려나. 강진군은 이곳 월남사터를 1995년에 이미 일차적으로 유적지 조사를 해놓은 상태이다. 주변 형질의 변경은 물론 유물이 될 성싶은 모든 광물, 석재, 기와조각 등의 반출을 금한다는 경고 간판도 있다. 본격적인 발굴을 위해서는 행정적인 절차만 남겨놓은 듯하다. 그러면, 이 폐사지를 사랑하여 인근에 돌담을 쌓고 나무를 심고 집을 세웠던 이들은 평생을 살았던 이곳을 두고 떠나야 할 것이다. 이미 두어 채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img05.jpg
석축과 수구가 천연스럽게 밭두렁이 되고 말았다. 이 절묘한 사랑의 풍경도 얼마 뒤이면 영구히 사라질 것이다.

절터 주변의 농가들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다 보면 옛 절터의 석축 및 석재들이 눈에 띈다. 아예 절터의 주춧돌을 이용하여 집을 올리기도 하였고, 기단의 돌들을 돌담의 받침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천연스럽게도, 옥개석이 장독받침이 되었는가 하면, 석축과 수구水口가 밭두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절터와 농가가 자연스럽게 결합한 곳은 현재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얼마 뒤이면 전면적인 발굴이 시작될 터이고, 그러면 이 절묘한 사랑의 풍경을 그 누구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탑과 비가 무엇이기에 절터 주변의 사람들은 생의 자리를 이동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그들은 던지지 않으리라. 생애의 풍경 속에 거인처럼 들어서 있는 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리를 선선히 물려줄 용의가 있을 것이다. 하오니 부디 행복하소서. 허약한 모든 것들을 타파하고 우뚝 선 석탑을 부디 잊지 마소서. 금강처럼 단단한 그 석탑이 당신들의 봄날 밭이랑처럼 당신들의 돌담처럼 붉은 기운을 흘리고 있음을 기억하소서.

img07.jpg
월남사터 삼층석탑. 이 석탑과 관련된 전설을 음미하면서, 시대의 언어와 불화한 예술가의 생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백제계열로 분류되는 월남사터 삼층석탑. 각 층의 옥개석은 추녀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을 뿐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옥개석 상하로는 두어 매 씩 별석이 결구되어 있다. 특히 옥개받침의 별석 일부는 꽃잎의 유선형처럼 미끈하고 보드랍게 모가 접혀져 있다. 이러한 방식은 확실히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 마지막 석탑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의 정신세계를 표출하는 형식의 석탑이 건립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정림사지 석탑 형식을 따르는 백제계열의 석탑이 월남사에 건립된 것이다. 그래서, 사찰이 창건되었을 때 이 석탑도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월남사의 창건연대를 견훤이 군사를 일으킨 후백제시대나 고려초기로 잡는다. 이처럼 석탑이라는 대형 구조물의 건립을 통하여 시대의 염원을 구현했던 까닭일까? 정림사지의 석탑이 당당한 기세로 대지 위에 탄탄히 서 있어 거기에서 수평적 평화와 강직함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반면, 이 월남사터 석탑에서는 중세의 고딕양식처럼 가파른 상승을 비원하는 언어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시대에 팽배한 언어를 구현하는 것도, 한 시대의 경직성을 타파하는 새로운 언어를 구현하는 것도 석공이라는 한 예술가의 솜씨와 정신에 결정적으로 달린 것일 터이니, 시대의 언어와 싸움을 거는 건축언어로서 석탑이 건립되지 못하란 법은 없다. 예술사적 용어로 말하자면, 한 시대의 “양식”을 초탈하는 예술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우연찮게도, 이 석탑의 건립과 관련한 전설은 석공의 아내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금기사항을 어긴 석공의 아내는 죽음을 맞아 돌이 되었고, 그 돌-아내를 석재로 삼아 삼층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이 그 전설의 내용이다.

전설의 핵심적 내용, 즉 석공의 아내가 금기사항을 어김으로써 죽음을 맞았고 그 희생을 발판으로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월남사터 삼층석탑은 시대의 언어, 시대의 권력과 불화한 석공의 예술작품일 가능성도 있다. 한 시대의 언어, 한 시대의 권력과 불화하지 않는 이상 그토록 비극적인 희생양이 탄생할 리 없기 때문이다. 석공은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러면 월남사의 창건연대는 좀더 유동적이 된다. 하지만 석공의 아내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석재의 빛깔이 주는 강렬함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후대인들의 생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확실히 이 석탑의 석재는 통일신라시대에 주로 사용된 청회색이나 회백색의 석재와 판이하다. 이는 인근 무위사의 삼층석탑과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월남사터 삼층석탑을 화르르 싸고도는 붉은 빛깔에다 후대인들이 각자의 심장에 몽친 덩어리를 이입하여 그와 같은 전설이 만들어졌을 게다.

