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니파타 4.16, “사리풋타 경”

955(존자 사리풋타가 아뢰되)
저는 이제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나이다,
이와 같이 미묘한 말씀을 하시는 분께옵서
도솔천에서 무리의 스승으로 오신 것을!

956천상과 세간에 보이듯이
안목 있으신 분께옵서
일체 어둠을 몰아내시고서
홀로 쉼에 이르셨나이다.

957의존하는 바 없으신 그 붓다께,
숨기는 바 없으신 분, 무리에게 오신 분께,
여기 속박된 무수한 이들을 위하여
질문을 가지고 제가 이렇게 왔나이다.

958은둔하는 비구,
인적 없는 좌처坐處나
나무 밑둥, 묘지를 가까이하는 비구에게,
산중 동굴이나

959높거나 낮은 곳의 와처臥處에서
두려움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러나 비구는 좌와처坐臥處에서 무슨 소리에도
두려움에 떨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960불사不死를 향하여 가는 자에게
세간에는 얼마나 많은 위험[1]“세간에서의 위험들(parissayā loke)”은 생존적인 위험이 아니라, 제965송에서 보이듯이 비구의 “행처行處(제961송, gocara)”에서 벗어나 마라의 “행처”에 빠지는 위험을 말한다.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慧를 앞세우고”(969송) “마음의 갈피들”(970송, vitakkā)을 단속해야 한다. 비구가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비탄”(제970송)에 빠져들어 걱정과 불안과 자괴감을 헤어날 길 없다.이 있습니까?
그러나 비구는 외딴 좌와처에서
그 위험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961여기에서 그의 행실은 어떠해야 하며,
그의 행처行處는 어떠해야 하며,
스스로 의연한 비구의
계금戒禁[2]“계금戒禁”은 ‘계戒’와 ‘금기禁忌’라고 할 수 있다. 경에서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언급된다. 외적으로 드러난 겉모습과 겉행위에 억지스럽게 집착하는 계금의 경우 부정적으로 언급되며, 욕계欲界(마라의 행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서의 계금은 긍정적으로 언급된다.은 어떠해야 합니까?

962그는 어떤 배움[3]예류과부터 아라한과까지 성자로 분류되는데, 그 중 예류과・일래과・불환과는 아직 배울 것이 남은 “有學(sekha)”, 아라한과는 더는 배울 것이 없는 “無學(asekha)”으로 지칭된다. 이를 고려하면 “배움(sikkhā, 修習)”은 적어도 예류향 내지 예류과부터 해당하는 공부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과연 제970송에서는 “마음의 갈피들(尋, vitakkā)”을 경계하는 “有學”을 언급하고 있으며 제974송에서는 “배움”과 관련하여 “색성향미촉에 대한 貪의 극복”을 언급하고 있는 바, 이러한 배움은 적어도 무문범부에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나아가, “[마음의] 갈피가 남아 있는 삼매”가 초선初禪의 요건임을 고려하면, “마음의 갈피”나 “貪”의 관찰은 적어도 성자에 근접한 예류향 내지 (예류과 등등의) 성자의 “행처”일 것이다. 무문범부는 마라의 행처에서 노닐고 있으므로 결코 “마음의 갈피”나 “貪”을 볼 수 없다. 무문범부도 생각으로야 얼마든지 ‘이것이 마음갈피이고 이것이 貪’이라고 이해할 수야 있겠지만, 불교공부는 그런 식의 공부가 아니라서 첫걸음이 어긋나면 천리 길을 간다한들 허사다.을 받아지녀야
전일專一한 자, 현명한 자, 유념하는 자 되어
야금사가 은을 제련하듯
스스로의 티끌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963(세존께서 사리풋타에게 이르시되)
은둔하고 있는 자,
인적 없는 좌와처를 가까이하는 자,
깨달음을 바라는 자에게 안녕安寧이 되는 것을
여법如法하게 내가 아는 그대로 너에게 설하리라.

964굳센 자라면 다섯 가지 무서움에 굴하지 않으리니,
그는 유념하는 비구, 품행이 단정한 자로서
파리, 모기, 뱀,
사람의 접촉, 네 발 짐승을 겁내지 않을 것이다.

