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번역 서평

현재 우리나라는 니체 번역의 역사에서 초기에 일본어 역본을 중역하던 시기, 청하출판사의 비전공자에 의한 번역(더러는 영어 역본의 중역) 시기를 지나, 이제 비로소 철학 전공자에 의한, 그것도 새로운 비평본인 KGA/KSA 전집판 번역의 시기를 맞았다. 책세상 출판사의 니체 전집 완역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니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글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들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은, 니체가 고전문헌학 전공자였다는 사실, 니체가 독일어를 너무 아름답게 구사한다는 사실, 그리고 니체가 단지 철학뿐 아니라 문학, 음악, 예술에 대하여, 심지어는 인간의 심층에 대하여 경이로울 정도의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세상 출판사의 번역 시리즈는 그저 철학박사 학위를 딴 학자에 의해서 번역되고 있을 뿐이다. 비관적으로 말해, 책세상 번역 시리즈는,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는 면허증 하나만으로는 니체 번역의 자격이 충분한 것이 결코 아님을, 본보기로 역설해 주고 있다. 이런 말 하기는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오역이 즐비한 번역본도 있다는 것은 책세상 번역 시리즈의 번역자 선택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확신마저 갖게 된다. (물론 나는 책세상 번역 시리즈 전부를 다 본 것은 아니다. 그저 두어 권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어권 중에서 하필 심각한 오역본인 책을 접했고, 더 이상 책세상의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물론 그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역서는 최소한 평균점은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에 이진우 교수의 손길에 의하여 «비극의 탄생»이 번역, 출판되었다. 나는 이 책을 기다렸다. 나는 «비극의 탄생»에 관심이 많았고, 독일어로도 꼼꼼하게 정독하였으며, 관련 해석서들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의 다른 글들도 번역한 이진우 교수의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가 이 번역본에 대해 줄 수 있는 점수는, 평균점, 혹은 평균점보다 약간 아래이다.

아다시피, «비극의 탄생»은 두 가지 문체가 존재한다. 하나는 1872년 초판의 서문과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1886년 재판에 추가된 <자기비판의 시도>이다. 니체가 후자의 글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듯이, 초판의 문체는 “서투르며, 둔중하며, 힘겨우며, 비유가 난무하고 꼬여 있으며 감정적이다.” 그 반면에, <자기비판의 시도>의 문체는 물처럼, 때로는 격류가 되어 흐른다. 그 흐름의 와중에 육중한 문제 제기가 야전의 포성처럼 터진다. 그래서 그 흐름은 박진감이 넘치고, 앞 단락에서 뒷 단락으로 넘쳐 흐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번역본에서는 판본간 문체상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한편으로, <자기비판의 시도>의 문체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독일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감안하자면 이러한 문체의 생사는 그다지 타박할 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차라리 독일어의 절묘한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진우 번역만의 문제점이 아니다. 소위 철학 전공자들 거의 전부의 문제점이라고 치부해도 무방할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의 우리말 번역어 선택은 왜 그렇게 뻣뻣한가? 아마, 기본 소양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이는 예술과 문학에 문외한인, 혹은 그쪽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철학 전공자들의 전형적인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번역의 정확성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문체상으로 평가하자면, 책세상의 이진우 역본이 청하출판사 김대경의 역본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지나가는 김에 이야기하자면, 김대경 역본의 약점 중의 하나는 독일어의 접속법을 거의 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문학 전공자가 독일어 접속법의 뉘앙스를 거의 살리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 의아하기까지 하다. 접속법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것은 이진우 역본도 마찬가지이다. 하기야 독일어 접속법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본이 과연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른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문체는 그렇다치고, 과연 이진우 역본은 김대경 역본의 번역 오류를 개선하기는 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아니다’이다. 오히려 오역에 있어서 난형난제라고 평하고 싶다.
 

<자기비판의 시도> 부분을 표본으로 삼아 번역의 문제점을 거론해 보겠다. “그는 전황이 근심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무관심하기도 했다”(9면). 원문에는 “전황”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 역자의 해석이 개입된 셈인데, 특이하게도 김대경 역본과도 동일하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이 해석이 오류라고 생각한다. 일단 원문에도 없는 낱말이거니와 니체가 전황을 염려했다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덜 명백한) 오류는 “당시 나의 젊은이다운 용기와 악의가 방출된 그 책”(11면)에서도 드러난다. 독일어 Argwohn을 “악의”라고 번역한 것인데, 이런 역어 선택은 100%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Argwohn”이 의처증과 같은 “의심”, “의혹”, “의구심”에 가까운 의미이기 때문에 오류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낱말은 13면의 “사람들은 악의적으로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아마도 역자는 독일어 “arg”가 “악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보니까,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경 역본은 각각 “회의”, “불신”으로 옮겨 오히려 잘 된 편이다.)