전설과 함께 월남사터 삼층석탑 주위를 도는 것은 한 시대의 언어와 불화한 예술가나, 붉은 덩어리가 몽친 심장을 안고 살았던 이들의 생을 생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월남리 마을의 돌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붉은 빛깔의 돌을 사용하고 있다. 이 돌담길을 따라 골목을 더듬다보면 강원도 낙산사의 원통전 뒷편 황톳빛 담장을 따라 거닐 때 강렬하게 육박해오던 더운 호흡이 재현된다. 누가 이 폐사지를 쓸쓸하달 수 있겠는가! 석탑은 붉은 기운을 화르르 흘리며 상승을 비원하고 있고 돌담길은 그 비원이 홀로의 비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검은 능선 위로 하얀 달이 떠오르고
 

img06.jpg
월남사터 진각국사비 전면. 글이 새겨진 표면층은 전부 떨어져나갔다. 석비의 속살을 아물리게 하겠다는 듯, 햇살이 동백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어루만지고 있다.

그러나 진각국사비. 월남리 마을의 안온함과 석탑의 더운 호흡과는 상관 없이 차갑고 선명한 언어를 토하고 있는 석비를 향하여 간다. 진각국사비는 지극히 폐쇄적인 보호각에 둘러싸여 있어 어루만지기는커녕 제대로 보기조차 힘들다. 보호각 틈새를 겨우 비집고 눈길로나마 석비를 어루만져본다. 전면의 글자가 새겨진 표면층은 전부 떨어져나가 비에서는 비문을 확인할 수 없다.

다행이 이규보의 글이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하고, 석비가 깨어지기 전의 탁본이 전하여 우리는 그 비문을 읽을 수 있다. 비문은 세로로 작성되었으니 맨 오른쪽 첫 두어 줄은 비문 찬술자와 비문을 쓴 경위 등을 적은 서두 대목이고, 아마도 그 다음 줄이 비명碑銘이 시작되는 대목이리라. 옛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천년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저 눈길을 주어 쓸어내릴 수밖에 없다. 첫 문장은 이렇다:

夫自有心法已來凡衲子之鼻孔遼天者原其靈臺孰不欲與霜月爭潔

대개 심법이 있은 뒤로부터 무릇 납자로서 콧구멍[의 숨]으로 하늘을 흔드는 자는 그 마음을 궁구하나니, 누가 상월霜月과 더불어 깨끗함을 다투지 아니하겠는가?

img12.jpg
월남사터 진각국사비 탁본 상세. 맨 오른편에 “孰不欲與霜月爭潔”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당대의 명유 이규보는 왕으로부터 ‘진각국사’의 시호를 받은 무의자(無衣子) 혜심의 비문을 찬술하기 위하여 진각국사의 어록, 선시, 그리고 제자들이 기록한 행장 등을 읽었을 것이다. 불교적 깊이를 어느 정도 아는 이라면 무의자의 선시와 어록을 읽고서 “차가움”, “달”, “맑은 바람”, “대나무”, “깨끗함” 등을 맨 먼저 눈앞에 떠올릴 것이다. 이규보 역시 그랬고, 그래서 첫 문장에서 “상월霜月”이라는 중층적 이미지를 등장시켜 진각국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의 소개를 따라가면, 진각국사는 서리, 달과 더불어 깨끗함을 다투었다. 서리와 달, 그리고 깨끗함, …….

서리는 늦가을이나 초겨울 맑은 날 아침에 그 맺힌 모습을 잘 볼 수 있으며, 달은 그믐이 아닌 이상 맑은 날 밤이나 새벽이면 볼 수 있다. 그러나,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이 지상을 환히 비추면 풀잎이나 길섶에, 혹은 흙 위에 사르르 깔린 서리를 볼 수 있으니, 이 때는 달과 서리를 동시적으로 볼 수 있다. 대지의 피막이라도 되겠다는 듯 대지의 표층을 전면적으로 깔아덮은 서리를 은연히 비추며 그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은, 확실히 서늘함의 한 극치를 보여준다.