965타법적他法的인 것들[4]“타법적他法的인 것들(paradhammikā)”에서의 “타법他法(paradhamma)”은 5부 니까야에서 극히 드물게 보이는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외도의 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과 관련한 “안으로 身・受・心・法에 임하여 身・受・心・法을 관찰하는 자, 열심인 자, 알아차리는 자, 유념하는 자로 머물면서 세간에 대한 갈망이나 원망을 단속한다. 안으로 身・受・心・法에 임하여 身・受・心・法을 관찰하는 자로 머물면 거기에서 바르게 입정入定하고 바르게 맑아진다. 그가 거기에서 바르게 입정하고 바르게 맑아지면 밖으로 他身・他受・他心・他法에 대한 知見이 확연히 생긴다”(장부 제18경, DN ii.216)는 경문에 비추어볼 때, 他身~他法은 단순히 ‘타인의 身・受・心・法’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의미일 가능성도 살펴보아야 한다. 가령 他身~他法에 대한 知見은, “身・受・心・法에 임하여 身・受・心・法을 관찰함”으로써 ‘身・受・心・法이 아닌 딴 것(他)’, 즉 ‘身 아닌 딴 것・受 아닌 딴 것・心 아닌 딴 것・法 아닌 딴 것’에 대한 知見이 생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는 “자등명・자귀의 대 타귀의他歸依”, “법등명・법귀의 대 타귀의”에서 “他”의 용례와 유사한 것으로, ‘타인’에게 귀의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自와 法이 아닌 딴 것’에 귀의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때의 ‘自’는 ‘身→受→心’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는 거기에서 ‘색・수・상・행・식이 된 것’, 바로 그 법들을 무상, 고苦, 질병, 종기, 화살, 화禍, 재난, 타他, 파멸, 공空, 무아로 여긴다”(증지부 제4.124경, AN ii.128)는 경문 역시 “他”가 ‘타인’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경문에 따르면, 오온은 他法이다.
 
이와 같이 볼 경우 제965송에서 말하는 “他法的인 것들”은, ‘사념처라는 行處’를 벗어나 마음의 갈피와 갈래를 좇아갈 때(“소란”) 생겨나는 것이며, 종국에는 ‘생존적인 공포’(제964송) 내지 ‘걱정거리’(제970송) 등의 위험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은 사념처가 아닌 딴 것들, ‘他身・他受・他心・他法’에서 비롯한 “타他의 위험들”(제965송), “세간에서의 위험들”(제960송)이다. 그러므로 제965송에서 말하는 “선덕善德(kusala)”은 “他의 위험들”을 이겨내고 사념처로 귀의하는 것을 말하며, 그 반대 방향은 “불선不善(akusala)”이 된다. 그 유명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법구경의 경문은 바로 이 “他의 위험들”에 빠지느냐(惡), 아니면 “사념처”로 귀의하느냐(善) 하는 방향성을 말해 준다. 이렇듯 “타법”과 “선덕”, “오온”과 “사념처”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 게송은 “행처(gocara)”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답은 곧 불교의 선악론이기도 하다.
에서 수많은 두려움[5]이 게송에서 말하는 “두려움(bherava)”은 오온이라는 ‘마라의 행처’에 대한 두려움이며, 앞서 제964송에서 말하는 “무서움(bhaya)”은 생존과 직결된 공포이다. 사리풋타는 외딴 좌와처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세간적) 위험”(제958~959송)을 물었던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생존적) 무서움”, “(타법적) 두려움”, “(세간적) 위험”을 세밀하게 구분하시고서 답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언어가 재정의된 것이다.을 볼지언정
그것들을 위하느라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타他의 위험들을 이겨낼 것이다,
선덕善德을 구하는 자라면!

966병에 걸리고 배고픔에 시달려도
추위와 더위를 견뎌낼 것이며,
그러한 일들을 여러 모양으로 당하여도
집 떠난 자로서 굳세게 정진에 힘쓸 것이다.

967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자애(慈)로 접촉할 것이다.
의意의 혼란이 있거든
그것이 ‘암흑의 날개’임을 간파하고 몰아낼 것이다.

968분노와 오만의 힘에 끌려가지 않으며
그 뿌리까지 뽑아내고 우뚝 설 것이다.
나아가 사랑스러운 것이든 사랑스럽지 않는 것이든
有인 것들을 결정코 이겨낼 것이다.

969덕행德行을 기뻐하는 자로서
혜慧를 앞세워 위험들을 제거할 것이다.
외딴 와처臥處에서의 부족함을 극복하라,
비탄거리가 될 법한 네 가지를 극복하라!

970‘무엇을 먹을까?’, ‘어디에서 먹을까?’
‘정말 힘들게 잠을 잤다’, ‘오늘은 어디에서 잘까?’ ―
비탄에 빠지는 이런 [마음의] 갈피들을 단속할 것이다,
거처를 좇지 않는 유학有學이라면!