이런 오류들은 독일어 뉘앙스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거나 독일어 감각이 잘못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철학 전공자들이 독일문학 전공자들에 비해 어휘력이나 감각 면에서 뒤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니체의 다른 저서의 번역본들을 비교해 가면서 읽어본 지인들로부터 나는 책세상 번역본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딱히 듣지 못했다. 아마도 이러한 독일어 감각과 번역문의 문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18면의 “아름다움과 감성에 대한 두려움”(이진우 역본)과 “아름다움과 관능에 대한 두려움”(김대경 역본)의 차이를 낳았다. 물론 나는 후자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철학 전공자는 철학사에서 유구하게 논의되어온 “Sinnlichkeit”를 언제나 늘 “감성”으로 번역해서 읽었기 때문에 이진우 역본은 그러한 뻣뻣한 선택이 이루어졌을 게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경 역본이 더 잘 된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음악이라는 세례명을 받고”로 옮겨야 할 대목을 “음악에 몸을 바쳤고”(김대경 역), “음악의 세례를 받고”(이진우 역)로 각각 옮겼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김대경 역본은 의미가 빗나가면 확실하게 빗나가지만(빗나가는 것으로 모자라 정반대로 번역해 놓은 대목들도 있다), 이진우 역본은 애매모호하게 빗나간다고 할까. 애매모호하게 빗나가다 보니까 오역이 아닌 듯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한 오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오역의 특성이 두 책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느 역본이 더 낫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다만, 김대경 역본이 이진우 역본보다 ‘신명나게’ 읽힌다는 것만 언급해 두고 싶다.

설마 어떻게 정반대로 번역할 수 있겠느냐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철학자는 몰라도 니체의 글을 번역할 때에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니체의 문장이 워낙 문학적인데다가 낱말의 의미를 절묘하게 건드리면서 흐르기 때문에, 그리고 상궤의 사고를 전복시키는 궤적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그대로 정반대의 번역을 하게 된다. 더구나 니체는 희랍어나 라틴어의 문체를 좋아하여, 생략할 수 있는 단어는 최대한 생략하는 버릇이 있다. 그만큼 니체의 번역이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를 번역한 역자들치고 칭찬 한 번 제대로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니체의 책을 읽을 때만큼은 독한사전을 참고하지 않고 철저하게 독독사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기존에 기억되어 있던 독일어 감각을 지속적으로 재점검하는 한편으로 독한사전의 불비점을 보완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독의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니체의 문체로 인한 어려움은 그렇다치고, 또 니체가 다루는 분야가 워낙 방대하고 깊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역자들의 주위 학문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 명백하게 오류가 발생한 곳들도 있다. 바로크 음악의 작곡기법에 대해 기본지식을 갖추지 못한 두 역자는, “여태까지 인류가 경청하기에 이르렀던 도덕적인 주제[선율]이 한껏 빗나가 전개된 음형으로서 기독교를 다루고 있다” 쯤으로 옮겨야 할 대목을, “도덕적 주제의 뻔뻔스러운 제안으로서의 기독교, 이것에 인류는 지금까지 귀를 기울여왔던 것이다”(김대경 역, 29면)와, “기독교를 이제까지 인류가 귀 기울여온 도덕적 주제의 극단적 구체화로서 다루고 있다”(이진우 역, 17면) 로 각각 잘못 옮기고 있다. 니체가 굳이 “경청하다”는 낱말을 썼는데도 이 구절이 음악적 은유라는 점을 역자들이 간과한 까닭은, 그만큼 음악에 무지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니체는 음악에 얼마나 정통했던가! “그대의 대위법적 발성술과 귀의 현혹술을 총동원하여, 분노와 파괴욕의 기저음이 이 책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김대경 역, 32면)와, “그대의 대위법에 기초한 음성 예술과 귀를 현혹하는 기술 밑에서는 분노와 파괴 욕망의 기본 저음이 울리고 있지 않은가?”(이진우 역, 21면)의 번역 대목에 이르면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이 대목은 “귀를 홀리는 당신의 모든 대위성부 기법의 저음부에서 분노와 소멸욕망의 통주저음이 웅장하게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로 옮겨야 한다.