눈 덮힌 들녘과 산 위로 떠오르는 달은 또 어떠할까? 이때에 바람이라도 한 줄기 대지를 쓸어내리면 들녘과 산은 백색의 어둠 속에서 더욱 차가우리라. 그러나 해가 뜨거나 누군가 서리를 밟기라도 하면 이 극치는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만큼 깨끗하고 청한하다. 이규보가 진각국사를 비유하여 “상월”이라 한 것은 이런 유의 백색의 서늘함과 강하게 결부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이미지는 선승을 바라보는 평범한 이들의 시각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진각국사 자신이 이 이미지를 시와 글에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처럼 깨끗한 추위가 뼛속에 맑게 사무치는데
더욱 깊이 좌선하니 올곧기만 하도다
경계를 끊어버린 마음은 어떠한가
눈 위로 떠오른 달보다 더 깨끗하구나
澈寒淸入骨 更深坐兀兀
絶界心如何 潔愈雪中月

— “사계절 유감” 일부

바위산은 솟아올라 몇 길인지 알까마는
그 위에 높은 누대 있어 하늘가에 닿는다
북두로 은하수를 떠서 한밤의 차를 달이니
다연茶煙은 달 속 계수나무를 싸늘히 감싼다
巖叢屹屹知幾尋 上有高臺接天際
斗酌星河煮夜茶 茶煙冷鎖月中桂

— “인월대” 전문

“스승께서는 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宗風)을 이어 받았습니까?”
“눈구덩이에서 헤쳐나와 말하고 서리꽃에서 피어나 기를 떨친다.”
有問 師唱誰家曲 宗風嗣阿誰 曰 開雪竇日 出霜華氣

— “빙도자전”에서

바람을 들이켜고 달에 취하며 눈을 먹고 서리를 마시므로, 그 뼈는 차갑고 정신은 맑다.
감風醉月 飽雪飯霜 則其骨冷神淸

— “죽존자전”에서

img08.jpg
진각국사비 주위 사방으로는 대숲이 있다. 그래서 그의 비가 대숲에 은거하고 있는 듯하다. 차가운 정신을 유지하였던 그는, 겨울 햇살을 받아 안온하게 빛나는 대숲과 붉은 담장마저 얼릴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선지식의 정신은 확실히 우리의 세계와 다르다. 바람, 달, 눈, 서리, 차 등등 맑고 고요하고 비어 있고 깨끗하고 차갑고 담백한 것들과 더불어 노니는 경지는, 우리가 이 세계의 사물에 집착하며 분칠하기 좋아하는 습성과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고 서늘하다. 가령, 진각국사는 “인월대”에서 별이 총총한 차가운 날 밤에 차를 달인다. 그는 실내가 아니라 인월대 외부로 나와 다조에서 솔방울 등을 태워 차를 달인다. 다연茶煙은 차를 달일 때 타오르는 불의 연기일 수도 있겠고, 찻잔을 맴돌다 얼굴을 어루만지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차의 훈김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 다연은 차가운 날 밤에 참으로 따스한 것이지만, 진각국사는 이 다연마저 싸늘하게 얼린다.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으로 은하수 물을 떠서 차를 달인다는 것은, 우주에 가득한 추위를 끌어들인 가운데 차 한 잔을 달여 마신다는 의미이다. 우주적인 차가움으로 한 잔의 따스함을 그대로 얼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연은 둥근 달(계수나무, 즉 월면의 음영이 보일 정도이면 둥근 달이다)을 싸늘히 감쌀 수밖에 없다. 확실히 이 장면은, 대지 위에 깔린 서리나 눈 위로 백색의 달이 떠오르는 장면보다 더 차갑게 여겨진다. 서리 묻은 달이 떠오른다고나 할까. 아니면 냉기를 뿜어내며 달이 떠오른다고나 할까.

 
진각국사비는 보호각에 빠듯하게 갇혀 있지만, 우주적인 차가움을 노래했던 시인의 정신마저 가리지는 못한다. 진각국사비 주위로는 동백과 대숲이 어우러져 있다. 이 대숲은 장할 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사방으로 석비를 둘러싸고 있다. 오늘처럼 햇빛이 따스하기라도 하면 대숲의 빛깔이 이내 석비를 물들일 것만 같고, 붉은 돌담의 온기가 석비를 데울 것만 같다. 그러나, 차가운 정신을 유지하였던 그는 이 따스함에 기대지 않을 것이다.

대숲에서 들리는 맑은 바람 소리를 지극히 사랑하였던 시인을 생각했던 것일까. 후대인들은 대숲이 유난히 많은 월남리에다, 대숲이 우거진 곳에 그의 비를 건립하였다. 그의 가전체 소설 “죽존자전”은 대나무를 기리는 내용인데, 거기에서 그는 대나무를 칭송하기를, “바람을 들이켜고 달에 취하며 눈을 먹고 서리를 마시므로 그 뼈는 차갑고 정신은 맑다”고 하였다. 그렇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대숲은 사운거린다. 냉엄한 겨울 바람도 이 대숲을 통과하면 그저 청신한 바람으로 변하고 만다.