971그는 음식과 옷가지를 얻을 때에는
늘 지족知足에 알맞은 분량을 알 것이며,
두 귀를 수호하는 자, 품행을 조심하는 자로서
마을에서 공박을 당하여도 거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972눈을 아래로 두는 자, 서둘러 걷지 않는 자,
참선參禪하는 자, 성성하게 깨어 있는 자가 될 것이며,
무심(捨)에서 시작하여 스스로(我)가 입정入定한 자로서
사색의 습성과 산만함을 끊어버릴 것이다.

973말로 비난을 받아도 ‘유념하고 있음’을 좋아하고
동료 범행자梵行者들을 대함에 있어 불모지[6]“불모지不毛地(khila)”는 마음의 어느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경에서는 ‘불・법・승・계에 대한 의혹’(A iv.460), ‘탐・진・치’(A v.17) 등을 불모지라고 언급한다.를 파괴할 것이며,
말을 풀어내되 덕스럽게, 과하지 않게 하고
사람들의 어법을 속에 품지 않을 것이다.

974나아가 세간에 대한 다섯 가지 탐貪을 단속하고
유념하는 자 되어 배울 것이니,
色들, 소리들, 맛들,
냄새들, 촉감들에 대한 탐貪을 극복할 것이다.

975그 법들에 대한 욕구(欲)를 단속하리라,
그는 유념하는 비구, 心이 잘 해탈한 자!
적시에 바르게 법을 완전히 사량思量하는 자,
전일專一한 자, 그는 어둠을 없애리라.[7]이상의 「사리풋타 경」은 아직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대신하여 존자 사리풋타께서 물으시고 부처님께서 답하신 경으로, (1) “두려움”과 “위험”을 이겨내기 위한 “행실”과 “행처”와 “계금”(제960송), 그리고 (2) “스스로의 티끌”을 제거하기 위한 “배움”(제962송)―이 두 주제, 네 항목과 관련하여 문답한 내용이다. 부처님께서는 “행실(vyappatha)”에 대해서는 제964송으로, “행처(gocara)”에 대해서는 제965송으로, “계금”에 대해서는 제966송~제968송으로, “배움”에 대해서는 제969송~제975송으로 답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구분할 경우, “배움(修習)”은 출가자의 걸식・좌와처・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심해탈・법사량法思量으로 마무리되며, “계금”은 몸가짐・마음가짐(慈, 意, 분노, 오만, 사랑스러운 것 등)과 관련되는 것, “행처”는 他法(paradhamma)・선덕(kusala)과 관련되는 것, “행실”은 생존적 두려움과 관련되는 것이다.

955“Na me diṭṭho ito pubbe
icc-āyasmā Sāriputto
na-ssuto uda {kassaci}
evaṃ vagguvado satthā Tusitā gaṇimāgato

956sadevakassa lokassa, yathā dissati cakkhumā:
sabbaṃ tamaṃ vinodetvā eko va ratim ajjhagā.

957Tam Buddhaṃ asitaṃ tādiṃ akuhaṅ gaṇim āgataṃ
bahunnam idha baddhānaṃ atthi pañhena āgamiṃ:

958Bhikkhuno vijigucchato bhajato rittam āsanaṃ
rukkhamūlaṃ susānaṃ vā, pabbatānaṃ guhāsu vā

959uccāvacesu sayanesu, kīvanto tattha bheravā,
yehi bhikkhu na vedheyya nigghose sayanāsane.

960Kati parissayā loke gacchato agataṃ disaṃ,
ye bhikkhu abhisambhave pantamhi sayanāsane.

961Kyāssa vyappathayo assu, kyāss’ assu idha gocarā,
kāni sīlabbatān’ assu pahitattassa bhikkhuno.

962Kaṃ so sikkhaṃ samādāya ekodi nipako sato
kammāro rajatasseva niddhame malam attano”.

963“Vijigucchamānassa yad idaṃ phāsu,
Sāriputtā ti Bhagavā
rittāsanaṃ sayanaṃ sevato ca
sambodhikāmassa, yathānudhammaṃ
taṃ te pavakkhāmi yathā pajānaṃ.

964Pañcannaṃ dhīro bhayānaṃ na bhāye
bhikkhu sato (sa) pariyantacārī:
ḍaṃsādhipātānaṃ siriṃsapānaṃ
manussaphassānaṃ catuppadānaṃ,

965paradhammikānam pi na santaseyya
disvā pi tesaṃ bahubheravāni,
athāparāni abhisambhaveyya
parissayāni kusalānesī.