<자기비판의 시도>에서만도 지금 언급한 것보다 심한 오역들이 더 있지만 이만 줄이겠다.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언급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하나만 언급하자. “모든 비극적인 것에 감정을 고양시키는 독특하게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이진우 역, 19면)은 오역을 넘어 비문(非文)이다. 이런 대목을 쏙 끄집어내어 지적하는 것이 대단히 괴롭고 미안하지만, 이런 대목 하나가 번역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한다. 서문을 넘어 본문으로 들어가자면 고전문헌학과 희랍문학,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했을 오류들이 미리 생각나 마음만 답답하다.

“이런 번역비평을 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네가 번역을 직접 해라”라는, 충분히 가능한 충고를 나는 달게 받아들이겠다. 위에서 언급한 번역의 과실보다는 이 소중한 책을 번역해 준 역자들의 공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비극의 탄생»의 번역은 이진우 역본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권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곳곳에서 오역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도 니체의 유고들을 번역하기도 했고 책세상의 니체번역 편집위원인 역자의 손에서 번역된 책이 이렇다는 것에 비애를 느낀다. 하지만 이 비애는, 근원적으로는, 나의 니체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생긴다.

이 책은 처음으로 번역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번역이 기존의 번역서들보다 눈에 띄게 뛰어나지도 않다. 기존 번역서의 연장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나 할까. «비극의 탄생»이 제대로 번역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독자들이 이 번역본에 만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니체의 다른 저서와는 달리 «비극의 탄생»은 니체 생존 당시에 이미 신판(Leipzig 판본)까지 간행된 터이므로, 니체의 독일어 텍스트를 최근에 전면적으로 새로 비평한 de Gruyter 출판사의 KGA/KSA 비평본의 우위가 특별히 부각되지도 않는다. (이 비평본의 우위는 유고집이나 소위 «권력에의 의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책세상 번역 시리즈는 이 판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진우 역본에는 주석이 없다. 물론 청하출판사의 역본은 W.A. Kaufmann의 특출날 것 없는 영역본 주석을 그대로 베끼긴 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기회가 닿은 김에 이야기하자면, 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청하출판사의 번역 시리즈의 편집자 서문들은 이 Kaufmann 영역본의 서문을 번역한 듯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청하출판사는 희한하게도 그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꽤 있다. 문제는 그 서문들이 더러는 이상한 내용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가 원래 자신의 저서에 주석을 달지 않았으므로, 독자의 본문 독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번역할 때에도 주석을 달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본문 독해를 방해하지 않고서도 주석은 충분히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세상 번역본이 참고한 KGA/KSA 비평본도 별도의 권으로 분리하여 간단하게나마 주석을 달아놓지 않았던가! 더구나 잠언 형식의 글도 아니고 «비극의 탄생» 과 같은 저서에는 국내 독자들을 위하여 당연히 주석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번역서 하나 때문에 이진우 교수의 역량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라는 제도적 지위에 머물면서 번역서를 낸다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번역 자체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내가 지적한 오류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이 번역서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역자가 이 책의 번역에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니체를 번역해야 할까? 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니체에 대해 잘 모르거나 니체를 사랑하지 않는 학자는 되도록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용은 그렇다치고 문체가 조악하기 때문이다. 독문학 전공자도 좋고 철학 전공자도 좋은데, 제발 니체의 영혼을 사랑하는 학자가 번역했으면 좋겠다. 니체는 “학문” 자체를 문제거리로 파악한 영혼이므로, 학문적 방법론에만 익숙할 뿐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지식이 부족한 학자들은 부디 니체 번역을 피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비극의 탄생» 번역 서평”에 대한 10개의 댓글

  • 엥~~? 범우사에서 나온 곽복록 선생님이 쓴 비극의 탄생 읽다가
    실패하고 바로 그저께 이책 주문했는데??-.-;;
    저는 왠만하면 재미없는 책도 끝까지 읽는 편이라 책읽다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만 곽복록 선생님의 비극의 탄생은 그만 읽혀지더군요. 번역의 문제인지..제가 고전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인지..전공서적외에 영어책 읽어 본적은 없는데 영역본을 읽는건 어떨까요?

    aspirin
  • 영역본들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영역본으로 읽을 것이냐는 자신이 «비극의 탄생»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영역본으로 읽고 싶다면, Ronald Speirs 번역의 «The Birth of Tragedy and Other Writings» (Cambridge uni., 1999)를 추천합니다. 소개와 주석도 알차고, 덤으로 «디오니소스적 세계관»과 «도덕 외적인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도 싣고 있습니다.