때마침 대숲에 겨울 바람이 분다. 이 소쇄한 바람결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서늘하게 말렸던 시인은, 혹 이곳 월남사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제자들과 후원자들이 진각국사의 정신과 가장 부합하는 장소로 이곳을 고른 것은 아닐까. 강진 지방의 정치세력들과 긴밀히 연관되어 이곳에 석비가 세워졌다고 추정하고 마는 것은 어쩐지 정신적 위대를 너무 축소시키는 듯하다. 아무튼 정신적 위대에 부응하여 뭔가를 선택하였다면, 그 증거물은 후대에 남아 있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그 연계 고리를 읽는 것은 또 다른 시인의 몫이다.

 
오늘은 월출산 아래 월남리 마을에서 밤을 맞는다. 하여 월출산 동남편 자락 위로 달이 떠오른다. 월출산 천황봉에서 갈라져나온 동남편 지봉이 우뚝 솟았다가 누릿재를 향해 하향 곡선을 긋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둥근 달이 떠오른다. 냉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산하를 쓸고 다니는 시간에, 차갑고 검은 능선 위로 하얀 달이 떠오른다. 그리고 구름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마치 서리 묻은 달처럼, 오늘의 달은 지나가는 구름에 풀풀 냉기를 흘리고 있다. 이 냉엄한 정신적 풍경을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 또 있으니, 차가운 산, 즉 한산寒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던 한산자寒山子이다. 그는 한때 “부질없이 시도 짓고 책도 읽었으나”, 결국에는 “좋이 한산으로 돌아와 개울을 베고 누워 귀를 씻으며”(한산시·281) 생을 보냈다. 그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한산에서의 생활을 묘사하거나 한산에 달이 떠오르는 장면에서 가장 뛰어난 시들을 남겼다:

외로운 밤 돌평상에 혼자 앉으면
둥근 달은 한산에 떠오르나니

— “한산시·207” 일부

어느새 올랐던가 차가운 달빛,
몸은 외로이 날으는 학과 같나니

— “한산시·241” 일부

한산 꼭대기에 외로이 동그란 달
맑은 하늘 두루 비쳐 막힐 것 없네

— “한산시·299” 일부
(이상 김달진 번역, «한산시»에서 인용)

과연, 겨울밤의 월출산, “차가운 산에서는 달빛이 희다.”(한산시·80) 차가운 산 위로 떠오른 하얀 달빛이 만물의 머리 위에 임재하는 이 시간, 바람은 어김없이 진각국사비를 품에 안은 대숲을 차라락 깨우며 허공 속으로 유랑하고 있으리라. 한산의 달이 떠오르는 이 순간, 은빛으로 찰랑거리는 대숲 속에서, 석비의 주인은 무엇을 음미하고 있을까? 아마도 한산시를 음미하고 있으리라.

진각국사는 한산자의 시들을 즐겨 읽었고, 한산시에서의 모티브를 자신의 시에 일부 끌어들이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달을 노래하거나 천진天眞을 노래하는 시들에서 그렇다. 이처럼 위대한 시인들은 시대와 국적을 달리하여도 함께 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인들은 흔한 부류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다. 누가 과연 그 서늘한 정신세계를 쉬이 버텨낼 수 있겠는가. 그 세계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고, 함부로 촌평을 가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시인 서정주는 그 서리 묻은 세계에 접근하지 못하고 <풀리는 한강가에서>와 같은 시를 남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잎풀 같은 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보라 함인가

— 서정주, <풀리는 한강가에서> 일부

달빛 하얀 밤에 월출산 기슭에서 서성이고 있노라니, 선명한 정신적 세계가 펼쳐진다. 내가 겪어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는 세계. 차가운 산 위의 돌평상에 앉아 둥근 달을 보는 시인, 싸늘하게 높은 산봉우리 누대에서 차를 차갑게 마시는 다인, 외로이 날으는 학,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 그들을 일러 무엇이라 할까. 차가운 산 위로 서리 묻은 달이 떠오르고,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그만 멎는다.

  1. <탐진촌요>耽津村謠 첫 수의 원문은 이렇다:
    樓犁嶺上石漸漸 누릿재 위에 선 바위들은 험준하고 험준하다만
    長得行人淚灑沾 길손의 눈물이 뿌려져 오래도록 젖어 있다
    莫向月南瞻月出 월남리로 눈길을 돌리다 월출산을 쳐다보지 말라
    峰峰都似道峯尖 봉우리마다 모두 도봉산 첨봉을 닮았더라
    []
  2.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월남사에 대하여 “在月出山南 高麗僧眞覺所創 有李奎報碑”(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스님 진각이 창건하였으며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