966Ātaṃkaphassena khudāya phuṭṭho
sītaṃ accuṇhaṃ adhivāsayeyya,
sa tehi phuṭṭho bahudhā anoko
viriyaṃ parakkamma daḷhaṃ kareyya.

967Theyyaṃ na kareyya, na musā bhaṇeyya,
mettāya phasse tasathāvarāni,
yad āvilattaṃ manaso vijaññā,
‘kaṇhassa pakkho’ ti vinodayeyya.

968Kodhātimānassa vasaṃ na gacche,
mūlam pi tesaṃ palikhañña tiṭṭhe,
atha-ppiyaṃ vā pana appiyaṃ vā
addhā bhavanto abhisambhaveyya.

969Paññaṃ purakkhatvā kalyāṇapīti
vikkhambhaye tāni parissayāni,
aratiṃ sahetha sayanamhi pante,
caturo sahetha paridevadhamme:

970‘kiṃ su asissāmi, kuvaṃ vā asissaṃ
dukkhaṃ vata settha, kuv’ ajja sessaṃ’
ete vitakke paridevaneyye
vinayetha sekho aniketasārī.

971Annañ ca laddhā vasanañ ca kāle
mattaṃ so jaññā idha tosanatthaṃ,
sotesu gutto yatacāri gāme
rusito pi vācaṃ pharusaṃ na vajjā.

972Okkhittacakkhu na ca pādalolo
jhānānuyutto bahujāgar’ assa,
upekham ārabbha samāhitatto
takkāsayaṃ kukkucciy’ ūpacchinde.

973Cudito vacīhi satimābhinande,
sabrahmacārīsu khilaṃ pabhinde,
vācaṃ pamuñce kusalaṃ nātivelaṃ,
janavādadhammāya na cetayeyya.

974Athāparaṃ pañca rajāni loke
yesaṃ satīmā vinayāya sikkhe:
rūpesu saddesu atho rasesu
gandhesu phassesu sahetha rāgaṃ.

975Etesu dhammesu vineyya chandaṃ
bhikkhu satīmā suvimuttacitto
kālena so samma dhammaṃ parivīmaṃsamāno
ekodibhūto vihane tamaṃ so”
ti Bhagavā ti

* 각주   [ + ]

1. “세간에서의 위험들(parissayā loke)”은 생존적인 위험이 아니라, 제965송에서 보이듯이 비구의 “행처行處(제961송, gocara)”에서 벗어나 마라의 “행처”에 빠지는 위험을 말한다.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慧를 앞세우고”(969송) “마음의 갈피들”(970송, vitakkā)을 단속해야 한다. 비구가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비탄”(제970송)에 빠져들어 걱정과 불안과 자괴감을 헤어날 길 없다.
2. “계금戒禁”은 ‘계戒’와 ‘금기禁忌’라고 할 수 있다. 경에서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언급된다. 외적으로 드러난 겉모습과 겉행위에 억지스럽게 집착하는 계금의 경우 부정적으로 언급되며, 욕계欲界(마라의 행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서의 계금은 긍정적으로 언급된다.
3. 예류과부터 아라한과까지 성자로 분류되는데, 그 중 예류과・일래과・불환과는 아직 배울 것이 남은 “有學(sekha)”, 아라한과는 더는 배울 것이 없는 “無學(asekha)”으로 지칭된다. 이를 고려하면 “배움(sikkhā, 修習)”은 적어도 예류향 내지 예류과부터 해당하는 공부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과연 제970송에서는 “마음의 갈피들(尋, vitakkā)”을 경계하는 “有學”을 언급하고 있으며 제974송에서는 “배움”과 관련하여 “색성향미촉에 대한 貪의 극복”을 언급하고 있는 바, 이러한 배움은 적어도 무문범부에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나아가, “[마음의] 갈피가 남아 있는 삼매”가 초선初禪의 요건임을 고려하면, “마음의 갈피”나 “貪”의 관찰은 적어도 성자에 근접한 예류향 내지 (예류과 등등의) 성자의 “행처”일 것이다. 무문범부는 마라의 행처에서 노닐고 있으므로 결코 “마음의 갈피”나 “貪”을 볼 수 없다. 무문범부도 생각으로야 얼마든지 ‘이것이 마음갈피이고 이것이 貪’이라고 이해할 수야 있겠지만, 불교공부는 그런 식의 공부가 아니라서 첫걸음이 어긋나면 천리 길을 간다한들 허사다.
4. “타법적他法的인 것들(paradhammikā)”에서의 “타법他法(paradhamma)”은 5부 니까야에서 극히 드물게 보이는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외도의 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과 관련한 “안으로 身・受・心・法에 임하여 身・受・心・法을 관찰하는 자, 열심인 자, 알아차리는 자, 유념하는 자로 머물면서 세간에 대한 갈망이나 원망을 단속한다. 안으로 身・受・心・法에 임하여 身・受・心・法을 관찰하는 자로 머물면 거기에서 바르게 입정入定하고 바르게 맑아진다. 그가 거기에서 바르게 입정하고 바르게 맑아지면 밖으로 他身・他受・他心・他法에 대한 知見이 확연히 생긴다”(장부 제18경, DN ii.216)는 경문에 비추어볼 때, 他身~他法은 단순히 ‘타인의 身・受・心・法’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의미일 가능성도 살펴보아야 한다. 가령 他身~他法에 대한 知見은, “身・受・心・法에 임하여 身・受・心・法을 관찰함”으로써 ‘身・受・心・法이 아닌 딴 것(他)’, 즉 ‘身 아닌 딴 것・受 아닌 딴 것・心 아닌 딴 것・法 아닌 딴 것’에 대한 知見이 생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는 “자등명・자귀의 대 타귀의他歸依”, “법등명・법귀의 대 타귀의”에서 “他”의 용례와 유사한 것으로, ‘타인’에게 귀의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自와 法이 아닌 딴 것’에 귀의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때의 ‘自’는 ‘身→受→心’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는 거기에서 ‘색・수・상・행・식이 된 것’, 바로 그 법들을 무상, 고苦, 질병, 종기, 화살, 화禍, 재난, 타他, 파멸, 공空, 무아로 여긴다”(증지부 제4.124경, AN ii.128)는 경문 역시 “他”가 ‘타인’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 경문에 따르면, 오온은 他法이다.
 