    Gosinga
  • 착잡한 심정입니다. 니체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 사상에 대한, 세상을 향한 니체의 시선에 다가서려하지 않으면 않을 수록 그의 저술의 의미를 파악하고, 우리 말로, 이해하고 옮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충분할 수 밖에 없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모든 철학에 대한 개론적 지식을 갖듯 니체를 접하고 옮긴다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카우프만이 실존주의적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으나, 저같은 경우는 이 주석들이 차라리 고맙기 때문에, 책세상처럼 뒤로 주석을 몰아서 학생들이 더러는 아예 읽지 않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니체의 저서들은 어떤 영역본으로 보는 것이 나을까요?

    에움길
  • 글쎄요, 니체의 다른 저서들은 어떤 영역본이 좋은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관심 대목을 영역본으로나마 확인하고 싶은 경우에는 웹사이트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웹에서 니체 저서의 영역본을 제공하는 사이트들이 꽤 될 겁니다. 독일어 텍스트 제공하는 곳도 많고요.

    그중 제일 알찬 곳으로는 The Nietzsche Channel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독일어 텍스트와 영역본을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이외에도 다른 여러 정보들도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하루 트래픽 용량이 초과하여 접속이 안 되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Gosinga
  • 아, 이런 웹 싸이트도 있군요. 감사합니다.

    에움길
  • 2006년 1월 16일자 교수신문에서는 이진우 역본보다 김대경 역본을 추천하고 있다. 다음은 그 이유다.

    독문학자의 번역이지만 “원전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철학적인 내용해석에서도 전공자 못지않게 크게 뒤떨어지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 완간된 니체전집편의 이진우 교수 번역보다 “더 나은 번역“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번역본도 물론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전집번역보다 20여년 앞서 번역되었음에도 보다 충실해 그 의미가 아직 퇴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Gosinga
  • 교수신문에서는 2006년 1월 2일, 연재기획 “고전번역비평 – 최고번역본을 찾아서”의 한 꼭지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고문을 통하여 김대경 역본을 추천했다. 서울대 박찬국 선생이 이 글을 기고하였는데, 사실 그는 상당히 게으른 번역비평을 했다. 대충 읽어보고 좀 이상하다 싶은 대목 몇 곳만 비교한 다음 번역본들을 평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잔혹한 책읽기»의 번역서평으로 잘 알려진 강대진 선생이 전혀 잔혹하지 않게 이진우 교수의 또 다른 니체 번역본을 비평했다. 그의 기고문은 니체 전집 완간에 대한 기쁨과 몇가지 아쉬움이다. 제목은 거창하지만 니체번역 전반을 비평한 것이 아니라 이진우 선생이 유고번역본에서 고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한 번역오류 몇 군데를 지적하고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두 비평에 대하여 최근 2006년 2월 7일에 이진우 선생은 교수신문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기고문을 통하여 응대했다. 그는 특히 박찬국 선생의 비평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의 번역본이 잘 읽히는 문장이 아니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고싱가 숲
  • 번역과 관련해서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전 이진우 선생님 번역본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김대경 역본을 사서 영어랑(또 필요한 경우엔 간혹 독일어랑-아직 미흡하지만) 비교하면서 읽어봤는데, 김대경 선생님이 독일어 전공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독일어 전공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이진우 선생님의 번역본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대경 역본은 정말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김대경이 쓴 또 한 권의 [비극의 탄생]이랄까요?

    조호영
  • 위에서 교수 신문이 이진우역보다 김대경 역을 추천했다고 하셨는데, 이진우 역을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정말 그 글 쓴 교수라는 분 김대경역을 읽어보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군요. 아마 겨우 몇 군데 비교해 보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 것 보면 ‘교수’란 간판이 정말 신뢰가 안 갑니다. 적어도 책을 비교 추천할 때는 전반적으로 꼼꼼하게 살펴보고 추천하는 것에 독자에 대한 예의요, 학자의 양심이 아닌지…
    “독문학자의 번역이지만 “원전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라고요? 참나!! 정말 화납니다. “원전에 가장 충실하하면서도” 하하하ㅏ…

    조호영
  • 조호영님의 감정이 십분 이해됩니다. 니체 저작의 원문과 꼼꼼히 대조하면서 국내 번역본들을 읽을 때의 당혹감, 좌절감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알기 어렵지요. 아마도 그런 좌절감이 크기에 대조본(김대경 역본)에 대해 크게 실망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진우 역본과 대조해 보셔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대동소이, 난형난제라고나 할까요. 제 판단으로도 김대경 역본이 ‘그나마 낫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습니다만, 그게 우리나라 번역 현실입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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