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도 산봉우리, 잠언을 듣는 자도 산봉우리

모든 글들 중에서 누군가가 그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나는 사랑한다. 피로 쓰거라,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거니, 나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을 증오한다.

독자를 알고 있는 자는, 독자를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 세기의 독자도—그리고 정신 자체도 악취를 풍기리.

누구나 읽기를 배워도 된다는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사고까지도 망친다.

일찌기 정신은 신이었고, 이후 인간이 되었다가, 이제는 심지어 천민이 되기까지 하리.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자는, 자신의 글이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외어지기를 바란다.

산에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에 이르는 길이나, 그걸 위해서는 너의 두 다리가 길지 않으면 안된다. 잠언은 마땅히 봉우리이어야 하거니와, 잠언을 듣는 이들 역시 마땅히 키가 크고 우뚝 솟아오른 자들이어야 한다.

희박하고 갓맑으니 공기요, 가까우니 위험이요, 즐거운 악의로 가득하니 정신이라: 이들은 서로간에 몹시 잘 맞는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권,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에서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로 번역한 die lesenden Müßiggänger는 국내 번역서들이 대표적으로 오역하고 있는 낱말을 포함하고 있다. 니체의 저서 곳곳에서 등장하는 Müßiggänger는 라틴어 ōtium과 맥락이 닿고 있다. ōtium은 ‘의무, 업무에서 벗어난 상태’, ‘한가한 상태’, ‘사색하고 책 읽기 좋은 여유’를 의미한다. 즉 로마사회에서 로마시민이라면 마땅히 봉직해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잠시 혹은 상당 기간 한유로운 상태를 맞이한 경우를 가르킬 때 이 낱말을 쓴다. 그래서 이 낱말의 반대말 negōtium은 ‘직무’, ‘업무’, ‘일’을 뜻한다.

그런데 국내 번역서들은 한결같이 Müßiggänger를 “게으름뱅이”로 잘못 옮기고 있다. 니체가 주로 공박하는 대상이 그저 책만 읽는 학자들, 삶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하고 학문적 방법론에만 매몰된 자들, 한적하게 글만 파는 자들임을 국내 역자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니체가 말하는 Müßiggänger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지독한 책벌레들이며, 그래서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다.

원문의 die lesende Müßiggänger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 혹은 “글만 읽는 한적한 자들” 쯤으로 옮겨야 한다. 이 Müßiggänger는 두 번째 «반시대적 고찰» 머리말에서도 등장한다. “지식의 정원에서 깐깐한 성격의 한적한 자(der verwöhnte Müßiggänger im Garten des Wissens)가 역사학이 필요한 방식”이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더욱 분명하게도 “지식의 정원”이라는 공간적 장치까지 곁들여서 Müßiggänger를 설명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들은 다름아닌 지식인들, 성격이 깐깐한 병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목마저 “지식의 정원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버릇없는 게으름뱅이”(이진우), “지식의 정원에서 어슬렁대는 건방진 게으름뱅이”(임수길)로 번역하여 여간 원뜻을 훼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니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오역을 접하게 되면 정말이지 파르르 떨린다. 과연 이런 번역을 니체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잠언이 산봉우리라면 잠언을 듣는 이도 산봉우리여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법이며, 그래야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는 법이다.
 

니체는 독서(문자, 글)를 통하여 사고, 정신, 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피에서 정신, 사고, 글, 문자로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제시한다. “누구나 읽기를 배워도 된다는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사고까지도 망친다”는 말은, 그 물줄기가 역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부패의 경고이다. 타인의 “피”를, “읽기”(문자, 글)를 통하여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니체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die lesende Müßiggänger)을 그래서 증오한다.

그런데도 글 읽는 자들(독자들)을 감안하고서 글을 쓰는 자는, 정신을 부패시키는 자이며 독자를 부패시키는 자이다. 그들은 “독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 지위가 신에서 천민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오직 자신의 피로 써야 하는 법이다. 자신의 피로 쓰는 자는 독자를 모른다.

그렇다면, 그 타인의 “피”를, 그 타인의 “정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 어떻게 가슴에 새길 수 (니체의 표현을 따르자면 “욀 수”) 있겠는가! 그 피의 높이, 그 정신의 높이에 나란히 도달해야 한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야 한다. 그러나 그곳은 공기가 희박한 고산高山, 위험하고 외로워라. 선악이 없이 맑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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