이와 같이 볼 경우 제965송에서 말하는 “他法的인 것들”은, ‘사념처라는 行處’를 벗어나 마음의 갈피와 갈래를 좇아갈 때(“소란”) 생겨나는 것이며, 종국에는 ‘생존적인 공포’(제964송) 내지 ‘걱정거리’(제970송) 등의 위험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은 사념처가 아닌 딴 것들, ‘他身・他受・他心・他法’에서 비롯한 “타他의 위험들”(제965송), “세간에서의 위험들”(제960송)이다. 그러므로 제965송에서 말하는 “선덕善德(kusala)”은 “他의 위험들”을 이겨내고 사념처로 귀의하는 것을 말하며, 그 반대 방향은 “불선不善(akusala)”이 된다. 그 유명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법구경의 경문은 바로 이 “他의 위험들”에 빠지느냐(惡), 아니면 “사념처”로 귀의하느냐(善) 하는 방향성을 말해 준다. 이렇듯 “타법”과 “선덕”, “오온”과 “사념처”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 게송은 “행처(gocara)”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답은 곧 불교의 선악론이기도 하다.
5. 이 게송에서 말하는 “두려움(bherava)”은 오온이라는 ‘마라의 행처’에 대한 두려움이며, 앞서 제964송에서 말하는 “무서움(bhaya)”은 생존과 직결된 공포이다. 사리풋타는 외딴 좌와처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세간적) 위험”(제958~959송)을 물었던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생존적) 무서움”, “(타법적) 두려움”, “(세간적) 위험”을 세밀하게 구분하시고서 답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언어가 재정의된 것이다.
6. “불모지不毛地(khila)”는 마음의 어느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경에서는 ‘불・법・승・계에 대한 의혹’(A iv.460), ‘탐・진・치’(A v.17) 등을 불모지라고 언급한다.
7. 이상의 「사리풋타 경」은 아직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대신하여 존자 사리풋타께서 물으시고 부처님께서 답하신 경으로, (1) “두려움”과 “위험”을 이겨내기 위한 “행실”과 “행처”와 “계금”(제960송), 그리고 (2) “스스로의 티끌”을 제거하기 위한 “배움”(제962송)―이 두 주제, 네 항목과 관련하여 문답한 내용이다. 부처님께서는 “행실(vyappatha)”에 대해서는 제964송으로, “행처(gocara)”에 대해서는 제965송으로, “계금”에 대해서는 제966송~제968송으로, “배움”에 대해서는 제969송~제975송으로 답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구분할 경우, “배움(修習)”은 출가자의 걸식・좌와처・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심해탈・법사량法思量으로 마무리되며, “계금”은 몸가짐・마음가짐(慈, 意, 분노, 오만, 사랑스러운 것 등)과 관련되는 것, “행처”는 他法(paradhamma)・선덕(kusala)과 관련되는 것, “행실”은 생존적 두려움과 관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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